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충직한 검이 되려 했는데-152화 (152/254)

152 화

"그럼 이제 슬슬 나갈까요? 신 전 구경을 시켜 주고 싶은데."

조금 멍한 상태로 엘을 올려다 보고 있었을까, 붉은 혼적을 엄지 로 몇 번 쓸던 그가 묘한 분위기 를 단번에 갈무리했다. 태연한 듯 웃었지만 그의 눈가는 여전히 붉 은 채였다.

무언가 억누르고 있는 것 같다

는 느낌이 없잖아 있었지만, 나 또한 이 분위기가 간질거리면서도 민망했기에 고개를 끄덕였다.

아찔한 백합 내음이 가득한 정 원을 가로질러 출구로 향했다. 나 보다 걸음을 빨리해 앞장서서 가 는 엘의 긴 하늘빛 머리칼 틈새로 언뜻 보이는 양 귀 끝이 붉었다.

엘이 정원을 나섰다. 엘에게 가 려져 앞이 보이지 않아 엘만 따라 가고 있을 때, 문득 엘이 걸음을

멈추었다.

나는 엘의 얼굴도 보지 않았음 에도 그의 분위기가 싸하게 식었 음을 느낄 수 있었다. 가까운 거 리에 있는 익숙한 기운도.

나는 지그시 입술을 깨물어 불 쑥 튀어나오려는 웃음을 참고 슬 쩍 엘의 어깨 너머로 미어캣처럼 머리를 내밀었다.

"으...... 저 수줍은 표정 뭐 야...... 완전 싫어......

내 시야를 사로잡은 것은, 엘을 보며 봐선 안 될 걸 본 사람처럼 얼굴을 잔뜩 짜부라뜨린 채 경멸 스러운 표정을 짓고 있는 율리안 이었다.

'오랜만이네.'

통신구로 연락하긴 했으나 실제 로 보는 것은 정말 오랜만이었다. 반가움에 인사를 하고 싶기도 했 지만 그보단 이 상황에 대한 흥미 가 더 컸기에, 율리안이 날 발견 하지 못하게 존재감을 죽이고 불 구경하듯 상황을 관전했다.

"너 자비로운 신의 대리자가 사 람들 안구 건강은 신경 안 쓰냐? 아무 데서나 그런 끔찍한 표정을 짓고 있으면 지나가던 사람이 봉 변을 당하잖아! 양쪽 다 훤하던 내 시력이 널 보고 급격히 떨어졌 다! 눈앞이 뿌옇게 됐을 정도야! 물론 그 덕분에 네 얼굴을 희미하 게 볼 수 있는 건 다행이지만!"

조잘조잘 성을 내는 율리안은 독수리 무서운 줄 모르는 참새 같 았다. 나는 그 모습에 웃음을 터 트리지 않기 위해 입 안쪽 살을

깨물어야 했다.

"......율리안 대신관."

"뭐야, 애써 누그러트린 것 같은 그 말투는. 네 인성에 이렇게 반 응할 리가 없는데. 설마...... 카슈 미르 공녀님이라도 만났냐?"

분노를 꾹꾹 억누르는 엘에게로 율리안은 시원하게 기름을 부었 다.

끝에 내 존재를 짐작해 버린 그 를 보며, 나는 율리안이 하루살이 불나방인 데다 지옥의 아가리를

가진 미친놈이지만 짐승처럼 날카 로운 감을 가졌음을 다시금 느꼈 다. 율리안은 미친 모습만 보이다 가도 가끔 예리해질 때가 있었다.

"혀가...... 그렇게 자유분방해서 야 오래 달려 있을 수 있겠나?"

크게 심호흡을 한 엘이 낮게 뇌 까렸다. 상당히 살벌한 말이었지 만, 이건 그로서 상당히 억누르고 하는 말임을 꾹꾹 눌려 있는 그의 기운에서 느낄 수 있었다.

'이러면 안 되는 걸 알지만

이 상황은 꽤 흥미진진했다.

"친구라고 혀의 안위도 염려해 주는 거냐? 너만 가만히 있으면 내 혀는 100살 돼서 지팡이 짚고 다닐 때도 언제든 네 볼따구를 와 랄랄라 해 줄 수 있을 정도로 멀 쩡할 테니 걱정 말라고."

나는 율리안의 신들린 말솜씨와 내일을 생각하지 않는 배짱에 감 탄을 금치 못했다. 제국인이 말을 잘한다는 가설의 증거 자료로서

율리안의 입을 제출해도 될 것 같 았다.

"저번엔 감자밭에 머리만 남겨 두고 묻어 놨었다만...... 이번엔 거꾸로 뒤집혀서 감자밭에 머리만 묻히고 싶나? 그러고 쑥쑥 자라 보지 그래? 세 시간 동안 그렇게 두면 머리에 피가 쏠려 빨간 감자 가 되겠군. 그럼 머리를 잘라 서......

"율리안! 오랜만입니다!"

험악한 말을 짓씹듯 뱉는 엘은 내게 어색했다. 그의 모든 모습에

익숙해지고 싶었기에 우선 지켜보 고 있었지만 이대로 내버려 뒀다 간 오늘 이후로 율리안을 볼 수 없을 것 같았다.

나는 재빨리 엘의 말허리를 자 르고 쑥 얼굴을 내밀었다.

엘이 워낙 키가 큰 탓에 율리안 에게 내 모습을 보여주려면 발뒤 꿈치를 가파르게 들어야 했다. 내 목소리에 흠칫한 율리안이 주변을 두리번거리다, 엘의 어깨 너머로 빼꼼 튀어나온 나를 발견했다.

그의 표정은 어둠 속에서 한 줄 기 빛을 본 사람 같았다.

"공녀님......! 드디어 이 악마 새 끼를 벌하러 오셨군요......!"

다다다 달려온 율리안이 엘을 사이에 둔 채 나를 격하게 맞이했 다. 율리안은 잠시 엘을 밀치기 위해 끙끙거리기도 했지만, 석상 처럼 우뚝 선 엘을 이기지 못했 다. 그는 엘이란 벽을 사이에 둔 채 소통하는 것에 만족하기로 한 것 같았다.

"율리안...... 그...... 많이 마른 것 같습니다......

나는 율리안이 불쾌하지 않도록 최선을 다해 동정과 측은지심을 제거하고 말하려 했다. 허나 통신 구를 통해 본 것보다 훨씬 더 처 참한 그의 꼴에 안쓰러움이 깃드 는 건 불가항력이었다.

"공녀님...... 컥...... 커흑...... 따흑! 꺄흐흑!"

내 한마디에 감정의 봇물이 터 진 것처럼 연보라색 눈이 울망거

렸다. 울음을 참으려는 듯 숨을 꺽꺽 들이켜던 율리안은, 결국 제 팔에 얼굴을 묻고 소란스럽게 울 기 시작했다.

"아니, 율리안, 울지 말고...... 엘은 잠깐 나와 보세요."

다 큰 성인이 신전을 눈물 속에 빠뜨려 버릴 듯 우는 모습을 직접 보는 건 무척 당황스러운 일이었 다. 나는 엘을 밀어내고 율리안을 감쌌다. 엘은 잠시 저항하는 듯싶 었으나 금방 물러섰다.

"제가, 히끅! 얼마나, 컥, 수모 를, 겨, 겪었는지......!"

"숨은 쉬면서 말하세요......

잉잉거리는 율리안의 눈물을 대 강 손수건으로 닦아 주며 타일렀 다.

손수건을 쓱 낚아채 허락도 안 받고 코를 흥 푸는 모습에서 짜게 식긴 했지만, 원채 여러 바퀴 돈 인물이니 그러려니 하기로 했다.

"저 자식 만행을 책으로 써서 위로 쌓으면 그 길이가 가히 라의

처소에 닿을 정도일 겁니다! 저 자식 저거 안 되는 놈이라니까요! 저처럼 착하고 성실한 대신관은 태양계를 뒤져도 못 찾을 텐데! 나는 저 자식을 위해 개처럼 일했 는데! 그런 저를 얼마나 괴롭혔는 지 몰라요!"

내 뒤에 쓱 숨은 율리안은 호적 메이트의 잘못을 부모에게 고자질 하는 꼬마처럼 엘을 삿대질하며 왕왕거렸다. 율리안을 응시하는 엘의 은빛 눈동자에 섬뜩한 살의 가 스치고 지나갔다.

'이대로...... 둬도 되나?'

나는 잠시 갈등에 빠졌다. 분위 기를 보아선 당장 내일에 율리안 이 사제들을 모아 쿠데타를 일으 켜도, 그와 동시에 엘이 율리안을 쥐도 새도 모르게 신전 뒷산에 묻 어 버려도 이상하지 않을 것 같았 다.

'하지만 둘이 아주 오랫동안 친 구로 지내왔다고 했으니...... 그냥 이게 둘이 사는 방식 아닐까?'

애초에 엘과 율리안이 서로에게

다정히 안부를 묻는 모습 같은 건 상상도 되지 않았다. 둘은 애증의 관계고, 그냥 이렇게 사는 것이 그들의 방식이 아닌가 싶었다.

"공녀님! 얼른 저 사악한 놈을 혼내 주세요! 저 자식은 공녀님 말만 듣는단 말입니다!"

무서우면 말을 안 하면 될 텐데, 율리안은 내 등 뒤에 숨어 벌벌 떨면서도 입만큼은 아주 신랄하게 놀리고 있었다. 엘의 표정이 한없 이 싸늘해졌다. 고개를 돌려 힐끔 율리안을 확인한 나는, 짜게 식은

표정을 지었다.

"엘도 그렇지만 솔직히 율리안 도 좀......

"따흐흑!"

길게 덧붙이지 않고 절제된 떨 떠름함을 내비치니 율리안이 두 손에 얼굴을 묻었다. 우는 소리를 내면서도 반박은 못 하는 걸 보니 스스로가 미친 불나방 같다는 걸 자각하고 있는 모양이었다.

"엘. 율리안을 너무 괴롭히지 마 세요. 친구지 않습니까."

그래도 사람 얼굴이 저 꼴이 될 정도면 상당히 시달렸음이 확실했 기에, 엘에게 한마디 얹었다. 엘 은 주인에게 혼난 강아지처럼 눈 매를 축 늘어뜨리고 애처로운 표 정을 지으며 고개를 끄덕였다.

"율리안은...... 살고 싶은 사람 인 것치고는 사용하는 화법이 너 무 거칠지 않습니까?"

"허엉......

울고 있는 사람에게 뭐라고 하 기가 참 그래서 내가 할 수 있는

한 말을 돌려서 지적했으나, 율리 안은 섭섭한 것처럼 또다시 울기 시작했다. 나는 사람을 달래는 것 에 재주가 없었기에 상당히 곤란 할 때였다.

"작작하고 이리 와."

나를 힐끔 보더니 눈매를 서늘 하게 세운 엘이 손을 훅 뻗어 율 리안의 목덜미를 낚아챘다. 율리 안은 잠시 저항하는 듯싶더니 엘 에게 질질 끌려갔다.

"슈슈. 못 볼 꼴을 보여 줘서 정

말 미안해요."

"내가 못 볼 꼴이냐? 이 나쁜, 읍......!"

내게 사과하던 엘이 제 주머니 에서 손수건을 꺼내더니 분노한 율리안의 입에 처넣었다. 나는 입 이 막힌 율리안이 소리 없는 아우 성을 지르는 꼴을 바라볼 수밖에 없었다.

"신전을 구경시켜 주고 싶었는 데 날도 곧 저물 것 같고, 이 새 끼, 아니, 율리안 대신관도 문제 가 있는 듯하니 먼저 가 봐야 할

것 같아요."

이별을 고하는 엘은 가히 피를 토하는 듯한 표정을 짓고 있었다. 얼떨결에 고개를 끄덕인 나는, 내 게 살려 달라는 눈빛을 보내는 율 리안의 눈이 엘의 큰 손에 막히는 것을 보며 조금 걱정스러워졌다.

"엘. 살인은 안 됩니다."

나는 진지했다.

내가 단호하게 말하자 잠시 멈 칫한 엘이 입꼬리를 올렸다. 평소

와는 어딘가가 다른, 작위적인 미 소였다.

"노력해 보도록 하죠."

"읍! 으읍!"

"그럼 이만."

반지가 준비되면 연락하도록 할 게요.

엘이 애처롭기 짝이 없는 표정 으로 속삭였다. 그는 내게로 멀어 지는 발걸음을 떼면서도 이별이 싫음을 온몸으로 표현하듯 나를 몇 번이고 돌아봤다. 미친 듯이

꿈틀거리는 율리안을 으스러져라 겁박한 채로.

"안녕히 가십시오......

나는 조금 멍한 채로 두 사람을 손 흔들어 배웅해 주었다. 내일 율리안의 부고를 듣지 않길 바랄 뿐이었다.

잠시 두 사람이 떠난 곳을 바라 보던 나는 텅 빈 복도 너머 창문 으로 시선을 옮겼다. 꼿꼿이 떠 있는 것이 힘들었을까, 쉬러 가려 천천히 기울어지는 태양의 빛에

하늘이 붉게 물들었다.

'집에 가자.'

탈이 많았던 탓에 정신이 피곤 했다. 나는 저물어 가는 태양을 바라보며 작게 웃었다.

나는 신전을 나서서 저택으로 향했다. 마차는 언제든 부를 수 있었으나, 오늘은 잠시 걷고 싶었 다.

'슬슬 수도가 북적거리기 시작하 는군.'

검술 대회가 얼마 남지 않은 시 점이었으니 이해가 갔다.

딱 봐도 먼 길을 온 여행자들이 수도 거리를 활발하게 만드는 걸 지켜보다 외진 골목길로 발걸음을 돌렸다. 저택으로 더 빠르게 가는 지름길이었다.

내 뒤를 계속 따라오는 발걸음 소리에 얼핏 웃기도 했다.

"어이, 거기 귀족 나으리."

그리고 외진 골목길 앞에서 나 를 부르는 목소리는 내 예상에 없 던 것이었다.

나는 떨떠름하게 눈을 깜빡이며 목소리의 주인을 확인했다.

총 네 명으로 이루어진 무리는 딱 봐도 질이 좋지 않은 패거리였 다. 그중 나를 부른 칙칙한 쥐색 머리의 남자가 히죽 웃었다. 너무 뻔한 레퍼토리가 펼쳐질 것 같단 예감에 미간을 좁혔다.

"주머니가 꽤 무거워 보이는데, 가벼워지게 도와줄까?"

내 예상을 한 치도 벗어나지 않 은 대사를 날린 남자가 패거리와 함께 내게 다가왔다.

'어떻게...... 제압하지?'

나는 고민에 빠졌다. 네 사람 다 무력이 조금도 없는, 몸만 불린 불량배들. 내가 조금이라도 힘 조 절을 실패하면 생을 달리할 수 있 었다.

검엔 손도 대지 않은 채 주먹을 들까 말까 고민하고 있을 때였다.

"컥."

살기가 순식간에 골목을 집어삼 켰다. 내게는 조금의 영향도 주지 못하나, 무력의 경지가 없는 불량 배들의 의식을 끊기엔 충분한 농 도였다. 내게로 다가오던 패거리 가 줄 풀린 마리오네트 인형처럼 바닥으로 픽픽 쓰러졌다.

아주 잠시 그들에게 시선을 둔

나는, 이내 익숙한 압생트 빛 살 기의 주인을 향해 고개를 돌렸다.

"오랜만이구나."

목소리가 조금 떨리지는 않을까 걱정했지만, 다행히 태연하고 나 긋하게 잘 뻗어져 나왔다. 나는 내 두 눈에 담긴 그리운 인영을 향해 눈꼬리를 휘었다.

내 목소리에 검은 로브를 두른 남자가 조용히 후드를 벗었다. 익 숙하지 않은 색채의 머리칼이 바 람결에 흩날리는 모습을 본 나는

조금 놀란 채로 눈을 크게 떴다.

솔라티네 황가의 일원들은 대대 로 금발로 태어나듯, 아타라 왕가 또한 유전되는 색채가 있었다.

아타라 왕가의 일원들은 대대로 백발로 태어났다.

무엇이든 받아들일 수 있는 도 화지. 무너진 잔해에 남은 황폐한 잿더미. 달빛의 색채.

수많은 의미를 아우르는 가장 광활한 색, 백색이 바로 아타라

왕가를 상징했다.

'이게 네 진짜 모습이구나.'

나는 목울대를 울렁였다. 익숙한 베이지색이 아닌, 한없이 깨끗한 백색의 머리칼은 지는 태양빛을 받아 윤슬처럼 반짝였다. 그 아득 한 백색을 오직 저를 위한 색인 것처럼 익숙하게 소화해 내는 그 를 보며, 나는 작게 읊조렸다.

" 레오."

압생트가 번뜩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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