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충직한 검이 되려 했는데-161화 (161/254)

161 화

'젠장, 눈을 못 마주치겠어......•'

나는 라이너에게서 살짝 비껴 나간 허공에 시선을 둔 채 괜스레 목덜미를 쓸어내렸다. 점점 더 더 워지는 여름 날씨 때문인지 몸에 은은하게 열이 올랐다.

"그간...... 잘 지내셨습니까?"

조금 어색하게 물었다. 라이너와

내 사이의 분위기가 가느다란 실 하나로 아슬아슬하게 지탱되고 있 는 것 같았다. 나는 이유도 모르 고 긴장한 채로 습관처럼 검 손잡 이를 매만졌다.

황금빛 눈동자가 나를 물끄러미 응시했다. 조금 일렁이면서도 올 곧은 눈빛이었다. 분명히 여느 때 와 같았으나, 그날 밤 들끓던 그 의 눈빛이 너무 강렬하게 뇌리에 남아서인지 나는 지금의 완벽히 절제된 시선이 되레 어색하게 느 껴졌다.

"물론입니다. 저는 아주 무탈했 습니다."

한참 말없이 나를 바라보던 라 이너는 뒤늦게 대답했다. 엷게 미 소 짓는 그의 얼굴을 보고 있자니 천천히 긴장이 풀리는 느낌이었

"제가 근신하고 있는 동안 대귀 족 회의에 참가하셨다고 들었습니 다."

"아, 맞습니다. 사냥 대회 때 일 을 증언했죠."

"저도 함께 있었다면 증언을 도

와드릴 수 있었을 텐데...... 죄송 합니다."

라이너는 매끄럽게 대화를 이어 갔다. 나는 나를 향해 눈꼬리를 살짝 늘어뜨리며 사과를 건네는 라이너를 향해 고개를 휘저었다.

"혼자서도 충분히 할 수 있는 일이었고, 제 일이었습니다. 라이 너가 근신을 당하고 싶어서 당한 것도 아니잖습니까. 죄송해하지 마시죠. 라이너는 근신이 끝난 겁 니까?"

내 물음에 라이너가 고개를 끄 덕였다.

"네. 근신이 풀린 지는 조금 되 었고, 어제는 기사단에서 훈장까 지 받았습니다."

"축하드립니다. 무척 잘됐군요."

나는 유하게 눈꼬리를 휘며 진 심을 다해 축하해 주었다. 내가 받은 것도 아닌데 괜히 뿌듯하고 자랑스러웠다.

라이너가 입술을 꾹 깨물었다. 그의 눈동자가 가라앉고, 표정이

무거워졌다.

"잘된 일이지만...... 저는 마음 이 불편합니다."

"네? 어째서요?"

나는 눈을 크게 떴다. 훈장은 최 고의 명예였다. 귀족들이 괜히 가 슴팍에 훈장을 달고 다니는 게 아 니었다. 심지어 황가를 지키다 받 은 훈장이니 대단한 것일 게 분명 했다.

"제겐 받을 자격이 없습니다."

"그게 무슨 소립니까."

라이너의 단호한 말에 나는 표 정을 굳혔다.

"라이너가 받을 자격이 없다면 여태껏 세상엔 훈장이라는 제도조 차 없었을 겁니다."

라이너는 내가 아는 모든 이들 가운데 가장 용맹하고 올바른 사 람이었다. 위험을 무릅쓰고 테러 를 막은 그는 훈장을 받아 마땅했

내 호언장담에 라이너가 복잡한

표정으로 나를 바라보았다. 내 말 에 크게 감동을 받은 듯하면서도 나를 향한 미안함이 비치고 있었

라이너가 미안해하는 이유를 몰 라 미간을 좁힐 때, 그의 붉은 입 술이 천천히 달싹였다.

"훈장을 받아야 하는 사람은 제 가 아니라 당신이었습니다. 테러 에 관한 전반적인 사실을 알아낸 것도, 폭탄의 위치를 찾아낸 것 도, 사람들을 구한 것도 카슈미르 입니다."

나는 느리게 눈을 깜빡였다.

라이너가 훈장을 받는다면 나 또한 받아야 이치에 맞긴 했다. 나 또한 그와 함께 테러를 막았으 니.

하지만 황궁에서 미르를 호출할 방도가 있을 턱이 없는 데다, 정 체불명의 평민 용병에게 훈장을 주기에는 귀족들의 자존심이 상할 터였다. 내 존재가 지워지고 라이 너만 훈장을 받은 건 당연한 일이 었다.

"저는 훈장 같은 거 안 받아도 괜찮습니다. 그리고 정체를 숨기 고 있는 입장에서 받는 건 우습지 않겠습니까?"

"그래도 당신이 받길 바랐습니 다. 그 편이 더 기뻤을 겁니다."

나는 라이너를 달래듯 부드럽게 말했으나 낮은 목소리가 고집스럽 게 반박했다. 별것도 아닌 것에 마음을 쓰고 있는 라이너를 보고 있자니 고마우면서도 귀여웠다.

나는 시원하게 웃으며 그의 어

깨를 두드렸다.

"제가 받지 못했다고 해서 라이 너의 자격이 사라지는 건 아닙니 다. 라이너는 충분히 받을 만한 자격이 있습니다."

그의 금색 눈동자가 별이 빛나 는 것처럼 느리게 반짝였다. 나는 슬픔과 애정이 담긴 그 눈과 정면 으로 마주하며 눈꼬리를 휘었다.

"저는 라이너가 받은 것으로 충 분합니다. 제가 받은 것보다 더 기쁘군요."

정말이었다. 나는 역시 내 명예 가 쌓이는 것보단 라이너의 명예 가 높아지는 것이 좋았다. 내 주 위 사람들이 바로 내 명예였으니 까.

"......그렇습니까. 네, 생각해 보 니 상관없겠습니다."

하늘에 둥둥 떠다니듯 몽롱함이 깃들어 있던 그의 두 눈이 이내 부드러운 기색을 띠었다. 직선으 로 딱딱하게 굳어 있던 그의 입매 가 호선을 그리며 말려 올라갔다.

라이너의 상체가 굽으며 내 위로 그림자가 졌다.

태양을 등진 그는 역광을 받으 면서도 화사하게 빛나고 있었다.

"내 모든 게 당신 것이니, 내 훈 장이 당신의 훈장입니다."

나는 라이너의 목소리가 좋았다. 중저음의 낮은 목소리는 늘 반딧 불처럼 은은한 빛을 머금고 반짝 였다. '빛나는 목소리'라는 게 우 습게 들려도 사실이었다. 그의 목 소리는 정말 반짝거렸다.

"검술 대회에 출전하신다고 들 었습니다. 오늘 본선을 치르시겠 군요."

"아, 네. 라이너도 출전한다고 들었는데요."

라이너의 다정한 말에 여운을 곱씹고 있었을까, 그가 자연스럽 게 말문을 돌렸다. 내 되물음에 라이너는 고개를 끄덕였다.

"네. 저는 기사단장이라 준결승 전부터 출전하게 되었습니다. 카 슈미르와는 뒤늦게 만나게 되겠군

요.

하기야, 무려 황궁 제2 기사단 장이 본선 처음부터 참가해 웬만 한 실력자들을 다 압살하고 올라 와 버리면 곤란해질 터였다. 나는 내가 준결승전까지 올라올 거라 확신하는 라이너를 보며 조용히 눈을 빛냈다. 심장이 두근거렸다.

"이번에야말로 라이너와 검을 부딪쳐 볼 수 있겠군요."

라이너가 말없이 나와 눈을 맞 추었다. 우리 사이에서는 잠시 사

적인 감정이 사라졌고, 우린 검사 로서의 시선을 교환했다.

체력을 단련하며 라이너로부터 방어를 배운 지 꽤 오래되었지만, 나는 그와 정식으로 검을 맞댄 적 이 한 번도 없었다.

'아인하르트 경, 저와 대련 한 번만 해 주실 수는 없습니까?'

나는 라이너의 검술이 좋았다. 올곧은 그의 영혼을 따라 강하고 단단한 그의 검을 상대하고 싶었 다. 그래서 몇 번이고 대련을 요

청하곤 했지만, 그때마다 그는 특 별한 이유 없이 거절을 해서 난 내심 시무룩해지곤 했다.

'......조금만 더 기다려 주시기 바랍니다. 미르 님을 즐겁게 할 수 있는 경지가 되면 그때 제가 대련을 신청하겠습니다.'

언젠가 여느 때처럼 대련을 청 했을 때였다. 한참 망설이던 라이 너는 고해하듯 이렇게 말했다. 그 가 나와의 대련을 계속 거절해 온 이유를 알게 된 순간이었다.

라이너는 이전부터 자신의 무력 에 집착하는 모습을 보였다. 워낙 정신이 건강한 사람이었으니 광기 수준은 아니었지만, 가끔 빠르게 늘지 않는 무력에 고뇌하는 게 티 가 났다.

'더는 무능하게 지켜지고 싶지 않다고 했지.'

나는 하라바나를 앞에 둔 라이 너가 했던 말을 기억했다. 어렸을 때 몸이 약했던 그를 생각하면, 무력에 대한 집착도 충분히 이해 가 되었다.

'언니, 나는 강해질 거야. 더는 누군가에게 지켜지기만 하지 않을 거야.'

나는 라이너와 닮은 인물을 알 았다. 태생부터 약하여 남의 도움 없인 삶을 영위할 수 없다는 게 얼마나 괴로운 것인지 감히 이해 한다고 할 순 없어도, 어떤 것인 지는 알았다.

알을 깨고 보호에서 벗어나 스 스로 날아가려고 하는 강인한 영 혼들은 참으로 찬란했다.

'......그러시죠. 그때까지 기다리 겠습니다. 다만 이건 알아주셨으 면 좋겠습니다.'

나는 그런 이들을 응원했기에 그의 요청에 순응했다. 그러면서 한마디를 덧붙였다.

'제가 기대하는 건 강한 무력이 아니라 경의 검 자체라는 걸요.'

라이너와 검을 부딪치고 싶은 건 그가 강하기 때문이 아니었다. 물론 강하니 더 좋긴 했지만, 본

질적으론 그와 검을 나누는 것 자 체를 바라고 있었다.

대련은 검사 대 검사로 서로의 영혼을 엿보는 것과 같았다. 검이 허공에서 수놓이는 모양을 보며, 나는 그가 살아온 삶을 짐작하곤 했다.

나는 라이너가 궁금했다. 라이너 의 영혼을, 그가 살아온 삶을 알 고 싶었다. 그것들을 알게 되는 순간을 아직까지도 열망하고 있었

"이번엔 진심으로 검을 나눠 주 시는 겁니까?"

나는 장난스럽게 물었다. 온화한 황금빛 눈동자가 나를 연필로 따 라 그리듯 천천히 조심스럽게 담 아내다, 이내 그의 눈꼬리가 내리 막길을 그리며 휘어졌다.

"......네. 이제 더는 회피하지 않 겠습니다. 오실 때까지 기다리고 있겠습니다."

고개를 숙인 라이너가 내 머리 에 제 머리를 살짝 비볐다. 색채

도 길이도 사뭇 다른, 검은색과 은회색의 머리칼이 섞여 들었다. 이마에 닿는 그의 머리칼은 부드 럽고 간지러웠다. 기다리라는 명 령을 충성스럽게 수행하는 대형견 의 모양새라, 나는 작게 웃음을 터트리고 말았다.

"금방 올라가겠습니다. 미리 말 씀드리지만, 저는 안 봐드립니

나는 라이너와 검을 맞댈 날을 기약했다.

"저기 저 사람, 크리시스의 공녀 아닌가?"

"허...... 출전한다는 소문은 들 었건만 정말 호위도 하나 없이 단 신으로 올 줄은 몰랐군."

"뭐, 해 봤자 귀족 영애의 짧은 유흥 아니겠는가. 검술도 형편없 겠지."

나는 다른 사람들의 수군거림을 모두 주워 들으면서도 태연하게 검 장식을 매만졌다.

'이런 건 미르로 살면서 이미 익 숙해졌어.'

사람들의 시선도, 수군거림도 내 겐 일상에 불과했다.

나는 내가 다 듣고 있는 줄도 모르고 조잘거리는 이들에게 시선 도 주지 않은 채 내 차례를 기다 렸다.

'몸은 첫 경기 때 풀어도 되겠 지.'

딱히 몸을 풀 필요성을 느끼지

못해 의자에 늘어져 앉아 하품을 했다. 나는 무료해하며 통신 마도 구가 보여 주는 본선 경기를 구경 했다.

검술 대회는 토너먼트 형식으로 이루어졌고, 1차 본선은 이틀간 진행되었다. 나는 첫째 날 출전자 로서 대기실에 앉아 다가올 내 경 기를 기다리고 있었다.

'대진표를 봤을 땐 꽤 놀랐지.'

나는 며칠 전 대진표에서 봤던 내 첫 상대가 떠올라 피식 웃었

'여기서 떨어질 사람은 아니다 만...... 어쩔 수 없지. 대진운이 나빴어.'

내가 질 리는 없으니 당연히 상 대의 패배일 터였다. 나는 괜스레 내가 더 아쉬워져 한숨을 쉬었다. 그를 짓누를 생각을 하니 양심이 쿡쿡 찔려 왔다. 파릇파릇한 새싹 밭에 눈치 없이 끼어들어 정기를 쪽쪽 빨아먹는 얌생이 고목이 된 기분이었다.

'노아도, 카이사르도 예의상 출 전하지 않는데 내가 제국 소드 마 스터 위상을 다 깎아 먹고 있군.'

나는 더더욱 아파 오는 양심을 꾹 눌렀다. 그래도 그들은 중년이 니 끼어들면 참 꼴불견이겠지만, 난 외견만큼은 10대이니 어느 정 도 정상참작이 될 거라고 합리화 할 때였다.

"다음 출전자는, 카슈미르 도레 마 드 카이사르 크리시스 공녀님 입니다!"

'내 차례네.'

나는 여태껏 들려오던 평민들의 이름에 비해 무척 길고 거창한 내 이름을 들으며 자리에서 일어섰 다. 그대로 두 팔을 쭉 뻗어 가볍 게 스트레칭을 한 다음 전투장으 로 발걸음을 옮기려다 문득 뒤를 돌아보았다.

"아. 자네, 알아 두는 게 좋네."

나는 눈을 조용히 빛냈다.

"피는 꽤 진하다는 걸 말이야."

"네, 네? 저 말입니까?"

나와 눈이 마주친 남자가 화들 짝 놀란 표정을 지었다. 조금 전 까지 내 뒤에서 나를 열심히 깎아 내리던 사람이었다. 나는 미친 듯 이 혼들리는 동공을 바라보다 뱀 처럼 샐쭉 웃음 지었다.

"긴 역사간 수많은 검귀를 배출 한 크리시스의 피는 그들의 눈만 큼이나 진한 붉은색이지."

나는 허리춤에 검을 걸었다.

"내 눈은 그만큼 붉진 않지만, 그렇다고 검귀의 피까지 희석되진 않았어."

내 눈은 붉지 않았다. 가끔은 거 울 속에서 빛을 반사하여 빛나고 있는 모습에 스스로 놀랄 정도로 쨍한 분홍색이었다.

언젠가는 카이사르나 칼의 눈처 럼 붉지 않은 내 눈이 싫기도 했 다. 하지만 이젠 아니었다.

내 눈은 검은 용의 붉은 눈은 아니었지만, 자랑스러운 크리시스

의 공녀, 카슈미르 크리시스 본연 의 분홍빛 눈이었다.

내가 자신의 수군거림을 들었다 는 걸 깨달은 건지, 남자의 얼굴 이 새하얀 눈과 비견할 수 있을 만큼 창백해졌다. 나는 어깨를 가 볍게 으쓱이고 발걸음을 옮겼다. 특별히 죄를 물을 생각은 없었다.

와아아아-!

결투장에 들어서자 환한 빛이 내 머리 위를 내리쬐었다. 난 귀 가 아프도록 쏟아지는 함성을 흘

러 넘기며 조금의 흐트러짐도 없 이 걸어가 결투장 한가운데에 섰

나는 나에 대해 떠드는 군중들 의 이야기를 모두 백색소음으로 여기며 내 상대가 나올 반대편의 문만 바라보았다. 얼굴을 볼 생각 에 벌써부터 웃음이 흘러나왔다.

내 상대는 이미 내가 익히 아는 사람.

"그 상대는 세레논 오디세이 디 헬리오스 솔라티네 황자님입니

내 제자, 세레논이었다.

저벅저벅.

세레논은 2황자였지만, 디에고와 는 다른 매력의 잘생긴 얼굴로 상 당한 인기를 끌고 있었다. 그 인 기를 증명하듯 세레논의 이름이 호명되자마자 굉음 같은 함성이 일대를 뒤흔들었다.

그러나 수많은 소음 사이에서도 내겐 모래 바닥을 밟고 다가오는

작은 발걸음 소리만 크게 들렸다.

"카슈미르 크리시스가 2황자 저 하를 뵙습니다."

나는 작게 웃으며 허리를 굽혀 인사했다.

"이렇게 만나니 새롭네요."

천천히 고개를 든 세레논이 나 와 눈을 맞추었다. 연한 라일락색 머리칼이 햇빛을 받아 투명하게 빛났다. 축 처진 눈꼬리가 휘어 들어가고, 그 증심에 박힌 푸른색

눈동자가 보석처럼 반짝였다. 검 사보단 요정에 가까워 보이는 신 비로운 얼굴은 무척이나 아름다웠 다.

"보고 싶었습니다, 스승님."

내 첫 대전 상대는 나의 제자였 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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