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충직한 검이 되려 했는데-136화 (136/25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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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손에, 쥐고 싶다고.'

라이너와 나 사이에 시선이 물 결 흐르듯 조용히 오가는 와중에 그의 말을 곱씹어 보았다. 몇 번 이고 곱씹어 볼수록 자몽의 과육 을 씹는 듯 단맛과 쓴맛이 동시에 느껴질 뿐이었다.

이 상황에서 라이너가 손에 쥐 고 싶다고 하는 대상은 지나치게

명백했다.

'......나.'

평소엔 과묵함과 금욕 아래 숨 기지만, 간혹 나를 바라보는 금빛 눈동자 위로 잔물결을 일으키듯 퍼져 나가는 갈망을 내가 읽지 못 할 리 없었다.

'어째서? 내 무력이 탐나는 건 가?'

하지만 역시 갈망의 이유는 알 수 없다.

라이너처럼 부족한 것 없는 사 람이 나를 왜 필요로 한단 말인 가. 내 뒤에 크리시스 가문이 있 긴 하지만, 그건 진정으로 내 것 이라고 볼 수는 없었다. 공작은 카이사르였으니.

진정으로 내 것 중 내세울 만한 것은 아무리 생각해도 무력밖에 없었다.

'라이너는 검을 그렇게 사랑했 지. 그래서 소드 마스터인 내게 이런 감정을 내보이는 건가? 내

검술이 탐나서?'

내가 내릴 수 있는 최선의 결론 이었으나 뒷맛이 찝찝했다. 이대 로 결론을 내리면 라이너는 내 무 력만 보고 있다는 것이니 묘하게 씁쓸하기도 했다.

필사적으로 머리를 굴리던 나는, 결국 한숨과 함께 입술을 열었다.

"라이너는...... 제게 검술을 배 우고 싶습니까?"

혼자 머리를 굴려서 도출해 내

는 결론은 늘 오류였다.

아무리 열심히 생각해도 사람의 감정과 관계된 일엔 늘 핀트가 엇 나가 수많은 동상이몽을 경험했던 나는, 그냥 직접적으로 묻는 길을 택하기로 했다.

"......지금 검술 얘기가 왜 나오 는 겁니까?"

"......아닙니까?"

내 물음에 자신의 귀를 의심하 는 표정을 지은 라이너가 미간을 좁혔다. 또다시 잘못 짚었다는 것

을 깨달은 나는 머쓱해져 귓바퀴 를 매만졌다.

"하......

그런 나를 지그시 응시하던 라 이너가 푹 한숨을 쉬었다. 고개를 들어 하늘을 바라보는 그는 갓 걸 음마를 뗀 아이에게 윈드밀을 가 르쳐야 하는 사람처럼 막막해 보 였다.

"저는 가끔 당신이 그 작은 머 리로 어떻게 사람 말을 듣고 뜻을 파악하면 이런 결론이 나오는지

궁금할 때가 있습니다."

라이너는 평소 같은 담담한 투 로 말했으나, 나는 그 사이에 깃 든 한탄을 읽을 수 있었다. 반쯤 체념한 듯 담담한 투에서 더 민망 해진 나는, 조금 심통이 난 채로 라이너와 마주했다.

"제게 있는 거라곤 검밖에 없으 니 라이너가 제 검술을 탐내는 게 아닌가 생각했습니다. 그럼 라이 너는 왜 저를 원하는 겁니까?"

나는 이전부터 궁금했던 것을

종이 공처럼 꾸깃꾸깃 뭉쳐 라이 너에게 직구로 던졌다. 나는 의문 이적힌 종이가 전해지지 못한 채, 내 속을 태우는 불길의 장작 으로 훨훨 타오르는 것을 버티지 못했다.

내 의문을 직시하는 라이너의 동공이 옅게 일렁였다. 끝없는 갈 망이 너울거리는 황금빛 바다 한 가운데 떠오른 검은 태양이 요동 치는 모습은 한 폭의 걸작 같았 다.

"......저는 그럴 듯하게 말하는

방법을 모릅니다. 사랑 시 같은 비유도 하지 못합니다."

짧은 침묵 끝에 꾹 다물려 있던 입술이 살며시 열렸다.

하기야, 라이너는 강직하고 뻣뻣 한 기사 그 자체였다. 말을 돌려 할 줄도 몰랐다. 그렇다고 말을 날것 그 자체로 사납게 하진 않았 으나, 예쁘게 하는 건 더더욱 아 니었다.

말을 요리라고 한다면, 라이너의 말투는 특별한 기술 하나 없이 딱

익히기만 한 채로 식탁에 내놓는 느낌.

"하지만 그래도 말하고 싶습니 다."

라이너가 낮은 목소리로 내 귓 가에 속삭였다. 내 머리끝을 매만 지던 큰 손이 내 앞머리를 간지럽 혔다.

"밤하늘을 볼 때면 카슈미르의 머리카락이 떠올라서, 여러 밤을 지새워 밤하늘을 바라봤습니다. 그래도 당신이 그리웠습니다. 밤

하늘은 아름답지만...... 칠흑의 원 형인 당신을 그저 본뜬 것에 불과 하니까. 바람결에 흔들리는 당신 의 머리칼을 볼 때야 끝없는 갈증 이 비로소 조금은 충족되는 것을 느낍니다."

라이너의 손이 천천히 내 눈가 로 옮겨져 왔다. 속눈썹을 건드리 는 단단한 검지손가락 끝에 나는 살짝 눈을 감았다 떴다.

"카슈미르의 두 눈이 담은 색은 이전에 단 한 번도 본 적이 없습 니다. 그 무엇도 이 색을 흉내 내

지 못하죠. 자연에 수많은 분홍빛 이 있으나 맑은 하늘의 노을은 이 색만큼 강렬하지 않고, 엉겅퀴 꽃 은 이 색만큼 빛이 나지 않습니 다. 당신만이 가진, 당신 고유의 색입니다. 당신이 이 두 눈으로 저를 올곧게 응시할 때 저는 옳은 길을 가고 있다고 느낍니다."

낮게 속살거리는 말들은 연인들 의 밀어처럼 간질거렸다.

이상한 기분에 움찔한 내가 살 짝 고개를 숙일 때, 작게 웃은 라 이너가 엄지손가락으로 내 아랫입

술을 살짝 눌렀다. 저절로 입술 틈새가 열렸다.

기사의 거친 손끝이 신체에서 가장 말랑한 부위에 닿는 기분은 이루 말할 수 없을 만큼 묘했다.

"카슈미르가 제 이름을 부르는 것이 좋습니다. 의무와 숙명만 남 은 이름 없는 삶에...... 드디어 이 름이 생기는 것 같습니다."

라이너는 아이에게 태양이 뜨고 지는 이유를 설명하듯 느리고 차 분하게 말했다. 낱말 사이사이로

짙은 감정이 깊게 배어들어 한 마 디 한 마디가 물 먹은 솜처럼 무 거웠다.

나에 대한 이리 세심한 설명은 처음 듣는 것이었기에, 그가 나와 는 다른 언어로 말하는 것 같았 다.

"이렇게 모든 것이 사랑스러운 것투성이인데 어떻게 당신을 원하 지 않을 수 있습니까."

라이너의 입꼬리가 부드럽게 휘 어들었다. 그때 나는 문득 라이너

가 웃을 때면 오른쪽 뺨에 보조개 가 파인다는 것을 발견했다.

라이너는 내게 사랑스럽다고 하 지만, 내 눈엔 그가 더 사랑스러 워 보였다.

"당신은 사랑받아 마땅한 사람 이라는 거. 카슈미르는 여기까지 만 알고 있으면 됩니다. ......아직 O "

라이너는 무언가 말하고 싶은 듯 붉은 입술을 새빨간 혀로 축이 다가도 길게 숨을 내쉬며 말을 끊

었다. 마지막에 따라붙는 '아직'이 란 단어가 의미심장하게 들렸다.

"제가 감히 주제도 모르고 당신 을 원해도 너무 미워하진 말아 주 십시오. 당신은 자비롭지 않습니 까."

내 얼굴에서 손을 뗀 라이너가 제 머리를 내 뺨에 살짝 부볐다. 그의 은회색 머리칼은 무척이나 부드러워, 늑대를 닮은 은회색 셰 퍼드가 애교를 부리는 것만 같았 다.

'......간지러워.'

라이너의 머리칼이 닿은 뺨 부 근의 간지러움이 퍼진 걸까, 자꾸 만 온몸이 간질거렸다.

어쩐지 나를 응시하는 금안을 똑바로 마주하기 힘들어졌다. 나 는 이상한 기분에 고개를 살짝 돌 려 버리고 말았다.

"껄껄껄."

그리고 매대 너머 계산하는 탁 자에서 므흣한 미소를 가득 지은

채 꽃받침을 하고 나와 라이너를 보던 할머니와 눈이 마주쳤다.

"비, 비켜 보십시오!"

라이너로 인해 정신이 반쯤 나 간 탓에 할머니의 기척조차 느끼 지 못했던 나는 화들짝 놀라 라이 너를 두 손으로 밀어냈다. 그는 순순히 밀려났다.

"떽! 거 훤칠한 젊은이들 둘이 붙어 있는 거 보기 좋았건만 왜 떨어지나!"

나와 라이너의 거리가 벌어지자 단숨에 정색한 할머니가 단숨에 점프하여 탁자를 뛰어넘고 우리 쪽으로 다가왔다. 목덜미가 화끈 해진 나는 거칠게 마른세수를 했 다.

"대체, 왜 여기 있는 겁니까, 라 모나."

공교롭게도, 나와 라이너를 열성 적으로 구경하던 지긋한 노인은 내가 아는 사람이었다.

"왜 여기 있느냐니! 여긴 내 가

게다, 캐슈넛. 나는 매 축제 때마 다 장신구 노점상을 세웠던 걸 잊 은 거냐? 잠시 다녀올 곳이 있어 서 손녀한테 가게를 맡겼었는 데...... 이런 재밌는 일이 있는 줄 알았다면 더 빨리 왔을 게다."

"......우선 알겠습니다만, 그놈의 견과류 호칭은 그만두실 때도 되 지 않으셨습니까?"

"모르는 소리를 하는구나. 딱 귀 여운 호칭이거늘."

"하......

나는 한숨을 내쉬며 이마를 짚 었다. 내 이름을 마음대로 바꿔

부르며 허허롭게 웃는 라모나의 눈빛은 굉장히 의미심장하면서도 흐뭇해 보였다.

"카슈미르. 이 어르신과는...... 아는 사이입니까?"

나와 라모나를 멀뚱멀뚱 바라보 고 있던 라이너가 물었다. 붉게 달아오른 목덜미를 매만지던 나는 느리게 고개를 끄덕였다.

'젠장, 왠지는 몰라도 부끄러 워......

라모나. 내가 크리시스 저택으로 옮기기 전에 살던 동네에서 가깝 게 지내던 사람이었다.

뒷골목을 전전하며 먹을 것을 구하러 다니던 나를 여러 번 도와 준 라모나는, 내가 7살이 되며 도 움의 손길을 뚝 끊은 다른 마을 사람들과는 다르게 7살이 넘은 후에도 만날 때마다 먹을 것을 쥐 여 주곤 했었다.

'왜 하필 지금 만난 거지......

크리시스 공작가로 간 뒤에도

한번 만나고 싶었던 몇 안 되는 사람이었으나, 지금은 때가 좋지 않았다.

"그래서 캐슈넛. 네 옆에 그 청 년은 누구라고?"

라모나는 나를 놀리기 좋아하는 아주 짓궂은 사람이었다.

"......친구입니다, 친구."

"오호. 요새 아가들은 친구랑 그 렇게 노는 모양이야? 짜릿하구 먼."

"라모나......

내 방어를 구렁이 담 넘어가듯 능숙하게 받아치는 라모나의 태도 에 두 손에 얼굴을 묻을 수밖에 없었다. 라이너를 보기가 민망해 질 지경이었다.

난 내 속도 모르고 시원하게 웃 어젖히는 라모나를 보며 지끈거리 는 관자놀이를 꾹 눌렀다.

"짓궂으십니다, 정말."

"말도 없이 떠난 너한텐 이것도 싸다! 이 찌그러진 피망 같은 것!"

엄하게 표정을 굳힌 라모나가 들고 있던 지팡이로 내 옆구리를 쿡 찔렀다. 사나운 말투와는 다르 게 심술과 섭섭함이 섞여 있는 라 모나의 두 눈을 본 나는 작게 탄 식을 뱉었다.

크리시스 저택으로 옮겨가며 나 는 누구에게도 그 사실을 알리지 않았다. 딱히 비밀은 아니었지만, 괜히 퍼트리고 다닐 필요는 없었 으니.

허나 다른 사람은 몰라도 라모

나라면 내가 말없이 떠났다는 사 실이 섭섭할 법했다.

"죄송합니다. 자리를 옮기고 한 번 찾아뵈려고 했는데...... 영 시 간이 나지 않아서 이제야 뵙습니 다."

나는 죄송스러운 마음에 살짝 고개를 숙이며 말했다.

내 사과에 혀를 한 번 찬 라모 나가 지팡이 손잡이 부근으로 내 뒤통수를 후려쳤다. 살벌한 퍽 소 리가 났으나 물론 아프지 않았고,

라모나 또한 내가 아프지 않을 걸 알기에 친 것일 터였다.

"못난 놈. 언질 정도는 줄 수 있 지 않았느냐. 어디서 코 박고 뒤 진 줄 알고 한참 찾았건만•• ... 잘 생긴 청년이랑 재미나 보고 있 어?"

"라모나, 좀......

라모나의 거침없는 언사에 나는 작게 꿍얼거렸다. 내가 잘못한 것 이 있기에 크게 무어라 할 수가 없었다.

"다음에 정식으로 한번 찾아뵙 겠습니다. 너무 짓궂게 굴지 마세 요."

나는 눈매를 늘어뜨리며 살랑살 랑 라모나의 비위를 맞췄다.

'무척 감사한 분이니까.'

뒷골목을 누비며 하루 끼니가 궁하던 어린 날, 라모나의 도움은 절대 무시할 수 없는 것이었다.

나는 조금 씁쓸하게 웃었다.

"그리고, 어렸을 때 도와주셔서 감사했습니다. 이전엔 다른 사람 들도 조금 도와줬지만 7살 이후 부터는 라모나 말곤 도와주는 사 람이 없어서...... 라모나가 없었다 면 무척 힘들었을 겁니다. 아시다 시피 저랑 동생은 부모님의 도움 을 못 받았으니까요."

힘들었던 과거가 떠올라 목소리 가 저절로 낮아졌다. 어미의 보호 를 받지 못하고 사람들에게서 전 전긍긍하며 밥을 빌어먹던 시기를 떠올리면 조금 울적해졌다.

라모나라면 내 감사 인사에 됐 다며 빠르게 넘어갈 거라 생각했 는데, 내 예상과는 다르게 내 말 을 들은 라모나의 표정이 이루 형 용할 수 없을 만큼 묘해졌다.

"너...... 아직도 모르는군."

" 네?"

"하기야, 네 어미가 그리 가고 말해 줄 수 있는 사람도 없었지. 오드리가 비밀을 지켜 달라 당부 하기도 했고......

라모나의 중얼거림에 표정이 굳 었다.

'오드리.'

무척이나 오랜만에 듣는 내 어 미의 이름.

여태껏 가물가물했으나, 그 이름 을 한 번 듣는 순간 내 어미의 이 름이었음을 기억할 수 있었다. 무 언가 있다는 것을 직감으로 느낀 나는 다급히 라모나의 어깨를 잡 았다.

"무슨 소리를 하시는 겁니까. 제 가 뭘 모르고 있는 거죠?"

내 물음에 라모나가 얼굴을 일 그러뜨렸다. 복잡한 눈빛으로 고 민하는 듯싶던 라모나는, 이내 뭔 가를 결심한 표정으로 느리게 입 을 열었다.

"네 어미가 말하지 말아 달라고 했지만...... 이제 너도 알아야겠 지."

라모나가 나를 똑바로 바라보았 다.

"네가 7살이 될 때까지 너를 도

와주던 마을 사람들, 기억하냐?"

"네."

"사람이 딱 한정되어 있었지? 돌아가면서 매일 먹을 것을 줬 고."

"......네."

"나야 오드리가 주는 돈을 안 받았지만...... 다른 사람들은 오드 리가 주는 돈을 받고 너를 도와줬 던 거다. 그래서 오드리가 죽은 뒤 사람들이 더는 너를 도와주지 않았던 거야. 못난 것들이지."

그리고 이어진 말은, 내가 상상 치도 못한 내용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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