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41 화
지그문트는 내 질문 뒤에도 한 참 동안 대답이 없었다. 짙은 침 묵이 방 안을 집어삼켰다.
길고 새하얀 손이 자수정이 박 힌 검을 내 손에서 빼내 갔다. 검 을 느리게 매만지는 손길에도, 응 시하는 눈길에도 회한이 묻어났 다.
'넌 내게 너무 어려워.'
아리아드네의 실타래가 없는 미 노타우로스의 미궁. 자를 수 없는 고르디우스의 매듭. 네겐 온갖 난 제들의 이름을 붙여도 부족했다.
바닥이 없는 무저갱보다 깊은 보랏빛 눈동자의 뜻을 확실히 읽 어 낼 수 있는 날이 오기나 할까 싶었다.
나는 기이하게 번뜩이는 지그문 트의 눈을 관찰하며 조용히 그의 대답을 기다렸다.
"......나는 모든 미련과 애착을 버려야 했다. 어린 날의 추억과 인연까지도."
긴 기다림 끝에 떨어진 붉은 입 술은 오랫동안 묵혀 놓은 죄를 고 해성사하듯 무겁고 버적거리는 소 리를 냈다. 나는 그를 지긋이 응 시하며 느릿하게 이어지는 그의 말을 기다렸다.
"카라쇼의 장례식에 참석하면 그녀의 마지막 모습을 영원히 잊 지 못할 것 같았다. 너를, 다시 보면......
처음 봤다. 늘 여유롭고 냉철하 던 지그문트가 이리 주저하는 것
O
검을 내려다보며 뚝뚝 끊기는 목소리로 간신히 문장을 잇던 지 그문트가 눈을 들어 나를 바라보 았다.
"이곳에 안주하고 싶을 것 같았 다."
보랏빛 눈동자가 한없이 가라앉 았다.
두루뭉술한 대답. 여전히 불친절 한 설명.
한숨을 푹 내쉰 나는 지그문트 가 든 검을 손가락질했다.
"그럼 어째서 그걸 아직도 가지 고 있지?"
그가 눈을 내리깔았다.
"......버릴 수 없었으니까."
지그문트는 왜 모든 미련과 애
착을 버려야 하는지도, 안주해선 안 되는 이유도 여전히 말해 주지 않았다.
궁금해 속이 터질 것 같았지만, 나는 지그문트가 이 이상은 말해 주지 않으리라는 걸 본능적으로 알아차렸다.
'미련인가.'
모든 것은 흔적을 남긴다. 하다 못해 작은 들꽃도 자신이 머물렀 던 자리에 꽃잎을 남기는데, 카라 쇼 같은 이가 지그문트에게 흔적
을 남기지 못했을 리 없었다.
그리고 흔적은 어김없이 미련을 불러오는 법이었다.
모종의 이유로 카라쇼의 곁을 떠나야 했던 지그문트는, 아직 미 련을 완전히 버리지 못한 모양이 었다.
"나는 너를 기다렸지. 아주 오랫 동안."
"하지만 오지 않아서, 차라리 다 시는 보지 않기를 바랐어. 다시
봤을 땐 친구가 아닐 것 같았으 니."
"그런데 너는...... 너무 망가져 서 돌아왔구나. 이전보다 더 개자 식이 됐어."
나는 옅은 헛웃음을 뱉고 지그 문트와 시선을 마주쳤다.
"대체 그동안 어떻게 산 거냐, 지그문트."
그가 제 입술을 지그시 깨물었 다. 입은 조개처럼 닫혔고, 대답
은 돌아오지 않았다.
"......네가 이곳의 길드장이라고 했지. 그럼 넌 떠난 지 1년 뒤에 길드를 창설한 건가?"
지그문트가 저렇게 굴 땐 의자 에 포승줄로 묶어 놓고 죽을 때까 지 패도 입을 열지 않는다는 걸 알았기에, 나는 순순히 말을 돌렸 다.
지그문트는 고개를 끄덕였다.
"정보 길드 창설은 스승님과 함
께 있을 때부터 계획하고 있었다. 스승님도 알고 계셨지."
"그래? 그런데 왜 나는 몰랐 지?"
카라쇼도 알고 있었다는 말에 무심코 되묻자, 지그문트가 심각 한 표정으로 입을 다물고 바닥을 바라보았다.
생김새가 워낙 특출난 탓에 얼 핏 보면 세계의 안위에 대한 심도 깊은 고민이라도 하고 있는 것 같 았지만, 나는 저게 지그문트가 할
말이 없을 때 시선을 피하는 방식 이라는 걸 알았다.
그가 정보 길드의 수장이라는 것을 오늘 처음으로 알게 된 나는 입꼬리를 비틀어 올렸다.
"개자식아, 그때 나만 안 알려 준 거냐?"
"......딱히 궁금해하지 않을 거 라고 생각했다."
지그문트가 아무것도 없는 창밖 을 사연이 많아 보이는 눈으로 바 라보며 변명했다. 나는 남몰래 이
를 악물었다.
'아무리 그래도 나한테만 안 알 려 주냐......!'
지금이야 친구라고 할 수도 없 고 원수라고 할 수도 없는 애매한 사이라지만, 그땐 그래도 악우 정 도는 되는 사이였다.
어떻게든 서로를 처단하고 카라 쇼의 유일한 제자가 되는 것이 우 리 둘의 동일한 새해 소원이긴 했 어도, 같이 다녔으니 친구는 친구 였다. 정보 길드를 창설한다는 빅
뉴스는 알려 줄 법했단 말이다.
나는 지금 내가 느끼고 있는 감 정이 섭섭함이 아니라고 스스로를 세뇌하며 조금 불퉁해진 낯으로 삐딱하게 앉아 턱을 괴었다. 어쩐 지 심술을 부리고 싶어졌다.
"길드 이름이 'Hide & Ceek'가 뭐냐? 제정신으로 지은 건가? 누 가 보면 간판에 잘못 적은 줄 알 겠군."
"스승님께서 직접 지어 주신 이 름이다."
"......신들려서 제정신이 아닐
때 영감을 받고 지으신 이름 같 군. 오탈자인 듯 반항아적인 느낌 을 주면서도 가운데 기호를 중심 으로 나누어진 네 글자 대칭이 무 척 균형적이라고 생각한다. 나중 에 내 묘지 비석에도 적어 넣고 싶군."
나는 삐딱하게 앉았던 자세를 바로하고 턱을 괴었던 손을 빼 두 손을 무릎 위에 모았다. 대체 뭔 가 싶어 보이던 이름이 한순간에 멋지게만 느껴졌다.
나를 어이없다는 듯 바라보는
지그문트의 시선을 비스듬히 피한 채 입술을 열었다.
"그런데...... 대체 무슨 의도로 지으신 이름이냐......?"
카라쇼가 지었다고 하니 무조건 괜찮아야 하긴 하지만, 당최 뜻을 알 수 없는 이름이었기에 은근슬 쩍 물었다. 지그문트는 잠시 멈칫 하더니 고개를 저었다.
"나도 모른다."
"그렇군......
어쩐지 시원찮은 대답이었지만 우선 수긍했다. 나는 이름에 대한 생각은 한구석에 밀어 둔 채 턱을 매만졌다.
'지그문트가 정보 길드의 길드장 이라면 지그문트와 키프로스 가의 연도 이해가 가. 지그문트가 키프 로스의 수족이라는 건 보나 마나 거짓말일 거고. 아무래도 지그문 트는 의뢰를 받아 키프로스에게 정보를 조달해 주고 있는 게 아닐 까. 아니면 모종의 이유로 손을 잡았거나.'
심증뿐인 추리였지만, 불가능한 가설은 아니었다.
여러모로 생각해 보던 나는 테 러를 떠올리는 바람에 가라앉은 마음을 정리하고 눈을 들어 지그 문트와 마주했다.
요정 패에 대해서도 묻고 싶었 다. 그게 대체 왜 우리 집에 있었 으며, 너는 왜 그걸 찾았고, 돌려 달라고 하면 돌려줄 거냐고.
하지만 나는 직감적으로 그가 이에 대해선 답하지 않으리라는
걸 알았기에, 이를 뒤로하고 가장 궁금했던 질문을 던졌다.
"너는 나와 어떻게 하고 싶은 거지?"
짙은 보랏빛이 나를 조용히 담 아냈다. 나는 소름끼치도록 속을 내비치지 않는 시선을 묵묵히 받 아냈다.
"그렇게 나와 카라쇼를 잊고 싶 었다면, 다시는 내 눈앞에 나타나 선 안 됐던 거 아닌가."
내 단호한 말에 지그문트의 눈 동자가 순간 일렁였다.
나는 지그문트의 반응을 유심히 살폈다.
지그문트는 읽는 것이 불가능하 다 느껴질 정도로 두꺼운 포커페 이스를 가진 사람이었으나, 나는 한때 그와 생과 사를 함께했었다.
그의 감정을 하나하나 확실하게 읽을 수는 없다 해도, 그가 강렬 한 감정을 느끼거나 확연히 동요 할 때만큼은 알아차릴 수 있었다.
'그러니, 자극한다.'
꽝꽝 언 얼음을 녹이는 방법은 하나, 불을 지르는 것뿐이었다.
"나는 너를 잘 알아. 지독한 냉 혈한에, 정을 모르는 놈이지. 그 런 놈이 내가 보고 싶어서 내 앞 에 나타난 건 아니라고 생각한 다."
"첫 만남은...... 그래. 우연이라 치자. 네 길드 앞에서 만난 것이 었으니 내 실책일지도 모르겠군.
두 번째도 네가 원하는 걸 훔쳐가 려다 만난 것이니 우연이겠지. 하 지만 나는 테러 날 네 행동은 이 해가 되지 않아."
첫 만남은 내가 지그문트의 영 역에 침범한 것에 가까웠고, 두 번째 만남은 그가 내 영역인지 모 르고 왔다가 우연히 만난 것이니 우연이라고 칠 수 있었다.
"왜 테러를 막으려는 날 도와준 거지?"
하지만 세 번째 만남은, 아무리
보아도 우연이라고 할 수 없었다.
나는 상체를 숙여 지그문트와의 거리를 좁혔다.
"테러의 주범이 키프로스가라는 건 이미 알고 있다. 너는 키프로 스의 수족이라고 했지. 네가 누구 아래 들어갈 리 없으니 수족은 아 니겠지만, 키프로스와 한패라는 건 분명해. 그런 네가 아무런 이 유 없이 나를 도울 리가 없다."
키프로스와 한패인 지그문트가 키프로스의 소행인 테러를 막는
다?
상식적으로 이해가 되지 않는 상황이었다. 나는 그가 감정과 충 동에 따라 움직일 리 없다고 생각 했다.
"스승님 때문이라곤 했지만 그 게 전부라고는 생각하지 않는다. 카라쇼를 뭣도 없는 용병이라고 한 너니까 말이야."
" 나는••••••
"그래. 테러를 막는 걸 도와준 것도 뭔지 모를 네 계획 때문이었 다고 하자. 정말...... 카라쇼 때문
이었다고 믿어 주마. 그래도 나는 네가 이해가 되지 않아."
모든 감정을 배제한 차가운 눈 으로 지그문트를 바라보며 최대한 날카롭게 내뱉었다. 그 가운데, 나는 그의 동요를 읽었다.
"왜 떨어지는 나를 잡아 줬지? 어째서 나를 잡고 동요했지? 왜 평범한 의뢰를 하러 온 나를 따로 이곳에 불렀지? 그리고 왜 내 질 문에 대답해 주는 거지? 정말 나 와 모든 걸 끝내고 싶었다면, 너 는 그날에도 내 생애 최고의 개자
식이 되겠다고 해선 안 됐다. 없 는 사람이 되어 다시는 얼굴을 보 이지 않겠다고 했어야지. 그날 길 드 앞에서 서 있던 내게 단도를 던지는 게 아니라, 모르는 척 지 나갔어야지."
버리겠다는 말은 버릴 수 없다 는 말이다. 정말 버리고 싶을 때 는 말이 없다.
지그문트가 진심으로 나와의 인 연을 끊고 싶었다면 내게 말을 걸 어선 안 됐다. 개자식으로 남겠다 고 하는 게 아니라 침묵했어야 했
점점 더 금이 가는 지그문트의 포커페이스를 보며, 나는 숨을 내 쉬었다.
'멍청하구나, 카슈미르. 아직도 그 사사로운 감정과 미련한 정을 버리지 못했어.'
나는 첫 재회에서 나를 조롱하 던 지그문트를 생생하게 기억하고 있었다. 나는 그 순간 지그문트의 말투와 표정을 그대로 따라하며 말했다.
"사사로운 감정과 미련한 정을 버리지 못한 건 너 아닌가, 지그 문트."
이 말을 끝으로, 지그문트의 포 커페이스가 무너졌다.
"하, 하하하!"
제 입을 손으로 덮은 채 무섭도 록 고요히 나를 바라보던 지그문 트가 어느 순간 크게 웃어젖혔다.
나는 지그문트가 자신의 포커페
이스가 무너질 때 제 본 감정을 보이지 않기 위해 도리어 웃곤 한 다는 걸 알았기에, 웃음 사이에서 그를 읽어 내기 위해 집중했다.
"너는, 아무것도 몰라, 카슈미
카슈미르. 내 이름. 아무라도 부 를 수 있는 한낱 이름에 불과한 데, 이상하다. 지그문트의 혀 위 에 오르면 마법 주문이라도 되는 마냥 진득하고 음습해졌다.
수많은 감정이 뒤섞여 탁해진
보랏빛 두 눈을 바라보았다. 이제 야 제 기색을 내비치는데, 색깔들 이 뒤엉켜 검은색만 남은 그의 눈 에선 감정을 읽을 수 없었다.
그저, 언제나 제 위를 덮고 있던 살얼음을 걷은 채 끓어오르고 있 다는 것만 읽힐 뿐이었다.
"그래. 나는 아무것도 몰라. 네 가 아무것도 말해 주지 않으니 까."
나는 그 두 눈을 피하지 않으며 거침없이 응수했다.
모를 수밖에 없었다. 말하지 않 으면 모른다. 나는 지그문트에 대 해 아는 게 아무것도 없다고 해도 이상하지 않았다.
다만 내 생각은 분명했다.
지그문트와 이 애매한 사이 그 대로, 뭔지 모를 찝찝한 찌꺼기를 남긴 채 관계를 끝내 버리고 싶지 는 않았다.
"그러니 말해, 지그문트. 너는 나를 어떻게 생각하는지, 앞으로
어떻게 하고 싶은지. 네 그 얄미 운 방식대로, 곤란한 부분은 모두 도려내고 말해도 괜찮아. 그냥 좀, 말해."
침묵 속에서 혼자 질문을 던지 는 것은 이제 지긋지긋하다. 이 젠, 대답을 듣고 싶었다.
내 단호한 말에 지그문트가 느 리게 숨을 들이쉬었다.
다른 이들에게는 그저 그가 냉 철하게 생각하고 있는 것으로 보 였겠지만, 내 눈엔 그의 동요가
고스란히 보였다.
금이 가 금방이라도 물을 홍수 처럼 뱉어낼 듯 위태로운 댐 같은 그를 나는 가만히 기다릴 뿐이었 다.
"......카라쇼도, 이제 거의 잊었 는데."
한참의 기다림 끝에 지그문트의 입술이 열렸다. 평소의 감미로운 목소리와 다르게, 무척 메마른 목 소리였다.
"내 삶은 공동묘지였고, 이미 많 은 이들을 묻었다. 카라쇼도 이젠 수많은 무덤들 중 하나의 이름일 뿐이고, 그녀를 향한 애정도, 미 련도, 거의 다 털어냈는데......
늘 얼어 있던 얼음장이 녹아내 린 걸까, 지그문트의 얼굴이 축축 했다. 새하얀 피부엔 눈물 자국 하나 없음에도 내겐 그가 울고 있 는 것처럼 보였다.
"너는 정말 끈질겨. 너만은 참 끈질기게 내 속에 살아남아 있어. 여전히."
그르렁거리는 낮은 목소리가 위 협적이었다. 눈앞에 맹수를 둔 듯 목덜미가 섬찟해지는 것을 느끼 며, 나는 상체를 낮춘 채 지그문 트에게 온 신경을 집중했다.
"아직도 모르겠어?"
지그문트가 숙이고 있던 고개를 천천히 들어 올렸다.
내 후각을 잠식하는 설원의 향 기. 공기를 짓누르듯 무거운 기 운-
"너는 내가 이 빌어먹을 곳에 남긴 유일한 미련이야, 카슈미 르."
아, 지그문트는 진정으로 한겨울 매서운 폭풍을 닮은 사람이었다.
유일한 미련. 그 말이 참 무겁게 떨어졌다. 형용할 수 없는 감정이 나를 감싸고, 대답은 도수 높은 알코올처럼 증발되었다.
대답 없는 내 앞에서 지그문트 는 피부를 벗겨 버릴 듯 거칠게
마른세수를 했다.
"너만 없었으면 나는 정말로 해 방될 수 있었을 텐데......
지그문트가 말꼬리를 흐렸다. 제 앞머리를 거칠게 쓸어 넘긴 그는, 나를 향해 두 눈을 번뜩였다.
"나는 네가 정말 싫어, 카슈미
나를 옭아매는 한 쌍의 보랏빛 사슬에서, 나는 핏빛 비릿한 광기 와 지독한 증오를 보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