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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는 심호흡과 함께 목을 꽉 죄 는 보타이를 끌어 내리고 주머니 에 박아 넣었다. 예의에 어긋난 행동이었지만, 오지 않아도 되는 데도 증인으로 참석해 준 내게 예 를 지적할 사람은 없었기에 신경 쓰지 않았다.
'슈슈. 이건 어디까지나 참석을 바란다는 거지 필수로 참석해야 하는 것이 아니다. 이미 사냥 대
회 때 널 심문하지 않는 걸로 얘 기를 마쳤었다. 네가 원치 않는다 면 참석하지 않아도 된다.'
카이사르는 혹여 내가 부담을 느낄까 걱정되었는지 참석하지 않 아도 된다고 말했지만, 나는 단호 히 고개를 저으며 참석을 고집했 다.
'아무리 내가 전쟁에 나선다고 해도 나 혼자 전쟁을 마칠 순 없 어. 군사들 또한 준비되어 있어야 해.'
이를 위해선 제국이 북부에 대 한 경각심을 가져야 한다. 그러려 면 사냥 대회 거대 마수 사건의 주범이 북부임을 알게 해야 했다.
'그리고 고위층들이 내 존재에 대해 인식해야 하기도 하고.'
장내를 쭉 둘러보았다. 내게로 쏠린 시선에 머리털이 쭈뼛 섰으 나, 겉으론 한없이 당당한 낯을 가장했다.
나는 사교성이 좋지 않았다.
먼저 나서서 말을 붙이는 서글 서글한 성격인 것도, 사람들이 말 을 걸고 싶어 할 정도로 생김새가 사랑스러운 것도 아니었다.
하지만 나는 사람들 앞에 나서 는 것에 익숙해져야 했다. 싫다고 물러설 수 없었다.
'그래도 내겐 하나의 무기가 있 으니까.'
나는 자리에서 일어서 증인석을 향해 걸어가며, 옮기는 걸음마다 희미하게 마나를 방출했다. 쏟아
지던 시선들이 이전보다 짙어지는 것을 느꼈다.
마나를 극한까지 활용하는 소드 마스터, 대마법사 같은 이들에겐 자연에서 태어난 것은 그 무엇이 든 끌어당기는 힘이 있었다.
매력과 비슷하나 좀 더 강렬하 고, 카리스마와 결이 같지만 그보 다도 본질적인 것.
사람의 시선을 잡고, 집중할 수 밖에 없게 만드는 분위기.
"카슈미르 도레마 드 카이사르 크리시스, 증인으로 출석했습니 다."
나는 제국의 주축들 앞에서 위 축되지 않고 씨익 웃었다.
'그러고 보니 제국 공식 소드 마 스터 세 명이 이렇게 모인 건 처 음이지 않나.'
붉은 검귀, 금빛 정의, 검은 재 앙. 단 셋뿐인 제국의 공식 소드 마스터들이 한자리에 있었다.
나는 두 소드 마스터의 기운으 로 인해 마음 한편에 타오르기 시 작한 묘한 흥분을 억눌렀다.
만약 우리 셋 중 하나라도 존재 감을 통제하지 않았다면 여기서 머리를 들고 있을 수 있는 사람은 엘 말곤 없었을 것이다.
'하지만 노아라면 내 기세를 어 느 정도 느꼈겠지.'
동족은 동족을 알아본다. 아마 그는 내가 조금 전 마나를 운용한 시점에서 이질감을 느꼈을 것이
다.
노아를 슬쩍 곁눈질하자, 아니나 다를까, 나를 응시하는 황금빛 두 눈이 경계와 흥미로 뒤섞여 반짝 이고 있었다. 나를 담을 때면 늘 부드럽고 따스하던 라이너의 눈과 생긴 건 거의 똑같지만 담긴 연륜 과 감정은 사뭇 달랐다.
'노아는 사냥 대회 때부터 나를 눈여겨봤지.'
사냥 대회 날, 어마어마한 양의 사냥감을 들고 나타난 나를 보던
그의 눈빛을 아직 잊지 않았다. 노아라면 직접 드러내기도 전에 내가 미르임을 눈치챌 것 같다는 생각이 들었다.
'하지만 그걸 눈치챘다 해도 함 부로 입을 놀리진 않겠지. 그리고 지금 시점에서 크리시스의 공녀가 미르라고 떠들어 봤자 미쳤다는 소리만 들을 테니까.'
나는 노아가 얼마나 신중하고 입이 무거운지 알았다. 크게 걱정 이 들진 않았다.
"이제 증인의 맹세를 진행할 차 례군."
헬리오스가 말문을 떼며 증인석 옆에서 대기하고 있던 대신관에게 눈짓했다. 대신관은 사람들을 향 해 허리를 깊게 숙이곤 내게로 다 가왔다.
제국의 법정에선 증언을 하기에 앞서, 신관 앞에서 진리의 맹세를 해야 했다. 신관의 신성력을 빌려 맹세하게 되면 거짓을 말하는 즉 시 거부반응이 일어나 진위 여부 를 알 수 있었다.
'거짓말을 하면 잠시 몸이 굳을 거라고 했지.'
"맹세를 집행하겠습니다."
나이가 꽤 지긋해 보이는 대신 관이 내 앞에 서서 눈짓으로 내게 양해를 구했다. 내가 소매를 걷 고, 대신관의 손이 내 손목에 닿 으려 할 때였다.
" 잠깐."
아침 이슬이 맺힌 잎사귀처럼
매끄럽고 청명한 목소리가 장내를 울렸다. 단 한 마디로 모든 이목 을 사로잡는 매혹적인 목소리.
나는 목소리의 주인에게로 시선 을 돌렸다.
붉은 와인으로 번들거리는 입술 이 샹들리에의 빛을 받아 석류 알 처럼 반짝였다. 가장 신성하고, 고귀하다 여겨지는 긴 연하늘색 머리칼이 새하얀 상아 팔걸이 위 로 물줄기처럼 흘러내렸다. 유리 알처럼 빛나는 은색 눈동자는 빛 자체를 담아 놓은 것 같았다.
이 엄숙한 자리에서 가장 편안 히 앉아 있는 이. 이곳의 주인.
"맹세는 내가 집행하도록 하지."
입술에 묻은 와인을 손등으로 쓱 닦아낸 엘리오르 라가 나를 똑 바로 바라보았다.
지그문트가 확연한 어둠 아래에 있는 것 같은 퇴폐적인 분위기를 풍긴다면, 엘은 분명 빛 위에 있 으면서도 아슬아슬하고 관능적이 었다. 엘이 아무리 천사 같은 웃
음을 지어도 그와 눈을 맞추면 금 방이라도 잡아먹힐 듯 아찔한 기 분을 감출 수 없었다.
'웃어도 그 정돈데, 무표정이니 까......
섬뜩 소름이 돋은 목덜미를 매 만졌다.
무표정인 엘은 내게 어색했고, 조각같이 아름다웠으며, 동시에 내 본능이 경종을 울릴 정도로 위 험해 보였다.
"......교황. 괜찮겠습니까?"
엘이 나서자 놀란 표정을 짓던 헬리오스가 엘에게 조심스럽게 물 었다.
'헬리오스가 존댓말을? 그것도 조심스럽게?'
봐서는 안 될 것을 본 것 같았 다. 나는 경악을 숨기지 못했다.
존댓말을 사용하는 헬리오스라 니.
너무 어울리지 않았다. 교황과 황제는 같은 계급이기 때문에 존 대를 사용하는 것이 맞다는 걸 알 지만, 이렇게 직접 보니 세상의 이치에 맞지 않는 무언가를 본 것 만 같았다.
'엘, 교황이지.'
워낙 가까운 친구로 지내다 보 니 잊고 있다 또 새삼스럽게 자각 을 했다. 내 친구 엘은, 제 위에 신이 아닌 그 무엇도 두지 않는 태양신전의 주인이라는 것을.
종교는 사람의 마음을 사로잡고, 태양신교에 있어 교황은 신의 사 자다. 정치를 사로잡는 건 황제일 지 몰라도 제국민들의 마음을 붙 잡고 있는 건 교황이었다.
'사실 신전에서 이루어지는 대귀 족 회의를 교황이 아닌 황제가 진 행한다는 것도...... 교황의 힘이 약해서가 아니라 교황의 말의 무 게가 너무 무겁기 때문이지.'
교황은 신의 사자. 교황의 입은 신의 말씀을 전하는 입이다.
진행할 자격이 없어서가 아니라, 대귀족 회의조차 교황이 나설 만 큼 대단한 일이 아니라 여겨지기 때문이었다.
"네. 내가 하죠."
엘이 자리에서 일어났다. 취한 것 같진 않았지만, 그가 가까워질 수록 더 강하게 풍겨 오는 와인 향은 고혹적이었다.
"서, 성하......
엘이 내 앞에 우뚝 서자 내 옆
에 있던 늙은 대신관이 입을 떡 벌린 채 굳어 버렸다. 거의 혼절 하기 직전의 기색으로 창백하게 질려 있는 것이, 길 가다 악마라 도 만나서 봉변을 당한 사람 같았 다.
"성하께서, 하실 필요는......
"내가 한다고 했을 텐데."
안쓰러울 정도로 떠는 대신관의 말허리를 거침없이 끊은 엘이 고 개를 기울이며 나긋하게 말했다. 그의 입가엔 천사 같은 미소가 걸 려 있었다.
'......화 안 났나?'
여느 때와 같은 미소에 고개를 갸웃하는데, 내 옆에 있던 대신관 이 허억 하고 숨을 들이쉬었다. 대신관은 초식하는 사자라도 본 것처럼 경악하고 있었다.
"성하께서 이리 친히 나서 주실 필요는 없습니다. 제게 과분한걸 요."
왜 저렇게 질렸는지는 모르지만 대신관이 안쓰러워진 나는 친근한
투로 넌지시 말했다. 왜인지 내 대답에 더는 커질 수 없을 것처럼 크게 뜨고 있던 눈을 더 크게 뜬 대신관이 금방이라도 쓰러질 것처 럼 비틀거렸다.
"......카슈미르는 내가 아닌 다 른 이에게 맹세할 생각인 건가 요?"
내 말을 들은 엘의 표정이 살짝 굳었다. 은빛 눈동자가 깊게 가라 앉고, 안 그래도 순하던 눈매가 더 축 늘어졌다. 아무래도 시무룩 해진 듯했다.
"아뇨. 그게 아니라, 성하께서 번거로우실까 봐 말입니다. 성하 의 일이 아니잖습니까."
나는 고개를 저으며 황급히 변 명했다. 내 대답에 푹 숙였던 고 개를 휙 든 엘이 나를 보며 눈꼬 리를 휘었다.
"내가 싫은 게 아닌 거죠?"
나는 그 말에 엘에게 경계를 세 우던 날들이 생각나 피식 웃었다.
"그럴 리가 있겠습니까."
"좋아요. 그럼 이제...... 자네는 비키지 그런가."
엘이 대신관을 바라보며 싱긋 웃었다. 활짝 핀 백합처럼 아름다 운 웃음이었다.
"헉, 네, 네!"
그 웃음을 앞에 두고 귀신이라 도 본 것처럼 안색이 새파래진 대 신관이 고개를 몇 번이고 끄덕이 곤 황급히 도망갔다.
"그럼 맹세를 집행하도록 할까 요."
유하게 눈을 휜 엘이 장내를 바 라보았다. 그를 따라 사람들에게 로 시선을 돌린 나는, 그제야 모 든 사람들이 나와 엘을 커진 눈으 로 보고 있다는 것을 알았다. 심 지어 헬리오스조차도 나와 엘을 번갈아 보며 믿기지 않는다는 표 정을 짓고 있었다.
"......지을 수 있는 표정이 사람 피 말려 죽이는 표정이랑 나가 죽 으라는 표정밖에 없다고 생각했는
데."
헬리오스의 아주 희미한 속닥거 림이 내 귀에 꽂혔다. 거의 입을 뻐끔거리기만 한 수준에 가까웠으 나, 내 귀엔 확실히 들렸다.
"카슈미르. 손을."
내가 더 생각을 이어가기 전에 엘이 내게 손을 내밀었다. 나는 재빨리 그에게 손을 뻗었다. 따뜻 한 온기를 품은 엘의 손이 내 손 목을 살며시 붙잡았다.
'......슈슈. 처리해 주랴?'
그때 갑작스럽게 머릿속을 울리 는 전언에 나는 고개를 들었다. 카이사르가 금방이라도 오러를 날 릴 듯한 눈으로 이곳을 바라보고 있었다. 나는 어리둥절해서 고개 를 기울였다.
'아뇨. 괜찮은데......
"슈슈. 집중."
내가 다른 곳을 보자 엘이 속삭 였다. 그제야 그에게로 시선을 맞
추자, 만족스럽게 웃은 그가 입술 을 열었다.
"그대, 진리 아래서 자유하라."
은빛 원이 내 손목 위에서 한 바퀴를 돌고 피부로 스며들었다.
'••••••이건?'
몸을 타고 오르는 부드러운 느 낌.
미간을 좁히는데, 엘이 말을 이 었다.
"죽음에 이르게 될지라도 진실 하라."
엘은 은색 눈동자를 내게로 맞 춘 채 눈꼬리를 휘었다.
"태양 아래 진리는 영원히 빛바 래지 않으리."
엘의 손에서 빛이 터져 나오고, 이내 잠잠해졌다. 나는 의식이 끝 난 게 분명함에도 여전히 내 손을 잡고 있는 엘을 묘한 표정으로 바 라보다 살짝 손을 움직여 그의 손
에 글자를 적었다.
[이거 맹세 아니지 않습니까.]
나는 신성력이 없었지만, 엘에게 여러 번 치유를 받고 맹세 또한 하다 보니 어느 정도 분별은 가능 했다.
'방금 전 엘이 한 건 맹세가 아 니라 치유인데.'
맹세는 특유의 꽉 조이는 느낌 이 있는데, 방금 전엔 신성력이 몸을 부드럽게 감싸고 치유하는
느낌만 들었다.
해명을 바라는 눈으로 엘을 올 려다보니 그가 나직하게 웃곤 마 찬가지로 손가락을 움직였다.
[내가 당신에게 해를 가하는 맹 세를 어떻게 집행해요.]
손가락에 간지럽혀진 손바닥에 살짝 열이 올랐다. 내가 눈을 깜 빡이며 엘을 바라보고 있자니, 그 가 속삭였다.
"회의 끝나고 나면 신전에 남아
있어요. 같이 있고 싶으니까. 오 랫동안 나를 걱정시켰으니 이 정 도는 해 줄 거죠."
물음이 아니라 확신이 어린 투 였다. 나를 하염없이 응시하는 은 빛 눈에 나도 모르게 고개를 끄덕 이자, 엘이 만족스럽게 웃으며 내 팔목을 놓아주었다.
저벅저벅.
"자. 그럼 이제 증언을 들어 볼 까요."
털썩.
쏟아지는 시선 가운데 당당하게 홀을 가로질러 다시금 편하게 앉 은 엘이 턱을 괸 채 웃었다.
나를 똑바로 바라보는 시선이 한없이 깊고 짙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