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충직한 검이 되려 했는데-160화 (160/254)

160 화

나는 능숙한 손놀림으로 검을 닦아냈다. 검날은 은빛으로 빛나 며 내 얼굴을 비추었다.

난 티 한 점 없이 깨끗한 검을 만족스럽게 바라보고 검집에 수납 했다.

'빨리 달지 않으면 울겠군.'

내 양옆을 차지한 채 나를 초롱

초롱한 눈으로 바라보고 있는 칼 과 아리아를 보고 있자면 저절로 웃음이 나왔다. 나는 조심스러운 손길로 검에 붉은색과 하늘색의 장식을 달았다.

"좋네요."

두 사람의 얼굴이 단번에 밝아 졌다.

검술 대회 증표라며 검 장식을 건네 온 둘은, 저번 사냥 대회 때 내게 줄 증표를 가지고 한바탕 싸 운 것을 반면교사 삼아 이번엔 사

전에 합의를 본 것 같았다. 아리 아가 뿌듯함이 가득한 표정으로 내 허리를 와락 안았다.

"본선 잘 치르고 와. 계속 응원 하고 있을 테니까."

"응. 이겨서 돌아올게."

나는 부드럽게 웃으며 아리아의 머리를 쓸어내렸다. 짧지만 부드 러운 머리칼이 손가락을 간지럽혔 다.

"검술 대회에서 오러를 사용할 생각이냐? 오러를 사용하면 곧바

로 미르임이 밝혀질 텐데. 네가 원한다면 언제든 미르임을 밝혀도 괜찮긴 하다만."

카이사르는 턱을 괸 채 앉아서 고개를 기울였다. 검은 와이셔츠 에 붉은 조끼로 가벼운 복색을 한 그는 느슨하게 풀린 기색이었다.

그 무뚝뚝한 성정에 입으로 직 접 말하진 않겠지만, 그는 이 순 간이 편하고 좋다고 온몸으로 말 하고 있었다.

"이번 기회에 밝히긴 할 겁니다

만, 바로는 아닙니다. 오러를 사 용하지 않아도 이기는 데엔 문제 없을 테니까요."

나는 태연스럽게 답했다.

검술 대회에서 오러 없이 승리 를 거두는 것쯤 어렵지 않을 듯했 다. 오러를 보이는 건 조금 나중 의 일이었다.

내 말에 세 사람 다 아리송한 표정을 지었지만, 내가 답으로 줄 수 있는 건 웃음밖에 없었다.

'아직은 말하면 안 되니까.'

나는 쓸개즙 같은 침을 삼켰다. 입 안이 온통 썼다. 더는 무언가 를 숨기고 싶지 않지만, 이건 불 가피 했다.

'이게 마지막이야.'

그것으로 위안을 삼으며, 나는 최대한 밝게 웃어 보였다.

"나는 네가 끝까지 네 자신이 미르임을 밝히지 않길 바랐는데."

조금 가라앉은 낯으로 찻잔 손 잡이를 매만지던 칼이 중얼거렸 다. 내가 어리둥절한 표정을 지으 니, 그가 고개를 들어 나를 바라 보았다.

원래 고귀하고 아름다운 것들엔 하나같이 전설이 따라붙기 마련이 다. 소지자를 죽게 만든다는 무서 운 전설이 있을 법한 섬뜩한 아름 다움을 가진 루비가 시리게 번뜩 였다.

"너는 미르가 검사들 사이에서 숭배되고 있다는 걸 모르겠지."

네?"

나는 커진 눈을 깜빡였다. '미 르'라는 이름이 유명한 것은 당연 히 알고 있었지만 숭배 수준인 줄 은 몰랐다. 유명세를 얻기 위해 검을 잡은 것도 아닐뿐더러, 그런 것에 관심을 가질 시간도 없었으 니까.

칼이 과장하는 게 아닌가 싶어 눈을 가늘게 떠보았지만 그는 진 지했다.

"미르가 평범한 일상에선 무얼

하는지, 어떨 때 정말 행복하다는 표정을 짓는지 나만 알고 싶었다. 미르의 본모습을 독점하고 싶었 어."

칼의 목소리는 심해 아래를 긁 듯 낮았다.

옅은 광기에 사로잡힌 붉은 눈 은 과거의 칼, 혹은 원작의 칼을 연상시켜, 나는 아주 오랜만에 그 를 보며 긴장감을 느꼈다.

"칼. 궁금한 게 있는데, 물어봐 도 됩니까?"

"무엇이든."

칼과 단둘이 보내던 어느 날의 오후, 나는 문득 의문이 떠올랐 다.

"우리가 두 번째로, 그러니까 눈 내리는 공작가 정원에서 만났던 때를 기억하십니까?"

"잊었을 리가. 내 동생이 나무에 매달려 대롱대롱 흔들리고 있을 때 아닌가."

"그건 좀 잊으세요......

민망함에 두 손으로 얼굴을 묻 는 나를 보며 칼은 너털웃음을 지 었다. 그와 처음 만났을 땐 감히 볼 수 있으리라 상상조차 하지 못 했던 표정이었다.

내가 달라지고 성장한 만큼 칼 또한 부쩍 달라졌음을 새삼 깨달 았다.

"그때, 제가 마수 토벌 때보다 훨씬 전부터 칼을 구해 왔다고 하 지 않았습니까."

'넌 날 구한 사람이다.'

'그건 마땅히 해야 할 일......

'마수 토벌 때도 있지만, 그보다 훨씬 전부터 넌 날 구해 왔어.'

내가 그와 처음으로 만났던 건 루주 마을 마수 토벌 때다. 그렇 기에 그 이전부터 내가 그를 구했 다는 칼의 말은 이해할 수 없는 것이었다.

"......그랬지."

"그건 무슨 뜻이었습니까?"

내 물음에 과거를 회상하는 듯

깊어져 있던 붉은 눈이 조용히 내 게로 굴러왔다. 그의 두 눈은 늘 피를 연상케 하는 섬뜩한 붉은색 이었는데, 그때만큼은 저물녘 태 양의 따뜻한 붉은색이 생각났다.

"카슈미르로서의 너를 처음 만 난 건 그때였지."

"그랬죠."

"하지만 미르로서의 너는 이전 부터 몇 번이고 만나 왔다."

"••••••네?',

여전히 그는 이해할 수 없는 말 을 했다. 내가 자세한 설명을 요

구하는 눈빛을 보내자, 그는 엷은 미소를 지었다.

"네가 징그럽게 생각할 것 같아 서 자세히는 말하지 못하겠군. 양 해해라."

" 무슨••••••

"다만 나는 네가 나를 알기 전 부터 너를 알고 있었다. 너는 내 이름을 알기도 전에 내 세상에 생 명을 불어넣었지."

칼이 나직하게 말했다. 그의 목 소리는 뺨에 톡 떨어지는 새하얀 눈송이처럼 시원하고도 부드러워

기분 좋았다. 그의 날카로운 눈매 가 낭창하게 휘어들었다.

"미르는 내게 삶을 알려 주었지. 이게 진정으로 사는 것이라고, 생 을 잊은 내게 줄곧 말해 주었다. 나는 그것으로 네가 없는 시간을 버텨 왔지."

"미르를 만나서 참으로 다행이 야. 그게 없었다면 나는 카슈미르 와 만날 순간까지 버티지 못하고 목을 매달았을지도 모르니. 그랬 다면 너무 억울했을 거다."

칼과 함께한 시간이 제법 지난 만큼, 나는 익히 들어 알고 있었 다. 그가 평생을 숨 막히는 무료 와 공허에서 버텨 왔음을.

칼은 나를 만나기 전의 과거가 흑역사라도 되는 양 말하기를 꺼 려 했지만, 과거의 그를 아는 이 들은 많았다.

'아가씨가 나타나셔서 다행입니 다. 아가씨가 없었다면...... 저는 진작에 섬길 주인을 잃고 실직자 가 되었을지도 모릅니다.'

칼을 오랫동안 섬겨 온 늙은 시 종은 언젠가 내게 그런 말을 했 다. 그 외에도 저택 내의 많은 사 람들이 무심코 내가 칼을 살렸다 는 투의 말들을 하곤 했다. 칼에 게 입막음을 당한 건지 자세하게 말해 주진 않았지만.

"미르가 내게 생을 알려 주었다 면, 카슈미르는 내게 행복을 알려 주었지. 나는 너를 보는 것만으로 도 즐거워지고, 너라는 존재가 살 아 있다는 사실만으로도 하늘에 있는 존재에게 감사하게 돼."

칼의 길고 하얀 손이 내 뺨을 쓸었다. 그의 손끝은 파충류의 피 부처럼 서늘했지만, 나를 바라보 는 눈동자는 명백히 사랑에 빠진 이의 뜨거운 눈빛을 담고 있었다.

내가 조금 멍해져 있었을까, 칼 의 눈이 깊어졌다.

"사실 아직도 가끔은 공허함에 빠져 신을 저주하곤 한다. 어째서 나를 이 세상에 태어나게 했는지, 왜 나만 정상적으로 살 수 없는 지, 어째서 들이쉬는 숨에 허무 를, 내쉬는 숨에 회의를 불어넣었

는지 수도 없이 원망했지."

태어남으로써 시작된 비극은 내 게만 해당되는 게 아니었다. 모두 가 각자 다른 모양의 배꼽을 가지 고 있었다. 탯줄을 자른 순간 만 들어지는 흉터 말이다.

"하지만 그러다가도 문득 이 생 각을 하면 머릿속이 말끔해지지."

눈을 감은 칼이 내 뒷머리를 부 드럽게 잡은 채 나와 이마를 맞대 었다. 똑같은 채도지만 길이와 구 불거리기가 다른 검은 머리칼이

이마 사이로 섞여들었다. 그의 이 마는 조금 뜨끈했다.

"그 원망스러운 신이, 이 사랑스 러운 것도 만들었구나."

나는 그 순간 보았던, 그가 천천 히 눈을 뜨는 모습을 평생 잊지 못할 것 같았다.

확실하게 들은 것은 없으나, 정 황상 칼이 '미르'에게 상당한 애 착을 가지고 있다는 것만은 확신

할 수 있었다. 나는 꽤나 살벌한 아우라를 풍기는 칼의 눈치를 살 폈다.

"제가 미르임을 밝히는 게 싫으 십니까?"

"그래. 싫어."

칼의 대답은 빠르고 단호했다. 나는 굉장히 난감해졌다. 거울을 보지 않았지만 내 동공이 흔들리 고 있을 게 분명했다. 나를 물끄 러미 바라보던 칼은 한숨처럼 긴 숨을 내쉬었다.

"하지만 내 감정보다 네가 더 중요하다. 네 목적이, 의견이 더 중요해."

칼이 상냥한 손길로 내 옆머리 를 넘겨 주었다. 그의 입가엔 어 쩔 수 없다는 미소가 감돌고 있었 다.

"그러니 네 뜻을 행해라. 그게 무엇이든 응원할 테니."

나는 입술을 꾹 깨물었다. 이제 는 다정에 조금 익숙해졌나 싶었

는데, 소용돌이처럼 휘몰아치는 지독한 다정엔 또 어찌할 바를 모 르게 되어 버렸다.

난 눈을 느리게 감고 칼의 손에 머리를 기대었다. 큰 손이 순간 움찔했지만, 이내 능숙하게 내 머 리를 받쳤다.

"실망시키지 않을게요. 정말요."

나는 이 다정한 이들을 실망시 키고 싶지 않았다.

'조금 긴장되는군.'

나는 짧게 심호흡을 하고 고개 를 쳐들어 눈앞의 건물을 바라보 았다.

로마의 콜로세움을 연상케 하는 거대하고 탁 트인 건물. 이곳이 검술 대회 본선이 진행되는 장소 였다.

아직 본선이 시작되기 한참 전 이라 주위는 한적했다. 출전자들 이 슬슬 모여드는 무척 이른 시간

이었다.

'이렇게 긴장한 게 좀 웃기네.'

나도 모르는 새에 몸이 위축된 것을 깨닫고 피식 웃음 지었다.

나는 소드 마스터였다. 카이사르 나 노아 정도가 나오지 않는 이상 은 질 리 없었다. 비하자면 초등 생 수학 올림피아드에 출전하는 수학자가 펜을 쥔 손을 긴장으로 떨고 있는 것이었다.

'무심코 오러를 내는 것만 조심

하면 되겠지.'

나는 손을 꾹 쥐었다가 펴며 심 호흡을 했다. 사실, 내가 느끼고 있는 이 감정은 긴장보단 흥분에 가까웠다.

검은 내 영혼이다. 나는 검을 휘 두를 때 진정 살아 있음을 느끼곤 했다.

검사에게 대련은 가장 즐거운 일이었다. 타인과 검을 맞대며 다 른 영혼을 알아가고 나와는 다른 방식을 배워가는 것은 짜릿했으

니. 검사는 필연적으로 다른 검사 와의 대련을 갈망했다.

'개자식! 오늘은 반드시 네 숨통 을 끊는다!'

'웃기지도 않는군. 해 보든지.'

어렸을 적엔 대련에 대한 갈망 을 지그문트와의 대련으로 채웠 다. 그와 나의 검은 정반대라 상 대하기 어려웠지만, 그만큼 배울 것도 많고 재밌었다.

하지만 지그문트와 완전히 엇갈

리고 난 뒤로는 대련에 대한 갈망 을 채워 줄 사람이 없었다. 마수 를 잡기 위해 수도 없이 검을 휘 둘렀지만, 마수를 일방적으로 도 륙하는 것과 다른 검사와 대련하 는 것은 차원이 달랐다.

크리시스의 일원이 된 후론 가 끔 카이사르와 대련을 하긴 했지 만, 그는 첫 대련에서 내게 상처 를 입힌 뒤로 진심으로 임하지 않 았다. 진심 없는 대련으로는 끓어 넘치는 소드 마스터의 투기를 잠 재울 수 없었다.

'진심으로, 필사적으로 부딪쳐 보고 싶어.'

찌릿거리는 손을 꽉 쥐었다. 저 절로 입가에 미소가 피어올랐다.

내 실력과 비등한 수준의 검사 를 만날 순 없을 것이다. 내가 전 력을 사용할 일은 없겠지만, 그것 까진 바라지도 않았다. 실력이 없 어도 좋으니 진심으로 부딪쳐 오 는 상대와 검을 맞대 보고 싶었

생각만으로도 피가 끓는 느낌에

누가 보면 미친 사람이다 싶을 정 도로 히죽거리고 있을 때였다.

청아한 아침 공기 사이로 익숙 한 향기가 섞여 들었다. 수많은 기운이 난잡하게 섞인 광장에서도 똑똑히 구분할 수 있을 만큼 따뜻 하고 곧은 기운. 내 머리 위로 부 스러지는 햇빛을 닮은 금빛 아우 라.

" 아."

내게로 다가오는 발걸음 소리에 작게 탄식을 뱉었다. 어쩐지 몸이

화끈 달아오르는 느낌이었다.

조금 민망하고 쑥스러웠지만, 그 것보단 그리움이 더 컸다. 나는 천천히, 그렇지만 너무 느리지 않 게 몸을 돌렸다.

그리고 이내 두 눈이 마주했다.

" 카슈미르."

소름끼치도록 좋은 낮은 목소리 가 내 이름을 불렀다. 나는 고개 를 살짝 쳐들어 시선을 맞추었다. 왼쪽 입가가 참을 수 없게 간지러

워졌다.

은회색 머리칼에 황금색 눈동자. 누구보다 올곧은 시선.

"라이너."

축제 이후 처음으로 만난, 라이 너 아인하르트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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