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충직한 검이 되려 했는데-145화 (145/254)

145 화

일대에 깊은 침묵이 흘렀다.

술을 마시지 않고는 견딜 수 없 다는 듯 회의가 시작한 뒤로 연신 와인을 들이키던 엘도, 사람 목숨 을 거두기 전 저승사자처럼 웃고 있던 디에고도 표정이 진지해졌 다.

나는 말없이 시선을 교환하는 카이사르와 헬리오스를 보며 숨을

들이 쉬었다.

제국엔 세 마리의 용이 있었다. 황룡과 은룡, 그리고 흑룡.

황족과 신전 두 세력뿐만이 아 니라, 크리시스 공작가까지 합쳐 비등한 세 세력이 제국을 지키고 있음을 뜻했다.

그러나 왕홀을 쥔 황제와 교황 과는 달리, 크리시스 공작가는 그 입지가 애매했다.

공식적인 신분은 그저 귀족. 황

제와 교황은 귀족들을 거느릴 수 있는 것과 달리, 공작은 자기 이 름을 걸고 파벌을 만들지 못했다. '중립'이라는 이름을 묵묵히 지킬 뿐이었다.

'하지만 실질적으로는 황제, 교 황과 힘겨루기가 가능해.'

크리시스 공작가의 가장 큰 무 기는 바로 군사권이었다. 가문 대 대로 세습되어 내려오는 군 통솔 권과 거대한 검은 용 기사단. 이 힘은 단연 황제와 교황까지도 긴 장하게 만들었다.

'그런 크리시스에게 사병을 바칠 수 있느냐고 묻는 건, 온전히 충 성하고 있느냐고 묻는 거지.'

게다가 크리시스가 사병을 바치 면 다른 가문들은 크리시스의 눈 치를 봐서라도 자동적으로 바칠 수밖에 없었다. 나는 이 중요한 기로 가운데 힐끔 카이사르의 표 정을 살폈으나, 그는 속을 알 수 없는 낯으로 헬리오스를 마주하고 있을 뿐이었다.

'젠장. 여기서 말 잘못하면 망하

는 건데.'

카이사르가 가문을 말아먹을 멍 청한 인간은 아니지만, 그는 간혹 무척 충동적인 행동을 하곤 했으 니-물론 그가 수습할 수 있는 선 에서였다- 걱정이 되었다.

내 아버지인데도 작정하고 포커 페이스를 한 그의 표정은 읽을 수 가 없었기에 나까지도 카이사르의 대답을 기다리고 있던 찰나였다.

" 카슈미르."

"......네, 네?"

카이사르는 아주 뜬금없이 내 이름을 불러왔다. 나는 퍼뜩 놀라 말을 조금 더듬었다. 카이사르에 게 집중되어 있던 장내의 시선이 단번에 내게로 쏠렸다.

"너는 어떻게 생각하지?"

" 네?"

"황제 폐하의 질문에 대해서 말 이다."

내게로 시선을 돌린 카이사르가 턱을 괸 채 물었다.

'뭐지? 갑자기 나한테 왜 이러 는 거지? 카이사르가 답해야 하 는 거 아닌가? 변덕인가? 장난? 아니면 헬리오스한테 지능적으로 엿 먹이는 건가?

나는 고래 싸움에 낀 지나가던 상어의 기분을 느끼며 카이사르에 게 눈빛으로 해명을 요구했다. 내 다급한 신호를 읽었는지, 그는 입 을 열었다.

"이곳은 가주와 가주 후계자가 함께 얘기를 나누는 자리다."

"그렇습니다."

'그런데 왜 나를 부르는 건데.'

혹시 카이사르에게 기억력 이상 이 생겨 내가 가주나 가주 후계자 라고 착각을 하고 있는 건가 싶었 다.

내가 신 포도를 입에 한가득 넣 은 양 떨떠름한 표정을 짓고 있을 때, 카이사르가 씨익 웃었다.

"너는 가주 후계자가 아니냐. 그 러니 내 대신 답해도 되겠지"

" 우"

나는 내 귀를 의심했다.

현재 크리시스엔 무려 세 명의 장성한 자식이 있었다. 첫째는 세 기의 마법 천재 칼 크리시스요, 셋째는 천재 그 자체인 아리아 크 리시스다.

많은 이들은 장남인 칼이 후계 자라고 착각하곤 하지만 사실 크 리시스의 후계자는 아직 정해지지 않은 상태였다. 나는 태평하게 칼 과 아리아 중 하나가 될 거라고 생각하고 있었지만 말이다.

그런데 갑자기 후계자가 나란다.

그 순간 많은 생각이 오갔다. 어 느 날 식사 시간에 차기 가주 관 련 건이 대화 주제로 나와 서로 후계를 이으라고 논쟁하다 싸움이 불거졌던 모습. 갖기 싫은 폭탄을 서로에게 떠넘기기라도 하려는 양 죽일 듯이 싸우던 칼과 아리아.

자기는 마탑주가 될 거라며 으 르렁거리던 칼. 제대로 쉬지도 못 하는 공작 따위 카이사르 놈과 똑 닮은 너나 하라고 삿대질을 하던

아리아.

'......두 사람이 서로에게 공작 자리를 떠넘기려고 싸우다 가문을 건물 수리비로 말아먹는 꼴을 보 는 것보단, 차라리 내가 떠안는 게 낫긴 한데......

사실 나도 공작은 싫었다. 막중 한 책임감도, 바쁜 일도 피하고 싶었다. 전쟁이 끝나면 가난한 평 민 아이들을 모아 검술을 가르치 는 아카데미 스승 정도로 살아도 좋을 것 같았다. 정말 큰맘 먹어 도 검은 용 기사단 기사단장 정

도.

'그런데 갑자기 이렇게 나를 엿 먹인다고?'

하루아침에 제국의 고위층들 가 운데서 가주 후계자라는 독박을 쓰게 된 나는 번뜩이는 눈으로 카 이사르를 노려보았다. 내 대답을 기다리는 듯 태평하게 나를 바라 보는 카이사르를 보고 있자면 지 금 당장 대련하자고 검을 뽑고 싶 었다.

'우선. 우선 해명부터 해야 해.'

나는 다급했다. 이렇게 가주 후 계자로 낙인찍힐 수는 없었다. 헬 리오스를 휙 돌아보니, 아니나 다 를까. 심각한 흥미주의자인 그는 재밌어 죽겠다는 눈으로 날 바라 보고 있었다.

"이는 이전에 얘기된 상황이 아 니며, 공식적인 발표가 아니라 카 이사르 크리시스 공작님의 사견에 지나지 않습니다. 전 가주 후계자 가 아닙니다."

나는 헬리오스가 무어라 입을

털기 전에 쏟아내듯 후다닥 말했 다.

'여기서 헬리오스가 말을 하게 내버려 두면 나는 영락없이 가주 후계자로 낙인찍힌다.'

헬리오스는 나를 꽤 마음에 들 어 했다. 이전에 칼 대신 나를 불 러 디에고와 북부에 대해 논하게 한 것도 내가 가주 후계자로 적합 한 사람인지 확인하려 했던 게 분 명했다.

기싸움을 하던 헬리오스와 카이

사르가 함께 달려들어 나를 가주 후계자로 확정해 버릴지도 몰랐 다.

"저는 물론 결단코 가주 후계자 가 아니지만, 크리시스의 일원 자 격으로 의견을 말하자면......

나는 '결단코'에 힘을 주어 말하 며 카이사르와 눈을 맞추었다.

나를 온전히 담아내는 붉은 눈 은 내가 무얼 해도 받아 줄 수 있 다는 애정과 내 생각을 믿는다는 신뢰를 품고 있었다.

카이사르는 아무것도 모를 텐데. 내가 전생을 기억하고 있다는 것 도, 미래를 알고 있다는 것도 모 르는 그에게 있어서 나는 그저 19살짜리 어린애일 뿐일 텐데.

그를 보다 보면 가끔씩 어떻게 나를 저렇게까지 믿어 주는 걸까 하는 의문이 들곤 했다. 보통 사 람이라면 19살짜리 애가 큰일을 하겠다고 설치면 코웃음부터 칠 텐데 말이다.

속을 비치지 않는 깊은 붉음을

보고 있자면, 가끔은 그가 내 비 밀을 모두 알고 있는 게 아닌가 싶을 정도였다.

내가 카이사르의 속내를 모두 알 순 없다. 그가 나에 대해 어디 까지 파악하고 있는지도 가늠할 수 없었다. 그러니 내가 할 수 있 는 건 정해져 있었다.

"귀족들은 제국민들의 세금으로 현재의 부유한 생활을 누리고 있 고, 귀족의 의무는 제국민을 지키 는 것입니다. 제국의 안위를 위해 필요하다면 사병 또한 기꺼이 내

놓는 것이 맞겠죠."

그의 신뢰에 부흥하는 것. 그의 믿음과 기대가 틀리지 않았다는 것을 증명해 주는 것. 그가 열어 준 길을 따라 최선을 다해 가는 것. 그게 내 역할이었다.

'이렇게 대답해도 될까요, 아버 지.'

나는 또렷한 목소리로 대답하곤 카이사르를 힐끗 돌아보았다. 어 떤 무언의 강요도 없이 나를 물끄 러미 바라보고만 있던 카이사르가

입꼬리를 말아 올렸다. 다정한 눈 길이 잘했다고 말해 주는 것 같았 다.

"......크리시스 영애의 올곧음은 무섭군. 내가 잘못을 저지르면 반 역으로 끌어내려 버릴 것 같거 든."

날카로운 시선으로 나를 파헤치 듯 응시하던 헬리오스가 여느 때 처럼 능글맞게 눈꼬리를 휘었다.

'지금...... 귀족 자제한테 반역을 일으킬까 무섭다고 한 건가? 저

게 황제가 할 말인가?'

나는 입꼬리를 단단하게 굳힌 채 헬리오스를 껄끄러운 눈으로 바라보았다.

반역은 즉결 처형이 가능한 중 범죄다. 그는 내게 중범죄자의 싹 이 보인다는 소리를 한 것과 다름 이 없었다.

헬리오스의 아슬아슬 줄타기 논 법은 들어도, 들어도 적응이 되지 않았다.

내 눈에서 불순함을 읽은 건지, 헬리오스가 왕좌 손잡이를 팍팍 치며 깔깔 웃음을 터트렸다. 황제 가 아니라 자식의 재롱을 본 주책 아버지 같았다.

"하하! 얼굴 풀게! 진지해지기 는!"

나는 헬리오스가 황족들이 받는 무섭도록 철저한 예절교육을 받은 적이 있긴 한지 궁금해졌다.

웃을 수도, 화를 낼 수도 없는 상황에서 티베트여우 같은 표정을

짓고 있었을까, 헬리오스는 어느 새 웃음을 멈추고 상체를 숙인 채 턱을 깍지 낀 두 손 위에 얹었다.

"욕 아닐세. 칭찬이야."

짙푸른 눈동자가 나를 직시했다. 나는 그 눈과 마주하며 문득 카이 사르를 떠올렸다.

"제대로 안 하면 끌려 내려올지 도 모르지만, 반대로 제대로만 한 다면 그대는 늘 충성을 바친다는 거 아닌가."

이상한 일이다. 카이사르와는 정 반대의 색채에, 성격도 완전히 달 랐다.

살면서 한 번은 웃어 봤을까 싶 을 만큼 차가운 카이사르, 늘 실 실 웃고 있는 헬리오스.

검술엔 천재적이나 권모술수엔 치를 떠는 카이사르, 정치엔 도가 텄으나 무력은 미약한 헬리오스.

그럼에도 불구하고 나는 이 둘 이 비슷하게 느껴졌다.

헬리오스의 두 눈엔, 카이사르와 같이 나를 향한 신뢰가 담겨 있었 으니까.

'......성공했군.'

나는 살짝 입꼬리를 올렸다.

내가 바랐던 대로, 나는 황제의 신임을 받고 있었다. 온전한 신임 은 아니겠지만 적어도 의심을 받 고 있진 않았다.

"크리시스 공작. 카슈미르 영애 의 말을 크리시스의 공식적인 입

장으로 받아들여도 되나?"

"네. 저것이 크리시스의 입장입 니다."

카이사르가 단호히 대답했다. 사 전에 말도 없이 가주 후계자로 밀 어 넣은 건 용서가 되지 않지만, 첨언 한 마디 없이 내 말을 지지 해 주는 모습에 코끝이 조금 찡했 다.

"좋아. 크리시스와 아인하르트는 사병을 바친다고 하고, 다른 귀족 들은 자율로 바치게 흐I지. 자율로 말이야."

키프로스 백작의 신음 소리가 얼핏 들려왔다.

크리시스와 아인하르트는 각각 가진 사병의 규모가 1, 2위를 다 투었다. 이 둘이 사병을 바친다는 건 다른 가문들은 말만 자율일 뿐, 필수적으로 바쳐야 한다는 뜻 과 다르지 않았다. 사장이 휴일을 포기하고 근무하겠다는데 사원들 이 쉴 수 없는 것처럼 말이다.

'키프로스는 북부와 붙어먹을 예 정인데...... 자기 사병을 북부와

상대하기 위해 바친다는 게 웃기 는 일이지.'

난 웃음을 꾹 참고 거하게 자기 발을 내리찍게 생긴 하비스트 키 프로스를 슬쩍 바라보았다.

' 어랍쇼.'

나는, 호오, 하고 흥미롭게 숨소 리를 내뱉었다. 나를 매섭게 노려 보는 하비스트는, 마치 이 상황이 다 내 탓이라고 질책하는 것 같았 다.

미르뿐만 아니라 카슈미르도 키 프로스와 원수를 진 것 같지만, 상관없었다. 어차피 그는 박살 내 야 하는 적이었으니까.

"자. 그럼 사병에 관련해서는 이 렇게 결정을 내리도록 하지. 이제 사냥 대회에서 벌어졌던 사건과 북부의 관계성에 대해 이야기하려 하는데."

하비스트와 잠시 서늘하게 시선 을 교환하고 있었을까, 헬리오스 가 팔걸이를 탁 쳐 시선을 모았 다. 천천히 탁자 앞에 앉은 귀족

들을 하나하나 훑어본 그는 최종 적으로 나를 바라보았다.

"카슈미르 크리시스. 증언을 부 탁하지."

내가 오늘 이곳에 호출된 이유.

"네."

사냥 대회에서 벌어진 거대 마 수 사건에 대해 증언하기 위해서 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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