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충직한 검이 되려 했는데-158화 (158/254)

158 화

'저 자식이랑은 정말 뭔가 있는 건가?'

우연도 세 번이면 운명이라는데, 지그문트와는 우리 둘 다 의도하 지 않았음에도 몇 번째 만나는 건 지 모를 일이었다. 이쯤 되면 엎 어져도 지그문트 쪽으로 엎어지는 게 아닐까 싶어 질릴 지경이었다.

"젠장...... 르웰린 그 자식이 후

계 계승에 끼어들 줄 누가 알았겠 느냐고! 조금만 더 기다려 줘. 르 웰린은 어떻게든 처리할......

"상황을 봐선 당신이 처리될 것 같습니다만."

메르헨의 애원에도 지그문트는 단호했다. 그의 목소리는 서늘함 을 넘어서 인간이 아닌 무가치한 무언가를 대응하는 것 같았다.

"후계자의 이름을 보아 계속 보 류해 줬지만 이래서야 살려 둘 가 치는 있나 싶습니다."

"자, 잠깐! 제발......!"

사형선고처럼 살벌하게 내려앉 은 지그문트의 한마디에 메르헨의 애원이 더욱 간절해졌다.

지그문트의 기운이 잘 벼린 검 처럼 날카로워졌다. 금방이라도 메르헨을 공격할 것 같았다.

나는 지끈거리는 관자놀이를 꾹 누르곤 자리를 박차고 허공으로 도약했다.

기척을 완벽히 죽인 채 소리 없 이 골목 벽 위를 달렸으나, 그새

내 존재를 파악한 건지 지그문트 의 기운이 크게 멈칫했다. 예나 지금이나 감 하나는 더럽게 예민 했다.

마음 같아선 이곳에 메르헨을 내버려 두고 가고 싶었다. 그가 르웰린에게 저지른 짓들은 그녀의 친구로서 절대 용서할 수 없었다. 나는 정말 그를 구하고 싶지 않았 다.

그럼에도 자리를 박차고 나선 이유는 두 가지였다.

첫째는 사람이 위험한 상황을 방관할 수 없기 때문이었고.

"방해해서 미안한데, 이 작자를 건드리는 건 곤란해. 이 목숨엔 임자가 있어서 말이지."

둘째는 메르헨의 파멸은 반드시 르웰린의 손에서 이루어져야 하기 때문이었다.

나는 유하게 웃으며 가볍게 착 지한 뒤 바닥에 엎어져 있는 메르 헨 앞에 섰다. 내가 올 것을 눈치 챈 듯한 지그문트가 놀란 기색 없

이 나를 바라보았고, 내 갑작스러 운 등장에 메르헨이 눈을 크게 떴 다.

나는 속으로 한숨을 쉬었다.

그에게 모욕을 들으면서도 손대 지 않고 내버려 둔 건 메르헨에 대한 처분이 오직 르웰린의 손에 서 이루어지길 바랐기 때문이었 다. 이대로 자멸해 버리는 건 곤 란했다.

'저런 놈은 르웰린의 손에서 더 고통받아야지.'

나는 서늘한 눈으로 메르헨을 곁눈질했다. 나와 눈이 마주친 그 가 크게 몸을 떨었다. 나는 메르 헨의 한심함에 혀를 차곤 지그문 트에게로 고개를 돌렸다.

'......저 가면.'

나는 지그시 입 안의 살을 깨물 었다.

내 검은 가면과 똑같은 형태의 흰 가면. 그가 첫 재회 때도 쓰고 있었던 저 가면은, 다름 아닌 카

라쇼의 선물이었다.

"자. 너희를 위한 새 가면이다."

어느 날 카라쇼는 환히 웃으며 두 개의 가면을 지그문트와 내게 내밀었다.

"슈슈는 그 허접한 가면을 바꿀 때가 됐고, 지그문트도 슬슬 새 가면이 필요했지. 하나씩 나눠 끼 라고 특별히 똑같은 모양에 색만 다르게 주문 제작해 왔다!"

그 말을 들은 지그문트와 나는 동시에 얼굴을 일그러뜨렸다.

"제가 왜 저 녀석과 똑같은 가 면을 씁니까. 불쾌합니다."

"맞습니다. 차라리 지금 가면을 계속 쓰겠습니다. 그리고 그렇게 허접하진 않습니다! 좀 저렴해서 그렇지......!"

"아니. 지금 네 가면은 허접 그 자체다. 지금 당장 누군가가 쓰레 기로 착각하고 쓰레기통에 던져 넣어도 이상하지 않아."

"하! 쓰레기통에 들어가야 하는

건 너 아닌가? 그리고 불쾌한 척 하는 게 굉장히 우습군. 너는 이 상황이 좋지 않나?"

"무슨 헛소리를 하는 거지?"

"넌 나랑 엮여서 좋잖아. 네 가 문의 영광 아닌가?"

"드디어 미쳤군."

"부끄러워 할 필요 없다, 지그문 트 하이드. 충분히 기쁜 티를 내 도 좋아."

"......스승님. 저 녀석이 스승님 의 능글거림을 배워 버렸지 않습 니까. 더는 회생할 여지조차 없는 것 같으니 길드로 가는 길에 봉지 에 싸서 버리는 게 좋겠습니다."

지그문트와 나는 견원지간이었 다. 사사건건 부딪쳐 죽일 듯이 싸웠으니 말이다.

여느 때와 같이 서로에게 으르 렁거리고 있을 때, 카라쇼가 유쾌 하게 웃었다.

"우정 아이템을 맞추면 얼마나 좋으냐. 녀석들, 좋으면서 괜히 툴툴거리는구나."

"하나도 좋지 않습니다."

"제가 이 자식과 맞출 건 주먹 밖에 없습니다."

지그문트와 나의 날선 대답에도 카라쇼는 태연했다. 나와 지그문 트를 보는 카라쇼의 눈이 어린 연 인을 보는 노인의 허허로운 눈빛 과 닮아 있어 얼굴을 와그작 구겼 을 때, 그녀가 눈꼬리를 늘어뜨렸 다.

"이 스승의 소원이래도 쓰지 않 을 게냐? 너희가 사이좋게 쓰는 걸 바랐는데......

나는 입술을 앙 물고, 지그문트 는 앓는 소리를 냈다. 그와 나 사

이의 얼마 없는 공통점 중 하나가 바로 카라쇼에게 약하다는 것이었 다.

"제가 검은색을 쓸 겁니다."

"뭐? 검은색은 내가 쓸 거다."

덥석 검은색 가면을 잡는 지그 문트의 손을 거칠게 쳐 냈다. 나 를 바라보는 보라색 눈동자에 가 소롭다는 기색이 서렸다. 나는 눈 썹을 꿈틀하며 비아냥거렸다.

"하얀 가면은 창백한 너나 쓰지 그래. 피부가 아주 백옥 같은 것

이 하얀 가면을 쓰면 피부랑 가면 이랑 구분도 안 가겠군."

"......하. 피부가 하얀 건 너도 만만치 않다. 네가 검은 가면을 쓰면 체스판 같을 거다. 순순히 내게 넘겨라."

지그문트와 나의 또 다른 공통 점은, 둘 다 검은색을 선호한다는 것이었다.

다만 지그문트는 다른 색의 옷 도 입긴 입었고, 나는 극단적으로 검은색 옷만 입었다. 때문에 그는 나를 어둠의 자식이라고 조롱하곤

했지만, 내가 보기엔 도토리 키 재기 였다.

"너희 둘은...... 정말 별걸 다 가지고 싸우는군. 흰 가면을 검게 칠해 주랴?"

카라쇼의 체념 어린 한마디에 지그문트와 내가 동시에 고개를 저었다. 똑같은 모양의 가면을 쓰 는 것도 싫은데 색깔까지 같으면 정말 싫을 것 같다는 마음이 통한 것 같았다.

"어쩔 수 없군. 동전 던지기로

정하자."

"그래."

"동전 던져서, 지는 쪽이 할복하 는 걸로."

"그래. 지는 쪽이...... 뭐?"

" 슈슈••••••

한쪽이 할복하면 같은 가면을 쓸 일도, 가면의 색을 가지고 싸 울 일도 없을 터였다. 내 제안에 지그문트는 어이없다는 표정으로 나를 바라보았고, 카라쇼는 한숨 을 쉬었다.

"동전 던져서 이긴 사람이 검은

가면을 써라."

지그문트와 살벌한 시선을 교환 하며 기 싸움을 하고 있었을까, 카라쇼가 단호하게 말했다. 스승 의 명을 거역할 수 없었던 나는, 지그문트의 할복은 다음으로 미루 며 주머니에서 동전 하나를 꺼냈 다.

"내가 앞면 할 거다."

"그러든지. 어차피 운이 좋은 쪽 은 나다."

한쪽 입꼬리를 끌어당겨 비웃는

지그문트를 향해 동전을 던지고 싶다는 충동을 참은 나는 동전을 허공으로 튕겼다. 그리고 수직으 로 낙하하는 동전을 양손으로 덮 어 잡았다. 나는 위로 덮인 손을 기세등등하게 떼어 냈다.

실제 넘어져도 뒤로 넘어질 만 큼 불운한 나와 달리, 지그문트는 운이 꽤 좋은 편이었다.

"내가 말했지."

결과를 확인한 내가 얼굴을 딱

딱하게 굳힐 때, 지그문트는 여유 롭게 웃었다. 선명한 보랏빛 눈동 자가 느긋하게 반짝였다. 동전을 잡은 손이 부들부들 떨려 왔다.

"뒷면...... 윽!"

말을 잇던 지그문트가 제 눈을 부여잡았다. 내가 순식간에 그의 두 눈을 찌른 탓이었다.

정정당당하지 못한 승부는 좋아 하지 않으나 지그문트와 하는 승 부만은 반드시 이겨야만 했다. 아 픈 듯 낮은 신음을 뱉는 모습이

조금 불쌍해 보이긴 했지만, 애초 에 비겁하게 싸우는 방법을 가르 쳐 준 사람이 지그문트였으니 죄 책감은 갖지 않기로 했다.

"스승님. 보세요. 앞면입니다."

태연하게 동전을 뒤집은 나는, 드러난 동전의 앞면을 카라쇼에게 보여 주었다. 카라쇼의 얼굴에 집 안을 엉망으로 만들어 놓은 고양 이를 보는 듯한 기색이 물들었다.

"그렇게까지 검은 가면이 갖고 싶나?"

눈을 몇 번 매만져 시야를 되찾 은 지그문트가 허탈한 목소리로 묻었다. 나는 당당하게 고개를 저 었다.

"아니. 너한테 지는 게 싫은 거 다."

지그문트의 두 눈이 나를 조용 히 담아냈다. 싸늘하게 화를 낼 거라 예상했던 것과 다르게 그의 반응은 잔잔했다.

새하얀 설원처럼 창백한 얼굴은

언제나 그렇듯 단단한 포커페이스 에 싸여 읽을 수 없었으나, 얼핏 웃음기가 스쳤던 것 같았다.

"목숨을 건 혈투가 아닌 이상 싸움에서 승패는 중요치 않다던 놈이 웃기는군."

"거기서 넌 제외다. 너와의 싸움 은 반드시 이겨야 해."

지그문트가 짧게 숨을 뱉었다. 웃음인 듯 한숨인 듯, 애매한 숨 결이 었다.

고요한 보랏빛 눈동자가 나를

응시했다. 두 눈엔 기분 좋은 서 늘함이 담겨 있었다.

"나는 네게 특별한 모양이지?"

그가 지나가듯 뱉은 말에 나는 흠칫했다. '특별하다'라는 단어가 지나치게 생소해 혼자 곱씹고 있 었을까, 지그문트가 흰 가면을 받 아 썼다.

나는 가면을 쓴 지그문트를 떨 떠름하게 바라보았다. 안 그래도 속을 읽을 수 없는 놈이 가면을 쓰니 더욱 의뭉스러워졌다. 지그

문트 특유의 고귀한 분위기 때문 에 용병은 무슨, 가면무도회에 온 귀족 자제 같았다.

'재수 없는 놈......

나는 눈을 흘겼다. 저 얼굴만 덜 됐더라면 더 전력으로 싫어할 수 있었을 텐데, 하필 놀랍도록 아름 다운 얼굴이라 싫어하다가도 주춤 하게 됐다.

나를 보곤 흐]', 하고 헛웃음을 뱉 은 지그문트가 입꼬리를 살짝 올 렸다.

"나는 싸움에서 승패를 아주 중 요하게 여기고, 너와의 싸움에선 더 중요시한다만......

카라쇼에게서 검은 가면을 건네 받은 지그문트가 그걸 내게로 휙 던졌다. 가볍게 받아내고 그를 물 끄러미 바라보자, 그의 눈꼬리가 희미하게 휘었다.

"배운 걸 충실히 사용하는 게 가상해서 말이다. 검은색을 더 좋 아하는 건 너니, 이번은 져 주 지."

그때 그 웃음은, 꽤 진심인 것 같았다.

잠시 사색에 빠져 있던 나는 앞 머리를 거칠게 쓸어 넘기며 정신 을 다잡았다. 그때와 지금은 다르 다. 너무 달랐다. 그때를 떠올려 봐야 좋을 것은 하나도 없었다.

'대체 저 가면을 왜 아직까지도 가지고 있어서는......

첫 재회 때 크게 혼들린 이유 중 하나가 바로 저 가면 때문이었 다. 진작에 버렸을 줄 알았는데, 예상을 한참 빗나가 관리가 잘 된 채로 그의 얼굴을 가리고 있는 가 면은 나로 하여금 많은 생각을 하 게 했다.

'그러는 나도 버리지 못했으니 까.'

입술을 살짝 깨물었다. 나 또한 그 가면을 지금 쓰고 있으니 할 말이 없었다. 누가 보면 지그문트 와 한패 같아 보일지도 모른다고

생각이 들었다.

'이 상황부터 처리를 해야지.'

가면에 대한 생각을 정리한 나 는, 메르헨을 발끝으로 툭툭 찼 다.

"이건 내게 넘겨줘야겠다."

나도 내가 상당히 뻔뻔한 소리 를 하고 있다는 걸 알고 있었지 만, 어쩔 수 없었다. 그렇다고 메 르헨의 빚을 대신 갚아 이 상황에 서 완전히 해방시켜 주는 건 싫었

다.

갑작스럽게 등장한 나를 경계하 던 지그문트의 수하들은, 내 말에 어이가 없다는 듯 얼굴을 일그러 트렸다.

"이 자식이 무슨 소리를......

"그만."

그들이 내게 위협적인 기세로 다가오려 할 때, 그 앞을 막아선 것은 지그문트였다. 새까맣게 죽 은 보랏빛 눈동자가 눈구멍 안쪽 에서 조용히 번뜩였다.

"이쪽은...... 내 막역한 악우다. 건드리지 마라."

막역한 악우. 깨끗한 쓰레기, 착 한 지그문트같이 양립할 수 없는 두 단어였다. 제멋대로 괴상한 호 칭을 만든 그를 짜게 식은 눈으로 바라보았을까, 그가 느긋하게 고 개를 기울였다.

"데카르도의 도련님이 내게 빌 린 돈은 상당하고, 나는 그에게 돈을 요구할 자격이 있다. 내가 왜 네게 넘겨야 하지?"

"내가 원하고, 나는 그를 데려갈 힘이 있으니까."

하, 하고 낮게 헛웃음을 뱉은 지 그문트가 고개를 살짝 쳐들며 나 를 내려다보았다. 마주하는 것만 으로도 몸이 저릿해지는 시선이었 다. 그는 어려서도 종종 저런 시 선을 보내곤 했지만, 완연한 어른 이 된 그의 위압감은 어린 날에 비할 수 있는 정도가 아니었다.

"그걸로는 안 돼. 여기서 나와 힘으로 결판을 내고 싶은 게 아니 라면 확실한 것을 제시해."

"커헉••••••!"

검은 가죽 장갑에 덮인 지그문 트의 손이 메르헨의 뒷덜미를 가 볍게 잡아 올렸다. 허공에 대롱대 롱 매달리게 된 메르헨이 컥컥거 리며 숨을 골랐다.

성인 한 명을 들고도 조금의 힘 든 기색도 없는 지그문트가 눈꼬 리를 휘었다. 간교한 뱀을 닮은 샐쭉한 눈웃음이었다.

"내가 데카르도의 도련님을 넘 기면, 너는 내게 무얼 줄 거지?"

낮은 목소리에는 흥미로워하는 기색이 감돌고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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