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47 화
"사냥 대회 이튿날, 저는 아인하 르트 소후작과 2황자 저하, 그리 고 아타라 사절단의 레오 블루벨 백작과 함께 바실리스크를 마주했 습니다."
나는 사냥 대회 첫째 날 이야기 는 건너뛰고 차분히 말을 이었다. 조금 전까지 긴장했던 것이 무색 하게도, 말을 시작하니 머릿속이 놀랍도록 차가워졌다.
'하라바나에 대해선 굳이 말할 필요 없겠지.'
나는 바실리스크에게서 살아남 았다는 것만으로도 제국에 새로운 불가사의를 만들어 냈다. 내가 하 라바나까지 상대했음이 알려지면 나는 정체불명의 금강불괴로 여겨 질 것 같았기에, 하라바나에 대해 선 나와 라이너, 가족들만의 비밀 로 남겨 두기로 했다.
"그 상황에서 넷이 몰려 있는 건 오히려 위험하다고 생각했기
에, 상황을 알리기 위해 소후작과 황자 저하를 보내고 저와 블루벨 백작이 바실리스크를 상대했습니 다."
레오 블루벨. 알렉산드로가 제국 으로 오며 사용한 가짜 신분이었 다. 이곳은 대귀족 회의인 만큼 모두가 '레오 블루벨'이 국왕 '알 렉산드로 아타라'라는 것을 알 테 지만, 공식적으로는 비밀이었기에 가명으로 칭해야 했다.
"바실리스크는 제게 관심이 없 었고, 오직 블루벨 백작만을 노렸
습니다. 제가 공격을 해도 제겐 시선도 주지 않더군요. 저는 그 부분에서 이상함을 느꼈습니다."
증인인 이상 본 상황만 얘기해 야겠지만 나는 북부의 최종 병기 에 대해 전해 줘야 했기에 내 의 견을 섞어 말했다.
나는 눈을 번뜩였다.
"분명 마수는 이지와 분별이 없 을 텐데, 어째서 나를 내버려두고 블벨 백작만 쫓았을까? 애초에, 마수가 어떻게 이곳에 왔을까?"
노아가 심각하게 표정을 굳혔다. 엘이 눈썹을 꿈틀거리고, 헬리오 스의 두 눈이 가늘어졌다. 내게서 사냥 대회 사건에 대한 자세한 전 말을 듣지 못했던 카이사르 또한 다른 사람들만큼이나 내 말에 집 중하고 있었다.
마수는 눈앞에 있는 모든 것을 먹잇감으로 생각한다. 먹을 것을 가려 먹는 인간과는 달리, 마수는 살만 있다면 죽은 것이든 산 것이 든, 큰 것이든 작은 것이든 집어 삼키고 보았다.
그런 마수가 명령이라도 받은 것처럼 한 사람만 쫓아 움직였다 는 건 기묘한 일이었다.
거대 마수가 숲에 등장한 것부 터가 말이 되지 않는다. 사냥 대 회가 진행된 곳은 철저하게 검증 을 마친, 마수가 출몰하지 않는 숲. 그런 숲에서 개체수가 극히 적고 극동 지방에서만 사는 바실 리스크가 나타났다는 것은 우연으 로 치부하기 힘들었다.
'누군가 거대 마수를 움직여 사
냥 대회를 뒤엎고 아타라의 국왕 을 죽이려 했다.'
타당한 결론은 쉽게 내려졌지만, 어떻게 했느냐가 문제였다.
바실리스크를 제압시키고 마차 에 태워서 운반한 것도 아닐 터. 바실리스크가 제 발로 사냥 대회 가 벌어지는 숲에 오게 한 방법이 문제였다.
아마 모두들 이 사건이 북부로 인해 발생했음을 지레짐작하고 있 으나, 방법에 대한 의문을 품고
있었을 것이다. 나는 그 부분을 확실히 풀어 주고자 했다.
모두가 내 다음 말을 기다리고 있을 때.
나는 힐끔 시선을 굴려 키프로 스 쪽을 살폈다. 그리고 속으로 피식 웃었다.
불안으로 점철되어 혼들리는 키 프로스 부자의 눈은 내게 만족감 을 안겨 주었다.
마수 테이밍은 북부의 비밀 무
기였다. 북부는 제국의 방심을 틈 타 마수로 허를 찌를 계획을 가지 고 있었으니 테이밍 사실이 여기 서 밝혀져선 안 됐다.
물론 나는 북부와 키프로스의 계획대로 흘러가게 내버려 둘 생 각이 없었다.
"아무래도 상당히 수상했기에, 차후 조사에 도움이 되었으면 해 서......
여유롭게 말끝을 끌며 주머니를 뒤적였다. 증언 중 해선 안 되는
행동이었으나, 그 누구도 지적하 지 않은 채 내 다음 행동을 기다 리고 있었다.
'내가 이 시간을 얼마나 기다려 왔는지 모를 거다.'
나는 씨익 웃으며 주머니에서 오랫동안 묵혀 왔던 그것을 꺼냈 다.
"저는 바실리스크의 심장을 채 취해 두었습니다."
생물을 가장 온전한 상태로 보
관할 수 있는 유리 상자.
그 안에 든 것은 기이하고 흉측 한 형태의 어두운 보랏빛 살덩이, 다시 말하자면 바실리스크의 심장 이었다.
"뭐라고......r
"정말인가!"
노아가 벌떡 자리를 벅차고 일 어나고, 눈을 크게 뜬 헬리오스가 답지 않게 언성을 높였다.
바실리스크의 사체는 이후 혼적
도 없이 산화되어 버렸고 결계 또 한 그저 사라져 버렸기에, 사냥 대회 사건에선 사실상 조사할 거 리조차 없었다. 남은 것이 없었으 니까.
그러니 내가 가지고 있던 바실 리스크의 심장은 그 사건의 유일 하다시피 한 단서였다. 가치가 있 음이 분명했다.
"자, 잠깐! 그게 진짜 바실리스 크의 심장인지 어떻게 증명할 수 있는가! 그대가, 어떻게든 업적을 세우기 위해 아무 짐승의 심장이
나 가져왔을지도 모르는 거 아닌 가!"
그때 듣기 싫을 정도로 갈라진 목소리가 다급하게 끼어들었다.
나는 목에 핏대까지 세운 채 불 안을 감추지 못하는 하비스트 키 프로스를 보며 서늘하게 낯을 굳 혔다. 얼마나 당황한 건지, 무턱 대고 아무 말이나 뱉어 나를 저지 하려는 것 같았다.
"저는 시작하기 전에 거짓을 말 하지 않겠다고 맹세했습니다. 바
실리스크의 심장인지는 수사관들 이 조사해 보면 확실해지겠죠."
"오, 오래전에 죽은 마수의 심장 이 뭐라고! 한낱 시체의 부산물일 뿐인데......!"
"아뇨. 이건 단서조차 없던 사건 에 유일하게 남은 혼적 아닙니 까? 또 모르지 않습니까."
감정을 통제하려 애쓰지만 동요 하고 있는 게 뻔히 보이는 백작의 얼굴을 향해 비죽 입꼬리를 비틀 었다.
"이 심장에서, 마수를 조종할 수
있는 약물 같은 것이 검출될지."
백작의 표정이 삽시간에 굳었다. 하비스트는 내가 갑작스럽게 닥쳐 온 대재앙이라도 되는 양 원망스 럽고 살기등등하게 나를 노려보고 있었다.
"......확실히, 지금으로서는 그것 이 그때 그 바실리스크의 심장인 지는 확인하기 어렵네. '북부가 사냥 대회 사건의 주범인가'라는 현 안건의 증거물인지도 확신할 수 없고."
조금 전의 흥분한 기색을 정리 한 헬리오스가 나와 하비스트의 말씨름을 끊고 모든 추론과 짐작 을 제거한 채로 말했다. 그의 두 눈은 회의적인 말투와는 상반되게 무섭도록 번뜩이고 있었지만 말이 다.
"하지만 조사할 가치가 있다는 것만은 확실하지 않습니까."
내겐 무척 익숙한, 잔잔한 바다 에 파도가 너울거리듯 침착하고 부드러운 목소리.
여태껏 말이 없던 디에고가 끼 어들어 단호하게 말했다. 나를 바 라보는 그의 눈동자가 자랑스럽다 는 빛을 띠고 있었다.
'역시 그대는 내가 인정한 사람 이야.'
디에고의 두 눈은 내게 그렇게 말하는 것 같았다.
믿을 만한 이에게 받는 신뢰는 언제고 달갑다. 나는 달아오른 목 덜미를 살짝 매만지며 파란이 일 어난 장내를 느리게 훑었다. 이내
내 시선이 닿은 곳은 명확했다.
"교황 성하."
내 부름에 또다시 시선이 집중 되었다. 여전히 나만을 시선에 담 던 엘이 활짝 핀 백합보다 아름답 게 웃었다. 옆에서 물로 목을 축 이던 헬리오스는 엘을 보더니 사 레가 들린 듯 크게 기침을 터트렸 다.
"네, 카슈미르."
꿀을 입술에 바른 듯 달짝지근
한 목소리. 당장 이 태양 신전을 달라고 해도 주저 없이 내 손에 신전 열쇠를 쥐여 줄 것 같은 맹 목적인 눈빛.
나는 그를 향해 유리 상자를 내 밀어 보였다.
"송구합니다만, 이걸 한 번만 받 아 주실 수 있겠습니까?"
"물론이죠."
뜬금없는 요청에 장내가 다시금 술렁였다. 엘은 갑작스러운 요청 에도 한 치의 망설임이나 거리낌
없이 빠르게 수락했다. 내가 말을 마치기도 전에 대답한 수준이었 다.
"이걸 성하께 전해 드리겠나?"
나는 내 옆에서 대기하고 있던 하인에게 유리 상자를 건넸다. 상 자를 건네받은 하인이 엘에게로 조심스럽게 발걸음을 옮겼다.
"왜 그걸 성하께 드리는 건가?"
불타는 눈으로 상황을 지켜보던 노아 아인하르트가 물었다. 나는
자신만만하게 웃었다.
"아마 성하께서 답해 주실 겁니 다."
유리 상자가 엘의 손에 들어갔 다. 상자를 손에 쥐는 동시에 가 늘어지는 그의 눈. 찡그려지는 미 간. 불쾌함을 여실히 드러내는 반 응.
"성하. 무엇이 느껴지는지 말씀 해 주실 수 있으십니까?"
상자를 한 번 만지고는 더러운
오물이라도 되는 양 자신의 옆에 위치한 탁자에 빠르게 내버려둔 엘이 느리게 입을 열었다. 그의 입은 웃고 있었으나 은빛 눈은 시 리게 번뜩이고 있었다.
"이번 건국 기념일 테러에서 사 용된 건 분명 흑마법으로 만들어 진 마력 폭탄이었죠."
흑마법은 자연을 거스른 저주받 은 주술. 신성력은 신에게서 온 가장 축복받은 힘.
신성력을 사용하는 이들은 흑마
법에 대해 본능적인 거부감을 느 꼈다. 신성력이 극도로 발달한 엘 이라면 더더욱 그럴 것이다.
"마력 폭탄에서 느껴지던 그 역 한 흑마법의 기운이 이곳에서도 느껴지네요."
바실리스크가 자신이 지나는 곳 에 존재하던 식물들의 생명을 모 조리 흡수하는 것으로 자신의 혼 적을 남기듯, 북부의 손길이 닿은 곳엔 흑마법의 기운이 흔적으로 남았다.
"제 생각에, 북부는 흑마법으로 마수를 조종하는 방법을 터득한 것 같습니다."
나는 증인의 자리에 서서 아주 뻔뻔히, 한 치의 흔들림도 없이 내의견을 말했다.
전쟁 앞에서 안일하게 굴던 제 국 위로 북풍이 몰아쳤다.
" A AI " I r I r!
증인으로서의 일을 마치고 심각 한 분위기의 홀에서 나온 나와 신 관이 가져다준 슈가볼 쿠키를 우 물거리고 있었을까, 가장 먼저 문 을 박차고 나온 것은 카이사르였 다.
나는 내 애칭을 부르는 우레 같 은 목소리에 크게 움찔하며 입가 에 묻은 하얀 가루를 황급히 닦아 냈다.
"그런 큰 사실을, 알고 있었다 면, 내게도 말해 주지 그랬느냐."
카이사르는 흉흉한 기세를 애써 억누르며 마디마디에 힘을 주어 말했다. 나는 크게 뜬 눈을 끔뻑 이다 죄인처럼 고개를 떨구었다.
하기야, 카이사르 입장에선 화가 날 법도 하다. 다른 사람도 아닌 자기 딸이 중요한 사실을 알고 있 으면서 말해 주지 않다가 공식적 인 석상에서 발표하는 것을 통해 들었으니 말이다.
"......죄송합니다. 다음부턴 중요 한 사실을 알게 되면 꼭 공유하도 록 하겠습니다."
불효자식이 되어 쭈그러져 있었 을까, 앞머리를 거칠게 쓸어 넘긴 카이사르가 한숨을 쉬었다.
"......정보를 공유받지 못해서 화가 난 게 아니라 네가 심각한 사안을 두고서 나와 의견을 나누 거나 도움을 받을 생각이 없었다 는 게 속상한 것이다."
카이사르는 조금 전보다 더 누 그러진 목소리로 말하며 내 머리 를 쓰다듬었다. 머리를 짓누르다 시피 쓰다듬던 이전과는 다르게
능숙해진 손길이 기분 좋아 살짝 눈을 감았다.
"다음부턴 공유해 주거라. 나는 네가 무거운 진실을 혼자 지고 가 는 것이 싫단 말이다."
카이사르가 한숨처럼 속삭이며 나를 제 품으로 끌었다. 과묵하고 말하는 방법을 모르던 그가 솔직 히 제 마음을 말하게 된 것은 크 나큰 변화였다.
'나도 달라져야겠지만......
나 또한 처음과 비교하면 많이 바뀌었지만, 아직도 혼자서 모든 것을 처리하는 생활양식을 송두리 째 바꾸진 못했다. 하루 이틀 쌓 인 습관이 아니었음에.
'조금만, 조금만 더 혼자 하다 가, 당신께 공유할게요.'
아직은 혼자 해야 할 일이 조금 남았음에 마음속으로 카이사르에 게 사과를 건네며, 나는 그의 품 안에서 느릿하게 고개를 끄덕였 다.
내 마음을 알아챈 걸까, 카이사 르는 만족스럽지 않다는 눈으로 나를 바라보았으나 무어라 더 첨 언하지 않았다. 나는 그곳에서 내 게 부담을 주지 않으려는 그의 배 려를 읽었다.
그것이 좋아 배시시 웃으니, 카 이사르는 어쩔 수 없다는 듯 웃으 며 내 어깨에 팔을 둘렀다. 이젠 익숙해진 스킨십은 가슴을 몽글몽 글하게 했다.
"오늘 수고가 많았다. 이만
덜컥.
카이사르가 하던 말을 우뚝 멈 췄다. 그의 표정이 이루 말할 수 없을 만큼 서늘해졌다.
나는 등 뒤에서 느껴지는 익숙 한 인기척을 향해 반가운 마음 반, 미안한 마음 반으로 고개를 돌렸다.
"카슈미르. 잠시 시간을 내줄 수 있겠나?"
맑은 기운을 보이는 보통 때와 는 다르게 조금 무겁게 가라앉은 목소리. 눈이 부시도록 반짝이는 황금빛 머리칼과 우수에 젖은 푸 른 눈.
"......황태자 저하."
디에고 솔라티네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