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충직한 검이 되려 했는데-157화 (157/254)

157 화

"검술 대회 증표로 뭘 줄까? 손 수건 같은 건 식상하니까 수류탄 은 어때? 검술 대회에선 마도구 만 아니면 모든 무기를 허용한다 며? 여차하면 던져 버려."

"웃기는군. 아주 증표로 대포도 주겠어."

"넌 찬물 좀 작작 부어."

여느 때와 같이 싸움인지 대화 인지 모를 말들을 주고받는 아리

아와 칼을 지긋이 바라보았다. 이 런 평범한 일상은 내게 무척 소중 한 것이었지만 평소와 달리 오늘 은 저 모습을 즐기기가 힘들었다.

'너를 불행 속에 태어나게 해서, 네 어린 시절을 지켜 주지 못해서 미안하다.'

검은 베일 뒤에 가려진 참혹한 과거를 헤집은 게 바로 어제의 일 이었다.

그때의 진실을 알게 되었다 해 서 천지가 개벽하고 바다가 메마

르진 않았다. 나를 보는 카이사르 의 눈이 조금 더 애틋해진 것 외 엔 내 주위 모든 것이 예전했다.

하지만 나는 조금 달라진 기분 이었다. 예전부터 정리되지 못했 던 마음 한편의 흙탕물 구덩이가 서서히 말라 땅이 되어 가는 것 같았다. 비 온 뒤 땅이 굳는 것처 럼.

'나는 지금 무엇을 위해 살아가 는 걸까.'

허공에 시선을 둔 채 조용히 생

각을 정리했다.

아주 어렸을 적의 나는, 어머니 처럼 살진 않겠다는 오기로 살아 갔다. 어머니를 향한 원망으로, 더럽고 질척거리는 감정들로 가까 스로 버텼다.

조금 더 자란 나는 아리아를 위 해 살았다. 무채색 세상 속 유일 한 색채를 발견한 뒤 또다시 눈•이 멀고 싶지 않다는 집념을 품었다.

어느 순간 아리아를 살리기 위 해 검을 잡았고, 그 후엔 검이 내

가치가 되었다. 검술 실력이 바로 내 유일한 쓸모였다.

그렇다면 지금은 무엇이 나를 살게 할까.

유치한 오기는 졸업했고, 아리아 는 더 이상 내 보호를 필요로 하 는 아이가 아니었다. 검은 여전히 내 가치였으나, 그것으론 부족하 다는 생각이 들었다.

"언니. 무슨 생각 해?"

문득 들려온 목소리에 눈을 깜

빡였다. 소리가 들린 쪽으로 눈을 돌리자, 한때 내 모든 것이었던 선명한 하늘빛이 나를 기다리고 있었다.

아리아의 목소리는 나뭇잎 위를 구르는 아침 이슬처럼 부드러우면 서도 속엔 단단한 심지가 자리 잡 고 있었다. 그 나긋한 단호함은 특별히 소리를 키우지 않아도 사 람의 집중을 사로잡았다.

나는 대답할 생각조차 하지 못 하고 허공에서 흔들리는 아리아의 머리칼을 바라보았다.

"슈슈. 상심이 깊어 보이는군. 무슨 일이 있는 건가."

나는 또 다른 목소리가 들려온 곳으로 시선을 돌렸다.

피는 속일 수 없는 건지, 칼의 목소리는 카이사르와 굉장히 비슷 했다. 다만 카이사르에 비하면 어 린 티가 나서, 소년과 청년 사이 아직 완전히 피어나지 않은 장미 꽃봉오리 같았다.

아뇨. 아무 일 없습니다.

나는 애써 표정을 정돈하며 고 개를 저었다. 내 대답에 두 사람 의 표정이 순식간에 굳었다.

'뭐, 뭔데.'

공포 소설의 한 장면처럼 차가 워진 두 사람의 얼굴을 보며 흠칫 몸을 떨었다. 안광이 번뜩이는 하 늘색과 붉은색의 두 쌍의 눈 아래 서 쫄아붙었을까, 눈을 느리게 깜 빡인 아리아가 입꼬리를 끌어당겼 다. 눈은 웃지 않는 채였다.

"내가 여러 번 말했을 텐데. 언 니는 내게 다 읽힌다고."

과연, 아리아는 나를 가장 잘 아 는 사람이었다. 안 그래도 타인의 감정과 변화에 예민한 아리아가 평생을 봐 온 게 나니 당연한 일 이었다.

그런데도 내가 말하지 못하고 머뭇거리고 있자, 눈썹을 꿈틀거 린 아리아가 치명타를 날렸다.

"이번에도 뒤늦게 말해주려고?

테러 때처럼?"

나는 떨리는 동공을 숨기지 못 했다. 테러 사건은 칼과 아리아에 게 평생 미안해해야 하는 일이었 다.

'테러 당일이 되어서야 도움을 요청하고, 떠났다가 만신창이가 돼서 돌아왔으니까......

변명의 여지도 없는 내 죄였다, 나는 그 사건 이후 며칠간 칼과 아리아가 내게 싸늘하게 대했던 것을 생각하며 몸을 떨었다.

"그, 런 건 아닌데......

"그러고 보니 어제 아버지와 길 게 대화를 했다는데."

나도 눈치가 빠르다는 소리를 듣는 편이었지만, 칼과 아리아의 눈치는 단순한 눈치를 넘어 들짐 승의 본능 수준이었다. 소드 마스 터는 난데 사람 사이의 눈치는 왜 두 사람이 더 빠른지 모를 노릇이 었다.

칼이 툭 던진 한마디에 나는 더 이상 표정을 관리할 수 없었다.

"아버지께 물어보는 편이 낫겠 나, 네가 직접 말하는 편이 낫겠 나?"

유려하게 입꼬리를 올리는 칼을 보며 더는 뺄 수 없음을 느꼈다. 결국 나는 느리게 입을 열었다.

"......어제 아버지로부터 제 어 머니에 대해 들었습니다."

칼의 얼굴로 희미하게 난감함이 번졌다. 칼은 나와 이복남매이니 만큼, 내 어머니에 대해선 조심스

러워했다. 나는 칼에게 괜찮다는 눈짓을 보내곤 고개를 돌렸다.

" 아리아."

잔을 쥔 아리아의 손에 힘이 들 어갔다. 나는 입술을 꾹 깨물었 다.

내가 궁금해했던 것처럼, 아리아 또한 어머니에 대해 궁금해할지도 모른다. 그러나 나는 아리아에게 내가 들었던 이야기를 전할지 말 지 갈팡질팡하고 있었다.

아리아는 알아야 할 권리가 있 다고 생각하면서도, 괜히 아픈 기 억을 다시 들춰야 하는지는 의문 이었다.

"만약 네가 궁금하면......

"아니."

말을 미처 끝내기도 전에 아리 아가 단호하게 부정했다. 나는 눈 을 끔뻑이며 아리아를 바라보았 다.

"나는 궁금하지 않아, 언니."

화창한 봄날의 하늘 같은 푸른 눈이 냉정하게 번뜩였다.

"내겐 부모가 없어. 나는 과거 이야기에 휘말리고 싶지 않고, 그 사람들의 이야기를 듣고 싶지 않 아. 이건 원망이나 치기 어린 고 집 같은 게 아니야. 그냥 궁금하 지 않은 거야."

아리아의 두 눈은 완벽한 타인 을 논하는 눈이었다. 한 치의 흔 들림 없이 강인한 그 태도에서 나 는 아리아와 나의 다름을 느꼈다.

나는 그 시절 부모에 대한 마음 을 원망으로 돌렸다. 그것으로 탄 생이란 비극을 극복했다.

허나 그 시절의 아리아는 원망 조차 없이 제 부모를 인생에서 지 워 버린 모양이었다.

나는 아픈 아리아가 하루 종일 침대에 누워 무슨 생각을 했을지 상상조차 할 수 없었다. 내가 감 히 가늠할 수도, 가늠해서도 안 되는 부분이었다.

"나는 그냥 모르는 채로 살고

싶어. 모르는 사람들로 과거에 남 겨 둘 거야. 이해하고 싶지 않 아."

담담하게 말한 아리아가 찻잔을 기울였다. 그 모습은 한없이 우아 하고 어느 동화의 한 장면처럼 아 름다워 보였으나, 찻잔을 잡은 하 얀 손은 희미하게 떨리고 있었다.

"••••••그래."

나는 짧게 수긍했다. 그것이 아 리아의 선택이라면 받아들여야 마 땅했다.

미련한 나는 굳이 들추지 않아 도 될 진실의 장막을 찢고 들어가 추악한 세상의 단면을 확인했다. 그것이 내가 선택한 내 방식. 누 구도 고치려 들어선 안 되는 내 삶의 양식이었다.

그러나 현명한 아리아는 판도라 의 상자를 닫힌 상태로 내버려 둘 줄 알았다. 호기심을 뒤로 하고 이성으로 생각했다. 검은 장막은 그저 뒤에 두고 나아갈 수 있는 사람이었다.

"부모님이 필요하다고 생각한 적은 없어?"

나는 조심스럽게 물었다. 아리아 가 괜찮다고 하긴 했지만, 혹여 필요를 느낀 적이 있진 않았을까 염려되었다.

나를 지긋이 바라보던 아리아가 화사하게 웃었다. 내가 사랑하는 그 웃음이었다.

"응. 단 한 번도. 내게 가족은 언니 하나로 차고 넘쳤어."

사랑한다는 카이사르의 말에서 내가 탄생한 이유를 확신했듯, 진 심만을 꼭꼭 눌러 담은 아리아의 한마디에서 또 다른 것을 확신했 다. 나는 아리아를 향해 마주 웃 음 지었다.

" 다행이구나."

이제까지의 내 삶은 헛되지 않 았다고 말이다.

마나를 두른 발이 가볍게 땅 위 에 착지했다. 등 뒤로 검은 천 자 락이 크게 펄럭였다. 텅 빈 골목 을 잠시 둘러본 나는, 사뿐한 걸 음으로 골목을 벗어나 큰길에 들 어섰다.

'길드의 거리.'

제국의 길드들이 한데 모인 거 리는 꽤 한적했다. 이전에 왔을 땐 상당히 북적였던 것을 생각하 면 이는 테러의 여파일 가능성이 높았다. 수도 한복판에서 일어난

테러는 확실히 제국민들의 경각심 을 일깨워 준 듯했다.

'야샤는 길드에 있었으면 좋겠는 데.'

나는 주머니에 손을 넣은 채 야 샤의 명함을 만지작거리며 생각했 다. 혹여 헛걸음을 할지도 모른다 는 생각에 기분이 찝찝해졌다.

카이사르에게 어머니에 대한 전 반적인 얘기를 들었어도 아직 부 족했다.

내가 태어난 전말은 알게 되었 지만 그 이후 어머니가 어떻게 됐 는지, 레이샤와는 어떤 연관이 있 는지는 몰랐으니까. 나는 야샤를 만나기 위해 이곳까지 온 참이었 다.

'이상해. 왜 어머니에 대한 기억 은 구멍이 뚫린 것처럼 허전하 지.'

나는 내 머리를 헤집으며 미간 을 좁혔다. 아무리 떠올리려 해도 7살 이전의 기억은 기이하다 싶 을 만큼 텅 비어 있었다.

물론 어렸을 적 기억이 선명한 게 더 이상하지만, 그래도 의뭉스 러웠다. 나는 기억력이 그렇게 나 쁜 편이 아닌데도 어머니에 관해 선 작은 부분 하나도 떠올리기 힘 들었으니까. 누군가가 억지로 지 워 버린 것 같다 싶을 정도였다.

'그만큼 기억하고 싶지 않았던 걸까.'

힘든 시절 어머니를 떠올리기 싫은 마음에 내 무의식이 방어 기 제로 지워 버렸을지도 몰랐다. 나

는 피어오르는 이질감을 애써 지 우며 발걸음을 옮겼다.

'그러고 보니 이 앞은 'Hide & Ceek'인데.'

이제는 익숙해지기까지 한 길을 걸으며 슬며시 미간을 좁혔다.

증오인지 애정인지 분간할 수 없는 감정이 불쑥 고개를 들었다. 내게서 가장 극적인 반응을 이끌 어 낼 수 있는 한 남자의 얼굴이 떠오른 탓이었다.

'그 새끼 장사는 잘 되려나.'

사람 없는 길드의 거리를 보자 니 별 쓸 데도 없는 생각이 스물 스물 기어올랐다. 금전 난으로 배 를 곯으면 무척 고소할 것 같다는 마음과 어쩐지 그런 모습은 보기 싫다는 마음이 한꺼번에 들어 착 잡했다. 나도 내 마음을 다 알 수 가 없었다.

'아직도 정보는 안 보내줬단 말 이지. 시I끼가...... 일 그렇게 하다 다 말아먹지.'

나는 매일같이 편지 꾸러미를 확인해도 아직까지 보이지 않는 정보 문서를 떠올리며 혀를 찼다. 잘못 큰 자식을 보는 부모의 심정 이 되어 지그문트를 속으로 까 내 리고 있었을 때.

"조, 조금만 더 시간을 주면 확 실히 갚겠다니까!"

오른편 골목 너머로 희미하게 들려오는 목소리에 나는 우뚝 걸 음을 멈추었다.

정보 길드든 브로커 길드든, 종

류를 불문하고 대금을 겸업하는 길드들이 상당히 많았다. 대금은 돈 불리기 가장 좋은 일 중 하나 일 뿐더러 길드 자체가 보통 무력 가들로 이루어진 집단이니만큼 수 금에 용이하기 때문이었다.

아마 이 골목에선 혼한 일일 터. 그냥 스쳐 지나가는 것이 현명한 일일 테지만, 나는 갈 수 없었다. 들려오는 목소리가 익숙했던 탓이 었다.

"이거 안 놔? 감히 데카르도의 후계자에게 이렇게 대하다니

......

골목 너머 앙칼지게 울리는 목 소리는, 분명 메르헨 데카르도의 것이었다.

'무능한 개자식. 르웰린이 처리 할 쓰레기.'

메르헨을 떠올린 즉시 생각나는 단어들은 하나같이 부정적인 것이 었다.

'미친놈...... 고리대금에서 돈을 빌린 건가.'

껄끄러워진 나는 머리를 마구 헤집었다.

르웰린이 후계자로 서기 위해 본격적으로 작업을 시작한 이후, 메르헨의 입지는 빠른 속도로 줄 어들었다. 애초에 능력도 없는 놈 이 장자라는 이유로 차지하고 있 던 것이었으니, 진정한 후계자가 나타난 이상 모래성처럼 무너졌을 터였다.

'이를 갈고 있다는 소식을 듣긴 했는데 돈까지 빌렸을 줄이야.'

앞머리를 쓸어 넘긴 나는 앓는 소리를 냈다. 골치 아픈 상황이었 다.

어떻게 해야 하나 가늠하고 있 을 때였다.

"그게 지금 몇 번째 하는 말씀 인 줄은 아십니까, 데카르도의 도 련님."

이어서 들려온 익숙한 목소리에, 나는 숨조차 멈추고 굳었다.

정중한 듯하지만 한없이 서늘한 목소리. 낮은 톤에 음울한 어조. 호흡만으로도 겨울을 불러오는 이.

조금 신경을 기울이면 분명히 느껴진다. 얼어붙은 호수처럼 차 갑디 차가운 기운이.

내가 제 생각을 하는 줄 안 걸 까, 아니면 또다시 나를 뒤혼들고 싶은 것인가. 괜찮아질 만하면 그 는 또다시 모습을 드러냈다.

"나는 아주 오래 기다려 주었다

고 생각했는데 말입니다."

나는 목소리가 들려오는 골목을 향해 휙 몸을 돌렸다.

영원을 지난다 해도 잊을 수 없 을 그 목소리와 기운. 뼛속에 새 겨진 깊고 무거운 이름.

메르헨과 대치하고 있는 이는 지그문트임이 분명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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