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충직한 검이 되려 했는데-139화 (139/254)

139 화

아무리 신빙성이 없다고 해도, 전례가 있다고 하면 그저 잘못 본 것으로 치부할 수 없었다.

생각이 많아져 발걸음이 늦어졌 지만 라이너는 자연스럽게 내게 맞춰 걸으며 내 안색을 살폈다. 그 묵묵하고도 정성스러운 시선에 나는 아무것도 아니라는 뜻을 담 아 웃어 보였다.

"저기, 호수군요."

내 웃음에도 볼에서 떨어지지 않는 라이너의 시선에 목덜미를 쓸어내린 나는 바로 앞에 펼쳐진 호수를 가리키며 말을 돌렸다. 라 이너의 눈이 잠시 가늘어졌으나, 이내 그도 호수로 눈을 돌리며 고 개를 끄덕였다.

"네. ......아름답군요."

호수를 잔잔히 응시하던 라이너 가 작게 속삭였다.

늦은 시간으로 인해 인적이 드 문 호수는 밤의 장막에 박힌 별들 보다 더 빛나는 등불들로 장식되 어 있었다.

푸른 호수 위에 하얀 점처럼 박 힌 수많은 등불들. 그로 인해 훤 히 드러난 수면. 밤바람에 잔잔히 혼들리며 서로 부딪혀 부스러지는 O 스

■간r e -

"••••••와."

저절로 탄식이 나왔다. 인간이 만든 불빛과 자연이 펼치는 달빛

의 조화는 이곳을 현실 세계에서 아득히 먼, 이름 모를 어느 동화 의 한 장면으로 만들었다.

밤바람이 별을 스치고, 풀 냄새 와 물 냄새를 동시에 몰고 왔다. 그 아득한 아름다움은 가슴을 벅 차게 했다.

"라이너, 저기......

아름다운 광경을 넋 놓고 구경 하다, 호수 한가운데 잿빛과 금색 이 섞인 등불을 발견하고 이를 가 리키며 라이너를 돌아보았다. 당

신과 닮은 등불이라고 말해 주고 싶었다.

기다렸다는 듯 눈이 마주쳤다. 단 한 번도 돌아간 적 없다는 듯 나를 응시하고 있는 금빛 눈동자.

신이 뿌리고 간 별가루처럼 빛 나는 두 눈과 마주했을 때, 생각 했다.

저 아득한 광경보다 라이너의 두 눈이 더 예쁘다고.

"......당신과 함께 이 광경을 봐

서 기쁩니다."

눈을 느리게 깜빡인 라이너가 긴 다리를 성큼 움직여 내게 다가 왔다. 딱 한 걸음 떨어져 있던 그 와 나의 거리가 단번에 좁아졌다-

라이너가 내 턱 끝을 살짝 잡아 올렸다. 그의 상체가 굽혀지며, 얼굴이 가까워졌다.

언제부터 였을까.

맞닿는 피부가 불쾌하지 않고, 오히려 마음을 부드럽게 했던 건.

두 눈을 맞추는 일이 버겁지 않고 물 흐르듯 자연스러워진 건. 코끝 을 스치는 로즈우드 향을 가끔 떠 올리게 되고, 직접 맡게 될 때면 매혹적이라고 생각하게 된 건.

오가는 시선 속에 묘한 공기와 기이한 떨림이 스며든 건.

밤바람을 타고 서로의 숨결이 흐른다. 그 누군가 별을 마신 것 같다는 감상을 남겼던 샴페인의 고귀한 금빛을 담은 두 눈. 밤바 람 때문에 잔이 혼들렸는지 그의 두 눈이 옅게 일렁였다.

나도 모르는 새에 별을 마셨던 것일까, 현실감이 옅어지고 부유 감이 온몸을 채웠다.

늘 생각하지만 지독하도록 아름 다운 얼굴이었다. 누군들 라이너 에게 시선을 뺏기지 않을까 싶을 정도였다.

그러나 내 시선을 빼앗은 것은 그의 미모가 아니었다.

올곧은 방향만을 가리키는 북극 성.

나침반이 고장 났을 때도 북극 성은 방향을 잃지 않는다. 어떤 상황에서도 묵묵히 가장 추운 북 쪽을 가리킬 뿐이었다.

라이너는 내 북극성이었다.

나는 그가 혼들림 없이 하늘을 지킬 것이라고 생각했다.

'나는 라이너를 진심으로 믿고 있구나.'

밤하늘 아래 빛나는 그 눈을 보

며, 라이너를 향한 내 믿음이 한 없이 굳건하다는 것을 깨달았다.

라이너가 점점 더 얼굴을 가까 이 했다. 달빛 아래 그의 잿빛 속 눈썹이 은실처럼 반짝였다.

샴페인처럼 달큼하고 끈적한 공 기. 베어 물면 체리의 진득한 단 맛이 날 것 같은 그의 붉은 입술. 늘 보름달처럼 휘황하게 빛나다, 반쯤 감긴 눈꺼풀로 인해 반달이 된 금빛 눈동자.

그 금빛 아래 넘쳐흐르는, 들끓

는 욕망.

섬찟해지며 목덜미의 털이 곤두 섰다. 들이쉬는 숨이 기이하도록 달콤해 공기에 꿀이라도 섞인 것 같았다.

그가 가까워지는 것이 이상한데, 살짝 벌어진 그의 입술에 시선이 고정되는 것도, 그의 붉은 혀가 갈증을 느낀 듯 자신의 입술을 쓸 고 지나갈 때 나 또한 따라하게 되는 것도 이상한데.

더 이상한 것은 이상함을 느끼

면서도 피할 수 없다는 것이었다.

아니. 피할 수 없었던 것인지, 피하지 않았던 것인지, 나는 알 수 없었다.

덜컥 다가온 라이너의 얼굴로 인해 코끝이 맞닿고, 그의 고개가 사선으로 틀어졌다.

붉은 것들이 맞물리려던 직전.

그는 터지려는 댐을 틀어막듯

다급하게 호흡하며, 원하지 않았 던 목적지에 불시착하듯 내 왼쪽 입꼬리에 그의 입술을 살며시 대 었다 뗐다.

그제야 나는 숨을 쉬었다.

어째서 내가 숨을 멈추었던 건 지 나조차 알 수 없었다.

나는 몽환경에서 정신을 차리지 못한 사람처럼 멍하니 눈을 깜빡 이다, 느리게 시선을 들어 눈앞의 남자를 마주했다.

눈가가 새빨갛게 달아오른 라이 너는, 금방이라도 울 것처럼 얼굴 을 일그러뜨리고 있었다.

툭.

힘없이 떨어진 라이너의 고개가 내 어깨에 닿았다. 그가 얼굴을 기대지 않은 반대쪽 어깨로는 그 의 큰 손이 닿았다. 내 어깨를 쥔 그의 손으로 미세한 떨림이 느껴 졌다.

"나는, 당신께 모든 걸 내주었으 니, 이 정도까지만 허락해 줘."

차마 채우지 못한 욕망. 끝없는 갈망.

수많은 것들이 뒤섞인 갈라진 목소리는, 참혹한 장송곡처럼 내 귓가에 남았다.

끝나가는 봄날, 잊지 못할 시간 이었다.

"무슨 일로 찾아오셨습니까.

나는 무감정한 얼굴로 기계처럼 딱딱하게 묻는 남자를 착잡하게 바라보다 길게 한숨을 내쉬었다.

내가 미르 차림까지 하고 온 이 곳은, 정보 길드 'Hide & Ceek' 였다.

테러가 일어난 지 2주가 지난 시점.

수도는 어느 정도 안정을 찾았 지만 테러에 대한 수사는 지속되 고 있었다.

아직 공식적인 발표는 없었으나 테러가 북부의 소행이라는 것은 공공연한 사실이었다.

사회에 냉랭한 기운이 감돌고, 금방이라도 북부와의 전쟁이 선포 될 것 같은 가운데.

나는 요 근래 들어 많아진 의문 들을 해소하기 위해 이곳을 찾았 다.

레이샤의 유품이라던 잿빛 늑대 의 문양이 새겨진 주머니. 그 안 에 든 요정 숲의 출입패. 그것이

있던 장소가 우리 집, 그것도 어 머니의 방이었다는 점. 그걸 가져 간 지그문트. 어머니를 알고 있는 '푸른 날개' 야샤.

'레이샤와 내 어머니 오드리, 요 정과 지그문트, 그리고 야샤.'

수많은 이들이 실타래처럼 뒤엉 킨 이 미스터리를 정보 길드를 통 해 알아볼 생각이었다.

'레이샤와 어머니, 지그문트에 대해 알아봐 달라고 의뢰하면 되 겠지.'

차분히 생각을 정리하고 입을 열었다.

"의뢰를 하려고 하네만."

"지금은 잠시 의뢰를 받지 않고 있습니다. 다음에 찾아주시지요."

'뭐 이런......

나는 바늘을 찔러 넣어도 피 한 방울 나오지 않을 것 같은 남자를 보며 내 운 없음에 한탄했다.

'다음이라니...... 다음엔 못 올지

도 모르는데.'

사실 어머니의 과거를 캔다는 건 내게 있어 커다란 용기를 요했 다.

내가 알고 있던 당신이 사실 착 각일지도 모른다는 걱정. 혹여, 내가 정말 원치 않았던 아이라는 것을 확답받게 될지도 모른다는 불안.

오늘 이곳에 걸음하기까지는 깊 은 고민과 큰 결단이 필요했다.

지금 돌아가면 내가 이곳에 올 결심을 다시 할 수 있을지, 나는 확신할 수 없었다.

나는 한숨을 쉬곤 주머니를 뒤 적여 동그란 물건을 꺼냈다.

휙.

"......이게 뭡니까?"

"직접 보게."

내가 물건을 던지자 자연스럽게 받아든 남자가 눈썹을 꿈틀거렸 다. 처음엔 미심쩍어하던 남자의

눈이 점점 더 커졌다.

"......설마, 당신 진짜 미르입니 까?"

많은 용병들이 내 이름을 사용 하지만, 그들에겐 없고 내게만 있 는 것이 있었다.

황금 방패 용병임을 증명하는 황금 패.

황금 패를 가진 용병 미르는 단 한 명뿐이었다.

"이래도 오늘은 의뢰를 받지 않 는가?"

경악이 물든 남자의 얼굴을 보 며, 나는 느릿하게 웃었다.

급하게 어딘가로 연락을 한 남 자는 나를 이끌고 길드의 깊은 곳 으로 향했다.

얼핏 듣기로는, 남자는 내가 평 범하게 의뢰를 할 수 있도록 안내 하려 했으나 상대방의 명령으로

길드장에게 데려가는 것 같았다.

"이곳에서 잠시만 기다려 주십 시오."

길드장과의 직면은 예상에 없었 지만, 나야 길드장에게 직접 의뢰 해도 문제는 없었다. 무슨 일이든 대가리와 담판을 보는 게 좋으니.

길드장에게 직접 의뢰하면 길드 의 자존심 때문에라도 확실히 일 처리를 해 줄 게 분명했다.

'다만...... 길드장이 나를 만나려

하는 이유가 뭐냐는 거지.'

나는 고풍스러운 의자에 앉아 턱을 괸 채 방 안을 살폈다.

길드장의 사무실로 보이는 방 안은 병적일 정도로 깔끔해서 사 람이 지내는 곳이라기보단 관광을 위해 인위적으로 만들어진 곳 같 았다.

무채색과 원목으로만 이루어진 인테리어엔 화려함이 없었으나, 방 안을 차지한 가구 하나하나 고 가인 태가 나 충분히 고급스러워

보였다.

'보통 외부인을 길드장 사무실에 혼자 둘 리가 없는데. 그것도 정 보 길드가.'

정보 길드는 그 어떤 종류의 길 드보다 보안을 철저히 했다. 그럼 에도 불구하고 길드에서 가장 은 밀해야 할 길드장의 거처에 나를 혼자 뒀다는 것은, 거기다 들어가 는 길까지 고스란히 보여줬다는 것은 그만한 이유가 있을 게 분명 했다.

'신생이거나 유명하지 않은 길드 라면 실수라고 생각할 수도 있겠 지만...... 'Hide & Ceek' 같은 네 임드 길드가 이런 실수를 저지를 리 없어.'

'Hide & Ceek'는 창설된 지 5 년이 지났다. 유서가 깊은 건 아 니었지만, 신생 축에 든다고 할 수도 없었다. 게다가 창설과 동시 에 높은 의뢰 성공률로 무섭게 인 지도를 넓힌 네임드 길드였으니.

이 상황이 실수가 아닌 의도된 상황임은 분명했다.

'나한테 원하는 게 뭘까.'

눈을 가늘게 뜬 나는 자리에서 일어나 느긋하게 주위를 돌아보았 다. 길드장이 마법사인지 방 안엔 마도구가 여럿 있었지만, 감시용 마도구는 없는 것 같았다.

'이 길드의 길드장에 대해선 알 려진 게 없어.'

보통 길드들은 길드의 상징으로 길드장을 내세웠다. 길드장의 성 향에 따라 길드의 성향이 결정되

었고, 강한 길드장은 그 길드의 자랑이었다.

그만큼 길드에서 길드장이 갖는 의미는 대단했다.

허나 'Hide & Ceek'의 길드장 은 완벽히 베일에 싸여 있었다. 대외적으로 얼굴을 드러낸 적도 없고, 이름도 알려지지 않았다. 그 흔한 목격담조차 없이 소문만 무성할 뿐이었다.

'생각할수록 불길한데. 대체 무 슨 꿍꿍이지.'

아는 게 있어야 추리라도 하는 데 아는 게 없으니 의심만 가중될 뿐이었다.

그나마 생각해 낸 것이 나를 길 드원으로 섭외하려 하는 걸지도 모른다는 것이었으나, 어디까지나 가정일 뿐이었으니 답답했다.

의문을 풀고자 왔는데 의문만 생기는 것 같아 앓는 소리가 저절 로 나왔다. 난 일단 생각을 뒤로 하고 길드장이 올 때까지 방 안을 둘러보기로 했다.

'성격 진짜 까칠할 것 같은데.'

나는 깨끗한 흑단 원목 탁자를 손가락으로 쓸어 보았다. 색깔이 검어 먼지가 묻어 있어도 티 나지 않는 건 줄 알았는데, 자세히 보 니 아예 먼지가 없었다.

아무것도 묻어나지 않은 손끝을 질린 표정으로 바라보던 나는 문 득 창문 앞 거치대에 놓여 있는 검에 시선을 빼앗겼다.

'잠깐, 저거......

순간 숨을 멈춘 나는, 두 눈을 의심하며 경악에 가득 차 검을 잡 아 들었다.

'이게, 이게 왜 여기 있지?'

검은색 가죽 검집에 꽂혀 있는 이것은 귀족들의 검처럼 화려하지 않았지만, 훌륭한 대장장이가 만 든 태가 나는 좋은 검이었다.

깔끔하게 세공된 은색 손잡이. 그 중심에 박힌 청명한 자수정. 손잡이 끝에 달린 태그.

내 눈에 익은 검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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