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충직한 검이 되려 했는데-164화 (164/254)

164 화

" 아악!"

외진 골목에서 비명이 터져 나 왔다. 남자는 도망치려 했으나, 살아 움직이는 한 마리의 뱀처럼 빠르고 예리한 채찍이 그의 발목 을 휘감았다.

볼썽사납게 땅에 엎어진 남자는 뒤로 질질 끌려갔다.

"컥."

빠르게 찌른 채찍이 남자의 목 을 휘감았다.

남자가 발버둥치기를 잠시, 이내 몸이 힘없이 늘어졌다. 숨은 아직 쉬고 있었으나 충격으로 기절한 채였다.

"쯔 "

혀를 찬 르웰린은 남자를 걷어 찼다. 그녀의 두 눈은 쓰레기를 보듯 무감각했다.

그 모습을 조금 떨어진 곳에서 지켜보던 칼은 소리 없이 헛웃음 을 뱉으며 왼손에 발동했던 마법 진을 사그라트렸다.

칼이 오늘 르웰린을 마주한 것 은 순전히 우연이었다. 여느 때와 같이 마탑에 들렀다가 저택에 돌 아가는 길에 골목 너머에서 르웰 린을 보았다. 평소였다면 길에서 르웰린을 봤든 말든 상관하지 않 고 갈 길을 갔겠지만, 이번엔 볼 일이 있기도 했고, 르웰린이 있는 곳이 보통 귀족들은 가지 않는 외

진 골목이었기에 따라 들어갔던 것이다.

'그런데 이런 상황을 마주하게 될 줄은.'

전투를 하게 되리라 예상하고 오른손으론 마법진까지 미리 그리 고 있었건만, 칼의 예상이 부끄럽 게도 르웰린은 상황을 아주 깔끔 히 정리한 상태였다.

르웰린은 인기척을 느끼곤 앞머 리를 쓸어 넘기며 뒤를 돌아보았 다. 그러고 눈을 크게 떴다.

"......칼 크리시스 공자?"

제가 해치운 남자들의 패거리이 리라 예상했건만, 상상치도 못한 인물이었다.

"르웰린 데카르도. 이런 곳에서 만나는군."

낮고 고혹적인 목소리가 거대한 뱀처럼 그녀의 몸을 휘감았다. 놀 란 기색을 지운 르웰린은 비소에 가까운 미소를 띤 채 우아하게 허 리를 굽혔다.

"칼 크리시스 공자를 뵈어요. 그 날 이후 처음이네요."

르웰린의 목소리는 여느 때와 같이 나긋했으나, 말 안엔 가시가 들어 있었다. 칼의 눈썹이 꿈틀거 렸다.

"......그래. 아타라 사절단 축하 연회 이후 처음이군."

아타라 사절단 축하 연회는 르 웰린에게도, 칼에게도 좋은 기억 이 아니었다. 칼에겐 제 사랑이

별 같잖은 놈들에게 모욕당한 최 악의 날이었고, 르웰린은 제 친구 가 오라비에게 모욕당하는 걸 두 고 봐야만 했던 날이었다.

적안과 녹안이 허공에서 치열하 게 부딪쳤다.

"뭐, 좋지도 않은 기억을 곱씹는 건 이쯤 해 둘까요. 저도 조금 바 빠서."

먼저 눈을 돌린 르웰린은 손에 쥐고 있던 채찍을 동그랗게 말더 니 원피스 자락을 걷고 허벅지 가

터에 걸어 놓았다. 후작 영애가 공작 영식 앞에서 보일 모습은 아 니었지만, 거침없이 치맛자락을 드는 르웰린이나 그걸 앞에 둔 칼 이나 태연했다.

'저 채찍은......

그 순간 채찍을 유심히 본 칼이 짧게 헛웃음을 뱉었다.

"카슈미르가 몇 달 전에 채찍을 구하더니, 그대 때문이었군."

"아, 카슈미르 영애가 선물해 준 무기죠."

르웰린이 여상스럽게 대답했다.

그녀가 쥐고 있던 채찍 손잡이 에 박힌 브랜드 마크는 칼에게 아 주 익숙한 것이었다.

"가장 빨리, 가장 빠르게 배울 수 있는 무기 중 하나는 채찍이겠 죠? 기본 근력과 숙련도가 필요 하지만 검보단 비교적 난이도가 낮으니까요."

어느 날 카슈미르는 칼과의 티 타임에서 혼잣말처럼 중얼거렸다.

카슈미르에게 모든 신경을 기울 이고 있던 칼은 그녀의 말을 곱씹 으며 턱을 매만졌다.

"확실히. 단점도 있지만 장점도 확실한 무기지."

"이전에 저도 채찍을 잠시 사용 해 봤는데 나쁘지 않더군요. 하지 만 저는 역시 검이 제일 좋습니 다. 혹시 괜찮은 채찍을 파는 곳 을 아십니까?"

"음. 어느 정도는."

칼은 한때 고문을 취미로 삼았 던 사람이었다. 어느 정도가 아니 라 아주 잘 알았지만, 흑역사를 동생에게 밝히고 싶지 않았기에 대충 얼버무렸다.

"아, 그러면 혹시 초심자가 쓸 만한 채찍 하나만 구해 주실 수 있으십니까? 근력이나 신체 조건 은 일반인 수준이고, 체격은 저와 비슷합니다."

"네가 필요하다면 구해 보도록 하지."

칼은 귀찮은 것을 싫어했지만, 그녀의 부탁을 기꺼이 승낙했다. 그 구실로 카슈미르와 티타임을 한 번 더 가질 수만 있어도 아주 만족스러울 터였다.

"역시 칼이네요. 감사합니다."

칼은 그날 카슈미르가 지었던 환한 웃음을 잊지 못했다. 그는 그 웃음을 사랑했다.

'슈슈가 검 말고 다른 무기를 쓸

리는 없으니 다른 사람에게 줄 거 라는 건 알고 있었지만...... 그게 르웰린 데카르도였을 줄은.'

칼이 눈을 가늘게 떴다.

뱀처럼 샐쭉해진 눈매 사이로 번뜩이는 그의 붉은 눈동자는 고 까운 기색을 담고 있었다. 직전에 만났을 때 르웰린의 행동이 생각 난 탓이었다.

'......이번 일은, 침묵해 주셨으 면 좋겠어요.'

물론 사절단 축하 연회에서 르 웰린이 메르헨을 감싼 건 이유가 있었을 터였다. 하지만 그건 칼이 알 바가 아니었다.

칼은 르웰린이 그리 마음에 들 지 않았다. 그날 일 때문도 있었 지만, 무엇보다 카슈미르가 가족 다음으로 총애하는 사람이기 때문 이었다.

마음은 한계가 있는 샘이다. 사 람마다 샘의 크기는 다르지만, 아 무리 샘이 크다 해도 퍼낼 수 있 는 물의 양은 한정되어 있었다.

칼은 마른 샘을 가지고 있는 사 람이었다. 태생부터 그의 샘에선 물이 솟지 않았다. 허나 카슈미르 가 물을 나눠 준 덕분에 겨우 사 람처럼 살고 있었다.

칼은 특별히 욕심이 많은 편은 아니었으나, 원하는 것은 반드시 갖고 독차지해야 했다. 그는 카슈 미르의 물결이 닿는 곳이 확장되 는 게 싫었다. 그렇게 물을 이곳 저곳으로 퍼 주다 보면 저절로 제 게 소홀해질 것 같았다.

'그것만 빼면 꽤 재밌는 인간이 긴 한데.'

칼은 짙은 녹음 어린 르웰린의 눈을 바라보았다.

르웰린은 아주 당당하게 그와 마주했다. 그의 시선을 피하지 않 는 이는 정말 오랜만이었다.

"뭘 하고 있는 건가요?"

어린 르웰린은 호기심이 많았다.

그녀는 머리를 싸매고 고뇌하고 있는 제 오라비, 메르헨과 그의 스승에게로 다가갔다.

"방해하지 말고 저리 가."

"하하. 데카르도 영애께선 호기 심이 많으시군요."

귀찮다는 듯 짜증을 내는 메르 헨과 달리, 나이 든 그의 스승은 호기심 많은 어린아이에게 상냥했 다.

메르헨보다 10개월 늦게 태어났 기에 아직은 특별한 수업을 받지

않는 르웰린은 궁금한 마음에 제 오라비가 공부하는 곳을 자꾸 기 웃거렸다.

"데카르도 영식께서 문제를 많 이 어려워하시는군요. 영애께서도 한번 풀어 보시겠습니까?"

" 네!"

스승은 가벼운 어투로 제안했다. 그러나 이 제안은 르웰린의 궁금 증을 풀어 주기 위함일 뿐, 진심 으로 그녀가 풀 수 있을 거라 생 각한 건 아니었다.

르웰린은 순진한 낯으로 고개를 끄덕였다.

"정상에 섰을 때 교만하지 않게 하는 동시에, 절망 속에서도 희망 과 용기를 줄 수 있는 말이 있을 까요? 특별히 정답이 있는 문제 는 아니니 자유롭게 대답하시면 됩니다."

지식과 논리가 아니라 재치와 지혜를 가늠하는 물음이었다. 10 살도 되지 않은 어린아이들이 제 힘으로 풀어 낼 수 있으리라 기대 하기엔 지나치게 까다로웠다.

어린 르웰린은 생각했다. 그리고 오래 지나지 않아 대답했다.

"'이 또한 지나가리라'. 어떤가 요?"

인간의 인생은 짧고도 길었다. 정상의 순간도, 절망의 순간도 결 국엔 지나갔다. 인생의 부질없음 을 말하면서도 현재에 대한 응원 을 함께 전달하는 문장이었다.

스승의 눈이 커졌다. 그의 눈이 보물을 찾은 모험가처럼 반짝이기

시작했다.

"......그럼 이건 어떤가요. 지혜 가 두 개의 상자 중 하나에 들어 있습니다. 한 상자는 금 상자, 다 른 한 상자는 은 상자일 때, 데카 르도 영애는 둘 중 무엇을 고르시 겠습니까?"

질문을 들은 르웰린은 미간을 좁혔다. 이해가 되지 않는다는 얼 굴이었다.

"왜 둘 중 하나를 골라야 하죠? 둘 다 가지면 되는데."

박장대소한 스승은 웃음기 가득 한 눈으로 르웰린을 바라보며 입 을 열었다.

"훌륭합니다. 내일부터 데카르도 영애도 함께 수업을 듣는 게 좋을 것 같다고 후작님께 건의해 보도 록 하죠."

갑작스러운 말에 놀란 르웰린이 활짝 웃으며 제 오라비를 돌아보 았다.

"메르헨! 들었어? 나 이제......!"

메르헨의 얼굴을 본 르웰린은 흠칫 굳었다. 기쁨에 달아올랐던 양 뺨이 식고, 두 눈이 혼들렸다.

르웰린 데카드로가 자신을 향한 원색적이고도 강렬한 증오를 최초 로 마주한 순간이었다.

'그때 본 그 자식의 눈이 내 평 생을 통틀어 최고로 소름 끼치는 눈일 거라고 생각했는데...... 아니 네.'

르웰린은 눈앞의 인영을 바라보 며 생각했다. 겉으로 티 내진 않 고 있지만, 온기라곤 찾아볼 수도 없는 붉은 눈을 마주하고 있자면 불가항력적으로 털이 곤두섰다.

'정말 웃기지도 않는군. 그대는 슈슈를 모욕한 치를 처벌하는 것 보다 가문의 명예가 더 중요한 가? 슈슈는 그대를 위해 나섰는 데 그대는 손익이나 따지고 있다 니 역겹기 짝이 없군. 장사치들 가문에서 나온 종자들은 다 이런 건가? 오라비나 동생이나......

르웰린은 그날 칼이 제게 쏟아 냈던 거침없는 폭언을 똑똑히 기 억했다.

그 당시엔 가슴이 찢어지는 것 같았지만, 지금은 괜찮았다. 생각 해 보면 그때 칼의 발언은 틀린 말이 아니었으니까.

모욕을 당한 슈슈에게 한 번만 넘어가 달라고 하는 몰상식한 인 간이 있다면 저 또한 칼처럼 반응 했을 것이다. 르웰린에겐 불가피 한 이유가 있었지만, 그런 건 칼

이 알 바가 아니었을 터다.

르웰린은 칼을 이해했다.

'하지만 그것과는 별개로...... 참 가까워지기 싫은 인간이야.'

르웰린은 본능적으로 치솟는 섬 뜩함을 억누르고 사교용 미소를 띠었다.

칼 크리시스는 시선만으로 사람 을 짓눌렀다. 피만큼이나 붉은 두 눈을 보고 있자면 눈을 마주치는 것만으로 사람을 굳게 만든다는

바실리스크와 마주하고 있는 것 같았다.

분명 같은 인간임에도 이성으로 이해할 수 없는 인외의 존재를 마 주한 듯 아득했다.

르웰린은 소름 끼치도록 아름다 운 칼의 얼굴을 보며 조금 질려 버렸다.

위험하다는 분위기는 있는 대로 풍기는 주제에 얼굴은 시선을 돌 릴 수 없을 만큼 아름다워서, 독 가시가 있는 장미를 보는 기분이

었다.

그에 대해 온갖 흉흉한 소문이 퍼지는 중에서도 그의 곁을 기웃 거리는 영애들과 영식들이 산더미 같았던 까닭도 알 만했다.

'이런 인간이 슈슈 앞에만 서면 사랑에 빠진 눈을 한다는 게 웃기 지.'

헛웃음을 뱉은 르웰린은 칼 크 리시스가 다정한 손길로 슈슈의 옆머리를 넘겨 주던 것을 떠올렸 다. 지금 제 앞에 있는 섬뜩한 인

간과 그때 그 사람은 다른 존재라 해도 믿을 수 있을 것 같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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