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62 화
"참고로 카슈미르 크리시스 영 애께선 현제 세레온 황자 저하의 검술 스승으로서......
해설자의 쩌렁쩌렁한 목소리가 귀에 웅웅 울렸다. 난 주위가 지 나치게 시끄러운 게 싫었기에, 살 풋 미간을 좁히며 투명한 마나의 막으로 세레논과 나를 덮었다. 소 리가 완벽히 차단되자 이 세상에 나와 세레논만 남은 것 같았다.
"스승과 제자의 대결이라니, 상 황이 참 짓궂습니다."
나는 갑자기 소리가 차단된 상 황에 놀란 표정을 짓는 세레논을 향해 유한 목소리로 말했다. 잠시 눈을 깜빡이던 세레논은, 이내 안 그래도 축 처진 눈꼬리를 더욱 부 드럽게 풀어 내렸다.
"그런가요? 저는 좋은데요."
"1차 본선에서 떨어져도 괜찮으 십니까? 제가 가르친 저하는 여 기서 떨어질 실력이 아닌데. 사람
들도 시끄럽게 떠들어 댈 겁니다. 고작 귀족 영애에게 졌다고요."
나는 앞머리를 쓸어 넘기며 여 상스럽게 물었다. 낮게 웃음을 흘 린 세레논이 웃음기 어린 눈동자 를 나와 맞추었다.
평소 인형처럼 생기가 없던 뿌 연 푸른색 눈동자는 내 앞에서 검 을 잡을 때면 언제 그랬냐는 듯 찬란하게 반짝거렸다. 그때만큼은 그의 눈이 우울한 안개가 아니라 신비로운 푸른 진주 같았다.
"괜찮아요. 대단한 강자에게 지 는 것은 부끄러운 일이 아니니까 요. 그리고 애초에 제 목적은 스 승님 이었으니까."
세레논이 유려한 손길로 발도했 다. 자신이 가장 고귀한 피를 이 었음을 증명하듯, 검을 뽑아 겨누 는 그 일련의 과정조차 우아함이 돋보였다.
"이번엔 진심으로 싸워 주실 거 죠?"
붉은 입술이 얇아지고, 입꼬리가
말려 올라갔다. 진심으로 행복하 다는 듯 웃는 세레논은 지도에는 없는 어느 호수에 살고 있는 요정 처럼 몽환적이었다. 나는 덩달아 피식 웃고 말았다.
"스승을 향해 거침없이 날을 세 우다니, 대단한 불효로군요."
"사랑스러운 제자의 발칙한 애 교 정도로 봐 주시죠."
내 장난스러운 꾸짖음을 세레논 이 능글맞게 받아쳤다.
'나랑 싸우는 게 목적이었다고
하니 이겨도 괜찮겠지.'
제자를 쥐어 패고 올라가야 한 다는 사실에 쇠꼬챙이로 푹푹 찌 르는 듯하던 양심의 고통이 한층 완화되었다. 나는 여유롭게 검 손 잡이에 손을 올렸다.
"아쉽지만 오늘도 오러는 못 보 여 드립니다."
'스승님. 제자가 빨리 오러를 뽑 을 수 있도록 먼저 오러를 뽑는 시범을 보여 주시면 안 됩니까? 스승님 오러를 보면 금방 오러를
만들 수 있을 것 같은데.'
'오늘 날씨가 무척 좋군요. 스승 님 오러를 보기 좋은 날 아닙니 까?'
이전부터 세레논은 내 오러에 지대한 관심을 보였다. 하루가 멀 다 하고 오러를 보여 달라고 하니 이젠 조금 안쓰러울 정도였지만, 나는 아직까지도 오러를 보여 준 적이 없었다. 오러를 보여 준다는 건 내가 용병 미르라고 밝히는 것 과 같았으니까.
세레논의 표정이 조금 시무룩해
졌다. 나는 축 처진 그의 얼굴을 아기 고양이 보듯 바라보다, 검집 에서 검을 뽑았다.
"하지만 적어도 진심을 다하도 록 하죠."
사실 정말 진심으로 싸웠다가는 황족 살해자로 목이 잘릴 것이다. 그를 제자로서 가르치는 것이 아 니라, 검사 대 검사로서 상대하겠 다는 의미였다.
"무척, 기대가 됩니다, 스승님."
세레논의 양 뺨이 복숭앗빛으로 물들었다.
그는 검을 사랑했다. 황궁에 살 며 거짓과 가식에 물든 면모를 보 이기도 했지만, 검에 대한 마음만 큼은 진심이었다. 나는 무척 들떠 보이는 세레논을 향해 검을 세우 며 마나의 막을 해제했다.
와아아아-!
막이 사라지는 즉시 시끄러운 소음들이 쏟아져 나왔다. 나는 힐 끔 눈을 들어 관중석을 바라보았
다.
'아는 사람이란 아는 사람은 다 온 것 같군.'
나는 가장 상석에 앉은 헬리오 스와 엘을 응시했다. 보통 황제와 교황은 준결승전쯤부터 모습을 보 였지만, 헬리오스는 세레논을, 엘 은 나를 보기 위해 벌써 관전하러 온 듯했다. 그뿐만 아니라 황태자 디에고를 포함해 나와 친분이 있 는 고위 귀족들 모두가 경기를 지 켜보고 있었다.
"그럼, 경기를 시작하겠습니다!"
사회자의 한마디를 기점으로 세 레논과 나 사이의 분위기가 단번 에 팽팽해졌다. 세레논의 연한 벽 안이 진지해졌다. 당장에라도 서 로에게 달려들어야 하는 상황이었 지만 그와 나, 둘 다 웃음을 잃지 않았다.
"부디 부족한 제자와 잠시나마 어울려 주시기를."
그 말을 끝으로, 세레논은 나를 향해 가볍게 도약하며 검을 휘둘
렀다.
검날이 강하게 맞부딪쳤다. 세레 논의 검엔 묵직한 힘이 실려 있었 지만 나는 흔들림 없이 그의 검을 막아 내고 크게 내쳤다,
'처음에 비하면 정말 늘었단 말 이지.'
나는 처음 세레논과 검을 마주 했을 때를 떠올렸다. 검에 대한 열정이 돋보이고 재능도 있었던
반면, 제대로 배우지 못한 건지 전반적으로 엉성했다.
지금도 부족함이 보이긴 하지만, 몇 달간 급속도로 성장한 세레논 은 나를 뿌듯하게 했다.
챙! 챙!
나는 나를 향해 호기롭게 날아 오는 세레논의 검을 매끄럽게 받 아내며 그를 응시했다. 시린 검날 두 개가 맞닿은 틈새로 보이는 세 레논의 눈은 햇빛을 받은 모래알 처럼 반짝이고 있었다.
'내 검술과 닮아 가고 있단 말이 지.'
어깨 부근으로 빠르게 날아오는 검을 쳐 냈다.
힘에만 치중하던 세레논의 검에 예리함과 세밀함이 더해지고, 정 적이던 움직임이 자유분방하게 변 해 가며 점점 더 내 검술과 닮아 가고 있었다.
'자기가 용병왕 미르의 검술을 전수받고 있다고는 상상도 못 하
겠지.'
나는 키득 웃었다. 자신이 미르 의 단 하나뿐인 제자임을 알게 된 다면 그가 어떻게 반응할지 정말 궁금했다.
캉!
빠르게 움직이는 발을 따라 흙 먼지가 자욱하게 날리고, 햇빛을 받아 시리게 빛나는 두 날붙이가 허공을 수놓았다. 실력을 드러내 지 않고 가볍게 검을 교환하던 나 는 고개를 들어 관중들을 확인했
다.
관중들은 공녀와 황자의 대련이 라는 쉬이 볼 수 없는 구경거리에 크게 환호하고 있었다. 그와 나의 대련 수준이 낮지 않았으니 더욱 그랬다.
나는 몇몇 사람들이 나를 보며 놀란 표정을 짓는 걸 포착했다. 공녀라 별달리 기대하지 않았던 내가 세레논과 대등하게 싸우는 모습에 많이들 놀란 것 같았다.
나야 가볍게 하고 있지만 무력
이 없는 이들의 눈엔 지금까지도 충분히 화려해 보일 터였다. 나는 전체적으로 절제된 느낌인 내 본 연의 검술을 잠시 내려놓고, 흥분 한 관중들을 위해 더욱 화려하게 움직이기 시작했다.
'너무 쉽게 끝내면 안 돼.'
내 머리가 있었던 곳을 크게 베 고 지나가는 세레논의 검을 피하 며 적당한 타이밍을 노렸다.
관중들은 내가 미르라는 걸 몰 랐다. 아무리 그의 스승 직위에
있다고 해도, 너무 쉽게 이겨 버 리면 세레논의 명예에 흠집이 갈 수 있었다. 나는 서서히 속도를 높이기 시작했다.
쉬익
거센 바람 소리가 고막을 자극 했다. 빠르고 역동적인 내 움직임 을 좇으려 애쓰는 세레논의 이마 로 구슬땀이 흘러내렸다.
처음은 한 자리에 서서 큰 움직 임 없이 검만 움직이던 스타일을 바꿔, 움직임의 반경을 넓히기 시
작했다. 경기장은 충분히 넓었고, 공간은 활용하면 활용할수록 박진 감이 넘치는 법이었다. 나는 세레 논을 점점 더 벽 쪽으로 몰아갔 다. 흙먼지 바람에 포니테일로 묶 은 머리카락이 크게 휘날렸다.
"저하, 제가 이전에 한 말 기억 하십니까!"
점점 더 커지는 관중들의 소리 와 전투 소음에, 세레논에게 말을 걸기 위해선 반쯤 고함을 쳐야 했 다. 세레논은 내게 눈빛으로 의문 을 표했다.
'나를...... 닮긴 닮았군.'
나는 검을 나누면서 그의 얼굴 을 보며 새삼스럽게 알아차렸다. 모자 사이도 아닌 사제지간인데 이렇게 닮아 간다는 것이 신기했 다.
투쟁심과 흥분으로 물든 푸른 눈. 잔뜩 올라간 입꼬리. 피를 흘 리면 흘릴수록 강해지는, 광전사 를 닮은 분위기.
요정 같은 외모와 상반된 듯하
면서도 잘 어울려서, 나는 짧게 헛웃음을 뱉었다. 지금의 세레논 은 정말 즐거운 전투를 마주했을 때의 나와 똑같았다.
"실전에 강한 검사가 되고 싶다 면."
나는 세레논의 검을 쳐 내며 발 에 마나를 두른 채 도약했다. 내 힘에 순간 휘청거리며 자세가 무 너진 세레논이 허공에 오른 나를 놀란 눈으로 바라보았다.
"지형을 이용하는 방법을 알아
야 한다고!"
파
빙판에서 스핀을 돌듯 허공에서 측면으로 빙 회전한 나는, 무중력 상태에서 경기장 벽을 발판 삼고 압축되었다 풀린 스프링처럼 높게 박차 올랐다.
쉬이익!
정점에 달했을 때, 나는 세레논 의 어깨를 향해 검을 던졌다.
세레논이 피가 흐르는 어깨를 부여잡으며 신음을 흘렸다. 일부 러 빗맞힌 검은 그의 살갗을 얕게 베고 세레논의 등 뒤로 박혔다. 잠시 멍하니 나를 바라보던 세레 논이 기분 좋게 웃음을 터트렸다.
"하하! 제가 스승님의 가르침을 어떻게 잊겠습니까!"
늘 환상을 부유하는 것 같던 그 의 몽환적인 두 눈이 현실 한가운 데로 내려앉아 세차게 불타올랐
다.
"전투에선 어떤 행동도 비겁하 다 할 수 없다고 하신 것도 스승 님이죠!"
촤악
세레논의 검이 선을 긋듯 땅을 긁었다. 공중으로 비산한 모래가 나를 향해 위협적으로 날아들어 시야를 방해했다.
'잘 배웠군.'
나는 팔로 눈가를 가려 눈을 보 호하고, 머리 위로 높게 들어 올 린 검을 내리찍으려는 세레논을 피해 옆으로 굴렀다. 옷이 온통 흙먼지로 더러워졌지만 상관하지 않았다.
'이 정도면 다들 만족했겠지.'
이 정도면 충분히 화려한 퍼포 먼스를 펼쳤다고 할 수 있으니, 다들 세레논의 실력이 만만치 않 음은 알았을 터였다.
'그럼 더 시간을 끌 필요는 없겠
지.'
쉬익
나는 더는 속도를 절제하지 않 고 자리를 박차고 일어나 세레논 의 뒤를 향해 달려갔다. 인간을 초월한 속도로 달리는 그 잠시간 은 진공에 빠진 것만 같았다.
"뭐야! 분명 저기 쓰러져 있었는 데......!"
"순간이동한 거 아니야?"
관중들의 소리가 커졌다. 순간
내 속도를 따라잡지 못한 세레논 이 내가 있었던 곳을 멍하니 바라 보다 퍼뜩 뒤를 돌아보았다.
내게 시간은 광활하고 무궁무진 한 벌판 같았다. 나는 빠르게 움 직이고, 다른 것들은 느리게 보여 아무리 뛰어놀아도 여백이 남아 있었다.
"아직 많이 느리십니다."
평범한 이들에겐 찰나겠지만, 내 겐 한 세월이었다. 나는 세레논이 완전히 뒤를 돌아보기도 전에 땅
에 박힌 검을 뽑고 그의 목에서 살짝 비켜난 곳을 향해 찔러 넣었
세레논이 크게 숨을 들이쉬었다. 그러나 나는 그에게 반격할 틈을 주지 않고 그의 무릎 뒤를 힘껏 걷어찼다.
"크윽......
세레논의 몸이 중심을 잃고 흔 들렸다. 새삼 황족을 너무 거칠게 다루고 있는 게 아닌가 싶었지만, 도를 넘을 정도로 위험해지면 기
사들이 난입할 게 분명했다. 그러 니 외부에서 제지하기 전까진 브 레이크를 걸지 않아도 될 듯했다.
캉! 캉!
검이 맞부딪치는 속도가 점점 더 빨라졌다. 나는 눈을 번뜩이며 춤추듯 검을 놀렸다. 공간을 넓게 쓰며 많이 움직이게 한 탓에 지친 건지, 세레논의 숨이 상당히 거칠 었다. 내 속도는 점점 더 빨라지 는 반면 그는 점점 더 따라오기 벅차 하고 있었다.
나는 그 모습을 바라보다 검을 세워 힘으로 밀며 그와 밀착했다. 검이 'X'자로 교차되고, 세레논은 가까스로 내 압박을 견뎌 냈다.
"당신은 왜 싸우고 있습니까, 세 레논?"
나는 그 가운데, 처음으로 그의 이름을 불렀다. 황자 저하도, 제 자님도 아닌 그의 이름을.
세레논이 놀라 눈을 크게 떴지 만 나는 아랑곳하지 않고 말을 이 었다.
"베고 싶은 것이 있습니까? 아 니면 무언가를 지배하고 싶나요? 당신의 검 끝은 어디를 가리킵니 까?"
" 나는••••••
"이걸 알아내지 않는 이상."
콰앙
결집된 마나가 세레논의 머리 위를 매섭게 날아가 굉음을 내며 벽에 부딪쳤다. 오러는 아니었지 만, 오러의 기초가 되는 마나의 결정이었다.
"꺄악!"
벽면이 크게 무너져 내리고, 그 부근에 앉아 있던 관중들에게서 비명이 터져 나왔다. 오러가 아닌 만큼 건물 전체를 뒤혼들 정도의 위력은 아니었지만, 흉포한 하라 바나의 발톱이 긁은 자리같이 초 승달 모양의 거대한 자국이 남아 있었다.
그 폭풍 같은 흐름에 휩쓸려 짧 게 잘려 나간 세레논의 라일락색 머리칼이 허공에 나부꼈다. 나는
혼들리는 그의 눈동자를 마주한 채 단호하게 얼굴을 굳혔다.
"세레논은 절대 오러를 만들어 내지 못하고, 절 이기지도 못할 겁니다."
정답을 찾기 위해선 과정이 있 어야 했다. 한계를 뛰어넘으며 찾 아낸 자신만의 답이 바로 오러의 주체니까. 반드시 검을 잡는 이유 를 떠올려야 했다.
"계속 키프로스의 꼭두각시로 살고 싶으십니까? 그렇다면 검을
잡을 게 아니라 아무것도 하지 말 아야죠. 아직도 디에고를 넘어설 방도가 검이기 때문이라 잡고 있 는 겁니까? 정말 그게 다예요? 세레논은 디에고를 찍어 누르고 싶은 겁니까? 그게 검을 잡는 이 유입니까?"
나는 무자비하게 검을 움직이며 세레논에게 끊임없이 물었다.
생기를 잃은 세레논은 스스로 질문할 줄 몰랐다. 그래서 나는 스승으로서 조금 도와줄 겸, 대신 질문해 주기로 했다. 다만 정답을
찾는 건 오로지 그 스스로의 힘으 로 해야 했다.
"그런 게 아니야! 나는......!"
파지 직!
세레논의 검날 위로 번개탄같이 작은 불꽃들이 튀었다. 이를 악문 세레논의 눈동자에 섬광이 깃들었 다.
"나는, 형님이 좋은 제국을 만들 어 가는 걸 돕고 싶어서, 검을 잡 는 겁니다!"
쾅
세레논이 검을 휘둘렀다. 세레논 의 검에 조금도 밀림이 없던 내가 처음으로 살짝 밀린 순간이었다.
맞닿은 검에서 광채가 번쩍였다. 나는 잠시 입을 벌렸다.
모두가 태양이 될 수 있는 것은 아니다. 태양의 자질이 있는 자가 있고, 없는 자가 있다. 리더가 있 다면 팔로워도 있어야 하는 법. 이 세상 모두가 우두머리일 순 없
었다.
그렇다면 우두머리가 아닌 이들 은, 리더가 아닌 팔로워들은, 태 양이 아닌 달은, 과연 가치가 없 는 존재들인가?
그들 또한 반드시 존재해야 하 는 세상의 일부였다. 가치 없는 것은 없다. 가치가 다를 뿐이었 다. 그림자가 될 줄 알고, 뒤에서 지킬 줄 알며, 누군가를 진심으로 지지할 줄 아는 것. 나는 리더보 단 오히려 팔로워가 더 멋진 이들 이라고 생각했다.
'이것이 당신의 정답이구나.'
나는 세레논의 검을 보며 느리 게 눈을 깜빡였다.
내가 정답을 유추한 과정 또한 세레논과 비슷했으나, 본질적으로 달랐다. 완전한 암흑을 택한 나와 는 달리, 그는 다른 이를 빛내면 서 자신 또한 빛나기를 선택했다.
'눈부시네.'
세레논의 오러는, 달빛을 닮은
찬연한 은색이었다.
맞닿은 검을 힘껏 내치자 세레 논의 검이 허공을 날았다.
"하•...
검을 놓친 세레논이 숨을 몰아 쉬었다. 그는 완전히 넋이 나간 얼굴을 하고 있었다. 나는 한숨처 럼 웃었다. 그는 황자라는 자리가 어울리지 않을 만큼 땀범벅에 흙 먼지투성이였지만, 그 가운데에서
도 빛나고 있었다.
"방금, 보셨습니까? 저, 오러, 은색•...
"네. 봤습니다."
난 말을 할 정신조차 없는 듯 띄엄띄엄 단어만 나열하는 세레논 을 향해 고개를 끄덕이며 부드럽 게 미소 지었다.
"해내실 줄 알았습니다. 자랑스 럽군요."
나는 진심으로 기뻤다. 그가 오
러를 꺼낸 것도 기뻤지만, 무엇보 다도 그가 나처럼 시련에서 성장 하지 않았음이 기뻤다.
내가 오러를 꺼낸 순간 또한 스 승으로 비롯되었으나, 그 순간은 내게 지독한 악몽으로 기억되었 다.
나는 아프면서 성장한다는 무책 임하고도 허무한 말이 싫었다. 내 아픔은 씻을 수 없는 흉터로 기록 되어 아직도 나를 아프게 하는데, 성장했다는 사실만으로 그 흉터가 긍정적인 것으로 변모하는 것이
괴로웠다.
'그래서 당신은 시련에서 성장하 지 않기를 바랐는데, 당신에겐 오 늘의 기억이 악몽이 아닐 것 같아 다행이야.'
그 사실에 나는 조금 눈물이 날 것 같았다. 내 스승은 제자에게 그리도 냉정하셨지만, 나는 그걸 되물림하지 않았다는 것에 슬픔을 닮은 기쁨이 울컥 솟아올랐다.
세레논의 멍한 푸른색 눈동자가 나를 응시했다. 한참 나를 바라보
던 그는 갑작스럽게 휘청거렸다. 그의 몸의 중심이 무너지기 시작 했다.
'초반엔 몸의 부담이 엄청나니 까.'
나는 신속하게 세레논에게로 다 가가 팔로 그의 허리를 받쳐 들었 다. 나 또한 막 소드 익스퍼트가 되었을 시기엔 조금만 오러를 사 용해도 몸에 커다란 타격을 받곤 했다.
"황자 저하! 괘, 괜찮으신 겁니
까?"
해설자의 놀란 목소리가 크게 울렸다. 관중들도 크게 들썩였다. 나는 그 모든 걸 무시한 채 덜덜 떨리는 세레논의 몸을 단단히 지 탱했다. 어쩌다 보니 탱고를 추는 것처럼 화려한 자세가 되었지만, 그것보단 세레논의 상태가 더 중 요했다.
"저도, 이제, 제 오러가 있는 겁 니까?"
조금 걱정한 것이 무색하게도,
세레논은 오러를 냈다는 것에 흥 분해 미친 듯이 눈을 반짝이고 있 었다. 나는 허탈하게 웃고 말았 다.
"그렇습니다. 다만 잊고 계신 거 같군요."
■스-르르"
' o •
"저희는, 아직 전투 중인데 말입 니다."
세레논의 새하얀 목덜미 앞으로 날카로운 검날을 들이댔다. 닿지
않을 정도의 거리를 지킨 채였다. 오러를 냈다는 사실에 정신이 팔 렸다가 갑작스럽게 목에 들어온 검에 겨우 제정신을 차린 듯한 세 레논이 나를 올려다보며 눈을 휘 둥그레 떴다. 나는 눈을 곱게 휘 었다.
"이제 경기를 끝내야 하는데, 항 복하시겠습니까?"
세레논의 연보랏빛 눈동자가 색 소 옅은 속눈썹 아래 사라졌다 나 타나기를 반복했다.
이내 그의 얼굴에 환한 미소가 차올랐다.
"소드 익스퍼트 데뷔전부터 패 배를 경험하는군요."
"어쩔 수 없습니다. 저는 봐 드 릴 생각이 없어서."
"뭐, 그래도 다행이라고 생각합 니다."
세레논이 검지와 중지를 곧게 세운 채로 떨리는 왼팔을 높이 들 었다. 경기 증 항복 표시였다.
"제 첫 번째 패배가 당신이라서
말입니다."
그가 나직하게 속삭였다. 나는 어깨를 으쓱이곤 사회자를 바라보 았다. 나와 눈이 마주친 사회자가 퍼뜩 몸을 떨더니 다급하게 입을 열었다.
"세, 세레논 황자 저하께서 항복 을 선언하셨습니다! 따라서 승자
나는 굳어 있는 관중을 자신만 만한 눈으로 한 번 훑어본 뒤 여 유롭게 손을 혼들었다.
"카슈미르 크리시스 공녀님이십 니다!"
나는 1차 본선을 가볍게 넘겼 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