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충직한 검이 되려 했는데-163화 (163/254)

163 화

달칵.

나는 들고 있던 잔을 찻잔 받침 위에 올려놓았다. 흰 배경에 순금 장미가 세밀하게 새겨진 티 세트 는 고급스러움을 넘어 예술 작품 같았다.

"역시 장미차는 로제의 것이 최 고인 것 같습니다."

나는 입 안이 한여름 밤의 이슬 이 맺힌 장미 내음으로 가득한 것 을 느끼며 작게 웃었다.

'로제'는 일류에 속하는 티 브랜 드로, 데카르도 후작가가 론칭한 곳이었다.

"카슈미르가 즐겼다면 기뻐요."

부드럽게 읏은 눈앞의 인영이 가볍게 잔을 기울였다. 그 일련의 행동에서조차 우아함이 엿보였다.

"검술 대회 본선 출전 축하해요,

카슈미르."

넝쿨같이 구불거리는 붉은 머리 칼이 정원에서 불어온 바람을 타 고 허공에서 나부꼈다. 나를 바라 보는 진녹색 눈동자는 다정함을 품고 있었다.

"감사합니다, 르웰린."

나는 상냥한 친우를 향해 배시 시 웃음 지었다.

1차 본선이 끝난 지 이틀이 지 난 시점이었다. 지금은 2차 본선

이 진행되고 있기에 다른 출전자 들은 눈코 뜰 새 없이 바쁘겠지 만, 나는 1차 본선에서 시드로 선 정되었기 때문에 시간 여유가 많 았다.

검술 대회는 토너먼트식으로, 실 력이 출중한데도 상대를 잘못 만 나 떨어지게 되는 불상사가 있을 수 있었다.

주최측에서는 그걸 방지하기 위 해, 그리고 일정 수준 이상의 강 자들이 먼저 맞붙어 관람하는 재 미가 떨어지지 않도록 선수들을

살펴서 몇몇 선수들을 후반부에 배치했다.

나는 1차 본선의 톱시드. 2차, 3차 본선을 모두 건너뛰고 4차 본선부터 경기에 돌입했다. 나야 귀찮은 일이 줄어들었으니 나쁠 것 없었다.

"경기, 지켜봤어요. 환상적이더 군요. 제국이 그대의 검술 실력에 대한 이야기로 화끈하게 달아오른 것을 아나요? 그대가 멋으로 검 을 차고 다니는 조숙하지 못한 여 자라는 소문이 단번에 잦아드는

게 어찌나 속 시원하던지."

르웰린이 신랄한 어투로 말했다. 당사자인 나보다 더 들떠 보이고 자랑스러워하는 기색이었다. 나는 머쓱해져서 목덜미를 매만졌다.

"그렇게 대단하진 않은걸요. 황 자 저하는 제 제자니 저하의 패턴 은 이미 꿰고 있었던 덕이 컸습니 다. 상대가 저하이셨으니 좀 화제 가 된 거겠죠."

"아뇨. 그것보단 더 본질적인 이 유가 있어요."

민망해서 이리저리 둘러대려 했 으나 르웰린이 단호하게 잘라냈 다. 녹음을 머금은 그녀의 진녹색 눈동자가 반짝였다.

"카슈미르의 검술은 사람의 마 음을 자극시키기 때문이에요. 한 없이 자유분방하게 움직이며 움직 임 하나하나에 자신이 살아 있음 을 열정적으로 표현하죠. 카슈미 르가 휘두르는 검을 보고 있자면 아득해지고 심장이 두근거려요. 분명 1차 본선 때를 기점으로 카 슈미르의 팬이 많이 생겼을 거예 요."

쏟아지는 칭찬에 나는 어쩔 줄 모르고 손가락을 꼼지락거렸다. 열정적으로 내 검술을 논하는 그 녀의 말투는 너무도 진심이라 더 욱 민망했다. 나를 향해 눈을 휘 며 웃어 보인 르웰린이 결정적인 마침표를 찍었다.

"나도 그대의 팬인걸요."

어찌나 말을 잘 하는지, 르웰린 이 어째서 사교계의 황제라 불리 는지 알 법했다.

나는 하늘 끝까지 둥둥 뜬 것 같은 기분을 느끼며 두 손으로 붉 어진 얼굴을 가렸다. 나는 칭찬에 극도로 약했다.

"크흠! 뭐, 저, 저도 르웰린의 팬이니 우린 서로의 팬인 거군 요."

"카슈미르도 내 팬인 건가요?"

르웰린이 비음을 흘리며 나를 향해 상체를 숙였다. 흰 비숍 와 이셔츠에 승마바지로 무척 가벼운 차림인 르웰린이 유일하게 착용한 액세서리인 붉은 보석 보타이가,

그녀의 기울어진 몸을 따라 펜듈 럼처럼 흔들렸다.

"그럼 내 어떤 모습이 좋은가

요?"

턱을 괸 르웰린이 짓궂게 웃으 며 물었다. 평소 상당히 까칠하고 예민한 성격인 르웰린은 내겐 상 냥히 굴어 주었지만, 가끔 이렇게 짓궂은 모습을 보였다.

"그, 어••••••

"이런. 더듬거릴 정도로 내게 장 점이 없나요?"

갑작스러운 질문에 당황하자, 르 웰린이 낚시에 성공한 프로 낚시 꾼처럼 능숙하게 섭섭한 표정을 자아냈다. 장난임을 알면서도 진 땀이 흘렀다. 나는 필사적으로 고 개를 휘저었다.

"그게 아니라, 너무 많아서 정리 하는 중인 겁니다."

"••••••네?"

르웰린의 얼굴이 순식간에 달아 올랐다. 제 머리칼에서 염료를 뽑 아 물들인 듯 새빨간 얼굴은 잘

익은 사과 같았다.

나는 조용히 생각을 정리하곤 천천히 입을 열었다.

"저는 냉정한 르웰린이 좋습니 다. 이성적이고 계산적인 모습이 요. 공과 사에 철저하고 손익에 확실한 점을 닮고 싶습니다. 저는 르웰린과 달리 신념으로 움직이고 감정에 휘말리곤 하거든요."

"......그건 보통 단점 아닌가요? 다들 내가 너무 냉정해서 사람 같 지가 않다고 하던데요."

차근히 이어지는 내 말에 움찔 한 르웰린의 눈빛이 가라앉았다. 나는 느리게 눈을 굴렸다.

확실히, 레이디에게 냉정하다는 말은 칭찬이 아닌 욕에 가까웠다. 보통 레이디의 덕목이라 함은 따 사롭고 다정해야 한다는 것이었으 니까.

'하지만 이상하지.'

냉정한 레이디는 굉장히 부정적 으로 들리는 데에 비해 냉정한 후 작은 긍정적으로 들렸다. 같은 수

식어인데도 뒤에 붙는 대상이 다 르다는 것만으로 욕이 될 수도, 칭찬이 될 수도 있다는 건 이상한 일이었다.

"저는 냉정함이 나쁜 것이라고 생각지 않습니다. 현명한 것이라 고 생각해요."

나는 나직하게 의견을 말했다. 옅게 일렁이는 진녹색 눈동자와 똑바로 마주한 나는, 눈꼬리를 부 드럽게 휘었다.

"사람들이 뭐라고 하든 무슨 상

관입니까? 제가 그런 르웰린을 좋아하는데."

르웰린이 느리게 눈을 깜빡였다. 에메랄드처럼 투명하게 반짝이는 그녀의 두 눈엔 몽롱한 빛이 깃들 어 있었다. 그녀는 어쩔 수 없다 는 듯 하, 하고 낮게 웃었다.

"......정말. 만나지 않은 동안 '사람을 매료시키는 101가지 방 법'이라는 책이라도 정독한 건가 요? 연락을 받지 않은 벌로 좀 더 골려 주려고 했는데...... 이래 서야 내가 당하겠네요."

'연락'이라는 단어가 나온 시점 에서 나는 흠칫했다. 테러를 막다 가 쓰러졌을 때 받았던, 몇백 통 이 넘는 부재중 연락이 떠오른 탓 이었다.

"벌은 이미 받지 않았습니 까...... 너그럽게 용서해 주시죠."

르웰린에게 초대를 받고 데카르 도 후작가의 장미 정원 테라스에 서 그녀와 마주한 직후, 내가 가 장 먼저 들은 말이 이것이었다.

'아, 그, 르웰린, 하하, 오랜 만......

'저기서 무릎 꿇고 손 들고 있어 요.'

'넵.'

나는 얌전히 벌을 섰다.

원래 후작 영애가 공작 영애를 벌세운다는 건 말도 안 됐다. 그 렇지만 나는 르웰린을 후작 영애 가 아닌 친구로 보고 있을뿐더러 나를 보는 르웰린이 너무 험악한 표정을 짓고 있어서 감히 거절할 생각을 하지 못했다.

그리고 그 순간 내가 거절했다 면, 르웰린은 두 번 다시 나를 친 구로 봐 주지 않았을 게 분명했 다.

르웰린은 벌을 서는 내 바로 앞 에 의자를 두고 앉아 내 머리 위 에 찻잔 받침을 올려 두고 불꽃 같은 눈으로 나를 바라보며 지옥 의 티타임을 가졌다. 나는 머리 위에 놓인 찻잔 받침을 떨어뜨리 지 않기 위해 중심을 잡으며 르웰 린의 눈빛에 식은땀을 뻘뻘 흘렸 다.

'무슨 일이 있으면.'

'르웰린에게 연락한다......!'

'무슨 일이 있으면.'

'르웰린에게 연락한다!'

티테이블 형에 처해져 세뇌를 당하던 나는, 30분 가량이 지나서 야 인간으로서 르웰린과 티타임을 가질 수 있었다. 나는 그때의 분 노가 생각난 건지 눈꼬리를 치켜 세우고 흘겨보는 르웰린의 시선을 슬금슬금 피했다.

"카슈미르에게 받은 게 너무 많

아서 나도 카슈미르를 돕고 싶은 데, 카슈미르는 나를 전혀 의지하 지 않는 것 같아서 섭섭할 때가 있어요."

"아닙니다! 저는 르웰린을 의지 하지만 이번엔......!"

"알아요. 은밀하게 처리할 필요 가 있었겠죠. 아는데도 투정 부리 는 거니까 조용히 들어요."

르웰린의 퉁명스러운 말에 나는 입을 닫았다. 아무리 르웰린이 전 보다 유해졌다고 해도 고양이 같 은 도도함과 까칠함은 아직도 남

아 있었다. 르웰린에게 약한 나는 얌전히 무릎 위에 손을 모아 순종 적인 자세를 취했다.

"......이제 메르헨을 거의 밀어 냈어요."

진정하려는 듯 심호흡을 한 르 웰린은 찻잔을 한 번 기울이곤 나 직하게 입술을 열었다.

나는 얼마 전 불가피하게 메르 헨을 도와준 것이 떠올라 일그러 지려는 얼굴을 애써 정리하며 고 개를 끄덕였다.

"아버지는 날 지지해 주세요. 당 연한 일이에요. 나만큼 데카르도 후작 자리에 어울리는 이는 없으 니. 내가 황금시대를 열 것이라고 확신하고 계시죠. 이제 내게 후계 를 넘겨주실 준비를 하고 계세요. 아버지의 지지와 내 수완이라면 데카르도를 완전히 집어삼킬 수 있을 거예요."

르웰린이 차갑게 말했다. 서늘하 게 가라앉은 톤은 내게 익숙하지 않은 것이었으나, 나는 그녀가 화 난 게 아니라 진지한 것뿐임을 알

수 있었다.

이유가 타당한 자신감은 오만이 아니다. 그건 스스로의 반짝임을 스스럼없이 드러내는 것이었다. 나는 주저 없이 스스로의 가치를 말하는 르웰린을 부드러운 눈길로 바라보았다.

나는 이런 그녀가 좋았다.

진녹색 눈동자가 나를 직시했다.

"데카르도가 완전히 내 손으로 들어오면, 데카르도는 당신의 완

벽한 조력자가 될 거예요."

이어진 르웰린의 말에 나는 순 간 잘못 들었나 싶어 미간을 좁혔 다. 나는 그녀의 말을 몇 번 곱씹 어 보곤 눈을 크게 떴다.

"제 조력자요?"

"네. 데카르도의 주인인 내가 당 신을 지지할 테니까. 붉은 장미는 언제고 당신의 마르지 않는 금고 가 되어 주겠죠."

르웰린이 자신만만하게 웃었다. 그리고 작게 덧붙였다.

"처음에 내게 다가온 것도 이것 을 위해서 아니었나요?"

작게 덧붙인 르웰린의 한마디에 가슴이 철렁 내려앉았다.

"알고...... 계셨습니까?"

나는 떨리는 눈으로 그녀를 바 라보았다.

처음엔 그랬다. 아주 처음엔. 전 쟁을 앞두었다는 생각에 조급했고 지금보다 생각이 어렸던 내게 그

녀의 데카르도가 굉장히 탐스러워 보였음은 사실이었다.

내가 그녀와 친구가 된 첫 티타 임에 갔던 이유는, 르웰린이 아닌 데카르도 때문이었다.

"이 내가 그것도 몰랐을까 봐요. 카슈미르와 처음으로 티타임을 가 졌던 것도 이곳이었죠. 그땐 이렇 게나 가까워질 거라고 상상도 못 했는데......

"르웰린, 저는......

"그것도 알아요."

내가 자신을 이용할 걸 알았으 면서도 지나치게 담담한 르웰린의 태도에 내가 더 당황해 무어라 말 하려 할 때, 그녀가 내 말허리를 끊었다. 진녹색 눈동자가 품은 눈 빛은 여전히 부드러웠다.

"지금은 나를 진심으로 친구라 생각한다는 거 말이에요."

르웰린이 고개를 살짝 기울이며 과거를 되짚듯 허공에서 눈동자를 굴렸다.

"처음엔 당신이 어려운 사람이

라고 생각했어요. 무뚝뚝하고, 표 정 변화도 많이 없고...... 어쩌면 거짓말쟁이일지도 모른다고 생각 했죠. 그런데 계속 알아가면서 유 심히 관찰해 보니까 너무 솔직한 거 있죠. 표정은 무표정 하나밖에 없는 주제에 눈빛은 사사건건 바 뀌는데 감정을 하나도 못 숨기잖 아."

르웰린의 목소리엔 웃음기가 가 득했다. 어떻게든 르웰린에게 그 땐 그랬지만 지금은 다르다는 것 을 납득시키기 위해 머리를 빠르 게 굴리던 나는, 그녀의 정확한

평가에 얼굴이 달아올랐다.

나를 잘 모르는 이들은 내가 무 슨 생각을 하는지 하나도 모르겠 다고 하지만, 나를 어느 정도 아 는 이들은 내 감정이 눈에서 다 보인다고 놀리곤 했다.

"어떻게 몰라요. 이렇게 열심히 나를 응원하고, 진심을 다해 내게 부딪쳐 오는데."

르웰린의 날카로운 눈매가 유하 게 휘었다. 그녀의 눈가에 찍힌 눈물점이 슬쩍 내리막길을 탔다.

"당신은 나를 둘러싼 수많은 거 짓 속에서 유일한 진실이었어요."

르웰린의 목소리는 높았으나 카 랑카랑하지 않고 차분했다. 발음 은 또박또박했고, 말투는 확신에 차 있었으며, 가을 해질녘 밤바람 처럼 서늘하면서도 고혹적인 탱고 같았다.

"자랑스러워해도 좋아요. 당신은 냉정한 내가 이유를 따지지 않고 지지하는 유일한 사람이니까."

르웰린이 새침하게 말했다. 나는 그녀를 한참 동안 멍하니 보다가, 물기가 조금 섞인 헛웃음을 뱉었 다.

이런 친구가 있다는 게 눈물이 나도록 기뻤다.

"르웰린이 내 지지자가 되어 준 다면 나는 르웰린의 검이 되도록 할까요."

나는 손을 뻗어 조심스럽게 르 웰린의 손을 쥐었다. 검은 레이스 장갑을 낀 르웰린의 손은 거칠기

짝이 없는 내 손과 상반되게 무척 예뻤다. 나는 그 손을 내 쪽으로 끌어, 손등 위에 짧게 입을 맞추 었다. 부드러운 살갗이 맞닿는 순 간 시선도 맞닿았다.

"내 신념에서 벗어나지 않는 한, 나는 당신을 위해 싸우겠습니다. 검이 필요하다면 언제든 부르세 요, 레이디 르웰린."

나는 르웰린을 향해 활짝 웃었 다. 눈을 깜빡이던 그녀는 작게 웃으며 내가 입술을 맞추었던 손 을 들어 내 뺨을 쓸었다. 장갑을

사이에 두었음에도 르웰린의 온기 가 느껴졌다.

"검은 재앙의 가호를 받게 되어 영광이라고 하죠. 사양하지 않을 게요, 기사님."

우리는 한참 동안 서로를 바라 보았다.

시선을 교환하는 것만으로도 느 낄 수 있었다. 우리는 서로에게 도움이 되고 있음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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