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충직한 검이 되려 했는데-148화 (148/25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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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황태자 저......

"무슨 일이십니까, 저하."

내가 대답하려 할 때, 카이사르 가 불쑥 튀어나와 나를 제 뒤로 숨기곤 대신 대답했다. 꾹 누르고 는 있는 것 같았지만 그에게서 은 은히 뿜어져 나오기 시작한 살기 를 내가 느끼지 못할 리 없었다.

"내 카슈미르와 잠시 나눌 얘기

가 있어서 말이네."

살기등등한 소드 마스터를 눈앞 에 두고서도 디에고는 낯빛도 변 하지 않은 채 태연하게 말을 이었 다. 그의 정신력이 얼마나 강한지 말해 주는 부분이었다.

'살기 죽이세요.'

디에고가 아무렇지 않아 한다고 해도, 황족 앞에서 살기를 보이는 것 자체가 반역죄로 여겨질 수 있 었다. 카이사르의 옆구리를 쿡쿡 찌르고 전언을 보내자, 나를 힐끔

본 카이사르가 입술을 지그시 물 며 살기를 거두었다.

"슈슈는 아직 몸이 좋지 않아서 말입니다. 오늘도 너무 오래 나와 있어서 두통을 호소하더군요. 어 서 가봐야 할 것 같습니다."

지금 당장 뒤구르기를 하며 신 전 한 바퀴를 돌 수 있는 나는, 비 온 뒤 하늘처럼 맑고 깨끗한 머리를 매만지며 눈을 깜빡였다. 디에고는 지나치게 멀쩡해 보이는 나를 곁눈질하곤 짜게 식은 눈빛 을 했다.

"공녀 본인에게 물으면 다른 대 답이 돌아올 것 같네만."

"그래도 슈슈가 몸을 회복한 지 얼마 되지 않았다는 사실은 변하 지 않습니다."

"나는 공녀의 의견을 물었네. 공 작의 의견이 아니라."

카이사르는 디에고의 반문에도 뻔뻔하게 버티며 어서 가라는 눈 빛을 보냈다. 뼈 마디마디가 시릴 정도로 차가운 카이사르의 눈빛에 도 끄떡하지 않고 마주하는 디에 고도 참 보통이 아니었다.

"아버지. 저는 괜찮습니다. 저하 와 잠시 얘기를 나누어야 할 것 같군요."

카이사르의 눈이 번뜩거렸다. 할 말이 많아 보이는 표정으로 나를 바라보는 카이사르와 정반대로, 디에고는 승리자의 미소를 입에 걸고 있었다.

"이런. 공녀는 공작과 의견이 다 르군."

"......제 딸아이가 너무 착해 저 하의 요청을 거절하지 못하는 것

뿐입니다."

이를 악문 카이사르는 씹어 먹 어 버리고 싶다는 눈빛으로 디에 고를 바라보았다.

나는 검 손잡이를 잡은 카이사 르의 손을 불안하게 바라보다, 그 가 검을 뽑기 전에 둘 사이를 막 아섰다.

"저하와는 얘기를 나눠야 하는 부분이 있습니다. 저하와 대화를 마치고 알아서 돌아가도록 하겠습 니다. 먼저 들어가시죠."

나는 카이사르를 향해 부드럽게 웃어 보였다. 카이사르는 여전히 불만족스러운 기색이었지만 나를 막진 않았다. 그 또한 내가 디에 고와 얼마나 친한지 알고 있었다.

"걱정 말라고. 귀하의 따님은 내 책임지고 바래다 줄 테니."

"제 딸은 저하의 보호를 필요로 하지 않습니다."

"알아. 내가 보호받으려고 함께 가는 거네."

"황궁과 공작가는 반대 방향입 니다만."

"그랬나? 그럼 간 김에 공작가 에서 하룻밤 묵으면 되겠군. 밤은 위험하니까."

"지금 제 딸과 밤까지 함께 있 겠다는 소리를 하시는 겁니까? 장난하십니까?"

농담인지 진담인지 모를 투로 능글거리는 디에고. 오만불손함의 마지노선을 아슬아슬하게 넘나드 는 카이사르.

두 사람이 서로를 노려보았다. 시선이 맞부딪치는 사이로 스파크 가 튈 것만 같았다.

"먼저 들어가세요, 아버지. 늦게 들어가진 않을 겁니다."

난 속으로 한숨을 쉬며 카이사 르에게 말했다. 카이사르는 나를 빤히 바라보더니 입술을 꾹 물곤 고개를 돌렸다. 저건 섭섭하다는 그만의 표현이었다.

"먼저 가보겠습니다."

카이사르가 몸을 돌려 성큼성큼 떠났다. 황태자가 인사를 받아 주 지도 않았는데 훌쩍 떠나버리는

카이사르의 행동은 무례한 것이었 으나, 나는 그가 인사를 했다는 것만으로도 대단히 스스로를 억누 르고 있는 것임을 알았다.

'카이사르가 디에고를 인정하긴 하니까.'

카이사르는 개인적으로 디에고 를 좋아하지 않았다. 성향이 워낙 상극이기도 했고, 나와 친하다는 점에서 불만이 있는 것 같았다.

'디에고 솔라티네가 군주의 자질 을 가지고 태어났음은 분명하다.

애송이는 아니더군. 조금의 시간 만 허락된다면 디에고 솔라티네는 현 황제보다 훨씬 대단한 군주로 성장할 거다.'

그렇지만 사감과는 별개로, 카이 사르는 디에고를 상당히 높게 평 가하고 있었다. 사람에 대한 좋은 평가가 상당히 짠 카이사르로서 그 정도 칭찬이라면 극찬과 다를 바 없었다.

"카슈미르."

잠시 생각에 빠져 있을 때, 다정

한 목소리가 나를 불렀다. 나는 목소리가 들린 쪽으로 고개를 돌 렸다.

"이제 잠시 그대를 내게 허락해 주겠나."

여기까지 오느라 힘들었다는 듯, 디에고가 힘없이 웃었다. 그 웃음 에 괜스레 마음이 아파진 나는 강 하게 고개를 끄덕였다.

나는 디에고의 안내를 받아 신

전 안에 위치한 정원으로 향했다. 신성함의 상징 중 하나인 백합이 만개한 정원을 보며, 나는 잠시 그 향기에 집중했다.

'이런 정원이 있는 곳에 사니 엘 에게서 백합 향이 나는 걸까.'

백합 향으로 각인되어 버린 한 인물이 떠올랐다. 꽤 합리적이다 싶었지만, 엘에게서 나는 백합 향 은 이 정원의 백합 향보다 훨씬 더 매혹적이고 그윽했기에 확신할 순 없었다.

"무슨 생각 하나?"

함께 걷는 내내 말이 없다 불쑥 말을 꺼내는 디에고로 인해 퍼뜩 정신이 들었다. 나는 목멀미를 매 만졌다.

"백합이 아름답다고 생각하고 있었습니다."

"......백합을 좋아하나?"

"음. 네. 사실 꽃이라면 대부분 좋아합니다."

아름답지 않은가. 찬란하게 생을 뽐내다 빠르게 시드는 것이. 짧고

굵게 살고 간다는 생각이 들었다.

내 긍정에 디에고의 미간이 살 짝 좁혀들었다. 아주 잠시였지만, 그의 곁을 오랫동안 지켜 온 내가 그 변화를 읽지 못했을 리 없었 다. 나는 걱정스럽게 그를 바라보 았다.

"혹시 백합을 싫어하십니까? 자 리를 옮기시겠습니까?"

"아니, 싫어하는 건...... 그래. 조금 싫어하지."

부정하던 디에고는, 잠시 간극을

두더니 이내 긍정했다. 심해 깊은 곳으로 가라앉은 푸른 눈이 나를 응시했다.

"교황의 상징 아닌가. 그대가 좋 아하는 모습을 보고 있자니...... 더 싫군."

나는 느리게 눈을 깜빡였다.

디에고는 내 앞에서 쉬이 불호 를 말하는 법이 없었다. 내가 좋 아하는 것엔 더더욱.

'그대가 좋다면 나도 좋네.

디에고와 함께하면서 가장 많이 들어본 말이 저것일 만큼, 그는 온화하고 너그러운 사람이었다. 툭하면 좋다고 해 그의 진정한 호 불호를 알아내는 것이 조금 어렵 기도 했지만, 확실히 함께하는 사 람을 편하게 해주는 성향이었다.

'그런 디에고가 직접적으로 싫다 고 할 정도면...... 대체 얼마나 싫 어하는 거지?'

나는 디에고가 이 꽃밭에 불을 지르지 않기만을 바랐다. 수습해

줄 수는 있었으나, 황태자가 신전 정원에 불을 질렀다는 사실만으로 도 신전과 황가 사이에 피비린내 나는 전쟁이 발발하게 될지도 몰 랐다.

"......나갈까요?"

슬쩍 디에고의 안색을 살피며 물었다. 디에고는 대답하는 대신, 오른손 주먹을 꽉 쥐었다가 내 앞 에서 천천히 폈다.

"와."

크고 예쁜 손 안에서 화려하게 피어오르는 꽃송이. 나는 짧게 탄 성을 뱉었다. 아리아와 칼로 인해 하루에도 몇 번이고 마법을 볼 수 있었지만, 맨손에서 꽃을 피워 내 는 발아 마법은 아직도 신기했다.

" 대단하시군요."

"간단한 기초 마법이야. 잔재주 일 뿐이네."

"그래도 예쁜 걸요."

마법의 난이도와 상관없이 예쁜 건 예쁜 것이다. 나는 그가 피워 낸 꽃을 유심히 살펴보았다.

" 델피니움이군요."

한 줄기에 다닥다닥 붙은 여러 개의 푸른 꽃송이. 분명 델피니움 이었다. 내가 단번에 알아볼 줄 몰랐다는 듯 눈썹을 들어 올리던 디에고가 살짝 웃었다.

"맞네. 델피니움이지. 나는 백합 보단 델피니움을 더 좋아하네."

상체를 굽혀 나와 시야를 비슷 하게 한 디에고가 천천히 손을 움 직여 내 옆머리를 귀 뒤로 넘겼

다. 귓가를 간지럽히는 부드러운 꽃잎의 감촉.

나는 눈을 살짝 감았다 뜨곤 내 귀에 걸린 델피니움과 디에고를 번갈아 보았다.

"델피니움의 꽃말을 아나?"

내 어리둥절한 시선에도 아랑곳 하지 않고 읏은 그가 조금 뜬금없 는 질문을 툭 내뱉었다.

'고지대 풀밭에서 자라고, 델피 니움의 줄기와 꽃은 경련, 마비,

매독 등에 약으로 사용한다는 것 밖에 모르는데......

나는 식물에 대해 박식했으나, 그건 모두 약재로 쓰일 때에 한해 서였다. 꽃말은 내 박식함의 범위 에 들어오지 못했다.

내가 대답하지 못하자 피식 웃 은 디에고가 고개를 숙였다. 가까 이 다가온 그의 얼굴이 비스듬히 엇갈려 꽃이 걸린 내 왼쪽 귀 앞 에 당도했다.

"델피니움의 꽃말은 '내 마음을

알아주세요'."

숨결 섞인 속삭임이 내 귓가를 뜨끈하게 간지럽혔다. 살짝 상체 를 세운 디에고가 나와 다시금 눈 을 맞추었다.

'......왜 델피니움을 좋아하는지 알 것 같네.'

나는 디에고의 눈동자가 청명한 푸른빛의 델피니움과 똑같은 색채 를 취하고 있다는 걸 인식했다.

나 또한, 델피니움이 좋아질 것

같았다.

"그대가 알아주었으면 좋겠는데, 들키고 싶지 않네. 그런데, 또 들 키고 싶어."

디에고는 아주 담담히 모순을 말했다. 눈을 잠시 내리깔고 있던 그가 조용히 시선을 들었다. 푸르 른 심해가 끝없이 깊은 제 속을 보여 주었다.

"그대가 알아주지 않는 한, 나는 그저 언제까지나 익명이겠지."

디에고가 눈을 살짝 휘었다. 가 까이 선 그에게선 늘 그렇듯 바닐 라 향이 났다. 분명 달콤하나, 동 시에 씁쓰름한 느낌이었다.

유리로 된 실내 정원의 천장을 통과한 햇빛이 그와 나를 은은하 게 비춰 왔다. 역광을 받아 그림 자 진 디에고의 얼굴은 어두웠으 나, 그의 두 눈만은 여전히 빛나 고 있었다.

"하지만 그래도 좋다고 생각하 고 있으니 아주 큰일일세."

나는 디에고가 하는 말을 이해 하지 못했다. 허나 물어선 안 될 것 같다는 직감만이 벼락처럼 다 가왔다.

내가 알아채 주길 바라지만 알 아채지 않기를 바라는 것. 그건 오로지 내 힘으로 알아내야 할 것 같았다.

"아. 저번 테러 때는...... 죄송했 습니다."

"음? 무얼?"

홀린 듯 디에고의 얼굴을 올려

다보던 나는 이내 떠오른 생각에 입을 열었다.

갑작스럽게 사과를 받은 디에고 가 살풋 미간을 좁혔다.

나는 조금 긴장한 채 감각에 집 중했다. 가까이에 사람 기척은 느 껴지지 않았고, 마법의 기운이 도 는 것은 온도 조절 장치밖에 없었 다.

미르로서의 이야기를 해도 된다 는 뜻이었다.

"그, 디디와 황제 폐하를 구해 드리지 못한 거 말입니다."

"아. 그때?"

디에고가 탄식을 내뱉었다. 그가 길고 예쁜 손으로 제 턱을 쓸어내 렸다.

"그때...... 아인하르트 경과 그 대가 함께 움직였었다지. 아인하 르트 경이 폭탄을 안전히 해체했 으니 되지 않았나? 결과적으로 모두 무사하기도 했고, 무사하지 않았더라도 그대가 사과할 부분은 아닐 텐데."

디에고가 한없이 이성적인 목소 리로 말했다.

디에고의 말이 맞긴 했다. 내가 테러의 주범도 아닌데 죄책감을 가질 이유는 없었다.

' 하지만......

"디디가 있는 마차의 폭탄을 해 체하러 가지 못해서 미안했습니 다. 물론 광장의 폭탄을 해체하기 위해서였지만, 그래도 친구를 구 하러 가지 않은 느낌이라......

아무리 불가피한 상황이라 해도 나는 디에고를 구하러 가지 않기 로 '결정'했던 것이다. 이에 대해 서 한 번쯤은 사과하고 싶었다.

고개를 푹 숙인 위로 디에고의 시선이 느껴졌다. 나는 디에고가 섭섭하진 않았을까 싶어 걱정되었 다. 한참 나를 바라보기만 하던 디에고는 검지를 들어 내 고개를 들어올렸다. 턱 끝에 닿아 오는 온기 품은 손끝은 부드러웠고, 새 하얗고 가느다란 손가락은 예뻤 다.

"고개 조아리지 말게. 그대는 제 국의 영웅인데 어찌 그러는가."

"......그래도,"

"오히려 내가 깊게 감사를 보내 야 할 부분이지. 나 대신 제국민 들을 구해 준 것에 대해서 말이 야."

긴 손가락이 내 검은 머리칼 사 이사이를 파고들어 부드럽게 쓸어 주었다.

"공포 앞에서 맞서고 제국을 위 해 싸워주어 고맙네. 나는 그대가

나를 살리러 온 것보다 제국민들 을 살리러 갔다는 것이 훨씬 기 떠."

묵묵히 말하는 그의 목소리엔 거짓 한 점 없었다. 디에고는 진 정한 군주였다. 자신보다 제국민 을 우선시했다.

태양을 등진 디에고가 환하게 웃었다.

"그대는 내 자랑이고, 내 영웅일 세. 조금도 죄책감 갖지 말게."

태양보다 디에고가 더 빛났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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