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충직한 검이 되려 했는데-142화 (142/254)

142 화

사람의 감정은 말로만 전해지지 않는다. 그 순간의 표정, 목소리, 눈, 모두가 저마다 말을 했고, 때 로는 입으로 하는 말과 몸이 하는 말이 불일치하기도 했다.

지그문트는 정말 나를 증오하는 것 같았다. 두 눈에 서린 증오는 분명 나를 향하고 있었으니. 하지 만 나를 향한 감정이 증오만은 아 니라는 것도 분명했다.

'너나 나나 비슷한 처지인 모양 이구나.'

나는 그가 무척 수상한 인물이 고, 행동거지에서 미심쩍은 부분 이 많다는 걸 알면서도 잘라내지 못하고 있었다. 그를 원망하는 동 시에 그가 안쓰러웠고, 그를 의심 하면서도 한편으론 믿고 있었다.

'네가 나를 미련으로 둔 것처럼, 나는 너를 버리지 못한 인연으로 두었지.'

지그문트와 나는, 서로의 일부였 다.

"이쪽도 마찬가지로 네가 싫고 지긋지긋하다, 지그문트."

나는 한숨을 내쉬며 앞머리를 거칠게 쓸어 넘겼다. 내 손가락에 뒤엉키는 검은 머리칼이 눈앞에 보이는 지그문트의 머리칼과 똑같 은 색이라는 것이 참 거슬렸다.

"그러니 말을 해• 나랑 뭘 하고 싶은 건지. 전처럼 나랑 숨바꼭질 이나 하면서 놀자고 다시 나타난

건 아닐 텐데."

차갑게 대꾸하며 잠시 어렸을 적을 떠올렸다.

카라쇼는 어린 나와 지그문트에 게 훈련의 일종으로 숨바꼭질을 시키곤 했다.

'카슈미르는 은신에 요령이 없 다. 싸움엔 정면 돌파만 있는 게 아니야. 숨을 줄도 알아야 하지. 반면 지그문트는 은신에만 뛰어나 고 추격에선 떨어진다. 숨바꼭질 에서 언제고 숨는 것만 할 수는

없는 법이다. 술래도 할 줄 알아 야 한다.'

그녀는 나와 지그문트에게 각각 부족한 것이 뭔지 제대로 파악하 고 있었다.

장소는 보통 울창한 숲. 정해진 시간 안에 지그문트가 나를 찾아 내면 그의 승리였고, 정해진 시간 이 지날 때까지 들키지 않으면 내 승리였다.

'젠장! 빌어먹을 족제비 새끼! 내가 술래였으면 넌 5분 안에 끝

났다!'

'그 족제비한테 잡힌 주제에 말 이 많군. 쯧• 넌 왜 이렇게 가볍 지? 시장에 내다 팔아 봐야 10골 드도 안 나오겠군.'

숨바꼭질 승부의 승기는 보통 지그문트가 가져갔다. 내가 이기 기도 했지만, 다섯 판을 하면 지 그문트가 네 번을 이기고 내가 한 번을 이기는 꼴이었다.

카라쇼는 내가 진 이유가 지그 문트와의 재능 차이 때문이 아니 라 4살이란 나이 차이 때문이니

너무 분해하지 말라고 말해 주었 지만, 그래도 나는 이기고 싶었

특히 지그문트는 나를 찾아낸 다음엔 꼭 내 목덜미를 잡아 나를 대롱대롱 들고 카라쇼 앞에 대령 했기에, 더욱 지고 싶지 않았다.

물론 나는 내가 이겼을 때 지그 문트를 공주님 안기로 옮겼다. 이 기는 쪽의 운반 방식에 토를 달지 않는 것이 우리의 암묵적인 룰이 었다.

'다음에 내가 이기면 넌 감자 포 대에 쑤셔 넣어져 어깨에 둘러메 질 줄 알아라.'

'꿈도 크군. ......목 아픈가?'

'••••••딱히.'

나와 지그문트는 툭하면 서로를 물어뜯었지만, 그래도 진정으로 서로를 증오하진 않았다.

우린 둘 다 외로웠다. 볕을 벗어 난 서늘한 그늘에서 서로에게 기 대어 가까스로 온기를 유지하는 사람들.

서로를 저버릴 수 있을 리 없었 다.

'하지만 그때로 돌아갈 순 없겠 지.'

지그문트와 함께 지낸 1년은 실 질적인 시간에 상관없이 깊고 짙 었으나, 떨어져 있던 6년의 간극 또한 컸다. 그와의 관계의 행방이 어찌될지는 몰라도 이전과 같지 않을 것이라는 건 분명했다.

"......내 대답은 여전하다."

나와 마찬가지로 상념에 빠져 있던 지그문트가 느리게 입을 열 었다. 어렸을 적의 희미한 생기조 차 잃고 삭막함만 남은 한 쌍의 보랏빛이 나를 직시했다.

"나는 네게 흉터로 남게 될 거 다. 내가 너를 어떻게 생각하는 지, 앞으로 어떻게 하고 싶은지는 상관없이 그렇게 될 수밖에 없다. 너도 곧 깨닫게 되겠지."

겨울 한복판에 덩그러니 놓인 한 쌍의 자수정이 눈 속으로 깊 이, 깊이 파묻혔다.

"우리는 공존할 수 없는 서로의 안티테제라는 걸."

안티테제. 어떠한 명제를 반박하 는 정반대의 명제. 한 명제의 모 순이 드러나게 하는 대척점. 함께 하는 것이 불가능한 상극.

"내가 살면 필연적으로 네가 죽 고, 네가 살면 필연적으로 내가 죽는다. 반드시 그렇게 될 거다."

지그문트는 우리가 공존할 수 없음을 확신하고 있었다.

공존할 수 없다는 말은 자기가 살기 위해 나를 죽이겠다는 말. 꽤 잔인한 말이었으나, 나는 덤덤 하게 수긍했다.

사실 지그문트와 재회했을 때부 터 나는 본능적으로 느끼고 있었 을지도 모른다.

눈앞의 오랜 악우는 영원한 겨 울을 가져올 것이고, 겨울을 끝내 기 위해선 그를 베어 내야 된다는 걸.

"그럼 다시 만나는 날엔 서로에 게 검을 겨눠야 할지도 모르겠구

나는 나직하게 말하며 제비꽃 설탕 절임 하나를 집어 혀 위에 올렸다. 달콤한 보랏빛이 내 입엔 쓰게만 느껴졌다.

"••••••그래."

한 박자 늦게 대답한 지그문트 가 마주 본 내게로 상체를 굽혔 다. 한 발짝 떨어져 있던 그와 나 의 거리가 좁혀졌다.

"하지만 오늘은 아니잖아."

낮고 굵은 목소리가 두 뼘 거리 앞에서 속삭였다.

나는 지그문트의 두 눈을 순간 적으로 물들인 감정을 읽을 수 있 었다. 그의 말대로 미련과 닮아 있었으나, 미련보다 깊은 감정이 었다.

"너••••••

"오늘 의뢰하러 온 거 아닌가."

내가 무어라 말하려 할 때, 지그 문트가 내 말허리를 끊었다. 그의 단호한 눈빛에서 더는 이에 대해 말하지 않겠다는 뜻이 엿보였다.

잠시 입술을 꾹 다물었던 나는 지그문트가 말을 돌린 방향으로 순순히 따라갔다.

"그래."

"길드장에게 직통으로 의뢰하게 되다니, 운이 좋군."

만족스럽게 고개를 끄덕인 그가 깍지 낀 양손 위에 제 턱을 얹었

"성심성의껏 모셔 드리죠, 고객 님."

지그문트가 옅게 눈꼬리를 휘었 다. 그의 어이없는 능청스러움을 두 눈으로 목도한 나는 얼굴을 팍 구겼다가 한숨을 내쉬었다.

"사람에 대한 정보를 구해 줬으 면 한다. 인원은 세 명."

"어느 정도 깊이의 정보를 원하 지?"

"팔 수 있는 건 모두 파헤쳐. 간

단한 인적 사항부터 사소한 습관, 은밀한 비밀까지 싹 다 알고자 한 다. 돈은 요구하는 만큼 주지."

내 거침없는 대답에 지그문트가 가늘게 뜨인 눈으로 나를 바라보 았다.

나는 그가 저런 눈빛을 할 때를 알았다. 저건 흥미롭다는 뜻이었 다.

"재밌군. 최선을 다해 보마. 이 름은?"

"우선 첫 번째는 레이샤. 성은

모른다. 한때 아타라 왕국 9왕자 이자 현재 국왕인 알렉산드로 아 타라의 유모를 맡았던 적이 있고, 지금은 죽었다. 그리고......•"

" 그리고?"

나는 조금 주저하다, 느리게 입 술을 열었다.

"추측이지만, 레이샤는 은빛 늑 대 수인일지도 모른다."

지그문트의 눈빛이 날카로워졌 다.

은빛 늑대 수인족은 개개인이 살상 무기라고 할 수 있을 만큼 선천적으로 강한 힘을 가지고 있 었고, 그만큼 수가 적었다.

수인 대학살 사건 이후로는 무 척 폐쇄적이 되어서 자신들의 영 역 밖으로 나오는 경우가 없다시 피 했기에, 아타라 왕족의 유모였 던 이가 은빛 늑대 수인이었다는 것은 누구든 놀랄 만한 정보였다.

"믿기는 힘들다만, 우선 알겠다. 두 번째는?"

"두 번째는 오드리. 마찬가지로

성은 모른다. 지금은 죽었다. 그 리고 이 이상 아는 게 없다."

"허."

내가 당당하게 모른다고 흐]'자, 지그문트가 헛웃음을 뱉었다.

이 정도 정보를 가지고 사람을 캐는 건 불가능에 가깝다는 걸 알 았지만, 내가 어머니에 대해 아는 것은 정말 없다시피 했기에 할 말 이 없었다.

"이 정도 정보로는 할 수 있는 게 없다. 사소한 거라도 좋으니

더 없나?"

지그문트가 손가락으로 소파 손 잡이를 툭툭 건드리며 고개를 기 울였다. 나는 깊게 생각하다 뒤늦 게 입을 열었다.

"죽기 전엔 수도 외곽에서 살았 다. 갈색 머리에 회색 눈이었던 것으로 기억한다. 그리고 이건 신 빙성 낮은 추측이지만...... 아무래 도 한 차례 개명을 한 것 같다. 개명한 이름이 오드리."

"개명?"

지그문트의 되물음에 고개를 끄 덕였다.

'뭔가, 다른 이름이 있었던 것 같아.'

확실하진 않다. 오직 느낌이었 다. 블러 처리라도 한 듯 희미해 진 어머니에 대한 기억 속에서, 어머니의 다른 이름이 있었던 것 만 같은 근거 없는 짐작.

내 애매한 표정에 낮게 숨을 뱉 은 지그문트가 고개를 끄덕였다.

",오드리'라는 이름으로 개명했 던 사람을 위주로 찾아보도록 하 지. 그리고?"

"그리고......

마지막 세 번째 사람. 나는 잠시 간극을 두었다.

내가 아는 이들 중 가장 미스터 리하고 어려운 사람. 내가 알고자 하는 이들 중 유일하게 살아 있는 이. 나는 지그문트를 똑바로 바라 보았다.

"지그문트. 지그문트 하이드."

바로 내 눈앞에 있는 그였다.

지그문트가 느리게 눈을 깜빡였 다. 길고 풍성한 검은색 속눈썹이 움직이는 모습은 나비 날개가 가 볍게 펄럭이는 것만 같았다. 나는 평온한 표정을 지은 채 말을 이었 다.

"검은 머리에 보라색 눈. 6년 전까진 제국에서 지냈으나 이후엔 행방불명. 지그문트 하이드에 대 한 정보를 원해."

지그문트에게 지그문트의 정보 를 캐 달라고 하다니, 웃기는 일 이었다.

사실 그가 이곳의 길드장이라는 걸 알게 된 후로 그에 대해 조사 할 마음은 거의 접었다.

지그문트에게 지그문트에 대한 정보 조사를 의뢰해 봤자 제대로 해 줄 리 없는 데다, 수많은 이들 이 악을 쓰고 캐내도 이름조차 알 아내지 못했던 'Hide & Ceek' 길 드장의 정보를 다른 정보 길드에 의뢰한다고 하여 알아낼 수 있을

것 같진 않았다.

그러니 이건 단순히 경고로 해 두는 말이었다. 나는 반드시 네 생각을, 꿍꿍이를 알아낼 것이라 는 경고.

내 대답을 들은 지그문트가 흐E 하고 웃음을 터트렸다. 턱을 괸 그가 고개를 느긋하게 기울였다.

"그 사람 정보는 상당히 비싸다 만."

"돈은 부르는 대로 준다고 했을 텐데."

"얼마를 요구할 줄 알고. 자신 있나?"

지그문트가 도발하는 투로 말했 다. 나는 입꼬리를 비틀며 눈썹을 살짝 들어 올렸다.

"그 정보만 제대로 얻을 수 있 다면, 네가 얼마를 생각하고 있든 그 두 배를 치를 수 있어."

내 자신만만한 대꾸에 지그문트 가 한 번 더 웃음을 흘렸다. 그의 얼굴은 여전히 포커페이스로 굳어 있었으나 내가 보기엔 꽤 즐거워

하고 있는 것 같았다.

"그래. 그 사람 정보까지 알아봐 주지."

"고맙군. 그래서 보수는 어느 정 도면 되지?"

보랏빛 눈동자가 잠시 허공을 굴렀다. 제 턱을 쓸어내리던 지그 문트는 고개를 저었다.

"생각해 보니, 나는 이미 네게 보수를 받았군."

"••••••무슨?"

내가 미간을 좁히자 지그문트가 여유롭게 제 양손을 펼쳤다.

"네 집에서 빌린 물건으로 선불 을 받았다고 하지."

'이 새끼가......

나는 숨을 크게 들이쉬었다. 자 신이 훔친 요정 패를 빌렸다고 뻔 뻔히 말하는 지그문트를 보며 잠 시 검 손잡이에 손이 올라갔으나, 간신히 다시 내렸다.

레이샤의 유품 때문에 무너지던

레오만 생각하면 지금 당장이라도 지그문트를 두 쪽 내고 요정 패를 돌려받고 싶었다.

하지만 그 요정 패가 여기에 있 는지도 미지수인 데다, 이곳에서 지그문트를 공격했다가는 길드 전 체에게 쫓기는 수가 있었다.

'개자식. 돈 절대 안 줄 거 다••...!'

나는 그때의 기억에 속으로 이 를 아득 갈며 짜증 가득한 표정으 로 자리에서 일어섰다. 지그문트

가 내게로 시선을 돌렸다.

"구한 정보는 어떻게 전달해 줄 거지?"

"아. 알아서 너희 집으로 배송해 주지."

"......내 뒤를 캐겠다는 말을 잘 도 돌려서 하는군."

"원한다면 나는 네가 어제 뭘 먹었는지도 알아낼 수 있다."

재수 없게 입꼬리를 올리는 지 그문트를 한 대 치고 싶은 충동이 일었지만, 첫 만남 때 그의 얼굴 에 침을 뱉었던 통쾌한 때를 떠올

리며 애써 억눌렀다.

"......정보 기다리고 있겠다. 빨 리 보내."

할 말도 다 끝났겠다, 나는 이곳 을 나서기 위해 망설임 없이 발걸 음을 옮겼다.

작별 인사까지 할 사이는 아닌 것 같아 그대로 문을 열고 나가려 던 때.

"이전부터 궁금했는데. 모든 사 정을 설명해 주면 너는 이해해 줄

건가?"

지그문트의 목소리가 내 발을 잡았다. 뒤로 돌아 있어 그가 어 떤 표정을 짓고 있는지 보이지 않 았으며 그나마 들리는 그의 목소 리는 여느 때와 같이 낮고, 굵고, 무감정할 뿐이었으나, 그럼에도 나는 알 수 있었다.

이게 지그문트가 미련을 보이는 방식이라는 걸.

"그러기엔 너무 늦었다고 생각 하지 않냐."

폐부에서부터 끌어 올린 긴 숨 을 내쉬며 나지막이 말했다.

나는 잠시 눈을 감았다.

그가 몇 년 더 빨리 와서 이리 말했다면 나는 긍정했을지도 모른 다. 하지만 그는 때를 놓쳤고, 어 떻게 해도 이전으론 돌아갈 수 없 다는 걸 우리 둘 다 알고 있었다.

눌어붙은 감정들은 철이 지나 문드러져 버린 과육처럼 진득하 고, 과하게 달콤했으며, 역했다.

"카슈미르."

"AX "

TTTT-

"••••••그래."

내 애칭은 어린 날에도 지그문 트의 입에서 자주 불린 적 없건 만, 그는 내 애칭을 부르는 것이 익숙해 보였다. 몇 번이고 불러 봤다는 듯.

"우리 아직 친구야?"

'우리, 여전히 친구야?'

지그문트의 물음에서 첫 재회 때의 물음이 겹쳐 들렸다. 나는 그때의 내 대답을 떠올려 보았다.

'너는, 내게 친구였던 적이 없 고, 앞으로도 그럴 거야,'

미친 듯이 욕을 퍼붓고 거짓말 까지 섞어 거친 대답을 했었다. 그 순간의 대답에 후회는 없었지 만, 분명 진실은 아니었다.

"나도 모르겠다.

그래서 이번만큼은 진실을 말했 다. 나의 가장 솔직한 대답이었

그 말과 함께, 나는 방에서 나왔 다. 심호흡을 한 나는 잠시 방문 에 기대었다.

지그문트와 나는 서로에게 안티 테제인 동시에 가장 큰 미련이었 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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