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37 화
"......정말입니까?"
머릿속이 멍해진 나는 뒤늦게 되물었다. 굳은 믿음으로 쌓인 마 음 한구석 벽에 금이 가는 느낌이 었다.
내 어머니는 여태껏 내 인생에 있어 변동 없이 부정적으로 인식 되는 사람이었다.
아주 어렸던 날엔 어머니에게 사랑을 기대하긴 했으나, 오랫동 안 기대를 보답받지 못하고 어느 순간부터 마음을 놔 버렸다. 이제 는 기대도, 원망도, 버적거리는 애착도 다 사라지고 정의할 수 없 는 찝찝함만 남은 뒤였다.
어머니는 내 인생에서 없는 사 람이나 다름없었다. 당신께 받은 것도 없고, 드린 것도 없었으니.
그런데 이제 와서 내가 받은 것 이 있었다니.
'그럼 내가 어머니를 원망하던 시간들은 어떻게 되는 거지.'
머리가 아팠다.
물론 어머니가 사실 내게 물질 적인 공급을 했다고 해서 좋은 어 머니였다고 할 수 있는 것은 아니 었다. 난 그녀에게서 정신적인 공 급은 조금도 받지 못했으니.
다만 '아무것도 안 했다'와 '무 언가 했다'는 꽤 큰 차이였다.
'하지만 어째서? 살려고 아등바
등하는 나를 돕고 싶었다면 그냥 직접적으로 도와도 충분하지 않았 나?'
지끈거리는 관자놀이를 꾹꾹 눌 렀다.
7살이 되어 어머니가 생을 달리 하기 전까진 우린 한집에서 살았 고, 나를 돕고 싶었다면 굳이 마 을 사람들을 매수할 필요 없이 그 녀가 직접 도와주었어도 될 것이 다.
나는 어머니를 이해할 수 없었
'어머니를 원망하며 끈질기게 살 아남긴 했지만......
때때로 긍정적인 감정보다 부정 적인 감정이 삶을 버티는 데 도움 이 되기도 했다. 이를 테면 복수 심이나 광기에 가까운 집착, 원망 같은 것들.
이런 것들은 한번 발을 들이면 벗어나기 힘든 질척한 늪이었기 에, 금방이라도 삶을 놓고 싶을 때 낭떠러지 앞에서 발을 뗄 수
없게 하는 접착제 역할을 했다.
깔끔하게 죽느니 더럽게 사는 것을 택한 것과 다름없었으나 지 금처럼 신념도, 줏대도 없었던 어 린 내겐 어머니를 향한 원망이 삶 의 원동력 중 하나이기도 했었다.
'당신보단 멋지게 살겠다는 치기 어린 집념이었지.'
어머니를 원망하며 그녀처럼은 살지 않겠다고 다짐했다. 그녀보 단 낫게 살겠노라 이를 악물었다. 아리아에 대한 애착이 생겨 그 아
이를 삶의 이유로 삼기 전까진 그 것이 보잘것없고 저열한 내 삶의 이유였다.
내 어머니, '오드리'라는 사람을 향한 의문은 점점 커져만 갔다.
"네겐 너무 이른 정보였나."
애써 표정을 정리하려 노력했건 만, 혼란스러움이 겉으로 티가 났 던 것인지 라모나가 한숨을 내쉬 었다. 나를 물끄러미 바라보던 라 이너가 걱정스럽다는 듯 미간을 좁혔다.
"카슈미르. 괜찮습니까."
"••••••아, 네."
나는 멍한 채로 뒤늦게 대답했 다. 머릿속에선 여전히 여러 생각 들이 복잡하게 차올랐으나 라이너 를 걱정시키고 싶진 않았다. 난 고개를 휘휘 저어 어머니에 대한 생각을 떨쳐 냈다.
"그럼 저를 진정으로 도와준 사 람은 결국 라모나밖에 없었던 거 군요."
쓴웃음을 지으며 한숨처럼 내뱉 었다.
7살 이후 칼로 끊은 듯 지원이 뚝 끊기며 속상한 마음에 눈시울 을 붉히기도 했었다. 그래도 여태 껏 도와준 것에 감사해야 한다고 생각하며 마음을 정리했는데, 결 국 자의로 도와줬던 이는 라모나 말고 아무도 없었던 것이었다.
'인간이라는 종족이 다 이렇다는 걸 알면서도 그 사실을 대면하면 늘 씁쓸하지.'
나는 눈가를 매만졌다. 물기는 느껴지지 않았고, 눈물이 날 것 같지도 않았으나 눈가가 욱신거렸 다.
내가 씁쓸한 감정을 추스르고 있을 때, 나를 지그시 응시하던 라모나가 제 주머니에서 무언가를 꺼내 내게 건넸다.
"......왕년에 알고 지냈던 할멈 하나가 있지. 그 할멈이 바로 오 드리가 이곳에 정착하는 걸 도와 줬던 사람이다. 네 어미에 대해 더 자세히 알고 싶어진다면 이 할
멈을 찾아가라. 이걸 보여주면 그 할멈이랑은 바로 만날 수 있을 거 고...... 오드리의 딸이라고 하면 반갑게 맞아줄 게다."
나는 눈을 깜빡이며 라모나가 건네는 종이를 받았다. 꽤 고급스 러운 재질의 종이는 손에 부드럽 게 감겨들었다.
손바닥 반만 한, 빳빳한 종이.
'......이 사람이 어머니를 도와줬 던 사람이라고?'
입이 떡 벌어진다.
명함에 적힌 이름을 확인한 나 는, 진심으로 경악했다.
친분이 있는 사람은 아니었다. 안면조차 튼 적 없었다. 허나 용 병 미르였던 내가 모를 수 없는 사람이었다.
'검푸른 까마귀의 길드장, 야샤.'
'검푸른 까마귀'는 실력 있는 브 로커들을 모아 각종 용달 의뢰를 받는 소형 길드였다.
빈말로도 크기가 큰 길드라고는 할 수 없었다. 허나 크다고 하여 무조건 좋은 것이 아니라는 것을 증명하듯, 소수이지만 확실한 실 력자로 이루어져 있어서 대륙 전 체에 거대한 영향을 미쳤다.
'정당한 금액만 치르면 무엇이든 운반해 준다. 불법적인 것까지도. 의뢰 성공률은 100%에 가까운 데 다, 한번 의뢰를 받고 나면 다른 쪽에서 더 많은 돈을 주며 물건을 빼돌려 달라고 해도 절대 수락하 지 않는다.'
'대륙의 모든 보물들은 까마귀 부리에 물려 운반된다'라는 말이 격언처럼 돌 정도였다. 제국의 황 제조차 누군가에게 은밀한 물건을 전달할 땐 검푸른 까마귀에게 의 뢰를 한다는 소문이 있을 정도로, 대륙 내에서 검푸른 까마귀에 대 한 신뢰는 무척 굳건하였다. 의뢰 인을 절대 배신하지 않아 '품격 있는 까마귀'라고 불리기도 했다.
'그런 검푸른 까마귀의 길드장이 바로 야샤인데•• ... 그 사람이 어 머니를 안다고?'
용병으로 살며 몇 번이고 들었 던 유명인. 몸놀림이 재빨라 '푸 른 날개'라고 불리며, 그녀가 나 선 의뢰는 모두 성공으로 끝난다 고 들었다. 그런 사람이 어머니와 대체 무슨 연유로 알고 있는 것인 지 나는 짐작조차 할 수 없었다.
'나는 정말 내 어머니에 대해서 몰랐구나.'
새삼스러운 자각에 기분이 묘했 다.
수많은 의문들을 품은 채 명함 을 만지작거리고 있을 때, 라모나 가 지팡이 손잡이로 내 정수리를 툭 쳤다.
"뭐 그리 생각이 많으냐, 캐슈넛 아. 오드리에 대해 궁금해진다면 한번 찾아가 보면 되는 거고, 궁 금하지 않으면 명함을 불태우면 되는 거다. 축제에 놀러 나와서 어려운 생각만 하고 있지 마라. 네 옆에 청년이 어쩔 줄 몰라 하 는 게 안 보이는 게냐."
얻어맞은 정수리를 손으로 매만
지며 내 옆에 선 라이너를 돌아보 았다. 라이너는 여느 때와 같은 무뚝뚝한 포커페이스를 장착하고 있었으나, 내 눈엔 그의 두 눈이 빠르게 움직이고 있음이 보였다.
라이너는 오늘 처음 보는 라모 나가 제 기색을 읽어낸 것에 놀란 듯 살짝 흠칫했다.
'라모나는 무척 예리하니까.'
나는 놀랍지도 않았다. 명함을 주섬주섬 주머니에 넣은 나는, 르 웰린에게 줄 장미 브로치를 내밀
며 돈주머니를 꺼냈다.
"이거, 사겠습니다. 머리 리본도 요. 얼마입니까?"
"참...... 웃기는 소리 마라, 캐슈 넛. 내가 빈털터리 코찔찔이한테 돈을 받을 것 같냐."
'빈털터리도 코찔찔이도 아닌 데......
라모나가 코웃음을 쳤다.
나는 이제 크리시스 공작가에 들어가게 되어 원한다면 돈으로
목욕을 할 수 있는 데다, 전생을 떠올려 정신 연령은 중년을 넘어 간다는 사실을 설명할 재간이 없 어 주머니를 든 채 머뭇거리고 있 을 때였다.
"그냥 가져가라. 값은 네가 어느 곳을 가든 행복한 것으로 받으 마."
노인의 주름진 손이 내 머리칼 을 살며시 쓰다듬었다. 투박하지 만 인자한 그녀의 손은 그 어린 날 내게 도움의 손길을 내밀던 그 손이었다.
"......네."
내 어린 날은 힘들었지만, 그래 도 이런 이들이 있었기에 최악은 아니었다.
나는 라모나를 향해 배시시 웃 음 지었다.
"얘기는 충분히 하셨습니까?"
"그러게요. 이곳에서 아는 사람 을 만날 줄은 몰랐는데...... 기다
려 주셔서 감사합니다."
나와 라이너는 노점상 거리를 천천히 걸었다. 슬슬 어두워지고 거리의 등불들이 켜지며, 노점상 거리는 무척이나 북적거리고 있었 다.
"돈주머니를 모두 어르신에게 주시더군요."
" 아."
보폭이 좁은 나와 세심하게 발 을 맞춰 걷던 라이너가 말했다. 나는 머쓱하게 머리를 긁적였다.
"그분께는 워낙 받은 게 많아서 말입니다."
라모나 앞에선 순순히 수긍하는 척 물러났지만, 정말 값을 치르지 않기엔 그동안 받은 은혜가 너무 많았다. 허나 완고하게 나오는 라 모나에게 정면으로 돈을 줬다간 얼굴로 돈을 되받게 되리라는 걸 알았기에, 계산대에 몰래 내 돈주 머니를 던져두고 온 참이었다.
소드 마스터의 스피드를 이런 곳에서 쓰게 될 줄이야.
라모나는 내가 계산대에 돈주머 니를 놓는 것을 보지 못했지만, 라이너는 그 순간 본 모양이었다.
"음. 그런데 있는 돈을 모두 그 곳에 두고 와서...... 식사를 사기 가 조금 곤란하군요."
이제 슬슬 밥을 먹어야 할 시간 인데 동전 한 푼 없이 텅텅 비어 버린 내 주머니를 생각하며 라이 너를 곁눈질했다. 맑은 금빛 눈동 자가 나를 묵묵히 담아 내는 광경 을 응시하다, 조금 장난스럽게 미
소 지었다.
"저번에 제가 밥을 샀으니, 이번 엔 라이너가 한 번 내 주셔야겠습 니다. 괜찮으십니까?"
내가 말하는 저번이라고 함은, 라이너와 미르로서 단련을 위해 처음 만나 기묘한 식사를 했던 때 였다.
'그런데 라이너는 내가 미르라는 것을 마주하기 싫어하는데 미르 때 일을 이렇게 직접적으로 말해 도 되나?'
문득 떠오른 생각에 작게 숨을 뱉었다.
사실 미르로서든 카슈미르로서 든 이렇게까지 엮인 이상 모른 척 하는 것은 눈 가리고 아웅하는 것 밖에 되지 않았으나, 그래도 최대 한 라이너에게 맞춰 주고 싶었다.
우물쭈물하는 나를 바라보는 라 이너의 눈이 깊어졌다. 솜털같이 부드러워 보이는 은회색 속눈썹이 눈을 잠시 덮었다 드러냈다.
이내, 날카롭게 치솟은 눈매가 살짝 휘어들었다.
"물론입니다. 오늘은 제가 사도 록 하죠."
어쩌면, 라이너가 곧 나를 똑바 로 마주해 줄지도 모르겠다.
밤이 된 노점상 거리엔 사람이 많았지만 테러의 여파 때문일까, 생각만큼 인산인해는 아니었다. 지나가다 적당히 어깨가 스치고,
주위에서 떠드는 소리가 백색소음 으로 들릴 정도.
나와 라이너는 도란도란 이야기 를 나누며 노점상들을 구경했다.
"이런 축제날엔 들어가서 먹기 보단 길거리 음식들을 여러 가지 맛보는 게 좋은데...... 라이너는 길거리 음식 못 먹죠?"
고소한 냄새가 나는 주위를 두 리번거리다 대답을 기대하지 않고 중얼거렸다. 나는 워낙 없이 살았 기에 주위 사람들이 복어도 생으
로 씹어 먹을 거라고 말할 정도로 가리는 음식이 없었지만, 평생 귀 족으로 살아온 라이너에게 위생에 신경을 기울이지 않는 노점상 음 식은 무리일 것 같았다.
내 중얼거림을 들은 라이너가 황급히 고개를 저었다.
"아닙니다. 저도 뭐든 잘 먹습니 다. 길거리 음식 중에 카슈미르가 먹고 싶은 걸로 하죠."
라이너의 목소리는 단호했다. 여 러 번 권유해도 족족이 똑같은 대
답을 할 기세라, 나는 빠르게 포 기하고 주위를 두리번거렸다.
" 아, 까?"
그럼 저기서 드시겠습니
그때 내 눈에 보인 것은 각종 꼬치를 판매하는 노점상이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