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53 화
"......머리 예쁘네."
조용히 오가는 시선.
무거운 침묵 끝에 나는 작게 말 했다. 이 침묵을 끊어내기 위해 조금 뜬금없이 뱉긴 했지만 분명 진심이었다.
"이게 내 원래 머리야."
눈을 살짝 내리깐 레오가 제 앞 머리를 쓱 넘겼다. 흰 눈처럼 하 얀 머리칼이 허공에 날렸다. 그렇 게 잘 지내진 못한 건지, 오랜만 에 듣는 그의 목소리는 이전보다 거칠어져 있었다.
"연락, 못 받아서 미안."
"한동안 일어나지 못한 것도 이 유지만...... 사실 일어나고도 연락 할 엄두가 안 나 하지 못했어. 변 명은 안 하마."
할 말은 많았지만 우선 사과가
먼저였다. 내가 테러를 막고 쓰러 진 뒤, 가장 많은 연락을 한 사람 중 하나가 바로 레오다. 깨어난 이후에도 그 필사적인 연락에 한 번도 답하지 않은 것은 변명의 여 지 없이 내 잘못이었다.
"나는 겁이 많아서 네게 실수를 한 뒤 다시 마주하기가 두려웠던 거야."
감정을 읽을 수 없는 눈으로 날 내려다보는 레오에게 조용히 토해 낸 건 날것 그대로의 진심이었다.
깨어난 이후 모두에게 연락을 못 하긴 했지만, 레오에겐 특히나 엄두조차 나지 않았다. 레이샤의 유품을 앞에 두고 그와 싸웠던 일 때문이었다.
'지금 지그문트를 따라가는 건 안 돼. 무고한 사람이 죽는 건 용 납할 수 없어.'
'하...... 진짜 미치겠군. 카슈미 르, 너는 내게 레이샤가 얼마나 큰 의미인지 몰라서 그래. 레이샤 는 나한테 그냥 유모 정도가 아니 라고...... 나는 반드시 레이샤의 유품을 찾아야 해. 제발...... 가게
해 줘......
바로 직전의 만남에서 나와 레 오는 인가로 도망친 지그문트를 쫓는 것을 두고 대립했다. 레오는 마을에 오러를 날려 쑥대밭을 만 들어서라도 레이샤의 유품을 되찾 고자 했고, 나는 민간인들의 안전 을 위해 레오를 막아섰다.
'나는 방관 못 흐H. 가고자 한다 면 날 쓰러트려.'
레오를 막아서 인가를 지켰던 것엔 후회가 없다. 하지만 그를
막아섰던 과정을 되새길 때면 뜨 거운 용암 같은 후회가 울컥 솟아 내 목구멍을 틀어막았다.
'그렇게 거칠게 하면 안 됐는 데.'
안 그래도 상처 많은 아이를 그 리 사납게 내쳐선 안 됐다. 검을 내세우는 게 아니라 안아 줬어야 했다. 돕지는 못할망정 막아서서 미안하다 달래고 다른 방법을 찾 을 수 있도록 도왔어야 했다.
나는 저지르고 나서야 내가 그
에게 너무 매정했음을 깨달았다.
'우습지. 아직도 실수하며 배우 고 있으니.'
전생과 현생을 합하면 살아온 생이 50년이 넘는다. 이 정도 살 았으면 실수는 안 하고 살 법도 한데, 나는 여전히 실수하고 후회 했다.
얼마나 살아야 돌이킬 수 없는 실수 같은 건 하지 않을지 의문이 었다.
"너와 좋지 않게 헤어지고 줄곧 무서웠어. 다시 만난 네가 이젠 내가 싫어졌다고 할까 봐. 연락할 수가 없었어."
'나, 네가 너무 미워. 그런데, 미 운데, 죽어도 싫어할 수는 없어 서, 널 싫어하지 못하는 내가 너 무 혐오스러워......
그날, 레오는 나를 싫어할 수 없 다고 했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나는 두려웠다.
사람의 마음은 바람에 속절없이
흩날리는 가벼운 깃털 같은 것. 시간이 지난 지금은 매정한 내게 정나미가 다 떨어졌을지도 모를 일이었다.
'하지만 두렵다고 외면하기엔 너 무 소중한 사람이니까.'
한 발자국 나설 수밖에 없는 순 간이 있다. 더 큰 것을 위해, 주 저되더라도 나서야만 하는 순간이 있었다.
나는 천천히 발걸음을 옮겨 레 오 앞에 섰다. 연둣빛 눈동자가
짙게 가라앉은 채로 번뜩였다. 나 는 레몬 향 가득한 공기를 크게 들이쉬곤 눈매를 늘어뜨렸다.
"나를 용서해 줄래."
무거운 침묵이 흘렀다. 레오는 입매를 굳힌 채 읽을 수 없는 눈 으로 나를 응시하고 있었다. 나는 그 시선을 피하지 않고 그의 대답 을 기다렸다.
"......나, 오늘 무릎 꿇을 걸 각 오하고 왔는데."
그리고 레오의 입에서 흘러나온 것은 예상치 못한 말이었다.
"그렇게 헤어지고 네가 나한테 실망했을 것 같았어. 더는 나와 만나지 않겠다고 할까 봐, 안 받 아 주면 무릎 꿇고 붙잡기라도 할 각오로 왔는데......
지는 해의 역광에 의해 레오의 얼굴에 그림자가 드리웠다. 어두 운 낯빛 아래, 그는 헛웃음을 뱉 으며 얼굴을 일그러뜨렸다.
"네가 사과하면 어떡해.
불어온 바람이 하얀 머리칼을 흩날렸다. 그 바람에 휘말린 것일 까, 압생트 빛 눈동자도 혼들리는 수면처럼 일렁였다.
나는 레오의 눈에서 물감처럼 퍼지는 안도를 보았다.
그때서야 깨달았다. 그가 나를 마주한 뒤로 계속해서 숨기려 하 던 감정은 바로 두려움이었음을.
"너와 떨어져 있을 때, 네가 한 말을 생각해 봤어. 생명을 소중히
여기라고 한 거 말이야. 계속 생 각해 봤지만, 역시 나는 이해하기 힘들어."
살짝 쉰 낮은 목소리가 담담히 고백했다.
나는 묵묵히 고개를 끄덕였다. 그에겐 그가 살아온 방식이 있었 다. 내 방식을 단번에 이해해 주 기를 기대해선 안 됐다.
또다시 내 방식을 정면으로 반 박당해도 흥분하지 않겠다고 각오 하고 있을 때.
"하지만 이해할 수 없고 어려워 도, 네 방식이라면 나는 배워 보 고 싶어."
레오는 붉은 입술을 달싹여 내 게 새로운 길을 속삭였다.
나는 눈을 크게 뜬 채 레오를 올려다보았다.
이곳은 외진 골목길이라 가로등 이 없는데, 아직 하늘에 별은 떠 오르지 않았는데, 그의 두 눈은 압생트에 섞인 설탕 결정처럼 반
짝이고 있었다.
"나, 많이 더딜 거야. 오랫동안 너를, 네 신념을 이해하지 못할 가능성이 높아. 함께하다 보면 아 마 답답하겠지. 우리는 무척 다르 니까. 하지만, 그래도......
레오가 허리를 굽히며 나와 시 야를 맞췄다. 키가 큰 그를 앞에 둔 나는 그늘에 잠기게 되었지만, 두렵다기보단 안온했다. 그늘을 만든 주체가 나를 절대 해치지 않 으리라는 걸 알고 있었으니까.
"내게 가르쳐 줘. 내 방식대로 날 길들이고, 너로 물들여 줘."
속삭이는 낱말들이 지나치게 농 밀했다. 짧게 숨을 들이쉰 레오 는, 그날처럼 내게 손을 뻗었다.
그날의 그가 겹쳐 보였다. 제게 서 물러서는 날 보고 당황한 듯 손을 뻗던 레오. 내밀어진 손 위 로 붉은 피가 아른거려 나는 그만 그 손을 내치고 말았었다.
"이번엔 내치지 마."
레오 또한 그 날을 떠올린 듯 작게 으르렁거리며 뇌까렸다. 평 범한 이가 들었다면 오소소 소름 이 돋았을 살벌한 말투였다. 얼핏 듣기엔 명령조였으나, 나는 알았 다. 그가 사람을 대하는 것에 무 척 서툴러서 그렇다는 걸.
그는 어려서부터 그랬다. 상처 입고 세상을 불신하며 모든 것에 잔뜩 경계하는 아기 고양이 같았 다.
이젠 자라서 아기 고양이보단 거대한 백사자 한 마리 같지만,
그래도 여전했다. 그는 부드럽게 말하는 방법도, 사람을 진심으로 대하는 방법도 잘 몰랐다.
그의 말에선, 방어막처럼 두껍게 두르고 있는 가시 붙은 표피를 조 심스레 가른 뒤에야 진심을 볼 수 있었다.
"......옛 전설에선 사람의 마음 이 각자 모양이 다른 각진 도형이 라고 했대."
나는 하얗고 긴 손을 응시하며 천천히 말문을 열었다. 내가 그의
손을 잡지 않으니 레오는 일순 상 처받은 것 같았으나, 반문 없이 조용히 내 말을 경청했다.
"다른 사람과 함께한다는 건 마 음이 맞물려 돌아가는 것과 같아 서 서로를 상처 입히게 된다는 거 야."
각진 도형 두 개가 톱니바퀴처 럼 맞물려 돌아가다 보면 필시 서 로를 닳게 할 수밖에 없었다. 누 군가와 함께한다는 건 반드시 상 처받게 될 것이라는 것과도 같았 다.
"너와 내가 맞물리면 나도, 너도 분명 다치게 되겠지. 특히나 너와 나는 무척 다르니까. 함께 맞춰 가는 과정이 많이 아플 거야."
레오가 내게 전적으로 맞춰 준 다고 해도, 그 과정은 쉽지 않을 것이다. 우리는 더 이상 뭣도 모 르는 어린애들이 아니었다. 서로 의 신념과 삶의 방식이 있는 어른 이었다.
사람의 생명을 소모품쯤으로 취 급하는 레오와 함께하다 보면 분
명 내 신념이 꺾일 때도 있을 거 고, 생명에 집착하는 나와 함께하 다 보면 레오가 자신의 방식을 꺾 어야 할 때도 올 거다.
"그래도, 계속해서 맞춰가다 보 면 언젠가 너와 나 둘 다 둥근 도 형이 되어 서로를 이해할 수 있지 않을까."
사람과 사람이 맞춰가는 과정은 까다롭고도 고단해 차라리 혼자 사는 게 낫다 싶기도 했다.
허나 신이 인간을 창조할 때 하
나가 아니라 둘을 만든 것은, 애 초에 인간이 혼자 살 수 없는 존 재이기 때문이었다.
각진 도형의 맞물림은 처음엔 공멸의 길 같지만, 시간이 지난 뒤엔 얘기가 달라졌다. 각진 것이 계속 닳아지다 보면 분명 둥글어 질 테니.
시간이 걸릴지라도, 분명 그런 때가 올 거라고 생각했다.
가까워진 거리에서 미묘한 파동 이 느껴졌다. 예민한 감으로만 느
낄 수 있는 이 파동이 내 심장소 리일지, 레오의 심장소리일지 모 를 일이었다.
밤의 향취에 섞인 레몬 향, 그에 게서 그윽이 풍겨오는 농밀한 분 위기, 조금 굳은 눈앞의 몸, 나를 온전히 담아내는 압생트 빛 눈동 자.
나는 느리게 눈꼬리를 휘며 레 오의 손을 맞잡았다. 약간 서늘한 온도가 기분 좋았다.
"서로를 배워 보는 것으로 해.
너만 나를 배워 가는 건 불공평하 잖아. 내게도 널 가르쳐 줘. 널 알고 싶은걸."
레오와 떨어져 있었던 5년. 나 는 그 간격 동안의 그를 알고 싶 었다.
"......그 말, 내 마음대로 해석해 도 돼?"
잠시 침묵하던 레오가 나직하게 속삭였다. 나를 응시하는 두 눈이 위험하게 번뜩였다. 조금 어리둥 절해진 내가 고개를 기울이고 있
었을까, '하' 하고 웃은 그가 맞잡 은 손을 꽉 깍지 껴 잡았다.
"너 지금 나한테 프러포즈한 거 지."
예상치도 못한 말에 나는 눈을 크게 떴다.
프러포즈. 상대에게 결혼하기를 청하는 것.
함께 맞춰 가자고는 했지만, 그 게 결혼하자는 뜻은 아니었다. 애
초에 나는 결혼할 생각도 없는 데 다, 결혼은 사랑하는 사람과 해야 하는 거니까.
상황을 이해하지 못한 내가 고 장 난 채로 서 있을 때, 레오가 씨익 웃으며 한쪽 무릎을 꿇었다. 프러포즈하는 사람처럼.
"그래. 함께해 보자. 누구 하나 질려서 나가떨어질 때까지 지긋지 긋하게 붙어 먹어보는 거지. 물론 내가 나가떨어질 일은 없으니 우 리가 떨어지게 된다면 너로 인함 이겠지만, 그냥 도망가게 두진 않
을 거야. 너를 배우고, 너를 나로 물들여서, 나 또한 네게 필수불가 결이 되고 싶어. 나만 너를 필수 불가결로 삼은 건 불공평하잖아."
레오는 분명 유쾌한 투로 말하 고 있었으나, 그 목소리 안에 담 긴 끈적한 감정은 숨길 수 없었 다. 꿀을 잔뜩 탄 레몬차를 엎질 러 달콤한 향이 퍼지며 끈적거리 는 느낌이었다.
레오가 나를 올려다보았다. 그 맹목적이고 집착적인 시선에 피부 가 타오를 것만 같았다. 서늘한
손과 맞잡아 얼핏 차갑던 내 손에 도 열기가 오르기 시작했다. 그런 손등 위로, 레오는 길게 입술을 묻었다. 여전히 나를 직시하며.
"꼭 혼인을 할 필요는 없지만 함께하는 데 가장 좋은 방법이 혼 인으로 연을 맺는 것이지. 너먼 괜찮다면, 나는 언제든 백정장을 입을 준비가 되어 있어."
따라가기 힘든 대화 주제에 아 주 제멋대로 말을 하는데도 어쩐 지 미워할 수가 없다. 거침없이 혼인을 거론하는 레오를 멍하니
보고 있었을까, 나는 눈가를 움찔 하며 짧게 신음을 뱉었다.
" 아."
내 거친 손, 그중에 오른손 약지 가 붉은 입술 틈새로 모습을 감추 었다. 후끈한 숨결이 손가락을 아 찔하게 스치고, 새하얀 치열 사이 에 꾹 물렸다. 물리는 건 살짝 따 갑고 그칠 정도였으나, 손끝에 눌 리는 말캉한 혀나 손가락을 감싼 온기가 기분을 이상하게 만들었 다.
"임시 반지. 왼손 약지엔 이미 반지가 있어서 못 하지만, 약지라 는 것에 의의를 두자고."
내 손가락을 문 채 반쯤 감긴 느른한 눈으로 나를 응시하던 레 오가 천천히 입을 떼어 냈다. 장 신구 하나 없던 오른손 약지 끝엔 이빨 자국이 남아 있었다. 반지를 연상케 하는 자국이.
"왕후가 되어 줄래, 슈슈?"
날 선 눈꼬리가 곱게 휘었다. 어 두워진 하늘에 떠오른 보름달이
스포트라이트처럼 레오를 비추었 다. 달빛에 잠긴 그의 모습은, 인 간이라고는 믿기 힘들 정도로 신 비롭고 아름다웠다.
어이없는 상황에, 그리고 눈앞에 찬란한 광경에 말문이 막힌 내가 아무 말이 없자 레오가 느리게 고 개를 기울였다. 그의 굵은 손끝이 약지의 자국을 사뿐히 더듬었다.
"왕후가 되기 싫어? 그럼 네가 국왕 해. 내가 국왕 부군 하지."
아무런 망설임도 없이 내 손에
왕홀을 쥐여준, 아타라의 피의 제 왕 알렉산드로 아타라가 환히 웃 었다.
"혼수는 왕국이면 되나?"
얼핏 장난 같은 말투. 허나 조금 도 장난 같지 않은 들끓는 눈빛.
마녀의 솥에서 신비로운 형광 연둣빛 독극물이 끓어올랐다.
알렉산드로 아타라는 기회를 놓 치지 않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