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51 화
'엘이...... 반지를 이렇게나 좋아 했나.'
엘에게 익숙하게 안긴 나는 그 를 멀뚱히 올려다보며 생각했다. 내가 반지를 끼지 않으면 세계를 멸망시킬 기세였다.
"엘이 준다면 물론 감사히 낄 겁니다."
나는 손을 들어 엘의 머리를 쓰 다듬었다.
교황의 머리를 쓰다듬는 행위는 신성모독으로까지 여겨질 수 있었 지만, 길들여진 맹수처럼 순하게 내 손길을 받아들이는 엘을 보자 니 당사자가 좋아하면 상관없지 않나 싶었다.
"제가 엘이 준 걸 왜 거부하겠 습니까."
나는 기꺼운 마음으로 눈꼬리를 휘었다. 아무것도 받지 못한다 해
도, 내게 무엇이든 해 주고 싶어 하는 엘의 마음만으로도 충분히 선물을 받은 기분이었다.
나를 물끄러미 바라보던 엘의 두 눈이 깊어졌다.
"......그런 말은 함부로 하면 안 될 텐데요. 뭐든 거부하지 않는다 는 뜻이에요?"
"물론입니다. 절 못 믿으십니 까?"
"흐음. 과연."
미심쩍다는 투에 자존심이 자극
당한 나는 당당하게 포부를 보이 듯 주먹으로 가슴을 쳤다.
눈을 가늘게 뜬 그는 내 허리에 두른 손으로 내 척추 부근을 손가 락으로 천천히 훑어 올라갔다 내 려가기를 반복했다. 나는 묘하게 끈적한 그 손길에 흠칫하면서도 꿋꿋이 대답했다.
"엘이 제게 나쁜 것을 줄 리가 없지 않습니까."
이것은 꽤 맹목적인 믿음이었다.
나는 내게 이유 없는 호의를 보 여주었던 유일한 사람인 엘을 잊 지 않았다. 그 당시엔 삶이 하도 척박해 가시 세운 고슴도치처럼 그를 경계했지만, 여유를 갖게 된 지금은 알고 있었다. 그의 호의는 대가를 요구치 않는 진심이라는 것을.
내가 쥐뿔도 없는 용병이었을 때나 공작가의 공녀가 된 지금이 나, 엘의 태도는 똑같았다. 여전 히 상냥했다.
내 대답을 들은 엘이 입을 꾹
다물었다. 빛나는 샹들리에를 닮 은 은빛 눈동자가 조용히 일렁였 다. 잠시간의 간극 뒤에야 그가 느리게 입술을 열었다.
"나는 당신에게 아주 더럽고 추 악한 걸 줄 생각인걸요."
"으2"
O •
"당신에 비하면 한없이 악한 데 다, 아주 지독한 걸 당신 손에 쥐 여 주고 싶어요."
나는 머리로는 엘이 말하는 게 무엇인지 추측하며 엘을 지그시 응시했다. 나와 시선을 마주치지
않기 위해 눈을 내리깐 엘이 은실 을 섬세하게 박아 놓은 것 같은 속눈썹을 파르르 떨었다. 가슴이 아릴 정도로 처연해 보였다.
"그런 걸 주면 거부할 건가요?"
천천히 눈을 들어 나를 마주한 엘이 눈꼬리를 늘어뜨렸다. 은빛 눈은 실의에 빠져 있었다.
영문을 알 수 없었지만, 우울한 엘은 보기 싫었다. 길게 늘어진 그의 하늘색 머리칼을 귀 뒤로 넘 겨 주곤 그의 어깨를 달래듯 토닥
여 주었다.
"엘이 주는 것이라면 그런 것조 차도 한번 감당해 보도록 하죠."
나는 엘에게 너무 많은 것을 받 았다. 물질과 휴식, 그리고 위로 까지. 내 허리를 잡고 있는 크고 거친 손은 진창에서 구르던 내게 내밀어진 유일한 손이었다. 나는 은혜를 잊지 않았다.
그리고 받은 은혜 때문이 아니 더라도, 엘은 충분히 내게 특별했 다.
"어떻게 나쁜 것을 준다고 해서 당신을 거부하겠습니까."
나는 살짝 고개를 틀어 엘의 귓 가에 속삭였다.
그의 표정이 무섭도록 굳었다. 그에게서 자주 보지 못한 표정이 었다. 오답을 말했나 싶어 우물쭈 물할 때, 엘이 내 허리를 감은 팔 에 강하게 힘을 주었다.
그의 얼굴이 훅 가까워졌다. 동 시에, 짙어진 백합 향이 내 후각
을 잠식했다.
"그 말, 확실해요?"
"물론입니다."
"정말이죠? 뭐든 받는 거죠?"
"받는 처지에 가릴 게 있습니 까? 절 믿어 보세요."
대체 뭘 주려는 건지 몇 번이고 확답을 받으려 하는 게 의아했지 만, 나는 자신이 있었기에 순순히 대답해 주었다. 그제야 엘의 얼굴 이 풀어졌다.
"그래서 뭘 주시려는 겁니까?"
내 물음에 엘이 숨을 천천히 들 이쉬었다. 그는 꽃에 달린 잎사귀 를 표현하듯 손으로 자기 뺨을 감 싸곤 눈을 흐드러져라 휘었다.
"나를 주려고 하는데요."
" 2"
상상치도 못한 대답에 나는 얼 굴에 거대한 물음표를 띄우고 말 았다.
"말 그대로에요. 슈슈가 날 가져 줬으면 좋겠어요."
거대한 바위처럼 떨어진 엘의 말이 상징적인 의미를 담고 있진 않나, 비유적인 표현인가 심각하 게 고민하는 내 머리 위로 엘의 확인 사살이 떨어졌다. 나는 더욱 어리둥절해졌다.
"사람은 물건이 아닙니다."
"하지만 동물이죠. 반려인간 정 도로 생각하면 되겠네요."
내 멀뚱한 대답에 엘이 주저 없 이 대답했다.
'엘의 사고관...... 이대로 괜찮은 가......?'
스스로를 반려동물로 표현하는 데 거리낌이 없는 그를 보며 나는 진지하게 고민했다.
"왜 그런 게 되고 싶은 건지는 모르겠습니다만...... 누가 제국의 교황을 그렇게 취급할 수 있겠습 니까."
만약 평민 아이가 이런 식으로 말했다면 시종으로 삼아 달라는 뜻으로 알고 저택으로 데려갔을
것이다. 하지만 다 큰 엘을, 그것 도 신 이외엔 그 누구도 위에 두 지 않는다는 그를 반려동물 취급 할 순 없었다.
"교황이든 뭐든 누구나 관계 앞 에선 한 명의 인간일 뿐이죠."
디에고의 말을 오마주하듯 대답 한 엘이 야살스럽게 입꼬리를 올 렸다.
사람의 등줄기를 간지럽히는 묘 한 미소. 나는 이 관능적인 얼굴 이 엘의 원래 얼굴에 가깝다는 것
을 느낄 수 있었다.
이전엔 천사 같은 얼굴만 보여 주던 그는 서서히 그 본연에 가까 운 모습들을 보여주고 있었다. 내 가 그의 다른 면에 자연스럽게 익 숙해질 수 있도록, 천천히.
"당신은 그래도 돼요. 당신만 O "
엘은 아주 쉽게 내게 모든 것을 허락했다. 내 이름 앞에 한정의 뜻을 지닌 정관사를 붙여 나를 유 일한 존재로 만들었다.
'내가 뭐라고.'
가끔 그런 생각이 들기도 했다. 정말 내가 뭐라고, 이렇게 변함없 이 진심으로 다가와 주는지.
물론 내 외적인 요소에 대한 거 창한 호칭은 넘치도록 많았다. 검 은 재앙 미르, 용병왕, 크리시스 의 공녀, 황자의 스승 등.
이런 겉모습을 향한 친절이었다 면 차라리 쉬웠을 거다. 원하는 것만 주면 되는 일일 테니.
하지만 엘은 늘 사람인 나를 마 주했다. 자존감 낮고, 약간 소심 하며, 한없이 뻣뻣하고 감정에 미 숙한 카슈미르를. 내가 얼마나 부 족한지 나 스스로가 제일 잘 알았 기에, 그게 벅차도록 고마운 동시 에 조심스러워졌다.
진심엔 진심으로 답해 주어야 했다.
"엘을 가지면...... 뭘 어떻게 해 야 하는 겁니까?"
사람을 소유한다는 표현이 거슬 렸으나, 우선 물었다.
'내 소유가 되어 뭘 하고 싶은 거지?'
반려동물처럼 먹여주고 씻겨 주고 재워 줘야 하는 건가 고뇌에 빠져 있을 때, 엘이 입술을 열었 다.
"관심을 가져 주세요. 당신이 나 를 인식하고 있다는 걸 느끼게 해 줘요. 함께하는 시간을 가지고 예 뻐해 주세요. 그리고......
상체를 굽힌 엘이 내 손을 자기 머리 위에 얹었다. 얼른 쓰다듬으 라는 무언의 눈빛에 얼떨결에 강 아지 쓰다듬듯 신비로운 물빛 머 리칼을 쓸어내리자, 그가 기쁜 듯 눈꼬리를 휘었다.
"사랑해 주셔야 해요. 내가 외로 움에 죽어가지 않도록."
사랑, 혀를 이빨에 댈 듯 말 듯 하다 끝엔 입천장에서 뭉근하게 굴리는 그 단어는 듣는 것만으로 도 기분이 이상해졌다.
분명 그가 말하는 사랑은 친구 를 향한 애정일 텐데도 얼굴이 화 끈해졌다. 엘의 목소리가 새빨갛 게 익은 과실처럼 농염했기 때문 이었을지도 몰랐다.
"저는 •"
"그리고 가장 중요한 게 하나 더 있어요."
더듬더듬 답하려는 내 말허리를 사뿐하게 자른 엘이 길게 숨을 들 이쉬었다. 그의 눈이 우주 꼭대기 에 걸린 별이 우주 반대편으로 떨
어지는 기나긴 궤도만큼이나 깊어 졌다.
말할지 말지 고민하는 것 같은 그를 잠자코 기다리고 있었을까, 외설스럽도록 붉은 그의 입술이 천천히 열렸다.
"무슨 일이 있어도, 나를 버리면 안 돼요."
나는 지독하도록 아름답던 얼굴 이 애처롭게 찡그려지는 것을 빤 히 바라보았다.
"내가 당신만큼 선한 사람이 아 니어도, 당신 기대에 충족할 만큼 상냥하지 못해도, 당신이 알던 나 와 다른 모습을 보아도 돌아서면 안 돼요."
엘이 고개를 떨구었다. 내게 얼 굴을 보여 주기 싫은 것처럼.
"분명 당신은 나를 믿는다고 했 지만 그래도 불안해요. 내가 조금 이라도 나를 통제하지 못하면 당 신은 한 자리에 있을 수 없다는 듯 떠나 버릴 것 같아서."
내게 확신을 주세요. 절대 버리 지 않을 거라고 말하고, 나를 당 신 손으로 잡아 주세요.
간절한 속삭임에 나는 잠시 말 을 잃었다. 눈앞의 푸른 머리칼 위로 먹이 칠해지고, 검은 머리의 소년이 일렁였다.
"내일도 오실 거예요?"
"음...... 아니. 장기간 토벌을 나 갈 예정이라서. 한동안 못 올 것 같네."
"......그냥 오늘 돌아가지 않으 면 안 돼요?"
"뭐?"
태양 신전의 가장 외진 곳에서 온통 흑빛뿐이던 소년과 나직하게 대화를 나누던 순간. 죽어버린 검 은 눈이 질척이는 늪처럼 변하던 광경.
"가셨다가 다시는 돌아오지 않 으실 것 같아요. 나를 이곳에 버 리고."
소년은 어두웠다. 늘 마수의 피
처럼 검고 섬뜩한, 불길한 기운을 풍겼다. 비현실적으로 아름다운 얼굴까지 겹쳐져 인간보다는 저주 받은 인형 같았다.
온갖 비애와 어둠을 한입 가득 삼킨 두 눈엔 희망도, 믿음도 없 이 집착만 가득했다.
" 검정아."
"......네."
"내가 이렇게 가고 돌아오지 않 은 적 있어?"
"저번에 일주일 후에 온다고 해 놓고 열흘 뒤에 왔잖아요."
서늘하게 날 선 검은 눈을 슬쩍 피했다. 불가피한 상황이었지만, 결과적으로는 거짓말을 한 것이었 으니 죄책감이 심장을 쿡쿡 찔렀 다.
"그건...... 미안. 일이 너무 복잡 해져서......
"열흘이 한 달이 되고 한 달이 일 년이 돼서 언젠가 당신이 날 잊어버리면 어떡해요."
미성에 가까운 목소리는 무척 앳되었지만, 그 안에 든 끈적거리
는 감정은 조금도 앳되지 않았다. 나는 내 오러만큼이나 어두운 절 망을 머금은 두 눈을 바라보다 작 게 웃었다.
"너무 오래 기다리게 하지 않을 게. 조금 늦게 돼도 꼭 돌아올 테 니까, 나를 믿어. 너를 계속 혼자 두지 않아."
"나랑 만든 규칙, 기억하지?"
"......네."
"그래. 너는 이 시간에, 이곳에 나와 있기만 하면 돼. 나는 그런 너를 만나러 올 거야. 네가 오지
않으면 난 거절로 생각하고 더는 너를 괴롭히지 않아. 알지?"
"......언제쯤 다시 올 거예요?"
"으음...... 열 밤만 자고 일어나 면 또 만날 수 있을 거야."
표정을 찡그렸다 푼 소년은 내 게 슬쩍 새끼손가락을 내밀었다. 뭔가 싶어 바라보자, 민망한 듯 시선을 피하면서도 꿋꿋이 내민 손을 유지하는 소년의 모습은 풋 풋하기 그지없었다.
"약속은 새끼손가락을 엮어서 하는 거라고 당신이 알려줬잖아
요."
"기억하고 있었네."
"이렇게 독특한 걸 잊을 리 없 으니까."
검은 눈동자가 내게 초점을 맞 추었다.
"약속해요. 다시 올 거라고• 나 를 잊지 않을 거라고."
그 맹목적인 갈급을 난 여전히 잊지 않았다. 어둠뿐이던 검은 눈
동자에 이채가 도는 모습은 선득 하면서도 아름다웠다.
"......약속하죠."
잠시 어린 날의 기억을 되짚던 나는, 살며시 엘 앞으로 새끼손가 락을 내밀었다. 어린 날이 기억난 걸까, 그의 동공이 혼들리기 시작 했다.
"엘이 무슨 모습을 보여 주든지 돌아서지 않을 거라고 약속하겠습 니다."
굳어 버린 엘의 손을 부드럽게 잡아 그의 새끼손가락을 편 나는, 그곳에 내 새끼손가락을 엮었다. 얽히는 작은 가락 사이로 희미하 게 전해지는 온도는 퍽 따스했다.
"사람의 말은 스쳐 지나가는 바 람처럼 허무하니 믿기지 않는 것 도 당연합니다. 관계의 종말을 두 려워함은 이상한 일이 아니죠. 엘 이 불안해한다면 몇 번이고 다시 약속해 드리겠습니다. 계속 엘을 아끼는 것으로, 약속을 증명하겠 습니다."
어린 날엔 약속을 끝까지 지키 지 못했다. 그를 잊진 않았지만, 다시 돌아가지 못했으니. 그것은 그가 싫어서도 아니었고 사실 그 가 자초했다고 보는 것이 맞았으 나, 나 또한 미숙했다.
아무리 그가 나오지 않았다고 하여도 완전히 발길을 끊어버린 것은 어린 날의 치기였다.
'하지만 이젠
야지.'
자랐으니까. 지켜
사실 조금 두렵기도 하다. 내가
모르는 엘은 어떤 사람일지, 공포 로 군림하며 황제조차 어려워한다 는 태양 신전의 군주에게 익숙해 질 수 있을지 의문이었다.
그럼에도 확답을 내린 것은, 내 가 그만큼 엘을 아끼기 때문이었 다.
"나...... 어떡하죠."
긴 침묵을 유지하던 엘이 한참 뒤에야 입을 열었다. 그가 천천히 떨구었던 고개를 들었다.
"지금, 심장이 너무 뛰는데."
붉게 부어오른 눈가에 살짝 불 규칙한 숨. 그제야 새삼 맞물린 몸 사이로 극단적이리만치 빠른 박동이 느껴졌다.
백옥 같던 새하얀 피부가 아찔 하도록 달떠 있었다.
내 목덜미에 살포시 손을 얹은 엘이 고개를 틀어 얼굴을 묻었다. 목덜미에 닿는 뜨끈한 온기에 예 민한 감각이 살짝 튀어 오르긴 했 으나, 그가 내 목에 얼굴을 묻는
것은 예삿일이었기에 반항 없이 서 있을 때였다.
" 아."
붉은 입술 새가 살짝 벌어지고, 고른 치열이 여린 살을 잘근 베어 물었다. 머리카락에 아슬아슬하게 가려질 위치에, 피부엔 혼적이 남 겠지만 통증에 무딘 내겐 약간 따 가운 정도로 그친 강도.
엘의 돌발 행동에 놀란 나는 아 픈 신음보단 탄식에 가까운 숨을 뱉었다.
천천히 내 목에 묻었던 얼굴을 든 그가 짙고 길게 숨을 내쉬었 다. 뜨거운 숨결이 혼적을 간지럽 혔다.
처음 느껴 보는 이상한 감각에 멍해진 채로 목울대를 울렁일 때, 엘이 나를 올려다보며 사르르 눈 꼬리를 휘었다. 백합이 만개하는 것만 같았다.
"이건 약속의 증표로 해요. 금방 사라지겠지만...... 상징적인 의식 이었다고 하죠."
이 흔적이 사라져도 나는 잊으 면 안 돼요.
나직한 속삭임이 지나치게 매혹 적이다.
그는 한 철 지나가고 잊힐 꽃이 아닌, 계속 나를 찾아와 뒤혼들 계절이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