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55화
"떠들썩하군."
집무실 창 너머로 수도를 바라보던 카이사르가 중얼거렸다. 나는 고개를 끄덕여 수긍하곤 그와 마찬가지로 창 밖을 바라보았다.
"검술 대회 예선전이 시작했으니 말입니다."
검술 대회 예선은 열흘에 걸쳐 이
루어졌다. 평민들을 대상으로 한 어 중이떠중이 거르기였기에 나는 참가 하지 않았다.
'귀족들 중에도 어중이떠중이가 얼 마나 많은데. 평민들만 걸러야 한다 니 웃기지.'
속으로 실소를 터트렸다.
귀족은 예선 없이 곧바로 본선에 진출할 수 있다. 귀족 우월주의가 엿 보이는 규칙이었다.
나는 귀족이긴 했지만, 귀족으로 산
시간보단 평민으로 살아온 시간이 긴 만큼 이런 불공평한 제도엔 반골 기 질이 불쑥 올라왔다.
물론 먹고 살기도 바쁜 평민보다는 검술을 기본 교양으로 배우는 귀족이 평균적으로 뛰어나긴 했다. 제국의 소드 마스터 중 두 명이 귀족이기도 했다.
'하지만 난 평민이었을 때 소드 마 스터가 되었는데.'
어디까지나 평균일 뿐, 절대적이진 않았다. 애초에 신분으로서 무언가를
판단할 순 없는 법이었다. 예선을 치 르지 않아 편한 건 사실이었지만, 귀 족들에게만 편한 규칙이 마음에 들진 않았다.
만약 내가 검술 대회에 관여할 수 있는 사람이 된다면 이런 규칙은 말 소해 버리리라 생각하며 찻잔을 기울 였다.
카이사르의 집무실은 늘 냉한 공기 로 가득 차 있었다. 소드 마스터가 오랫동안 머무는 자리엔 그의 존재감 이 물드니 당연한 일이었다. 그의 기 운은 섬짓하다 싶을 만큼 서늘했으니
까. 나는 이 온도가 싫지 않았다. 기 분 좋은 바람이 부는 것 같았다.
카이사르에게선 붉은 향기가 냈다. 유리잔에 든 와인 같았고- 페르세포 네를 지하에 남게 한 석류알과 닮았 으며, 인생의 끝자락을 의미하는 황 혼이나 섬뜩하게 흐르는 피가 연상되 었다. 감히 한 단어로 정의내릴 수 없는 깊은 붉음이었다.
나는 잉크 냄새와 홍차 내음, 그리 고 카이사르의 체향이 섞인 집무실의 공기를 가볍게 들이켰다.
난 이 향기를 좋아했다. 그래서 가 끔은 특별한 이유 없이 이곳을 찾아 와 향기에 파묻혀 있다 가기도 했다. 집무를 보는 카이사르를 구경하면서 말이다.
"그래. 그럼 이제 말해 주겠나."
하지만 오늘은 그런 날이 아니었다.
창문에 머무르던 시선을 조용히 내 게로 옮긴 카이사르가 물었다. 붉은 두 눈이 나를 머리부터 발 끝까지 훑 었다. 다른 이였다면 카이사르의 심 기가 불편한 것이라고 착각했을지도
모르지만, 나는 이게 그의 습관일 뿐 임을 알았다.
"무엇이 궁금한 거냐."
나는 심호흡을 하며 끝없이 깊은 피 웅덩이를 마주했다.
지금은 과거를 듣기 위해 카이사르 를 찾은 참이었다.
내가 이곳까지 오기엔 오랜 시간이 걸렸다. 결심을 내리기까지 오랜 고 민과 깊은 숙고가 필요했기 때문이었 다. 카이사르•가 이에 관련해 말하기
를 꺼려 하는 기색을 보였기 때문도 있었다.
사실 아직까지도 이 길이 맞는지 확신이 들지 않았다.
어떤 것들은 검은 베일 뒤에 숨긴 채 방치해두는 편이 낫다. 판도라의 상자처럼 말이다. 때때로 무지는 매 서운 진실의 파도에서 인간을 보호하 는 방파제가 돼 주었다.
'하지만 알고 싶은걸.'
베일 뒤에 괴물의 아가리가 도사리
고 있어서 날카로운 이빨에 상처받게 될지도 몰랐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나는 알아내기로 결심했다.
"제 어머니에 대해서 알고 싶습니 다."
인류는 아주 오래전부터 인간이 어 떻게 생겨났는지를 알기 위해 연구를 계속해 왔다. 자신의 근원을 알고자 함은 특별한 이유를 필요로 하지 않 는 인간의 본능임이 분명했다.
내 어머니. 내 인생의 가장 큰 미스 터리. 꼬인 타래의 실마리. 나와 아
리아의 이름을 지어 준 사람. 나는 그녀에 대해 아는 것이 없었다. 그녀 는 다른 사람들에게 오드리라고 불렸 으나 그 이름이 진짜인지도 확실치 않았다.
나는 건국 기념일 축제에서 만난, 어린 시절 날 도와준 라모나에게서 받은 야샤의 명함을 들고 오랫동안 고민해 왔다.
대륙 전체를 통틀어 최고의 브로커 길드로 꼽히는 '검푸른 까마귀'의 길 드장, '푸른 날개' 야샤. 그녀는 오드 리에 대한 단서를 가지고 있을 게 분
명했다.
'무엇을 알게 될까 두렵지만, 두렵 다고 물러서는 건 내 방식이 아니니 까.'
나는 고민 끝에 야샤를 찾아가 보 기로 결심했다. 다만 야샤를 찾아가 는 건 두 번째로 할 일이었다.
'첫 번째로 할 일은 카이사르와 대 화해 보는 거야.'
내가 믿는 사람은 아직 얼굴 한번 본 적 없는 아사가 아니었다. 내게
서툴게, 꾸준히, 벅차도록 사랑과 신 뢰를 부어 준 카이사르였다.
카이사르에게 묻고 싶었다. 내 어머 니는 어떤 사람이었냐고. 나는 당신 에게 무슨 의미였냐고. 이전까진 괜 한 것을 물으면 나를 버릴까 두려워 묻지 못했으나, 이젠 아니었다.
나는 이제 카이사르가 나를 버리지 않을 거라고 확신할 수 있었다.
카이사르는 느리게 눈을 감앴다 떴 다. 언젠가 이런 질문이 올 것을 예 상했다는 듯 담담한 낯이었다. 두 손
을 깍지 껴 모은 그는, 그 위로 제 턱을 얹곤 잔잔한 시선으로 날 바라 보았다.
"이미 결심을 마치고 온 거겠지."
"네."
"네게 상처가 될지도 모른다. 그래 도 괜찮으냐."
"괜찮습니다."
나는 주저 없이 대답했다. 망설일 필요는 없었다.
"......그래. 그럼...... 처음부터 얘기 해 줘야겠지."
붉은 눈이 과거가 적힌 빛바랜 양 피지를 읽듯 깊어졌다.
"공작 부인과 사별한 지 1년쯤 지 난 때였다."
칼의 어머니는 칼을 낳다가 세상을 떴다. 나와 칼이 한 살 차이가 나니, 공작 부인이 세상을 떠난 지 1년 뒤 면 딱 내가 태어날 때쯤이었다.
"나는 더 이상 부인을 들일 생각이 없었지만, 가신들은 달랐지. 칼에겐 어미가 필요하다며 내게 새 부인을
들이라고 재촉했다. 부인을 떠나보낸 지 얼마 지나지도 않아 재혼을 하는 것이 더 상처를 주는 짓 같아 거부해 도 계속 그러더군. 급기야는 가신 가 문 영애들의 초상화를 늘어놓고 내게 원하는 이를 선택하라더구나. 영애들 이 상품도 아닌데."
카이사르의 말투는 시니컬했다. 그 의 미간이 미세하게 찌푸려져 있었 다.
'그러게. 영애들이 상품도 아닌데.'
나는 속으로 자조했다. 카이사르는
젊어서부터 살인귀라 불렸다. 그러니 그 당시에도 사람들은 카이사르를 잔 인하고 난폭한 존재로 알고 있었을 터였다.
그런 상황에서 자진해서 카이사르 의 부인이 되겠다고 한 이가 카이사 르가 받은 초상화 속 여인들 중 몇이 나 있었을까.
신물이 났다.
"솔직히 고백하자면, 나는 그 상황 에 질려 있었다. 본보기로 가신 몇 명을 압박해도 그때만 조금 수그러졌
다가 다시 떠들어 대더군. 자기 자식 을 공작가의 부인으로 만들고 싶었던 거겠지. 내게 와 봤자...... 불행할 텐 데."
팔꿈치를 소파 팔걸이에 얹은 채 이마를 짚은 카이사르가 자조적으로 웃었다. 자신이 누군가를 행복하게 해 줄 수 없을 거라 확신하는 그는 조금 씁쓸해 보였다. 그가 피도 눈물 도 없는 살인귀가 아닌 인간임을 증 명하는 모습이었다.
"사람들이 헛소문을 떠들어 댈 때 속상하진 않으셨습니까?"
나는 문득 물었다.
카이사르는 어떤 일에도 상처받지 않을 것 같은 사람이라 여태 생각해 보지 않았던 부분이었다. 하지만 상 처받지 않는 인간이 있을 리 없었다.
생각해 보면, 카이사르에 대한 소문 은 보통 사람은 감당할 수 없을 만큼 질 나쁜 것이었다. 나조차 모든 사람 들이 나를 난폭한 살인귀 취급하며 그 누구도 내게 다가오지 않는다고 생각하면 버티기 힘들 테니. 나는 카 이사르가' 정녕 단 한 번도 힘들지 않
았는가 걱정이 되었다.
"......속상하지 않았냐고?"
카이사르의 눈이 미미하게 커졌다. 이런 질문은 처음 들어 본다는 반응 이었다. 몇 번이고 말을 곱씹어 보던 그는, 이내 한숨처럼 웃었다.
"그럴 리가. 오히려 다가오던 사람 들이 없어서 좋다고 생각했다. 내가 속상할 때는 네가 나가서 다치고 돌 아올 때밖에 없으니 염려 말아라'."
카이사르는 나를 달래듯 말을 시작
했다가 끝엔 붉은 눈을 번뜩이며 뼈 있는 한마디를 던졌다. 조금 뜨끔한 내가 시선을 피했을까, 그가 턱을 쓸 며 가라앉은 눈을 했다.
"하지만 계속 고립되어 있으니 조 금은 공허했던 것 같기도 하군. 외로 운 건 아니었다. 그저 무언가 채워지 지 않은 게 있는 것처럼 허전했을 뿐 이야."
거의 처음 들어보는 카이사르의 진 솔한 속마음이었다.
기분이 먹먹해져서 표정을 굳히며
시선을 내리까니, 카이사르가 다 괜 찮다는 듯 눈꼬리를 살짝 접어 웃었 다
"이젠 괜찮다. 그때의 공허는 네 빈 자리에 대한 통증이었으니."
이럴 땐 카이사르가 진실해서 다행 이라고 생각했다. 그는 거짓을 말하 느니 침묵하고, 빈말은 절대 하지 않 았다.
그러니 이 말은 거짓 한 점 없는 진실일 터였다.
내가 작게 웃을 때, 카이사르는 내 질문에 대한 답을 이었다.
"나는 결국 한 사람을 선택했다. 가 신들은 멈출 생각이 없어 보였으니, 질질 끌어 봤자 살인귀와 함께 살아 야 할지도 모른다는 공포에 떠는 이 들만 늘어날 것 같았다. 내가 선택한 건 가장 한미한 가문에, 가신으로서 제대로 된 자리도 차지하지 못하는 망하기 직전이던 남작가의 영애였다. 지금은 아예 멸절한 가문이지."
"잠깐만, 설마••...
얌전히 듣고 있던 나는 머릿속에
스친 생각에 눈을 크게 떴다. 카이사 르의 눈이 더욱 가라앉았다.
"그게 바로 네 어미, 앤테이아 헬라 였다."
안테이아 헬라.
나는 일순 머리가 지끈거림을 느꼈 다. 과거의 기억과 알고 있던 정보, 그리고 지금 듣는 진실들이 뒤섞였 다. 나는 카이사르 앞에서 애써 평탄 함을 가장하며 관자놀이를 꾹꾹 눌렀 다.
"이름이 안테이아 헬라가 확실합니 까?"
"그래. 확실하다."
"오드리는 모르십니까?"
"......오드리? 그게 누구지?"
내가 알고 있던 이름을 입에 올리 니 카이사르가 미간을 좁히며 생전 처음 듣는다는 표정을 지었다. 역시 오드리는 가명이었던 모양이다.
'가명이라는 건 어느 정도 예측하고 있었지만, 내 어머니가 귀족에...... 이름이 안테이아 헬라였다고?'
그렇다면 여기선 두 가지 의문이 생겼다.
'어머니가 귀족이라면, 나는 왜 사 창가에서 태어난 거지?'
6살에 멀쩡한 동네로 이사를 하긴 했지만 그전까지는 사창가에서 살았 다. 그렇기 때문에 나는 어머니가 그 쪽과 관련된 일을 하던 평민일 거라 생각했건만, 귀족이었다니.
아무리 한미하다고 해도 귀족은 귀 족이다. 귀족이 사창가에서 살 이유 가 뭐가 있겠는가. 나는 그 이유를
짐작할 수조차 없었다.
'안테이아 헬라.'
나는 그 이름을 곱씹고. 곱씹己 또 곱씹어 보앴다. 몇 번이고 기억을 되 짚어 본 끝에, 나는 이전에 '안테이 아 헬라'라는 이름을 들은 적이 있음 을 확신했다.
'사실 이젠 내용도 가물가물한 데...... 똑똑히 기억하고 잊지 못하는 것이 딱 하나 있습니다. '안테이아 헬라'라는 제국 아카데미 마법부 학 생의 글이었습니다. 은빛 늑대 수인
족의 인식을 개선해 달라는 상소문이 었죠'
내가 세레논에게 어떤 세상을 추구 하느냐 물었을 때 돌아온 답변에서 들은 이름이었다.
'모든 것엔 금이 가 있습니다. 태양 의 제국 또한 예외는 아닙니다. 이 금은 흠집처럼 보이기도 하지만, 저 는 그 틈 사이로 빛이 들어온다고 생 각합니다. 시행착오 없이 완벽한 것 은 없습니다. 실수로 생긴 틈에서 바 깥으로부터 들어오는 빛을 보셨다면, 틈을 막으려고만 하지 말고 벽을 허
물어 주십시오. 바깥의 빛과 마주해 주십시오 외면하지 말아 주시길 바 립니다.'
세레논이 희망을 보고 빛을 꿈꾸게 한 글이었다. 나 또한 세레논에게서 전해 듣고 상당히 감명을 받아 여태 까지 똑똑히 기억하고 있었다.
레오의 유모, 레이사익 종족으로 추 정되는 은빛 늑대 수인족. 그런 레이 샤의 상징이라는 문양이 그려진 주머 니를 가지고 있던 어머니. 그런 그녀 의 실명, 안테이아 헬라. 은빛 늑대 수인족 인식 개선을 상소한 제국 아
카데미 마법부 학생 안테이아 헬라.
수많은 퍼즐들이 빠른 속도로 맞아 들어가기 시작했다. 워낙 얼기설기 맞춰진 탓에 명확한 그림은 보이지 않았지만, 한 군데나마 명확히 보이 는 것은 있었다.
'내 어머니는 안테이아 헬라 남작 영애로, 이전에 제국 아카데미 마법 부에 재학했다. 은빛 늑대 수인족에 대한 상소문까지 올린 걸 보아 레이 샤와 친분이 깊을 가능성이 있으 며...... 좋은 세상을 꿈꿨다.'
그런 글을 쓴 사람이 나쁜 사람일 거라곤 생각할 수 없었다. 내 어머니 는 어쩌면, 좋은 사람이었을지도 몰 랐다.
나는 숨을 들이쉬었다. 이미 낡고 해져 형체를 알아볼 수 없고 누구도 찾지 않는 오래된 태피스트리를 천천 히 복원하는 기분이었다.
내가 생각을 정리할 때, 카이사르는 말을 이었다.
"헬라 남작은 미친놈이었다. 안테이 아 헬라가 뽑히고 일주일도 지나지
않아 제 딸을 내 침실로 보내 버렸으 니. 안테이아 헬라가 공작 부인이 되 면 힘을 나눠 먹기로 하고 다른 가신 들의 도움을 받아 급하게 일을 진행 한 거겠지."
나는 튀어나오려는 욕설을 삼켰다. 자세한 내막을 보지 않아도 그림이 보이는 탓이었다.
'팔리듯이 왔구나.'
과연 그 일에 내 어머니의 자의가 들어갔을까. 내 어머니는 벗어날 수 없었던 것 아닐까.
어째서 세상은 그녀에게 힘을 주지 않았을까. 어째서 좋은 세상을 꿈꾸 던 제국 아카데미 마법부 출신의 엘 리트가' 그런 취급을 받아야 했는가. 그녀는 도구도, 아비의 소유물도 아 닌 한 명의 사람이었을 텐데.
가슴이 이상하게 아려 왔다.
"나는 그녀를 어떻게 하고자 하는 마음이 없었다. 하지만 한밤중에 내 보내면 그것도 문제가 될 테니 그냥 한숨 자고 가라고 했지. 그런데...... 그녀가 나를 붙잡았다."
카이사르의 눈은 끝이 보이지 않는 무저갱처럼 깊어졌다. 혀로 입술을 축인 그가, 희미한 슬픔이 깃든 눈으 로 나를 바라보았다.
"자기 동생을 살려 달라더군."
나는 숨을 멈추었다. 이런 게 유전 인 걸까.
그것은, 언젠가 내가 한 말이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