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충직한 검이 되려 했는데-165화 (165/254)

165 화

르웰린 데카르도는 사교계의 황 제였다. 아무리 사교계에 관심이 없는 칼이래도 르웰린 데카르도에 대해선 잘 알았다.

칼은 카슈미르가 없었을 때의 르웰린을 떠올렸다.

'나는 물을 달라고 했는데, 어째 서 포도주를 준 거지?'

어느 날인가의 파티에서였다. 시 종에게 잔을 받은 르웰린은 미간 을 좁혔다. 화들짝 놀란 시종이 식은땀을 뻘뻘 흘렸다.

'죄, 죄송합니다! 제가 다시

'쯧. 됐네.'

잔을 다시 가져가려는 시종을 가볍게 저지한 르웰린은 느리게 잔을 기울였다. 그 작은 동작조차 도 숨 막히도록 고아했다.

'물이 나를 보고 얼굴을 붉혀 포

도주가 된 모양이지.'

르웰린이 고고하게 웃었다. 주위 에서 탄성이 터지고, 모두 르웰린 에 대한 찬사를 늘어놓았다. 모두 가 그녀를 고귀한 여왕이라 평했 으나.......

우연히 그 광경을 본 칼은 생각 이 달랐다.

새까맣게 죽은 두 눈. 거짓에 찌 든 웃음. 분명 정점에 서 있었고 그곳에 걸맞았으나, 칼이 보기에 그녀는 불안해하고 있었다. 그녀

의 오만은 자신감에서 비롯된 것 이 아니라 자리를 빼앗길 수도 있 다는 불안에서 비롯된 것이었다.

모두가 르웰린을 사교계의 황제 라 칭송하였지만, 칼은 르웰린이 어울리지 않는 옷을 입고 있는 것 같다고 생각했다. 무겁고 거추장 스러운 드레스를 입고 꽃처럼 한 자리에 서서 웃기만 하는 것보다 가벼운 옷차림으로 세상을 누비는 게 더 어울릴 것 같았다.

'그렇게 생각했는데, 정말 그렇 게 될 줄이야.'

칼은 그때와 다르게 생생히 살 아 타오르는 녹안을 빤히 바라보 았다. 그 숨 막히는 사교계 한가 운데에서 서서히 시들어 가다 결 국 죽으리라 짐작했건만, 르웰린 은 그의 예상을 깨고 사교계에 대 한 집착을 놓은 뒤 날아오르고 있 었다.

그땐 정말 재미없는 사람이었으 나, 지금의 르웰린은 웬만한 것엔 감흥조차 느끼지 못하는 칼의 흥 미를 자극할 정도로 빛나고 있었 다.

"시선이 뜨거운걸요, 크리시스 공자. 할 말이라도 있으신가요?"

르웰린은 용건 없다면 비키라는 투로 말하며 치맛자락을 다시 정 리했다.

휘잉.

가까워지는 여름 녘에 걸맞게 따사로운 바람이 골목을 휩쓸었 다. 르웰린은 제 눈가로 들어오는 머리카락을 피해 살짝 눈을 감았 다. 붉은 머리카락이 맞바람을 만

난 불처럼 휘날리고, 가벼운 연둣 빛 원피스 자락이 허공에 나부꼈

"그래. 내 그대에게 용건이 있어 서."

스르륵.

손을 뻗은 칼이 바람에 흐트러 진 르웰린의 앞머리를 살짝 넘겨 주었다. 그 손길에 조금 눈을 뜬 르웰린이 놀란 표정으로 그를 바 라보았다.

칼의 표정은 여전히 무감각했으 나, 그의 눈은 아주 희미하게 반 짝이고 있었다.

"오늘 카슈미르의 부탁으로 그 대의 마력총을 제작해 오는 길인 데 마침 잘 만났군. 만난 김에 그 대에게 바로 전해 주도록 하지."

" 아."

칼이 들고 있던 상자를 건넸다. 르웰린은 짧게 탄성을 뱉었다.

'저는 검에 모든 걸 건 케이스지 만, 르웰린처럼 무력 단련에 모든

걸 걸 수 없는 경우엔 사용할 수 있는 무기가 하나 이상인 게 좋습 니다. 딱 두 개가 좋겠군요. 하나 는 여태껏 사용하던 채찍으로 하 고, 다른 하나는 총이 좋을 것 같 습니다. 조작이 간단하고 한 방으

로 큰 위력을 낼 수 있는 무기니 까요. 소드 익스퍼트 이상의 강자 에게는 힘을 쓸 수 없겠지만 그 이하의 잔챙이를 상대하는 일에선

바로 승기를 잡을 수 있을 겁니 다.'

카슈미르는 검술 대회 1차 본선 이후의 만남에서 그렇게 말했다.

마력총을 제작해 주겠다고 해서 연락을 기다리고 있었는데, 그걸 만들어 주는 사람이 칼 크리시스 일 줄은 몰랐다.

'젠장. 그걸 구실로 한 번 더 만 나려고 했는데.'

르웰린은 살짝 입술을 깨물었지 만 금방 평정심을 되찾았다. 그녀 는 매끄럽게 웃으며 상자를 받아 들였다.

"이렇게 고마울 수가. 힘 써 줘 서 고마워요. 잘 사용하도록 할게

요."

고맙다는 말에 진심이 조금도 없음을 어렵지 않게 포착한 칼이 헛웃음을 뱉었다. 그는 르웰린에 게 손짓했다.

"열어 보게."

" 네?"

"기껏 열심히 만들었는데 주인 손에 들어가는 모습 정도는 봐야 보람이 있지 않겠나. 총 한 번 잡 아 보게."

르웰린은 상자를 내려다보았다.

칼 크리시스는 마주하고만 있어도 이성이 갈려 나갈 만큼 섬뜩한 사 람이었지만, 그의 말이 아니라 해 도 총이 궁금하긴 했다. 그녀는 잠시간의 망설임 끝에 고급스러운 상자를 열었다.

르웰린은 탄성을 터뜨렸다. 권총 은 휴대하기 좋은 사이즈인 데다 살상 무기에 아름다움은 필요 없 다는 듯 아무런 장식 없는 검은색 이었지만, 잘 빠진 몸체는 충분히 고급스러웠다.

상자를 바닥에 툭 내려놓은 르

웰린은 권총을 이리저리 돌리며 살펴보았다. 그녀의 녹안이 반짝 거렸다.

'슈슈가 말해 준 좋은 총의 특징 이 다 있네.'

르웰린은 카슈미르에게 총을 배 우게 될 순간을 기다리기 힘들 정 도로 총이 마음에 들었다. 기분 좋게 두근거리는 심장에 작게 웃 었을까, 그 모습을 지켜보던 칼이 눈을 번뜩였다.

성큼 다가온 칼은 르웰린의 뒤

에 서서 그녀를 끌어안듯 몸을 겹 쳐 왔다.

"마력총은 마나를 주기적으로 충전해 줘야 하는 단점이 있지만, 그걸 감수하고도 사용할 만한 가 치가 있지. 내가 만든 것이니 단 연 최고일 거다."

"무슨•••••••"

르웰린은 훅 다가온 칼의 체향 에 놀랐으나, 특별히 불쾌함을 느 끼진 않았다. 그의 눈빛에서 사심 이라곤 조금도 없다는 게 충분히 느껴졌으니까.

칼은 그의 작품에 자부심을 느 끼고 있을 뿐이었다.

"보통은 탄환에 마력을 덧씨워 공격력을 강화하는 수준에 그치지 만, 내가 만든 건 달라. 총에 마 나가 남은 한

찰칵.

르웰린의 손 위에 제 손을 겹친 칼이 그녀의 손을 움직여 총을 똑 바로 잡게 한 뒤 안전장치를 풀었 다.

"실탄이 없이도 발사되지. 응축 된 마나가 탄환이 되거든."

르웰린은 칼의 체온이 상당히 서늘하며, 그의 체향은 소름 끼칠 정도로 매혹적이라는 걸 깨달았 다.

칼은 르웰린을 반쯤 껴안은 채 뒤로 빙 돌았다. 르웰린은 얼떨결 에 제가 죽사발로 만들어 놓은 깡 패들과 마주 보았다. 그녀의 손가 락을 방아쇠에 끼워 준 칼은, 총 구를 깡패 중 하나의 팔에 겨누었

"내 마력총엔 사용할 수 있는 기능도 많지. 예를 들어 이걸 두 번 누르면 음소거 마법이 걸려 총 성이 들리지 않고, 이걸 이렇게 돌리면......

찰칵.

칼은 몸체 중간에 있는 버튼을 두 번 누르곤, 손잡이 끝 부근의 톱니바퀴를 돌렸다. 경쾌한 소리 가 허공에 퍼지고, 그의 검지가 방아쇠에 닿은 르웰린의 검지와

겹쳐졌다.

"맞은 대상이 음소거가 되지."

더러운 것들의 비명은 그대도 듣기 싫겠지?

르웰린의 귓가 근처에서 낮은 목소리가 울려 퍼졌다, 살짝 고개 를 돌린 그녀는 칼과 눈이 마주쳤 다.

철컥.

칼은 웃고 있었다.

소리 없이 총구를 벗어난 총알 이 패거리 중 하나의 팔에 박혔 다. 기절해 있던 남자는 총을 맞 고 깨어나 비명을 질렀지만, 소리 는 들리지 않았다. 칼과 르웰린, 둘 사이에서 들리는 건 서로의 호 흡소리뿐이었다. 녹색 눈동자가 가늘어지고, 붉은 눈동자가 미세 하게 휘어졌다.

르웰린은 악마에게 유혹당한다 는 게 바로 이런 느낌일 거라고 확신했다.

"......감사해요, 공자."

느리게 숨을 들이쉰 르웰린은 손을 내렸다. 칼은 스스럼없이 그 녀의 손을 놔 주었다.

"정말 마음에 들어요."

르웰린은 눈을 휘어 웃었다.

비명 소리를 듣지 않아도 된다 는 점에서, 르웰린은 이 총이 참 마음에 들었다.

"당연히 마음에 들어야지. 누가

만든 건데."

칼은 당연하다는 표정을 지었다. 칼 크리시스는 예의상이라도 '마 음에 들어 다행이다' 같은 소리를 하지 않았다. 상당히 오만해 보였 지만, 르웰린은 여느 영식들의 빈 말보단 이게 나았다.

칼은 여전히 섬뜩한 사람이었지 만, 어쩌면 생각만큼 나쁜 사람은 아닐지도 몰랐다.

"차후 기회가 된다면 감사의 의 미로 차라도 한번 대접하죠."

르웰린은 총을 집어넣고 상자를 챙겼다. 그 모습을 잠시 지켜보던 칼은 인사도 없이 먼저 발걸음을 옮기며 말을 꺼냈다.

"총을 배울 곳이 필요하다면 내 게 연락해."

르웰린은 주위를 정리하던 손길 을 멈추었다. 그녀는 이해할 수 없다는 눈으로 칼을 바라보았다.

르웰린이 아는 칼은 이런 호의 를 건네는 사람이 아니었다.

그가 고개를 돌리고, 다시금 불 어온 바람에 밤의 한 자락을 실로 자아낸 듯 검은 머리칼이 허공에 나부꼈다. 붉은 눈이 그녀와 마주 했다. 상업을 주로 삼는 가문의 딸로서 수많은 루비를 봐 온 르웰 린조차 그의 두 눈보다 아름다운 붉은빛을 본 적이 없었다.

오랫동안 시선을 교환하고, 칼의 눈꼬리가 흐드러지게 휘어 들었 다.

"그 구실로 내 슈슈에게 개수작

부리지 말라는 소리야."

낮은 목소리가 사납게 말했다.

'미친 건 아니군.'

르웰린은 조금 안심했다. 경비대 에 칼 크리시스가 미쳐서 무슨 짓 을 벌일지도 모른다고 신고를 해 야 하나 심각하게 고민하던 참이 었다. 르웰린은 마음이 한층 편해 진 채로 그에게 손을 흔들어 주었 다.

"유감스럽지만 이미 카슈미르

영애께서 제게 총을 가르쳐 준다 고 하셔서 말이죠. 정 가르쳐 주 고 싶으시다면 번호표 뽑고 나중 에 와 주셔야 할 것 같군요."

칼은 이를 으득 갈며 웃었다. 르 웰린은 슬쩍 중지를 펼쳐 턱을 누 르고 눈을 내리깔아 생각하는 척 을 했다.

"그리고 개수작이라니, 공자가 할 말은 정말 아니지 않나요?"

'네가 슈슈 앞에서만 가식 떠는 걸 온 제국민이 다 아는데.'

가식으론 칼이나 르웰린이나 도 토리 키 재기였다. 순간 칼의 눈 매가 날카로워졌으나, 이내 차갑 게 웃음을 뱉곤 고개를 휙 돌렸 다.

"슈슈의 총애가 계속 갈 거라고 자만하지 않는 게 좋을 거다."

"글쎄요. 계속 갈 것 같은걸요. 저는 슈슈의 가장 친한 친구라 서."

"나는 그 아이의 하나밖에 없는 오빠고. 무려 혈육이지."

"나는 슈슈에게 손등 키스도 받

았어요."

"나는 슈슈가 뺨에 키스도 해 줬다."

르웰린과 칼의 유치한 대치가 이어졌다. 르웰린도 이게 유치한 짓임을 알았지만, 슈슈의 애정이 라는 면에선 아리아 크리시스를 절대 뛰어넘지 못하리라는 걸 알 기에 칼에게까지 밀리고 싶지는 않았다.

"나를 이기려면 그대도 슈슈의 혈육으로 다시 태어나라고."

르웰린이 대답하지 못하자 칼이 비죽 웃었다. 분해진 르웰린은 입 술을 꾹 깨물다 이내 떠오른 생각 에 서늘하게 웃으며 입을 열었다.

"하지만 혈육이기 때문에 못 하 는 것도 있을 텐데요."

칼의 표정이 순간 굳었다. 금방 평소의 무표정을 되찾긴 했지만, 순간 칼의 표정에 스친 기색을 르 웰린이 보지 못했을 리 없었다.

"......혈육이 아니면 못 하는 게 더 많을 거다."

칼은 부글거리는 속을 꾹 누르 며 짓씹듯 대답하곤 발걸음을 성 큼성큼 옮겼다. 후궁의 하극상으 로 화가 난 황후 같은 칼의 뒷모 습을 바라보던 르웰린은 썩은 미 소를 지었다.

생각만큼 나쁜 사람은 아닐지도 모른다는 거 완전히 취소다.

칼 크리시스는 성깔 더러운 개 자식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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