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43 화
"준비는 다 마쳤느냐?"
"네."
제복 소매 단추를 매만진 나는 카이사르를 향해 고개를 끄덕였 다.
묘한 긴장감이 오가는 가운데, 칼과 아리아의 걱정스러운 시선이 느껴졌다. 나는 그 가운데에서 최 대한 아무렇지 않게 웃었다.
"잘 다녀올게."
가벼운 복장을 선호해 평소엔 즐겨 입지 않는 정식 제복이 내 몸을 조였다.
크리시스 공작가의 이미지에 맞 추어 깔끔하면서도 위엄 있는 검 은 제복을 완벽하게 갖춰 입은 나 는, 영락없이 중요한 자리에 가는 사람 같았다.
이른 아침. 나와 카이사르는 태 양 신전으로 갈 채비를 마쳤다.
제국 수도를 정면으로 공격해 온 건국 기념일의 테러는 단번에 제국의 고위층들이 술렁이게 만들 었다.
황제와 황태자가 탄 마차에 폭 탄이 설치되는 것을 아무도 몰랐 다는 부분에서 특히나, 보안을 맡 았던 황실 기사단은 완전히 뒤집 어졌다.
'그날 호위를 맡았던 기사들은
거의 다 잘리고 라이너만 살아남 았다고 했지.'
그럴 만도 했다. 황제와 황태자 의 생명이 위험했으니 말이다. 만 약 라이너가 폭탄을 막지 못했다 면 기사들은 기사단에서 잘리는 게 아니라 머리가 잘렸을지도 모 르는 일이었다.
'특히 제1 기사단은 완전히 뒤 집어졌다지.'
카이사르에게 듣기로, 라이너의 아버지이자 제1 기사단장이며 소
드 마스터인 노아 아인하르트는 이번 테러에서 자신이 아무것도 하지 못했다는 것에 완전히 분노 했다고 한다. 그의 기세를 보아 제1 기사단의 기강은 이번 기회 에 완전히 다시 잡힐 것 같았다.
폭탄을 제때 처리한 덕에 헬리 오스와 디에고 둘 다 무사하고, 수사망이 좁혀지며 곧 키프로스가 북부의 조력자로 의심을 받을 것 으로 보였다.
티나가 내부 고발자라는 것은 아직 누구도 눈치채지 못했고, 수
도는 무사했다.
'모든 게 무사한 와중에 나만 심 란하지.'
나는 턱을 괴고 마차 창밖을 보 며 한숨을 내쉬었다.
수도의 거리는 언제 테러가 일 어났냐는 듯 시끌벅적하고 활기찼 다. 그 광경을 보면서도 나는 착 잡함을 지울 수 없었다.
"슈슈. 괜찮으냐."
내 맞은편에 앉아 나를 지그시 응시하던 카이사르가 물었다. 그 의 말투에서 걱정스러움이 묻어났 다.
"아, 네. 그냥, 조금 긴장돼서 말입니다."
나는 손등으로 목덜미를 닦아 냈다. 여름이 가까운 계절 때문인 지, 다가올 일에 대한 긴장 때문 인지, 목덜미엔 땀이 살짝 배어나 있었다.
"걱정할 것 없다. 네게 조금이라
도 곤란한 질문이 들어오면 내가 쳐낼 테니."
내 상태를 굳은 표정으로 살핀 카이사르가 손을 뻗어 내 옆머리 를 넘겨 주었다. 그의 손길은 여 름 볕보다 따사롭고 온화했다.
"......감사합니다."
나는 조금 경직되었던 표정을 펴고 부드럽게 웃었다. 거대한 파 도를 만난 듯 복잡하게 술렁이던 마음이 서서히 가라앉았다.
전쟁이 성큼 다가오는 가운데, 나는 태양 신전에서 진행되는 대 귀족 회의에 증인으로 부름을 받 았다.
웅장한 신전 안은 대귀족 회의 가 일어나기 때문인지 사제들이 아니라 무장한 성기사들이 대열을 갖추고 있었다.
나는 엘과의 만남을 위해 오가 면서 익숙해진 신전을 가로질러 걸었다.
"언제 와도 불쾌하군."
주위를 아니꼬운 눈으로 둘러본 카이사르가 인상을 찌푸렸다. 나 같은 경우 신성력으로 가득 찬 신 전에 오면 편하다고 느꼈으나, 카 이사르의 경우 체질상 신성력과 맞지 않아 신전이나 사제들을 불 쾌하게 여기는 편이었다.
'카이사르가 별종이지. 보통 마 나를 사용하는 검사들은 신성력을 편안하게 느끼니까.'
신성력을 꺼리는 나머지 정말 웬만한 부상이 아닌 이상은 신성 력 치료도 받지 않으려고 하는 카 이사르를 떠올리며 속으로 한숨을 쉬었다. 아무래도 카이사르에게 있어 태양 신전에서 보낼 오늘 하 루는 저기압일 듯했다.
"홀에 들어가기 전 손을 닦아 주시죠."
회의장 문 앞에 당도하자 사제 가 나와 카이사르에게 고개를 숙 여 인사하며 금으로 만들어진 대 야를 들이밀었다.
나는 귀찮은 절차를 거침없이 생략시키는 엘과 율리안 덕분에 그동안 몇 번이나 신전을 방문하 면서도 교황과 대사제를 만나기 전 갖춰야 하는 것들을 모두 넘겨 버렸다.
그러나 율리안으로부터, 사실 신 전에서 교황을 만나기 위해서는 긴 절차를 거쳐야 한다고 듣긴 했 다.
'원래 대사제와 교황을 만나기 위해선 성수로 손을 닦아야 하는
데...... 되게 대단한 것처럼 포장 하는 것치곤 사실 특별한 용도로 사용할 때가 아니면 맹물이나 다 름없거든요. 저나 교황놈같이 신 성력에 아주 예민해야 맹물과 성 수를 구분할 수 있는 정도고요. 제가 발 닦은 물로 슬쩍 바꿔 놔 도 아무도 모를걸요.'
대사제와 교황을 만나기 위해 거쳐야 하는 기나긴 절차를 설명 해 주며 장난스럽게 키득거리던 율리안이 떠올랐다.
나는 그 별거 없다는 성수에 손
을 닦으며, 부디 살짝 미쳐 있는 율리안이 그때 했던 말을 실행에 옮기지 않았기를 바랐다. 나는 그 가 발 닦은 물에 손을 씻고 싶지 는 않았다.
몸값 비싼 대귀족들을 오래 잡 아둘 생각은 없었던 건지, 절차는 손을 닦는 것만으로 끝났다. 하기 야 율리안에게 들었던 그 거창한 절차들을 모두 실행했다가는 회의 가 밤에 시작되어야 할지도 몰랐 다.
"들어오시죠.
사제가 고아한 대리석 문을 열 어젖혔다• 문 틈새로 쏟아져 나오 는 빛에 나는 짧게 심호흡을 하 고, 카이사르와 함께 거침없이 발 걸음을 옮겼다.
뚜벅뚜벅.
거대한 홀에 나와 카이사르의 구둣발 소리가 울려 퍼졌다. 내게 로 쏟아지는 시선 가운데 익숙한 얼굴들이 여럿 보였다.
'정말 우리가 가장 늦었군.'
크리시스의 자리를 제외하고 모 두 차 있는 장내의 좌석들을 질린 눈으로 돌아보다 힐끔 카이사르의 옆모습을 살폈다.
일부러 느지막히 갈 준비를 하 던 카이사르를 보며 늦게 갈 심산 이라는 건 눈치챘지만, 황제와 교 황보다도 늦게 도착할 줄은 몰랐 다.
'요즘 황제가 네게 관심을 갖고 있다. 만날 때마다 내게 네 안부 를 묻는 게 무척 거슬려. 교황은
원래부터 마음에 안 들었다. 어린 놈이 음침해서는•• ...
얼마 전부터 나를 옆에 두고 구 시렁거리던-다른 이들이 들으면 무서워서 덜덜 떨 정도로 섬뜩한 말투였으나, 나는 이것이 카이사 르가 구시렁거리는 방식이라는 걸 알았다- 카이사르를 떠올리면, 이 것이 그의 심술이라는 것을 어렵 지 않게 알 수 있었다.
나는 완전히 지각을 하고서도 당당하기 짝이 없는 카이사르를 보며 남몰래 한숨을 쉬었다.
"제국의 태양과 하늘을 뵙습니
얼굴에 만리장성을 철판으로 깐 카이사르가 헬리오스와 엘 앞에 서서 고개를 까닥였다.
시건방진 카이사르의 인사를 받 은 헬리오스는, 잠시 카이사르를 응시하더니 씨익 웃었다. 나는 저 웃음이 헬리오스가 상대를 엿먹이 는 Wl가지 방법을 장전할 때 짓 는 웃음임을 알았다.
"이런. 이거 우리 공작님 아니신 가. 오는 길에 강도라도 만난 모 양이지?"
"만나지 않았습니다만."
헬리오스는 늦은 것을 비꼬며 변칙구를 날렸으나, 카이사르는 그 비꼼을 알아듣지 못한 척 여느 때와 같은 무표정을 지은 채 정면 으로 리시브했다. 나는 헬리오스 의 웃는 얼굴에 살짝 금이 간 것 을 보았다.
"하하! 만사에 당당한 것이 자네 의 매력이지. 아주 사랑스럽군."
이번엔 카이사르의 뻔뻔한 무표 정에 살짝 금이 갔다. 나는 헬리 오스의 스매싱 공격에 튀어나올 뻔한 웃음을 애써 접어 넣었다.
당장 불경죄로 감옥에 처넣어도 될 만큼 불경한 눈빛으로 헬리오 스를 바라보던 카이사르가 느리게 입을 열었다.
"......과찬이십니다."
"나는 그대 성격에 오늘 말없이 회의를 쌩까지 않았다는 것만으로 도 박수를 보내 주고 싶네."
"저도 스스로에게 박수를 쳐 주 고 싶습니다."
양심을 마차 타고 오던 길 하수 구에 고이 버린 사람처럼 대답하 는 카이사르에 헬리오스의 눈썹이 꿈틀거렸다.
나는 부디 두 사람이 우격다짐 만 하지 않기를 바라며, 아까부터 내 머리털을 몽땅 불태울 듯 뜨겁 게 시선이 쏟아지는 방향으로 슬 쩍 고개를 돌렸다.
그리고 곧바로 마주치는 은색
눈동자.
그의 눈은 어떤 거대한 것도 단 숨에 집어삼키는 늪 같았다. 늪과 는 아득히 거리가 먼 찬란하고 맑 은 은빛임에도 그리 느껴졌다. 별 같이 빛나는 주제에, 본질은 별들 을 집어삼키는 블랙홀 같았다. 반 짝임에 홀려 발을 들였다간 속절 없이 빨려 들어갈 것이다.
아니, 원래 그의 눈은 검은색이 었으니, 그는 원래부터 그랬을지 도 모른다. 모든 빛을 흡수하는 흑색, 그 자체인 사람.
"공녀는 인사 안 하나요?"
기다란 연하늘빛 머리칼을 타고 그리운 백합 향이 퍼져 왔다.
그는 교황 엘리오르 라이자, 내 친구 엘이었다.
"......제국의 태양과 하늘을 뵙 습니다."
나는 목울대를 울렁여 마른침을 삼킨 뒤 허리를 굽혔다.
교황의 권위를 뜻하는 거대한 대리석 왕좌에 턱을 괴고 앉은 엘 이 나를 지그시 응시했다. 시선에 형태가 있다면, 지금 엘의 시선은 분명 사슬의 형태를 하고 있을 것 이다.
나는 온몸이 옥죄이는 기분을 느끼며 슬쩍 시선을 피했다.
'젠장, 미리 연락을 했어야 했는 데......
폭탄을 막으며 개박살이 나고 사흘 동안 정신을 잃었다 일어나 보니 내 통신구는 고장이 나 있었 다. 기절하기 직전 아리아에게 연 락을 넣을 때만 해도 멀쩡했던 통 신구가 갑자기 고장 났다는 게 황 당해 수리공에게 이유를 물었을 땐 지극히 어이없는 답변이 되돌 아왔다.
'이거...... 동시다발적으로 너무 많은 연락이 와서 그랬던 것 같은 데요. 과부화를 견디지 못하고 자 폭한 모양입니다. 아이고, 특히 네 명은 하루에 연락을 몇백 통씩
했는데요. 이러니 망가지지...... 발신자가 디디, 엘, 르웰린, 레오. 혹시 빚쟁이들 이름인가요?'
네 사람 다 내가 미르임을 알았 으니, 그리 나올 법도 했다. 나라 도 친구가 폭탄을 막은 뒤 반죽음 상태로 사라졌다는 소문을 들으면 경악했을 테니까.
나는 하루에 천 번 넘는, 연락을 빙자한 괴롭힘을 견디다 못해 자 결해 버린 통신구를 향해 애도하 며 머리털을 뽑았다.
'이걸...... 뭐라고 말해야 하지?'
네 사람에게 연락은 해야 할 것 같은데 대체 뭐라고 해야 할지 감 이 잡히지 않았다. 나는 하루 종 일 새로 산 통신구를 잡고 심각하 게 고뇌했다.
'다쳐서 미안하다고 해? 뭐야, 좀 이상하잖아. 걱정시켜서 미안 하다고 해야 하나? 먼저 그런 걸 보내긴 좀 머쓱한데......
나는 이런 것에 정말 소질이 없 었다.
한참을 망설이던 나는, 결국 가 장 많은 연락을 보냈다는 엘에게 연락을 해 볼까 했으나 엘에게 직 접 보내기는 좀 쫄려서 우선은 엘 과 가장 가까운 율리안에게 연락 을 넣었다.
-......카, 슈미르 공녀님......?
통신구에 떠오른 율리안의 얼굴 은 도저히 잊히지 않을 만큼 강렬 했다.
며칠 밤을 샌 듯 끝을 모르고
내려온 다크서클이나, 특유의 장 난기 어린 눈빛이 사라진 피페한 연보랏빛 눈동자 같은 것들로 인 해 그의 얼굴은 초췌함을 넘어 죽 어가는 고라니 같았다.
-공녀님, 공녀님? 괜찮으세요? 살아 계신 거 맞죠? 무사하세요?
"오, 네...... 전 멀쩡합니다 만...... 율리안, 혹시 못 만난 사 이에 마수 토벌이라도 다녀왔습니 까?"
폭탄을 막고 초죽음 꼴이 됐었 던 나보다도 심각해 보이는 그의
안색에 도리어 걱정을 건네니, 율 리안은 울컥한 듯 코를 훌쩍이더 니 갑자기 울기 시작했다.
-커헉, 공녀님...... 커흑...... 저 진짜, 저 진짜 너무 힘들어서
"알았으니까 울지 말고 말해 보 십시오. 무슨 일입니까?"
최대한 다정하게 묻자, 율리안은 더 크게 울기 시작했다. 한바탕 위로하고 달래 준 끝에, 그가 입 을 열었다.
-엘리오르 그 새끼가, 눈 뒤집 어져서 크리시스 공작가에 쳐들어 가겠다는 걸 막느라 얼마나 힘들 었는지 아세요......? 진짜 신전 전 체가 달라붙어서 그 새끼 막느라 난리가 났었다구요......•
"그랬습니까......?"
-컥...... 제가 앞장서서 막으니 까, 그 새끼가 글쎄, 저를 감자밭 에 머리만 꺼내 놓고 세 시간 동 안 묻어 놨다구요! 나쁜 새끼 진 짜...... 공녀님이 싫어할 거란 말 로 겨우 막아는 뒀는데, 다음부터 자기를 가로막으면 대사제 지위 박탈시키고 악어 사육장 악어새로
취직시켜 버릴 거라고...... 따흐 흑!
고충을 토로하는 율리안은 하루 아침에 실직한 사람처럼 억울하고 서글퍼 보였다. 나는 그런 그를 애써 달래 주면서도 땀을 삐질 흘 릴 수밖에 없었다.
'엘이...... 그렇게까지 화나 있다 고?'
나는 화난 엘을 마주한 적이 한 번도 없었다.
내게 있어 엘은 한없이 상냥하 고 유한 사람이었다. 엘의 만행을 푸념처럼 늘어놓는 율리안으로 인 해 엘이 화가 나면 무척 무서운 사람이라는 건 알았지만, 그 화가 나를 향해 있다고 생각하니 섣불 리 연락을 할 수가 없었다.
'다른 사람들도 그렇게 화가 나 있을지도 모른다는 생각에 연락을 차일피일 미루다가 결국 아무한테 도 연락을 못 했지......
겁나도 눈 딱 감고 편지 한 통 이라도 보낼걸 그랬다.
나는 숨 막히게 풍겨 오는 엘의 기운에 침을 꿀꺽 삼켰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