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67확.
'무언가 있긴 한 모양이군.'
예상보다 난폭한 반응이었다. 나는 잠시 내 목에 들어온 대검을 쳐 낼까 고민했으나, 이내 순순히 두 손을 들 어 항복 표시를 해 보였다.
생전 처음 듣는 이름에 이렇게 반 응하진 않을 것이다. 야샤는 어머니 와 아는 사이임이 분명했다. 아쉬운 건 나인 만큼, 내가 낮추고 들어가야
했다.
"진정하시죠 싸우려고 온 것이 아 닙니다."
"그 이름을 어떻게 안 건지부터 말 해 줘야겠어, 젊은이. 그대가 싸우기 싫다 해도 나는 여차하면 싸울 마음 이 있거든."
야야의 입꼬리는 유쾌하게 올라가 있었으나, 그녀의 눈은 조금도 웃고 있지 않았다. 나는 조금 놀랐다.
'어머니와 무슨 사이기에 이렇게까 지 나오는 거지.'
야야는 소드 마스터를 직전에 앞둔 소드 익스퍼트였지만 무르익은 연륜 과 뛰어난 전투 감각을 탑재한 인물 이었다.
대륙의 최강자를 다투는 반열에까 진 오르지 못해도 그 바로 아래라 할 수 있었다. 아마 라이너도 이시를 이 기진 못할 터였다. 실력 자체는 막상 막하겠지만, 아직 젊은 라이너가 연 륜이 깊은 야샤를 이기긴 무리였다.
그녀는 강한 사람임이 분명했다.
"저를 이길 자신이 있으신 겁니 까?"
하지만 소드 마스터인 나에 비할 바는 아니었다. 소드 마스터 앞에서, 같은 마스터가 아니라면 연륜 따위는 의미 없는 것이었으니까. 나는 내 강 함에 자신이 있었다.
"하하하!"
악의가 있는 건 아니었지만 얼핏 불쾌하게 들릴 수 있을 만큼 호기로 운 말이었기에 야샤가 불쾌해할까 잠 시 걱정했으나, 예상 외로 야샤는 아
무렇지도 않은 듯 시원스럽게 웃음을 터트렸다. 나를 바라보는 그녀의 눈 은 어르신들이 재롱 부리는 손주를 보는 눈과 닮아 있었다.
"자신감이 넘치는구먼. 그래, 나이 든 늙은이가 강하면 얼마나 강할까 싶겠지. 하지만 말이다."
푹
내 목 가까이에 위치하던 검끝이 유려하게 돌고, 내 목 바로 옆의 소 파 등받이에 박혔다. 부드럽고 붉은 소파를 뚫는 소리는 인간의 살을 뚫
는 소리와도 닮아 있어 묘하게 소름 이 돋았다. 야샤가 아무렇지도 않은 듯이 대검을 한 손으로 든 채 상체를 굽혀 내게 얼굴을 가까이하며 한쪽 입꼬리를 비틀었다.
"나도 인생을 허투루 보내진 않았 다. 널 이기진 못한다 해도 쉬이 져 주진 않을 거다, 아해야."
드러난 한 알의 푸른 눈동자가 반 짝였다. 바다의 청량한 푸름에도 하 늘의 광활한 푸름에도 비할 수 없는 독보적인 그녀의 색. 차가운 푸른색 이 뜨겁게 느껴질 수 있다는 것을 그
녀로 인해 알 수 있었다.
야샤의 눈에선 청염이 타오르고 있 었다.
"예민하게 반응하시는군요 안테이 아 헬라와 꽤 긴밀한 사이이신 모양 입니다."
나는 야샤익 눈을 피하지 않은 채 로 그녀를 슬쩍 떠 보았다.
혹시 철천지원수 같은 것이라면 내 가 안테이아의 자식임을 밝히기가 곤 란해졌다. 안테이아에게 못 한 복수
를 나에게 하려 들지도 몰랐으니까.
'물론 그럴 사람은 아닌 것 같지 만••... 혹시 모르니까. 이 사람이랑 은 싸우기 싫어.'
자세한 이야기를 하기에 앞서, 안테 이아와 야4이 관계부터 확인해야 할 것 같았다. '하.' 하고 헛웃음을 뱉은 야사가' 눈을 번뜩였다.
"안테이아는 내 생명의 은인이었
생명의 은인?'
나는 나도 모르게 흠칫했다. 이건 예상치 못한 일이었다.
'그 강력한 푸른 날개 야샤가 위험 해지는 일이 있었다고? 내 어머니는 그런 상황에서 야샤를 구할 만큼 강 했고?'
나는 혼란스러움에 입술을 꾹 깨물 었다. 아마 거울을 보면 눈동자가 미 세하게 떨리고 있을 터였다.
"......정말입니까?"
내 어머니는 소외된 것들을 위해 노력하고, 위험에 처한 타인을 구해 주는 사람이었나.
가면 갈수록 악인이 아니라는 것만 알게 되어, 그녀를 원망해 왔던 시간 들이 죄악같이 느껴질 정도였다.
복잡해진 마음을 추스리고 있었을 까
등받이에 박힌 대검을 가볍게 뽑아 내고 검끝으로 땅을 짚어 몸을 지탱 한 야샤는, 검은 안대로 가리고 있는 오른쪽 눈을 가리켰다.
"내가 이놈을 잃은 날이었지. 내 인 생 최초로 의뢰 수행을 실패할 뻔했 을 때다. 그때 나를 도와줬던 것이 바로 그 아이야."
"아."
나는 짧게 신음했다. 이어진 부분이 없이 동떨어진 그림 사이로 퍼즐 조 각이 맞춰지듯 길이 슬슬 이어지기 시작했다.
"그 아이는 절체절명의 순간에 나 를 도와주었고, 그 은혜를 갚기 위해 나 또한 그 아이를 도와주었다. 그
아이가 내게 자신을 보호해 달라고 했거든. 나는 한때 그 아이를 쫓던 이가 있었음을 안다. 아마 빚쟁이들 이었겠지. 추적을 끊느라 꽤 힘들었 던 기억이 나는군."
야샤의 벽안이 과거를 뒤쫓듯 깊어 졌다. 그녀의 목소리에 회한이 깃들 었다.
"나는 의뢰를 수행하기 위해 수많 은 이들을 해쳤네. 선한 사람은 절대 아니지. 법과 규율은 날 잡아둘 수 없어. 다만 나는 나만의 정의를 가지 고 있네. 인의가 없다면 인간이 어떻
게 인간일 수 있겠는가. 나는 적어도 은혜는 잊지 않아."
정점에 오른 이가 있다는 건 그 정 점의 탑을 쌓기 위한 패배자들이 있 다는 거다. 그녀의 주름진 손으로 인 해 수많은 이들이 피를 흘렸을 것이 다.
최고의 브로커 길드, 무패 신화는 트럼프 게임으로 얻을 수 있는 게 아 니었다.
애초에 누군가를 꺾지 않곤 살아남 을 수 없는 게 세상이다. 나 또한 살
인을 저지르지 않았을 뿐, 내게 도전 하는 수많은 도전자들을 꺾고 이 자 리에 서 있었다.
야샤가 말하는 그녀만의 인의는 아 마 괴물이 되어 가는 가운데 그녀가 스스로에게 부여한 마지막 인간성이 었으리라. 그것이 그녀의 정의였을 터였다.
"그 아이는 그때 도와준 것으로 빚 을 다 갚은 거라고 했지만, 나는 그 렇게 생각하지 않아. 한 번 은인은 영원히 은인이다. 설령 대상이 고인 일지라도, 내가 살아 있는 한 끝까지
은인이야. 그대가 그 당시 안테이아 를 쫓던 빚쟁이가 보낸 사람이며, 이 제 와서 안테이아의 정보를 캐러 왔 다면••... 유감스럽지만 나는 해 줄 말이 없군."
야샤에게서 위협적인 살기가 피어 올랐다. 짐승의 영역 표시처럼 진해 지는 마나의 흐름에 나는 본능적으로 검 손잡이 위에 손을 올렸다.
검을 잡은 내 손을 힐끔 본 그녀는 푸른 눈동자를 반짝이며 씨익 웃었
나와 대치하면서도 조금도 두려워 하지 않는 낯을 보이는 사람은 참으 로 오랜만이다. 야샤는, 죽음을 두려 워하지 않았다.
"살 만큼 산 늙은이가 더 살겠다고 옛 은인을 팔아먹으면 주책도 그런 주책이 없을 걸세. 내가 푸른 날개의 야샤인데 무엇을 두려워하겠나!"
자신감 넘치는 목소리로 말하며 자 리에서 일어난 아시가' 대검을 치켜세 웠다.
저 거대한 대검이 바로 그녀가 가
진 정의의 무게였다.
"일어나게. 어디 한번 겨루어 보자 고/'
쉬익!
검날 위로 마나가 밀집된다.
야샤의 오러는 그녀의 눈만큼, 그녀 의 정의만큼 청명한 푸른색이었다.
나는 야샤를 빤히 바라보았다. 야샤 는 참으로 빛나는 사람이었다. 나도 그녀처럼 나이가 들고 싶다는 생각이
어렴풋이 들 정도였다.
'나도 뻣뻣하고 융통성 없는 정의가 아니라, 당신처럼 자유롭고 당당한 정의를 가질 수 있을까.'
사람을 죽여선 안 된다는 집착에 가까운 집념 아래, 나는 아직까지도 전쟁에서 저질러야 할 학살을 걱정하 고 있었다.
내 정의는 아직 미숙했다. 세월이 지나 풍화되어 부드럽게 된 토양이 아니라, 아직 단단한 돌바닥이었다.
나는 여전히 사람을 해치는 게 싫 었고, 살인은 생각만으로도 구역질이 나왔다. 아마 영원히 그럴 것이다. 이 감각을 잊는 순간 나는 인간이 아 니게 될 테니.
하지만 내겐 이 정의만큼이나 중요 한 내 사람들이 있었다. 법과 규율을 지키지 않아도 자신만의 정의가 있다 는 그녀처럼, 나도 나만이 정의가 필 요했다. 내 신념과 내 사람 모두 버 리지 않고 균형을 맞춘, 어느 한쪽에 치우치지 않는 정의가.
'나도, 나만의 정의를 가지고 싶어.'
나는 아샤가 존경스러워지기 시작 했다.
잠시 그녀를 바라보다가 짧게 심호 흡을 하고, 알고 있던 지식과 O)샤의 말을 조합시켜 퍼즐을 마저 맞춰 나 가기 시작했다.
'빚쟁이들은 카이사르가 처리했다고 했어. 그러나 안테이아는 그 사실을 몰랐을 테니 빚쟁이들이 자신을 쫓아 올 거라고 생각했을 거고 빚쟁이들 을 피해 야샤에게 도움을 요청했다. 하지만 실질적으로 어머니를 쫓은 건
아버지였지. 아버지는 나와 어머니를 찾기 위해 노력했다고 했으니까. 야 샤는 어머니를 추격하는 아버지의 수 하를 어머니가 말힌 빚쟁이라고 생각 하고 추적을 필사적으로 끊어 냈고, 그 결과 아버지는 정보를 얻지 못하 고 어머니와 내가 죽었다고 생각한 거야.'
어디서부터 바로잡아야 할지 감이 안 잡힐 만큼 엉켜 버린 사건이었다.
'크리시스 공작가에서도 못 찾을 정 도면 상당한 실력의 인물이 어머니의 정보를 감췄을 거라고 생각하긴 했는
데, 그게 야여을 줄이야'
과거라는 퍼즐이 서서히 완성되어 가고 있었다.
내가 생각에 빠져 있느라 반응이 없자, 야샤는 나를 보며 미간을 좁혔 다.
"뭐야, 검 안 뽑나? 이 늙은이에게 겁 먹은 겐가? 에잉, 쯧. 젊은이가 그래서야 쓰나. 자고로 젊은이란
"드릴 말씀이 있습니다."
나는 야사익 훈수를 최대한 부드럽 게 잘라 내고 그녀와 눈을 맞추었다.
"첫째, 저는 어르신과 싸우고 싶지 않습니다. 둘째, 저는 안테이아 헬라 의 빚과 관련하여 온 사람이 아닙니 다. 그리고 셋째."
마지막 말을 하기에 앞서, 조금 망 설였다.
나는 지금 미르로서 이곳에 왰다. 내 개인적인 정보를 말하는 건 위험 할 수 있었다.
'하지만 어차피 곧 밝혀질 건데.'
곧 온 제국민이 미르의 정체를 알 게 될 것일뿐더러, 야사에게라면 말 해도 될 것 같았다. 그녀는 내 어머 니를 정말 소중히 생각하고 있었으니 까.
나는 단호하게 말했다.
"저는, 안테이아 헬라의 자식입니
이시가' 숨을 멈추었다. 그녀의 몸이 딱딱하게 굳었다. 손에 힘이 풀린 건
지 대검이 떨어질 듯 기우뚱하다 간 신히 다시 잡혔다. 드러난 한쪽 벽안 은 지금까지 사귀었던 남자친구가 이 복동생이었다는 사실을 알게 된 사람 처럼 경악으로 물들어 있었다.
"그대가, 용병 미르가••... 안테이아 의 자식이라고? 진심으로? 지금 장난 하는 거 아니지? 그러니까 내가 아는 '그' 안테이아 헬라의?"
"네. 그렇게 되었습니다."
믿기지 않는다는 듯 몇 번이고 되 묻는 야샤를 향해 단호히 대답해 주 었다.
'가면을 벗어서 얼굴을 보여 줘야 하나?'
확실히 단언했으나 야샤는 아무런 반응도 없이 굳어 있었다.
내 어머니가 어떻게 생겼는지 기억 이 나지 않으니 닮았는지 말았는지는 확실히 모르지만, 이전에 카이사르가 내가 어머니를 닮았다고 말한 바가 있으니 맨얼굴로 증명하기라도 해야 하나 싶어 고민하고 있을 때.
"잠깐, 잠깐, 잠깐, 진짜?"
대검을 내던지고 불쑥 내 앞으로 얼굴을 들이민 야샤가 내 양뺨을 꽉 붙잡고 제게로 끌어당겼다.
"그러고 보니 이 순등한 눈매...... 직선형 입매...... 동그란 귀...... 달걀 형 얼굴......! 애늙은이 같은 눈 빛......! 완전 안테이0}잖아! 게다가 어렸을 때랑 눈 색도 똑같아! 젠장, 어떻게 한 번에 못 알아본 거지!"
"자, 자까, 어르시......
점점 손에 힘이 들어가더니 급기야 내 왼뺨과 오른뺨을 맞붙일 듯 강하
게 모은 o|샤가 소리쳤다.
입술이 복어처럼 모인 탓에 제대로 발음하기가 어려웠지만 당황스러움을 감추지 못하고 그녀를 저지하려 할 때, 야샤가 눈부시도록 환히 웃었다. 나를 만나게 되어 정말 반갑다는 낯 이었다.
"네가 태어난 뒤에도 안테이아네 집을 몇 번 찾았지! 슈슈, 카슈미르! 너 맞으냐 젠장, 이렇게 자랐을 줄 이야! 아니, 네가 용병 미르라고? 그 검은 재앙 미르? 제국 세 검 중 하나 란 말이냐 자랑스럽다, 이놈아! 어려
서 네 눈빛 보고 내가 크게 될 줄 알 았다 이 말이야 아주 목마 태워서 시장 한 바퀴 돌고 자랑하고 싶구먼! 이 할미는 기억 안 나는 게냐! 내가 네 기저귀 몇 번 갈아 줬건만 하이 구, 세상에...... 그 꼬맹이가 이렇게 컸다고? 나보다 더 강하게? 세상 천 지 갈라질 노릇이군"
야샤의 입이 봇물 터진 듯 말을 토 해 냈다. 나는 여전히 양뺨을 꽉 잡 힌 채로 빠르게 쏟아지는 말 속에 정 신을 차리지 못했다.
어린 나를 아사가 본 적이 있다는
게 놀라웠지만, 나는 그보다 한 가지 의문에 집중했다.
야샤는••... 내 할머니인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