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49 화
그 후 꽤 오랫동안 디에고와 대 화를 나누었다. 대화의 주제는 그 간의 근황이었다.
"잘 지냈냐고? 아니. 잘 못 지 냈네, 슈슈. 미르가 폭탄을 처치 하고 만신창이가 된 채로 어딘가 로 사라졌다는 소문은 도는데 그 대는 연락을 안 받으니 하루하루 말라 가는 기분이었네. 내가 황제 가 되기도 전에 단명하는 꼴을 보
고 싶었던 거라면 아주 성공적인 시도였어."
"......죄송합니다."
"그대가 검술 수업도 일체 멈추 니 세레논까지 내게 와 형님은 스 승님과 친구인데 아는 게 없냐고 매일 캐묻고 가더군. 굉장히 질척 거리는 제자를 두었던데. 그런 세 레논 앞에서 나는 카슈미르 크리 시스 영애와 대단히 각별한 사이 지만 아는 게 아무것도 없다고 답 하던 내 심정이 어땠는지 아나?"
"......저기 호수에 들어가서 엎 드려 뻗칠까요?"
"하하. 무슨 소리를 하는 건가.
그럴 것까진 없네. 내가 제국의 황태자인 주제에 포용력이 날 향 한 그대의 관심만큼 작아 괜히 하 는 말일세. 너무 호쾌한 나머지 친구에게 연락도 안 하는 대인께 선 소인의 말을 귀담아듣지 말 게."
"다음엔 반드시 연락을 하겠습 니다......
나는 여태껏 디에고와 헬리오스 가 얼굴과 정치적 수완 말곤 닮은 구석이 없다고 생각했으나, 오늘 유전자의 강력함을 보았다. 입만 웃으며 사람을 양파 까듯 신랄하
게 까 내리는 디에고는 분명 헬리 오스의 유산이었다.
"내 얼마 전에 흥미로운 것을 보았네."
가차 없이 까이며 바닷바람에 건조되는 오징어처럼 말라 가는 나를 안쓰럽게 여긴 걸까, 디에고 가 이번만 봐주겠다는 듯 말문을 돌렸다.
나는 나는 기회를 놓치지 않고 달라진 대화 주제를 따라갔다.
"그게 뭡니까?"
"이제 슬슬 검술 대회가 시작할 시기가 아닌가. 인사부에서 내게 검술 대회 참가자 중 눈여겨봐야 할 이들의 명단을 올렸더군."
디에고의 입에 오른 안건은 나 에게도 흥미로운 주제였다. 속으 로 웃은 나는 아무것도 모르는 사 람처럼 눈썹을 들썩였다.
"그랬군요. 그래서요?"
"그 명단에서 익숙한 이름을 봐 서 말일세."
나를 바라보는 디에고의 푸른 눈이 재밌다는 듯 반짝였다.
검술 대회. 제국에서 1년에 한 번씩 열리는 이 유서 깊은 대회는 수많은 검사들이 참가해 실력을 겨루는 대련의 장이었다.
제국의 시민권만 있다면 귀족과 평민, 기사와 용병을 가리지 않고 모두 참가가 가능했기에, 대회가 열리는 봄의 끝자락이 되면 정말 가지각색의 검사들이 벌떼처럼 모 여들었다. 검술 대회가 벌어지는 한 달 동안 수도 모든 무기 상점
이 매진으로 문을 닫고, 여관들은 하나같이 만실일 정도였다.
검술 대회에 이렇게나 사람들이 모여드는 이유는, 첫 번째로선 어 마어마한 상금 때문이었다.
평민들은 물론 웬만한 귀족들도 입이 벌어질 액수였다. 일확천금 을 노리는 이들이 몰려드는 것은 당연한 수순이었다.
두 번째로선 수많은 거물들이 검술 대회를 보러 오기 때문이었 다.
귀족가들은 늘 가문을 지켜 줄 기사를 필요로 했고, 검술 대회에 서 실력을 확인하고 러브콜을 넣 어 채용하곤 했다.
만약 검술 대회에서 검은 용 기 사단장 파르베 로만이나 황궁 제 1기사단장 노아의 눈에 띄면 앞 으로의 인생길이 환해진 거나 다 름없었다. 검은 용 기사단과 황궁 기사단은 최고의 복지를 자랑했으 니까.
그렇기에 수많은 검사들이 거물
들의 눈에 들기 위해 날뛰었다.
"그대, 이번 검술 대회에 참가하 더군."
그리고 이번 검술 대회에 참가 하게 된 나는, 이 둘 중 무엇도 이유로 두지 않았다.
"이런. 깜짝 등장할 생각이었습 니다만, 들켰군요."
느긋하게 너스레를 떠니, 디에고 가 피식 웃었다.
"그러기엔 크리시스의 이름이 너무 무겁지 않나. 이미 그대가 참가한다는 소식이 황족들에게 전 달되었네. 황제 폐하께서 상당히 흥미로워하시고, 세레논은 스승님 이 참가하시면 자기도 참가하겠다 고 나서더군."
그의 짙은 푸른색 눈이 한 차례 번뜩였다.
"그걸 보니 내 궁금해졌네. 그대 는 분명 무력을 숨기고 있는 처지 일 텐데 어찌 이리 나섰지?"
디에고의 지적은 타당했다. 미르 임을 밝히지 말아 달라고 간곡히 부탁까지 했는데, 대놓고 무력을 뽐내야 하는 검술 대회에 출전한 다는 것이 어이가 없을 게 뻔했 다.
나는 민망함에 뒷머리를 조금 긁적거리면서도 여유롭게 웃었다.
"세상에 영원한 비밀이 어디 있 겠습니까. 이왕 밝혀질 거 극적으 로 멋지게 밝혀지는 것이 좋겠다 고 생각했을 뿐입니다."
여태껏 내가 미르임을 꽁꽁 숨 기며 고대하던 순간이었다. 나는 물끄러미 나를 향하는 시선을 당 당히 마주했다.
"이름의 무게가 크니 무대도 커 야 하지 않겠습니까?"
나는 제국에 한바탕 파란을 일 으키는 태풍의 눈이 될 생각이었 다.
"하, 하하!"
디에고가 호쾌하게 웃었다. 그는
늘 미소 짓고 있지만, 그가 진심 으로, 그것도 소리 내어 웃을 때 는 극히 적었다. 디에고가 진심으 로 웃는 것을 볼 때면 조개껍데기 만 가득한 모래사장에서 진주를 품은 조개를 찾은 느낌이라 기분 이 좋았다.
"왜 그대와 대화만 해도 이렇게 즐거워지는 건지 모르겠네. 그대 는 행복과 닮았나 봐."
디에고의 언어는 사랑을 노래하 는 시 같았다. 고심하여 고른 듯 정제된 낱말, 감미로운 목소리에
나긋한 어조가 꼭 잠들기 전 연인 에게 속삭여 주는 밀어 같았다. 노래에 비하자면 고풍스러운 축음 기에서 흘러나오는 재즈가 걸맞았 다.
서늘하게 올라가 있던 디에고의 눈꼬리가 곱게 휘어들었다.
"내가 검술 대회에 출전한 그대 를 보고 내 기사님이 되어 달라고 러브콜을 보내면 그대는 받아줄 건가?"
고운 웃음과 상냥한 말투였으나,
목소리는 묘하게 가라앉아 있었 다. 얼핏 탐욕이 일렁인 것도 같 았다. 나는 잠시 눈을 깜빡이다 이내 장난스럽게 눈꼬리를 늘어뜨 렸다.
"이미 당신께서 제 주군인데 충 성이 더 필요하십니까?"
나는 이미 디에고에게 충성을 맹세한 몸이다. 내게 적법한 태양 은 디에고 하나뿐이었다.
광활한 바다가 기다랗게 내려온 황금빛 햇살 아래 가리워졌다 모
습을 드러내길 반복한다. 봐도 봐 도 예쁜 디에고의 길고 풍성한 황 금빛 속눈썹을 구경하던 나는, 이 내 디에고와 눈이 마주치고 숨을 삼켰다.
"그렇게 말해도 그대는 모두를 지키는 기사가 아닌가. 나는 그대 가 나만의 기사님이 되어 줬으면 했네."
디에고의 두 눈에 가득 들어찬 것은 넓이와 깊이를 가늠할 수 없 는 거대한 소유욕이었다.
"그대가 나만을 위해 움직이고, 그대의 검이 내 명령만 따르기를 바랐네. 내 허락 없인 아무것도 못 하는 나만의 기사가 된다면 어 떨까. 그렇다면 다시는, 함부로 사지에 뛰어들지 못할 텐데. 네 시체를 보게 될까 두려운 마음에 아무것도 하지 못하는 날도 다신 없겠지."
읊조리는 목소리가 낮게 가라앉 아 있었다.
나는 깨달을 수밖에 없었다. 이 어둡고 무거운 마음이 그의 진심
이라는 걸. 그가 테러 사건을 가 볍게 승화시키기 위해 얼마나 노 력했는지 느껴졌다.
나는 입을 꾹 다물었다.
내 검은 한 사람에게만 온전히 바쳐질 수 없었다. 지키기 위해 세운 검이었고, 내겐 지킬 것이 많았으니까.
그 순간 내가 어떤 표정을 지었 던 걸까. 나를 보던 디에고의 얼 굴이 얼핏 일그러졌다. 길게 한숨 을 쉰 그는 이내 쓰게 웃으며 내
귓가에 걸린 델피니움을 만지작거 렸다.
"하지만 그것이 내 이기임을 알 아. 자유롭게 날아가야 하는 그대 를 땅에 묶어 두는 짓밖에 되지 않겠지. 그래서 참고 있는 거야."
델피니움을 만지작거리던 손이 천천히 내 귀로 옮겨 갔다. 예민 한 귀에 닿는 긴 손가락에 나는 움찔 몸을 떨었다.
고운 손끝이 귓바퀴를 느리게 쓸어내렸다. 살갗에 닿는 그의 손
길이 간지럽고 이상했다.
"부디 더는 다치지 말게. 내가 네 비행을 진심으로 응원할 수 있 도록. 내가 널 속박하고 싶게 하 지 마."
디에고는 귓전에 잠시 바람이 스치고 지나가는 듯 속삭였으나, 말의 무게는 조금도 가볍지 않았 다. 나는 목울대를 울렁였다.
"검술 대회 본선이 시작되고 한 번쯤 나를 찾아오지 그래. 내 증 표를 선물할 테니."
손을 떼고 얼굴을 물린 디에고 가 여상스러운 목소리로 안건을 바꾸었다. 그는 여느 때와 같이 다정한 낯이었다. 나는 뒤늦게 정 신을 차리고 대답했다.
"아. 저하가 사냥 대회 때 주신 리본도 아직 가지고 있습니다만."
"그거랑은 또 다른 이야기지. 이 번엔 조금 더 그럴 듯한 걸 증표 로 선물하겠네."
디에고의 눈동자가 내 얼굴에서 천천히 아래로 내려갔다. 내 몸을
끈적하게 훑는 것 같은 시선이 종 래에 닿은 곳은 내 왼손이었다.
내 왼손을 한참 응시하던 디에 고가 내 손을 잡아 올렸다. 그의 엄지가 내 약지 위에 겹쳐진 두 개의 반지를 훑었다.
"정인이...... 둘이나 있나?"
깊게 가라앉은 목소리가 나긋하 게 속삭였다. 나는 순간 이해가 되지 않아 눈을 끔뻑였다. 디에고 가 다정하게 웃으며 이를 갈았다.
"반지 고르는 솜씨가 버러지 같 군."
" 네?"
나는 칼과 아리아의 안목이 갑 작스럽게 욕을 얻어먹은 이 상황 에 물음표를 띄웠다. 디에고는 내 상태는 개의치 않고 말을 이었다.
"나도 이번 증표로는 반지를 선 물하지."
그가 엄지와 중지로 내 왼손 약 지를 간지럽혔다. 반지를 매만지 는 손길이, 금방이라도 반지를 빼
낼 것 같았다.
"왼손 약지는 바라지도 않으니, 주면 받아만 주게."
뜨거운 한숨이 손등 위를 스치 고, 디에고가 붉은 입술을 숨결에 달궈진 곳으로 내려앉혔다. 절절 한 입맞춤이었다.
"칼 공자와 아리아 공녀가 선물 해 준 반집니다만...... 디자인이 그렇게 별로입니까?"
디에고의 몸이 흠칫 굳었다.
'어디 아픈가•• ...?'
내가 힐끔 안색을 살필 때도 디 에고는 오랫동안 침묵했다. 얼마 나 지났을까, 그 끝에 그는 휙 고 개를 젖혔다.
그리고 이번엔 내가 흠칫할 수 밖에 없었다.
"아, 그런 건가?"
디에고는 이전에 본 적 없는 함 박웃음을 짓고 있었다.
"하하! 내 깜빡 착각해 버렸지 뭔가! 그랬군! 아주 멋진 반지일 세!"
"방금 전에 버러지 같다고......
"벌어지는, 입이 떡 벌어지는 안 목이라고 한 걸세. 그대의 형제자 매라 그런 건지 센스가 있군. 그 대와 잘 어울리는 걸로 아주 잘 고른 것 같네."
나는 디에고가 이렇게까지 하이 텐션인 걸 처음 보았다. 십 년간 묵은 체증이라도 내려간 듯 시원 해 보이는 표정이 그렇게나 행복
해 보일 수가 없었다.
"우선...... 알겠습니다. 그리고 저하가 반지를 선물해 주신다면, 그건 줄에 걸어 목걸이로 차고 다 니겠습니다."
"음? 왜 손에 끼지 않고."
내 대답에 갸우뚱하는 디에고를 향해, 나는 작게 웃었다.
"그럼 늘 품에 지니고 있을 수 있지 않습니까. 심장이 뛰는 곳 위에 간직해 두고 있겠습니다."
디에고의 얼굴이 그대로 굳었다. 숨을 턱 멈춘 채 나를 한참 바라 보기만 하던 그는, 이내 두 손에 얼굴을 묻었다. 얼핏 드러난 그의 귀가 붉었다.
"젠장...... 그런 멋진 말은 내가 해야 한단 말일세...... 왜 꼬드겨 야 하는 내게 기회를 주지 않고 이미 지독하게 꼬드긴 그대가 선 수를 치냔 말인가......
디에고가 한탄하듯 중얼거렸다. 나는 눈을 깜빡였다.
"아, 저하가 다시 하시겠습니 까? 들어 드리겠습니다."
"그게 아닐세! 하......!"
디에고가 제 주먹으로 제 가슴 팍을 퍽퍽 쳤다.
뭐가 아니라는 건지, 왜 저러는 건지 이해할 수 없어 그를 멀뚱하 게 쳐다보았다. 디에고의 가슴에 달린 훈장들이 흔들리며 짤그락거 리는 소리가 듣기 좋았다.
'......기척.'
그리고 어느 순간 경종을 울리 는 내 직감.
나는 기척을 느꼈으나, 특별히 경계를 하진 않았다. 그 고결하고 도 신성한 기운은 내게 무척 익숙 했으니까.
"이건 뭐랄까...... 우리 집 앞마 당에서 바람피우고 있는 연인을 발견한 느낌이랄까요."
귀를 옭아매는 매혹적인 목소리. 바람을 타고 풍겨 오는, 정원의 꽃향기보다 훨씬 더 진득한 백합
향.
길쭉한 인영이 정원 입구에 등 을 기댄 채 팔짱을 꼈다. 웃고 있 으나 조금도 웃고 있지 않은 얼굴 을 보며, 나는 그와 디에고가 둘 다 웃음으로 감정을 숨기는 포커 페이서라는 걸 깨달았다.
"맹랑하군요, 황태자. 신전과 힘 겨루기를 해 보고 싶다는 선전포 고였다면 아주 좋은 시도였다고 해 두죠."
살벌한 소리를 하며 나타난 인
물은 이곳의 주인, 교황 엘리오르 라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