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충직한 검이 되려 했는데-150화 (150/254)

150 화

"좋은 오후입니다, 성하."

입꼬리를 말아 올린 디에고가 태평하게 말했다. 조금의 동요도 없는 안색과 속을 비치지 않는 눈 빛, 모두 디에고가 대외적으로 나 설 때 보이는 기색이었다.

"그래, 황태자에겐 좋은 오후인 모양이군요. 나는 아닌데."

벽에 기대고 있던 몸을 세운 엘 이 나와 디에고에게로 저벅저벅 다가왔다. 아름답고 신비로운 은 빛 눈동자가 디에고를 꿰뚫듯 바 라보았다.

엘의 눈꼬리가 휘어들었다.

"지나치게 성급한 일반화의 오 류 아닌가요? 다른 인사말을 생 각해 보도록 해요. 일국의 태자가 그래서야 쓰나."

붉고 매끄러운 입술이 내뱉는 말은 그럴 듯한 헛소리였다. 말도

안 되는 트집을 잡는 엘을 짜게 식은 눈으로 바라보고 있을 때, 디에고는 여유롭게 답했다.

"이런. 실수를 용서하시기 바랍 니다. 제게는 좋은 오후입니다, 성하. 옆에 좋은 사람이 있어서 말입니다."

디에고가 내 어깨 위로 부드럽 게 팔을 둘렀다. 나는 그저 눈을 깜빡였다. 그와의 스킨십은 익숙 해진 참이었기에, 불쾌하거나 거 부해야겠다 싶진 않았다.

나와 디에고의 팔을 천천히 번 갈아 본 엘의 웃음이 짙어졌다. 일순 등의 잔털이 쭈뼛 설 정도로 위험해 보이는 웃음이었다.

"......재밌군요. 그대는 내 손에 즉위되기 싫은 모양이야."

나와 디에고 앞에 멈춰 선 엘이 고개를 기울였다. 기울인 고개를 따라 흘러내린 연하늘빛 머리칼이 허공을 수놓았다. 목소리는 상냥 하고 나긋한 주제에 뱉는 말은 살

벌하기 그지없었다.

'뭐지? 황가와 신전 사이에 트 러블이 있었나?'

나는 디에고와 엘의 기 싸움을 흥미진진하게 관전하면서도 한편 으로는 고민했다.

제국을 통제하는 실권은 황제에 게 있으나, 그런 황제를 즉위시키 는 것은 교황이다.

즉위식 마지막 단계는 교황이 직접 황제의 머리에 기름을 붓고

신의 이름으로 즉위를 선언하는 것인데, 그 의식까지 마쳐야만 진 정한 황제가 될 수 있었다.

'그래서 황태자들이 교황의 비위 를 잘 맞춰야 하지.'

교황이 조금이라도 수틀려 기름 을 부어 주지 않겠다고 고집을 부 리면 왕위고 뭐고 없는 거다. 임 명식을 받지 않고 억지로 황위에 오른다고 해도, 그 황제는 신에게 인정받지 못한 반쪽짜리 황제로 평생을 보내야 했다.

'엘이 만약 디에고에게 기름을 부어 주지 않으면...... 디에고는 제대로 망하는 건데.'

디에고가 황제가 되면 엘과 비 등해질지 몰라도, 지금으로선 확 실히 엘보다 아래였다.

나는 무슨 일이 있었는지는 몰 라도 황위를 가지고 위협당하고 있는 디에고를 안쓰러워하며 곁눈 질했다. 일자리로 사장에게 협박 당하는 부하 직원을 보는 기분이 었다.

"그럴 리가요. 말씀을 무섭게 하 시는군요."

디에고는 황위로 위협을 당하면 서도 여전히 여유로웠다. 서글서 글하게 웃으며 부드럽게 말하지만 절대 굽히지 않는 눈빛에서 새삼 스럽게 디에고의 수완을 보았다.

"그렇다면 적어도 내 신전에서 이런 모습을 보이면 안 될 텐데."

나직하게 대답한 엘이 조용히 내게로 시선을 옮겼다. 은빛 섬광 처럼 내리쬐는 엘의 시선은 따갑

도록 강렬해서, 나는 거대한 태양 아래 서 있는 기분을 느꼈다.

"그대가 하는 행동만 보면 황제 자리는 안중에도 없는 것처럼 보 이는군요."

낮게 가라앉은 목소리가 거침없 이 말했다.

얼핏 오만하게 들리는 말을 무 리 없이 소화할 수 있는 사람. 신 성한 태양 신전에 소유격을 사용 할 수 있는 유일한 인물. 신을 대 신하는 가장 고귀한 인간.

"태도 똑바로 해야 할 거예요, 황태자."

이를 악문 채 웃고 있는 눈앞의 남자는, 내 친구이지만 아득히 먼 존재였다.

마나가 사람을 압도하듯, 신성력 또한 사람을 압도한다. 엘에게서 신성력이 아우라처럼 흘러나올 때 면 인간이 감히 범접할 수 없는, 아득한 신성함이 느껴졌다.

소드 마스터인 나와도 맞먹을

듯 주위를 압도하는 존재감에 내 가 본능적으로 긴장을 하고 있었 을까. 희고 긴 손이 내 앞에 불쑥 나타났다.

"이리 와요, 슈슈."

살랑살랑 손짓하는 것이 꼭 사 람을 한입에 집어삼키기 위해 꼬 드기는 악마 같았다. 엘은 신에 가까운 존재임에도 늘 치명적인 악마 같단 인상을 주었다.

나는 그의 손을 빤히 응시하다, 시선을 들어 그와 눈을 마주했다.

"나 황제와 마지막까지 논의를 마치고 오느라 힘들었어요. 안아 줘요."

용광로에서 잘 달궈진 은빛 철 처럼 뜨거운 눈빛을 하고서 애처 로운 어투로 투정을 부리는 엘은 이질감이 드는 동시에 지독히도 아름다웠다.

'나는 어쩌다 황가와 신전의 기 싸움에 낀 거지......

나는 속으로 한숨을 쉬었다.

웃음이라는 가면을 쓴 채 피 튀 기는 기 싸움을 벌이는 두 능구렁 이 사이에 껴 있는 건 두 마리의 보아 뱀이 동시에 내 몸을 조이는 느낌이었다.

구경하는 건 조금 재밌었지만, 이렇게 내게 상황의 결정권을 넘 기는 건 곤란했다. 이런 상태에선 디에고 옆에 남아 있기도, 엘의 손을 잡기도 애매했다.

'여기서 내 선택이 황가와 신전 사이에서 크리시스의 선택으로 여

겨지게 되면 어떡하지.'

두 사람 다 각자의 선 곳을 대 표하다시피 하는 거물인 데다, 둘 다 태도가 너무 진심이라 나는 이 게 두 사람만의 싸움인지 진짜 정 치 싸움인지 헷갈리기 시작했다.

내가 빠르게 눈을 굴려 디에고 와 엘을 살펴보고 있었을까, 나보 다 먼저 입을 연 것은 디에고였 다.

"저는 이 제국의 황태자이자 태 양신교의 신도로서 성하를 존경하

고 따릅니다."

자신의 위치를 잘 알고 있다는 듯 정중한 말투. 허나 나는 디에 고의 푸른 눈이 바다가 얼어붙을 만큼 낮은 온도로 시리게 번뜩이 고, 그의 입가로 승자처럼 호기로 운 미소가 떠올랐음을 발견했다.

"하지만 사람을 쟁취함에 있어 선 누구든 똑같이 도전자의 입장 아니겠습니까. 신분을 들먹인다는 건...... 본연의 힘만으론 쟁취할 자신이 없다는 걸로 보이는군요."

엘의 표정이 섬뜩하게 굳었다. 나를 사이에 두고 벽안과 은안이 치열하게 맞부딪쳤다.

나는 슬그머니 먼 하늘을 시선 을 돌렸다.

'죄송한데 저 빼고 정쟁해 주시 면 안 될까요.'

헬리오스와 카이사르에 이어 엘 과 디에고까지, 왜 나를 고래 싸 움에 낀 상어 꼴로 만드는 건지 알 길이 없다. 나를 사이에 두고 싸우는 게 요즘 수도에서 핫한 유

행인가 싶을 정도였다.

내가 반쯤 해탈한 채 피할 수 없으면 즐기자는 마음으로 두 사 람의 숨 막히는 눈싸움을 관전하 고 있을 때, 디에고가 입을 열었 다.

"성하께서 많이 불안해 보이시 니 먼저 가 보도록 하겠습니다. 저는 슈슈와 또 만나기로 약속했 으니 말입니다."

상당히 여유만만한 목소리. 눈을 곱게 휘어 웃은 디에고가 내 어깨

를 가볍게 돌려 나를 자신과 마주 보게 했다. 그러곤 다가오는 상 체.

쪽. 쪽.

디에고의 양 뺨이 내 뺨에 번갈 아가며 맞닿고, 묘하게 외설스러 운 소리가 내 귓가로 울려 퍼졌 다. 맞닿은 것은 분명 얼굴의 살 갗뿐이나 어쩐지 입을 맞춘 것 같 은 느낌.

이전엔 널리 통용되었으나 이젠 거의 사용하지 않는 인사법이었

다.

"데려다주는 건 다음으로 미뤄 야 할 것 같군. 내 먼저 들어갈 테니 조심히 들어가 보게."

아름답고 찬란한 디에고의 얼굴 이 내 귓가에 다가왔다.

"반지, 기대하고 있게. 가장 멋 진 것으로 선물할 테니."

비밀 얘기하듯 속삭인 것에 비 해 목소리는 꽤 컸다. 누구 들으 라는 식이었다.

"제국의 하늘께 영광을. 그럼, 먼저 들어가 보도록 하겠습니다."

대전쟁에서 승리한 장군처럼 기 세등등하게 웃은 디에고가 엘을 향해 짧게 허리를 굽히고 돌아섰 다. 출구를 향해 나가는 그의 발 걸음은 하늘을 노니는 듯 가벼워 보였다.

" 하."

디에고가 정원을 떠난 지 얼마 나 지났을까, 잠시간의 침묵을 메

운 것은 엘의 헛웃음 소리였다. 몇 번 날카롭게 웃음을 뱉은 그는 이내 제 손으로 앞머리를 거칠게 쓸어 넘겼다.

"저 새끼가 진짜......

짓씹듯 중얼거리는 말은 명백한 욕설이었다.

엘이 욕하는 모습을 처음 본 나 는 순간 흠칫했다. 신의 말씀을 받아 전했을 입술이 욕을 내뱉는 것은 모독적이면서도 묘하게 치명 적이었다.

" 才、X "

TTTT-

디에고가 나간 출구를 한겨울 한파가 서린 눈으로 응시하던 엘 이 내게로 시선을 돌렸다. 그의 눈빛에 여전히 살얼음이 끼어 있 었으나, 내게로 향하는 그 잠시간 동안 겨울에서 봄으로 계절이 바 뀌어 있었다.

"황태자가 주는 반지, 받을 거예 요?"

묘하게 날이 서린 말투가 받지

않을 것을 종용하는 것만 같았다. 나는 눈을 데굴데굴 굴렸다.

"제가 곧 검술 대회에 출전해서 말입니다. 저하께서 증표로 선물 해 주시겠다고......

"무슨 반지를 준대요?"

" 네?"

갑작스러운 물음에 되묻자, 성큼 거리를 좁힌 엘이 내 허리에 팔을 둘렀다. 내 허리에 팔을 둘렀다. 나는 고개를 젖혀 그를 바라보았 다. 엘이 나보다 크다는 게 새삼 스럽게 와닿았다.

"금? 은? 다이아? 당신의 눈을 닮은 핑크 다이아몬드나, 이 검은 머리를 닮은 흑요석을 박아 주겠 대요? 황실의 보물을 준다던가 요? 슈슈, 그가 무얼 주든......

희고 큰 손이 내 뺨을 덮었다. 은빛 눈동자가 가라앉은 채 번뜩 였다.

"나는, 더 귀한 걸 줄 수 있어 요. 이제는."

분명 아름답게 빛나는 은빛인데,

나는 그곳에서 익숙한 암흑을 보 았다.

엘의 손은 디에고의 손과 크기 가 비슷한 데다, 얼핏 보아선 생 김새까지 비슷했다. 하지만 손에 새겨진 흉터는 디에고의 손과 비 교할 수 없을 만큼 많았다.

검정이라 부르던 천민 출신 일 개 수습 신관. 내 도움을 받고서 야 다른 신관들의 괴롭힘에서 벗 어날 수 있었던 약한 소년.

삐뚤게 잘린 검은 머리가 길어

진 채 고귀한 연하늘빛으로 물들 어도, 빛 한 점 허용하지 않던 검 은 눈이 광명 그 자체를 담아 은 빛으로 빛나게 돼도 달라지지 않 은 것이 있었다.

어둠에서 살던 이들에겐 지울 수 없는 혼적이 있었다. 나 또한 한때 어둠에서 살았기에 그 흔적 을 알아볼 수 있었다.

여느 평범한 천민들보다도 거친 손. 그 손만이 그와 나의 과거를 이어 주는 혼적이었다.

"그러니까, 그 새끼 걸 받지 말 라고는, 안 할 테니까."

어느새 날카로움이 무뎌지고 물 기에 젖어 애처로워진 숨결 섞인 목소리가 나를 간지럽혔다.

눈꼬리를 축 늘어뜨린 엘이 내 목덜미에 얼굴을 묻었다. 내가 그 순한 얼굴에 약한 것을 아는 듯 거침없는 움직임.

연한 살결에 닿는 그의 얼굴에 살짝 움찔했으나, 피하지는 않았 다. 길게 늘어진 연하늘색 머리칼

에서 짙은 백합 향이 풍겨 왔다.

"내 것도 받아줘요, 슈슈."

으르렁거리듯 말하면서도 목덜 미에 머리를 부드럽게 비비는 엘 은 사람의 마음을 혼들었다. 본연 의 사나움을 억누르고 사랑받기 위해 기를 쓰고 순종하는 번견 같 았다.

"우리 슈슈는 참으로 지독하게 도 선하니 그래 줄 거죠."

살짝 고개를 든 엘이 나를 올려

다보며 눈꼬리를 휘었다. 모든 자 연의 섭리를 무시하고 장소와 시 간을 막론한 채 꽃을 피워 내는 매혹적인 눈웃음이었다.

"당신은 내 것이 아닐지라도 나 는 당신의 것이니, 내가 당신의 증표를 가질 수 없더라도 당신은 내 증표를 가지고 있도록 해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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