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충직한 검이 되려 했는데-154화 (154/254)

154 화

"너...... 왕국을 막 팔아먹어도 되는 거냐?"

나는 레오를 보며 미간을 좁혔 다. 걸리는 말은 많았으나, 가장 걸리는 것은 이것이었다.

'함부로 왕 자리를 넘기는 인간 이 왕을 하고 있어도 되는 건가.'

나는 진심으로 아타라 왕국의

미래가 걱정되기 시작했다.

"......지금 할 말이 그거야?"

"조용히 하고 이리 와서 앉아 봐라. 일국의 왕이 함부로 그런 말을 해?"

레오가 믿기지 않는다는 표정으 로 되물었으나, 나는 심각했다.

땅에 털썩 앉은 나는, 나가서 훨 훨 비행을 하다 온 자식을 마주하 는 부모의 표정을 짓고 레오를 날 카롭게 바라보았다.

"세습 군주국에선 군주의 역할 이 크다. 군주가 '성군이냐, 암군 이냐'에 따라 국가의 존망이 갈린 다. 자고로 군주는 한마디를 할 때도 마수를 상대할 때처럼 신중 해야 하는 법이다. 너 그러다 도 박판 담보로 왕국 넘기겠다? 너 는 일국의 왕으로서......

"잠깐, 잠깐!"

나는 전생에 전쟁학 교수를 앞 둔 전쟁학 박사 학위 소유자였다. 전생의 기억이 희미한 가운데 전 쟁학만큼은 무서울 정도로 또렷하 게 기억하고 있었다. 그리고 전쟁

학을 공부하면 수많은 군주들의 군상과 제왕학, 군주학은 자연스 레 알게 되었다.

나는 군주 자리를 쉽게 여긴 이 들이 모두 나라를 시원하게 말아 먹었음을 기억하고 있었다.

'내 앞에서 나라를 팔아넘겨?'

전공으로 시비가 걸린 기분이었 다. 입 앞에 두 손을 기도하듯 모 은 채 전장에 출전하는 장수의 기 세로 일장 연설의 발동을 걸 때, 레오가 말허리를 끊어먹었다. 나

는 레오를 게슴츠레한 눈으로 꼬 나보았다.

"말이 왜 그렇게 돼? 지금 말의 논점은 결혼......!"

"논점보다 더 중요한 건 군주의 태도다! 너 그렇게 쉬운 마음으로 국왕을 하고 있는 거냐!"

나는 버럭 소리쳤다. 눈을 땡그 랗게 뜨고 두 손을 든 채 상황을 이해하지 못하던 레오는, 이내 맞 불을 놓듯 빽 소리쳤다.

"내가 아무한테나 이런 말 하는

줄 알아? 너니까, 너한테만 이런 소리 하는 거란 말이야! 바보!"

레오가 두 손을 주먹으로 꽉 쥐 었다. 흥분한 건지 살기가 옅게 깔렸다.

그는 경멸의 눈빛으로 상대방을 깔아보며 '더럽군' 같은 말을 뱉 는 것이 어울릴 얼굴로 '바보' 같 이 순수한 욕설을 뱉었다. 그의 입술이 잠시 쌍욕 비슷한 모양으 로 달싹이긴 했지만 말이다.

'아직 어리긴 어리군.

레오는 내 신체 나이보다도 1살 이 적었다. 나이 많고 능숙한 사 람들만 상대하다 감정에 솔직한 그를 보니 누그러지는 기분이었지 만, 나는 다시금 엄한 표정을 지 었다.

'친하다고 왕국을 넘긴다니, 그 게 말인가.'

나는 그가 정에 휘말려 일을 그 르치지 않기를 바랐다.

"너 설마 친한 친구라고 보증

서 주는 거 아니지?"

" 미쳤어?"

레오가 난폭하게 반문했다. 그가 다 큰 성인이라는 건 알고 있었지 만, 내 머릿속엔 세상물정 모르던 어린 그의 모습이 깊게 각인되어 있었기에 걱정이 불쑥 앞섰다.

"아무리 나라고 해도 왕국을 준 다는 소리 같은 거 함부로 하면 안 돼."

나는 푹 한숨을 쉬며 흰 머리칼 을 쓰다듬었다. 손가락 새로 감겨

드는 흰 털은 얇고 부드러웠다. 나는 나를 향해 번뜩이는 압생트 빛 눈동자를 안쓰럽게 바라보았 다.

'그래...... 애가 철이 없을 수도 있지...... 아니지...... 왕이 철이 없으면 안 되긴 한데...... 얜 자란 환경이 열악했으니까......

나는 레오의 어린 시절을 떠올 렸다. 레이샤에게 교육을 받았겠 지만, 그건 세상 물정을 배웠다기 보단 생존법 속성으로 익힌 것에 가까웠을 터였다.

'너, 네 약값으로 얼마가 드는지 는 알고 있냐?'

'천 골드-백 골드는 평민 가족 의 한 달 생활비다-? 아니, 그렇 게 유세 떠는 걸 보아 만 골드는 되나 보지?'

'......처음부터 가격을 너무 높게 부르는 거 아니냐? 센스 없기는. 그 정도 가격이면 네 상처는 침 발라서 치료해야 했어. 너 천 골 드가 얼마인지는 알고 있냐?'

'우리 집 찻주전자 가격이었는 데.'

'뭔...... 너희 집 드래곤 레어였

냐?'

생각해 보면 레오는 어려서부터 세상 물정에 어두웠다. 지금에서 야 그가 왕자여서 그랬다는 걸 알 지만, 그땐 이 자식이 폴리모프한 드래곤은 아닌지 의심까지 했다.

'왕국을 주겠다는 것도 그 연장 선이겠지......

이쯤 되니 레오가 안쓰러워진 나는 그의 머리를 두어 번 더 쓰 다듬었다. 마침 머리색까지 흰색 이라 새초롬한 흰 페르시안 고양

이를 쓰다듬는 기분이었다.

"......나는 정말 궁금해, 카슈미 르 크리시스."

나를 태울 듯 응시하던 레오가 짓씹듯 내뱉었다. 그가 내 제복 재킷 라펠을 훅 끌어당겼다. 나는 별 반항 없이 끌려갔다. 멱살이 잡힌 모양새라 기분이 묘해졌다.

"이제 성인에, 한 나라의 왕까지 됐는데, 넌 대체 언제까지 나를 애 취급할까."

꾹꾹 눌린 감정이 목 안에서 울 리는 소리는 짐승의 으르렁거림과 닮아 있었다.

나는 슬쩍 레오의 눈치를 살폈 다. 이글거리는 그의 두 눈은 사 람을 산 채로 녹이는 독극물 같았 다.

"하지만 레오, 나는 네가 걱정되 는걸."

나는 부드럽게 말하며 그의 흰 뺨을 손으로 감쌌다. 이건 진심이 었다.

나는 아직도 감이 잘 잡히지 않 았다. 내게 익숙한 것은 어리고 앙칼진 레오였다. 친남매처럼 아 옹다옹하고 챙겨 주는 것이 익숙 했다.

"결혼은 사랑하는 사람이랑 해 야지. 나보다 더 특별한 사람이 랑."

그래서 나는 달래듯 다그쳤다. 레오는 나와 같이 있을 수단으로 결혼을 말한 것 같지만, 역시 그 건 레오에게 더 특별한 사람이랑

하길 바랐다.

"카슈미르. 넌 정말 천하의 멍청 이야."

무섭게 얼굴을 굳힌 레오가 으 르렁거리며 내게 얼굴을 들이밀었 다.

아무래도 그는 태어나길 맹수에 가깝게 태어난 모양이다. 악문 잇 새로 날카로운 송곳니가 보였다.

"사랑이든 뭐든, 내게 이렇게까 지 지독한 감정을 느끼게 하는 존

재는 네가 유일해."

문득 나를 유일이라 부르던 다 른 이가 생각났다. 같은 유일을 말했으나, 두 사람의 어투는 극과 극을 그리듯 상반되었다.

엘이 내게 유일을 말할 때, 그는 간절해 보였다. 섬뜩하도록 끈적 한 기색은 숨긴 채로 아주 상냥히 나를 붙잡았다. 그는 독을 숨긴 한 떨기 백합 같았다.

그에 반면 레오는 난폭했다. 다 듬어지지 않은 감정들이 삐죽삐죽

날카롭게 튀어나와 있었고, 그 뾰 족함을 숨길 마음조차 없어 보였 다. 정제되지 않은 미숙함이었다.

하지만 그만큼 솔직했다. 진심으 로 부딪치며 다가왔다. 그랬기 때 문에 긴 간극 뒤에 만났음에도 떨 어진 적 없었다는 듯 또다시 친남 매처럼 친밀하게 대할 수 있는 걸 지도 몰랐다.

"내가 함께하고 싶은 사람은 너 밖에 없어."

하지만 깊어진 연둣빛 눈동자는

남매를 보는 시선이 아닌 것 같아 서, 기분이 이상했다.

"......지금은 그럴지 몰라도 곧 아니게 될 거야. 네 세상이 더 커 지고 어린 시절이 점점 희미해지 면 나는 네게 그렇게 큰 존재가 아닐지도 몰라."

나는 옅게 숨을 뱉으며 레오의 옆머리를 넘겨 주었다.

내가 소중하다고 말해 주는 것 도, 나를 원하는 것도 사실 고마 웠다. 나는 스스로에게 확신이 없

는 편이었으니까. 이런 표현들엔 가슴이 찌르르했다.

하지만 나는 내가 언제까지나 레오에게 유일한 존재일 거라곤 생각하지 않았다.

그는 아직 어렸고, 시간이 많았 다. 무려 국왕이니 앞으로 만나게 될 사람도 무척 많을 터였다.

나는 그가 더 좋은 사람을 만날 거라고 생각했다.

"그걸 네가 어떻게 알아.

탁. 큰 손이 내 손목을 붙잡았 다. 사나우리만치 반항적인 어투 였다. 나는 작게 웃었다.

"너라면 분명 더 좋은 사람을 만날 수 있을 테니까."

레오는 폭군이라 불렸다. 인륜적 으로 봤을 때 그가 좋은 사람은 아니라는 것을 나도 알고 있었다.

하지만 나는 그가 나와 맞춰 가 며 좋은 사람이 되어 갈 수 있다 고 생각했다. 그의 가능성을 믿었

다. 그때가 되면 레오에게 나는 일부일 뿐일 터였다.

"더 좋은 사람 같은 건 필요 없 어."

서늘하게 잘라 낸 레오가 제 뺨 에 내 손목을 가져가 대었다. 하 얗고 부드러운 피부에 연한 손목 살이 맞닿았다. 그의 두 눈이 번 뜩였다.

"내게 필요한 건 너야, 카슈미

르.

나는 레오와 조용히 시선을 맞 췄다. 늘 중력을 거부하고 중심에 매달려 있던 붉은 살덩이가 제멋 대로 중력을 따라 내려앉는 듯했 다. 내가 움직임의 이유를 고민할 때, 레오가 입술을 열었다.

"나랑 내기하는 게 어때."

갑작스러운 요청에 고개를 갸우 뚱했을까, 레오가 말을 이었다.

"1년. 1년 뒤에도 내 마음이 같 다면, 그땐 내 말을 진지하게 생 각해 줘."

레오의 눈빛은 진중했다. 나는 턱을 쓸어내렸다.

' 결혼이라.'

나는 결혼을 할 생각이 없었다. 크리시스의 이름을 놓고 싶지 않 았으니까. 가족들과 헤어지고 싶 지도 않았다. 나는 카슈미르 크리 시스로서, 크리시스의 무덤에 묻 히고 싶었다.

'하지만 그 두 개만 지켜진다 면...... 딱히 누구와 결혼하든 상

관없는데.'

레오에게 사랑하는 사람과 결혼 하라고 하긴 했지만, 실상 나는 결혼에 큰 감흥이 없었다. 현 인 간 사회에서 인간과 인간 사이 가 장 큰 결속을 의미하는 행위, 그 뿐이었다. 사랑하는 사람과 결혼 하고 싶다는 욕망 같은 건 내게 존재하지 않았다. 필요하다면 정 략결혼을 해도 상관없을 정도였 다.

'애초에 사랑이라는 건 뭘까.'

내가 사랑 아래서 태어나 감정 을 교육받으며 자라지 못했기 때 문일까, 나는 감정에 지극히 무뎠 다. 힘들다, 슬프다, 화난다 같은 감정의 발화점이 높았고, 가끔은 감정의 파도에 휩쓸리면서도 지금 느끼고 있는 감정이 무엇인지 정 의내리지도 못하곤 했다.

'하늘이 무너지는 기분 정도는 느껴야 사랑을 자각할 수 있는 거 아닌가?'

겨우 심장의 박동으로, 혼히들 말하는 간질거림 같은 것으로 사

랑임을 자각할 수 있단 말인가. 겨우 그런 것이 사랑이란 말인가.

두근거림과 간질거림 같은 건 여러 번 느껴 봤지만, 그것이 사 랑인지는 알 수가 없었다.

마치 굳은살과 흉터로 뒤덮여 더는 매끈한 살이 보이지 않는 내 손을 아주 작은 바늘로 쿡 찌르곤 통증을 느껴 보라는 것 같았다. 나는 손을 불에 한 번 넣었다 빼 도 조금 뜨겁다고만 느낄 정도로 고통에 무딘데 말이다.

내겐 사랑이 무엇인지 파악하는 것도, 느끼는 것도 모두 어려웠 다.

'그래도 좋아하는 사람들은 있으 니까. 그 사람들과 일생을 함께한 다고 하면...... 좋을 것 같은데.'

나는 사랑을 몰랐지만, 정과 신 뢰는 신봉했다. 정 가고 믿을 수 있는 사람이라면 결혼이든 백년가 약이든 해서 함께 살아도 좋을 것 같았다.

천천히 생각을 정리하고 있었을

까, 슬슬 내 눈치를 보던 레오가 입을 열었다.

"......내가 알렉산드로 크리시스 할게."

"누가 크리시스의 이름을 준다 고 했지?"

"너무한 거 아니야? 나 크리시 스 저택에서 처가살이도 할 수 있 어."

"누가 크리시스 저택에 자리를 내준다고 했지?"

" 야."

레오는 내 생각을 읽은 건지, 눈

치가 기민한 건지 내가 고민하고 있는 부분을 정확히 짚어 대답했 다. 이에 장난기가 솟아 그대로 반박하니 그가 불퉁한 표정을 지 었다. 나는 피식 읏곤 레오와 눈 을 맞추었다.

"그래. 1년 뒤에도 여전하다 면...... 내 고민은 해 보마."

나는 역시 레오가 좋았다. 가장 편했고, 친근했다.

내 거리낌 없는 대답에 레오는 귀를 의심하는 표정을 지었다. 돌

덩이처럼 굳은 채로 한참 생각을 하던 그는, 이내 눈을 동그랗게 떴다.

"진짜? 나랑 결혼한다고?"

"고민해 본다고만 했을 텐데. 왜 기정사실화가 되어 버린 거지?"

"너...... 진짜지? 대련하자는 거 아니야. 결혼이라고. 결-혼."

"내가 대단히 사악한 음모에 빠 진 것처럼 말하는데, 나도 귀가 있고 뇌가 있어. 결혼인 거 안다 고."

몇 번이고 되묻는 레오에게 느

긋하게 답해 주었다. 수많은 감정 이 스치던 레오의 얼굴이 끝엔 새 빨갛게 물들었다.

"나랑, 결혼해도 돼?"

"글쎄. 해 본 적이 없어서 잘은 모르겠다만......

나는 사랑이든 결혼이든 해 본 적이 없었다. 그게 무엇인지 몰랐 다. 그렇기에 가볍게 말할 수 있 는 걸지도 몰랐다.

하지만, 그래도.

"너라면 괜찮을 것 같기도 해."

나는 배시시 웃으며 입꼬리를 말아 올렸다.

압생트가 가득 든 잔이 미친 듯 이 흔들렸다. 숨을 안 쉬는 건지 숨소리조차 나지 않는 침묵이었 다.

그 끝에, 힘없이 고개를 떨군 레 오는 와락 나를 안았다. 그 얼굴 과 목덜미, 귀를 통틀어 사방에 이미 져 버린 태양의 열기를 품은 채로.

"어떡하지. 나, 네가 너무 좋 아."

"그래, 그래."

나는 커다란 등을 토닥이며 하 늘로 시선을 옮겼다.

하늘이 밤에 잠겨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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