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충직한 검이 되려 했는데-166화 (166/254)

166화

나는 건물 앞에 선 채 짧게 심호흡 을 했다. 분명 각오를 하고 왔음에도 막상 이 앞에 오니 상념이 많아졌다.

'검술 대회 재개도 사흘밖에 안 남 았는데, 참 바쁘네.'

나는 복잡한 마음으로 표지판을 올 려다보았다.

-검푸른 까마귀.

나는 과거를 파헤치기 위해 이곳을 찾은 참이었다.

검푸른 까마귀. 귀중한 것을 운반하 는, 실력 있는 까마귀들의 길드. 그 리고 이 길드의 주인, '푸른 날개' 야 샤

라모나는 야샤에게 가면 내 어머니 에 대해 들을 수 있을 거라고 말했 다. 라모나가 내게 준 명함은 내 주 머니에 고이 모셔져 있었다.

'무슨 말을 듣게 될까.'

나는 잠시 명함을 매만졌다. 사실 이 명함 하나로 '그' 푸른 날개 야샤 를 만날 수 있을지는 확신할 수 없었 지만, 라모나가 거짓말을 할 위인은 아닌 만큼 믿어 보기로 했다.

"무슨 일로 찾아오셨습니까."

건물 안에 들어서니 프런트에서 대 기하고 있던 나이가 지긋한 여성이 정중하게 물었다.

검푸른 까마귀는, 용병 일은 남성의 일이라는 인식을 깨고 여성을 많이

등용한 길드였다.

'나도 한때는 검푸른 까마귀에 들어 갈까 생각한 적이 있었는데.'

길드원 복지도 최상위급인 만큼 들 어가도 나쁘진 않았겠지만, 내 능력 치는 전투에만 치중되어 있었기에 검 푸른 까마귀와 어울리지 않았다. 내 가 잘하는 건 마수 머리를 깨부수는 거지 은밀하고 치밀한 물밑 작업이 아니니 말이다.

나는 내 동료가 되었을지도 모르는 여자를 바라보며 간결하게 대답했다.

"길드장을 만나러 왔습니다."

여자가 눈을 가늘게 떴다. 인자해 보이던 그녀의 얼굴이 순식간에 엄하 게 돌변했다.

"죄송하지만 그건 어렵겠군요 길드 장님은 아무나 만나 주실 만큼 한가 하지 않으십니다."

"이거, 확인해 주시겠습니까."

체스에서도 단번에 킹을 잡는 건 있을 수 없는 일. 여자의 거절은 당 연했다. 정말 웬만한 의뢰인이 아닌

이상은 길드장이 직접 행차하진 않으 니까.

나는 여자의 거절을 수긍하면서도 반신반의하며 명함을 내밀었다.

" 이건••••••

미간을 찌푸린 채로 명함을 살펴보 던 여자가 이내 눈을 크게 떴다. 그 녀의 손끝이 명함 귀퉁이에 휘갈겨진 사인에 닿았다.

"길드장님의 사인이군요"

'설마설마했는데 진짜였나.'

나는 조금 놀라 눈을 깜빡였다.

검푸른 까마귀처럼 쟁쟁한 길드의 길드장들은 아무에게나 자신의 사인 을 주지 않는다. 유출되면 도용의 위 험이 있으니까.

하지만 라모나는 그런 야샤익 사인 이 있는 명함을 영수증 넘겨주듯 태 연하게 내게 주었다.

'그러고 보니 왕년에 야샤랑 알고 지냈다고 하셨지. 라모나는 정체가

뭘까.'

라모나의 정체가 조금 궁금해졌다.

"......잠시만 기다려 주시죠 길드장 님께 말씀은 드려 보겠습니다."

"아, 잠깐."

나는 자리를 뜨려는 여자를 붙잡았

여자가 고개를 기울였다. 난 아공간 주머니를 뒤적이다, 손끝에 닿는 익 숙한 질감의 물건을 잡아 꺼내 던졌 다. 여자는 물건을 가볍게 낚아챘다.

"길드장님께 보여 드리세요/'

물건을 확인한 여자가 입을 크게 벌렸다. 그녀는 경악스러운 눈빛으로 나를 빠르게 훑어보았지만, 익숙한 반응이었기에 담담하게 마주했다.

"용병 미르가 만나러 왔다고 전해 주시면 얘기가 빠를 것 같습니다."

황금 방패 용병패. 내 정체를 증명 하기에 가장 좋은 물건이었다.

'길드장님은 곧 오실 겁니다.'

응접실로 안내를 받은 나는 소파에 걸터앉아 주위를 둘러보았다.

숨 막히도록 엄숙하고 깨끗하던 'Hide & Ceek' 길드 건물과는 달리, 검푸른 까마귀 길드 건물은 비교적 자유분방해 보였다. 그곳과 마찬가지 로 고급스럽지만 엄숙함보다는 세련 됨에 중점을 맞춘 것 같았다. 인테리 어에 주로 사용된 청량한 푸른색이 시원한 느낌을 주는 게 특히 인상적 이었다.

'야샤는 어떤 사람일까.'

길드장은 길드의 마스코트처럼 이 용되는 만큼 그녀의 강함이나 실력에 대해선 어느 정도 알고 있었지만, 그 녀의 성격같이 개인적인 정보는 알 수 있을 턱이 없었다.

'음...... 갑자기 결투 신청을 하진 않겠지.'

나는 깊은 곳에서 치솟는 걱정에 입술을 꾹 다물었다. 검은 머리에 보 라색 눈의 생양아치 때문에 내 머릿

속에서 '길드장'이란 존재에 대한 인 식은 지하에 처박혀 있었다.

내가 그녀와 원활한 대화를 나눌 수 있길 바라며 짧게 기도를 올리고 있을 때였다.

"길드장님! 용병 미르와 일대일로 대화를 나누신다니요! 너무 위험합니 다"

"거 자존심 구겨지는구먼. 내 나이 좀 먹었기로서니 그런 애송이에게 위 협을 당할 것 같나?"

" 그래도......

"그 아해가 나랑 결판을 보고 싶은

거였다면 명함을 내밀 게 아니라 길 드를 개판 냈겠지. 내가 알아서 할 테니 염려치 말라고, 바론."

나는 다가오는 묵직한 기운에 놀랐 다가 대화 소리를 듣고 멈칫했다.

'애송이 ? 아해 ?'

산전수전 다 겪은 듯 낮고 중후한 목소리는 꽤 가벼운 말투를 구사했 다. 나는 소드 마스터가 된 후 처음 겪어보는 애 취급에 조금 멍해졌다.

방문이 거침없이 열리己 긴 인영이 방에 들어섰다. 나는 나타난 인물을 빠르게 훑어보았다.

짧은 단발로 잘린 흰 머리. 오른쪽 눈을 가린 검은 안대. 등에 멘 거대 한 대검. 170대 중후반쯤으로 보이는 큰 키. 검은 베스트에 넉넉한 품의 흰 와이셔츠, 풀어헤친 크라바트

세월의 흐름으로 주름진 얼굴 사이 에서도 형형하게 빛나는 푸른 눈.

"나를 찾았나, 애송이?"

거친 손이 등 뒤에 메고 있는 검 손잡이를 잡고, 주름졌지만 날카로운 눈매가 유려하게 휘어들었다. 세월이 반드시 퇴화를 일으키는 게 아님을 증명하듯, 여전하게도 호기롭고 생기 넘치는 푸른 눈이 나를 직시했다.

분명 드러난 눈은 하나뿐이었음에 도 수십 개의 눈동자를 앞에 둔 것처 럼 위압적이었다.

소드 마스터를 애송이라고 부르기 에 거침없는 이 중년 여성은 분명 이 길드의 주인, '푸른 날개' 야야였다.

내가 야샤를 멍하니 바라보고 있을 때, 그녀는 제 등 뒤에서 대검을 뽑 아 들었다.

스르릉.

두 손으로 들기도 어려울 것 같은 대검을 야샤는 한 손으로 잡았다. 대 검의 무게가 느껴지지도 않는 건지 검을 뽑는 손길엔 버거움이 없었다. 이샤이 몸만 한 대검이 그녀의 손에 서 가볍게 돌아갔다.

'공격하려는 건가.'

크기만으로도 위협적이라 나는 조 금 긴장한 채로 야사으] 동태를 살폈 으나, 그녀는 여상스러운 표정으로 내 맞은편에 털썩 앉아 제 다리 사이 에 지팡이처럼 대검을 세워 몸을 지 탱할 뿐이었다.

'푸른 날개' 야사익 대검은 유명했 다. 날렵하고 은밀한 이미지가 강한 브로커 길三 검푸른 까마귀의 길드 장이 날렵함, 은밀함과는 몇천만 리 정도 떨어진 거대한 대검을 사용하니 말이다.

어려서 대검을 한 번 사용해 보았 다가 너무 무거워 곧바로 포기한 나 로서는■물론 소드 마스터가 된 지금 은 대검이 아니라 쇠기둥을 뽑아 사 용해도 별문제가 없었지만, 역시 나 는 가벼운 한손 검이 익숙하고 좋았 다- 야샤가 대단해 보였다.

대검은 가볍게만 휘둘러도 큰 타격 을 줄 수 있는 강력한 무기지만, 그 만큼 사용하기 어려웠다. 들고 있기 만 해도 체력 소모가 상당할뿐더러, 그걸 휘두르기까지 하려면 상당한 근 력이 필요했다.

게다가 대검같이 거대한 무기는 공 격 범위가 큰 만큼 적에게 적발되기 쉬웠다. 잘못하면 본인과 더불어 같 은 편까지 공격할 수 있기 때문에 세 밀한 조절도 필요했다.

제대로 쓰기 위해선 살과 뼈가 닳 는 노력이 필요한 무기인 대검은 장 점보다 리스크가 더 컸기에 사용자가 많지 않았다.

'그런 대검을 사용한다는 건, 자신 감이겠지.'

다른 사람도 아니고 날렵함과 은밀

함이 생명인 브로커가 대검을 사용하 는 건 미친 짓이었다. 그럼에도 샤 가 대검을 사용하는 것은 그 모든 리 스크를 감수하고도 성공할 자신이 있 다는 자신감의 표현임이 분명했다.

나는 감탄이 서린 눈으로 그녀를 바라보았다. 나를 바라보는 푸른 눈 은 얼핏 가벼워 보였지만, 깊이 들여 다보면 세월이 겹겹이 싸여 무척 무 거웠다.

'왜 이렇게 멋있지?'

나는 처음 느껴보는 강렬한 감정에

조금 당황하고 있었다. 분명 오늘 처 음 본 사람인데 지독히 동경하게 될 것 같았다.

나이가 드는 것은 쇠퇴가 아닌 무 르익음을 뜻한다는 걸 온몸으로 말하 고 있는 사람. 눈매에 주름이 지는 와중에도 생기를 잃지 않은 두 눈이 신기하면서도 대단했다.

"뭐야 요즘 젊은이들은 이렇게 예 의가 없나? 인사도 안 하는군."

내가 아무 말 없이 바라보고만 있 자, 야샤가 미간을 좁히며 핀잔을 주

었다. 나는 거리감 없는 야샤의 태도 에 당황하면서도 고개를 까닥였다.

"아, 안녕하십니까. 저는......

"어허! 누가 인사를 앉아서 하나!"

야샤가 자리에서 벌떡 일어났다. 돌 발 행동에 눈을 크게 떴을까, 대검을 내려놓은 그녀가 주먹 쥔 오른손을 왼손으로 감싸며 깍듯하게 고개를 숙 였다.

"검푸른 까마귀의 길드장, 야샤다. 만나서 반갑군."

흠 잡을 데 없이 정중한 인사였다.

'예를 중시하는 사람인 건가.'

앉아서 내 인사만 받으려고 했다면 감탄하던 것도 팍 식었겠지만, 야야 는 자신이 먼저 일어나 예의를 차려 보였기에 무시할 수 없었다.

나는 황급히 일어나 허리를 굽혔다.

"용병 미르입니다. 만나 뵙게 되어 영광입니다."

"그래야지."

야야는 고개를 끄덕이며 만족스러 운 표정으로 자리에 앉幼다.

"요즘 젊은이들은 예절을 모른단 말이지. 자고로 인간이란 인의와 예 가 기본이 되는 것일세. 기본을 갖추 지 않으면 금수에 불과하단 말이야."

야샤가 주절주절 말을 늘어놓았다. 위압적이고 무게감 있는 사람이리라 예상했건만, 생각보다 말이 많은 편 이었다. 나는 뻣뻣하게 앉은 채로 야 샤의 눈치를 봤다.

"어...... 감사합니다."

"음? 그런데 그대 왜 존댓말을 하 나?"

" 네?"

내가 어색하게 감사 인사를 하자, 이사가' 문득 깨달았다는 듯 의아하다 는 표정을 지었다. 나는 또다시 당황 했다. 야샤는 사람을 당황하게 만드 는 재주가 있는 모양이었다.

"그야 저보다 연장자시니까••...

"에잉, 쯧. 그거랑 존대가 무슨 상 관인가. 요즘 젊은이들은 이렇게 뻣 뻣한가? 지금 나도 말을 놓고 있지 않나. 그대도 놔 버려. 아니면 나도

존대를 사용해 드리랴?"

'이건...... 정말 뭐지?'

나는 야샤의 독보적인 성격에 멍해 졌다.

계속 요즘 젊은이들 타령을 하며 꼬장꼬장하게 굴면서도 나이가 많은 것을 무기로 내세우지 않았고, 사상 이 묘하게 진보적이었다. 나는 야시: 의 성격 파악에 실패한 채로 목덜미 를 긁적였다.

"괜찮습니다. 저는 존대가 더 편해

서요 어르신께선 편히 말을 놓아 주 십시오."

"뭐, 그렇다면야. 젊은이가 딱딱하 구먼. 편히 있게."

야샤가 소파에 편하게 기댄 채 팔 을 등받이 위에 걸쳤다. 나는 이 독 특한 인물 앞에서 잠시 할 말을 잃었 다.

"그래. 그럼 이제 본격적으로 이야 기를 시작해 볼까. 어째서 나를 찾아 왔는지 듣기 전에......

야샤는 느긋한 목소리로 대화를 이

끌었다. 그녀가 내리깔았던 눈을 들 어 나를 응시했다. 나를 가늠하는 날 카로운 푸른 눈 아래, 분위기가 삽시 간에 팽팽해졌다. 야샤는 검지와 중 지 사이에 내가 가져온 명함을 끼운 채 흔들었다.

"이건 언제든 날 찾을 수 있는 인 물이란 증표건만, 나는 용병 미르에 게 이걸 준 기억이 없네. 이걸 그대 가 어떻게 가지고 있지?"

이 지적이 나올 줄 알았다. 나는 침 착하게 그녀와 마주했다.

"혹시 라모나를 아십니까?"

"뭐? 라모나? 그 할망구?"

라모나를 언급하자 야사이 얼굴이 반갑다는 듯 화사하게 폈다. 날 서 있던 그녀의 분위기는 순식간에 부드 러워졌다.

"알지! 그 할망구 젊어서 그렇게 몸 이 날렵했다고! 협업도 많이 했지!"

"그••...렇습니까......?"

"그래! 그렇게 검푸른 까마귀에 들 어오라고 제안했건만 자기는 장사해 서 먹고 살 거라고 번번이 거절하더 군. 그 늙은이 고집이 황소 같다니까.

에잉, 쯧."

°p샤는 추억이 떠오른 것처럼 신나 게 떠들다 끝엔 혀를 찼다. 손주에게 옛날이야기를 하는 할머니 같았다. 나는 할머니가 없었지만, 만약 있었 다면 이런 느낌이었으리라 생각하며 고개를 끄덕였다. 극도로 친근해진 야사이 태도가 어색했지만, 어쩐지 싫지 않았다.

"아, 그러고 보니 라모나에게 이걸 줬었지. 나중에라도 들어올 생각이 생기면 들고 찾아오라고 했건만.••... 설마 그대, 라모나의 손주인가? 안

닮았는데!"

" 아닙니다r

명함을 보고 곰곰이 생각하던 야냐 가 경악스럽다는 표정을 지었다.

나는 급히 고개를 휘저었다. 결혼도 안 한 라모나에게 갑자기 손주가 생 긴다니, 안 될 일이었다. 그리고 가 면을 써서 드러난 거라곤 두 눈과 입 밖에 없는데 닮음의 여부를 어떻게 알았는지 모르겠다.

"라모나와는 그냥 아는 사이입니다. 라모나에게 도움을 많이 받았죠"

"흠...... 하기야. 그 영감탱이 젊어 서부터 묘하게 물러 터쳤었지."

턱을 쓸어내린 아사가 고개를 끄덕 이며 납득했다. 다른 이가 라모나를 욕했다면 화를 냈겠지만, 야샤는 진 정한 친구만 보일 수 있는 태도로 라 모나를 까내렸기에 무어라 할 수가 없었다.

"저는 길드장님께 물을 것이 있어 서 왔습니다."

나는 짧게 심호흡을 하고, 야샤와 똑바로 마주했다. 유일하게 드러난

그녀의 오른쪽 눈이 푸르게 빛나고 있었다.

"길드장님께선 안테이아 헬라를 아 십니까?"

말이 끝나기도 전에 일어난 바람 때문에 깊게 눌러쓴 후드가 펄럭였 다. 피할 수 있었으나 피하지 않은 나는, 살짝 눈을 내려 내 목 가까이 로 들어온 검 끝을 확인했다.

한 손으로 대검을 쥔 야샤는 내 목

에 검을 겨누고 있었다.

"너 뭐냐, 애송아?"

그녀가 시리도록 차갑게 웃었다. 푸 르고 청명한 호수는 싸늘하게 얼어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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