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68 화
"저기, 어르신......
"어허! 야샤라고 부르라니까! 어 르신은 거리감 느껴지지 않나!"
"야, 야샤. 저 충분히 배가 부릅 니다만......•"
"무슨 소리를 하는 겐가, 이제 겨우 열다섯 개 집어먹고! 에잉, 쯧. 그렇게 코딱지만큼 먹으니 아 직도 그렇게 마른 게야! 이리 비 실비실해서야 어디 가서 소드 마 스터라고 말할 수 있겠나! 네 아
비라는 놈은 밥도 안 챙겨 주디? 에잉, 썩을. 애비가 제대로 못 하 면 내게 와라. 쯧, 처음부터 내가 길러야 했어. 아, 목이 멘 게냐? 물 더 가져다주리? 아니면 우유 를 줄까?"
야샤의 단호한 손길 아래 열여 섯 번째 감자를 입에 문 나는, 입 이 막혀 반박조차 하지 못한 채 야샤가 쏟아내는 말을 들어야 했 다.
'그 아비는 하라바나 한 마리를 통째로 먹이려 했어요•••••• 두 분
참 닮으셨는데, 혹시 제 아버지의 어머니신가요......
나는 꺼내지 못할 말을 감자와 함께 꿀꺽 삼키곤 내 옆에 딱 붙 어 앉아 열일곱 번째 감자를 까기 시작한 야샤를 죽은 눈으로 바라 보았다. 활동량이 워낙 많은 만큼 먹는 양도 꽤 많은 편이었지만, 안 그래도 포만감 넘치는 감자를 계속 먹으니 배가 터질 것 같았 다.
"자, '아' 해라."
"야샤, 저, 저는 여쭐 것이 있어
서 온 겁니다!"
난 감자를 또다시 내 입에 넣으 려 하는 야샤를 보고 기겁해서 입 에 남은 감자를 급하게 삼키고 화 제를 돌렸다.
내 간절한 목소리에 야샤는 '아, 그랬지.' 하고 중얼거리곤 내겐 수류탄으로 보이기 시작한 감자를 내려놓았다. 나는 속으로 안도의 한숨을 쉬었다.
"그래. 내게 궁금한 것이 뭐냐.
내 오른편에 앉아 내 쪽으로 몸 을 돌린 야샤가 부드러운 목소리 로 물었다. 나를 바라보는 푸른 눈엔 간질거리는 다정이 깃들어 있었다. 나를 오랫동안 알고 있었 던 이의 눈이었다.
'나는 야샤를 조금도 기억하지 못하는데.'
너무 어렸기 때문이었을까, 나는 야샤와 관련한 단편적인 장면조차 기억하지 못했다. 그녀만 나를 기 억하고 있다는 것에 조금 미안해 졌다.
난 느리게 숨을 들이쉬었다.
가까이 다가온 야샤에게선 시원 한 향이 났다. 여름날의 청량한 바다를 머금은, 물기 어린 향이었 다. 짧은 백발이 그녀가 기울인 고개를 따라 허공에서 혼들릴 때 면 백야가 펼쳐지는 것 같았다.
"저는 어머니에 대해 알고 싶습 니다. 라모나가 야샤에게 오면 들 을 수 있을 거라고 하더군요."
나는 나를 직시하는 짙푸른 눈
과 똑바로 마주한 채 말했다.
"......안테이아에 대해 말이지."
그녀의 두 눈이 깊어졌다. 조금 즐거워 보였고, 동시에 슬퍼 보였 다. 아무래도 어머니와 야샤는 내 생각보다 더 깊은 사이인 것 같았 다.
"그래. 안테이아 성격에 네게 과 거 이야기를 해 줬을 리도 없으니 궁금할 법도 하겠군."
소파에 몸을 깊게 기댄 야샤가
다리를 편하게 벌리고 의자에 팔 을 걸쳤다. 나는 그녀의 바로 옆 에 앉아 있었기에 야샤가 내게 어 깨동무를 한 것 같은 모양새가 되 었다.
야샤의 손이 내 목 옆에서 손가 락을 까닥여 소파를 톡톡 두드렸 다. 그녀의 손은 주름지고 길었 다. 어디서부터 말해야 할지 고민 하듯 허공을 바라보던 야샤가 천 천히 입술을 열었다.
"내가 안테이아와 처음 만났던 건 한밤중 깊은 숲속에서였다. 그
날 나는 예상치 못한 기습으로 쫓 기고 있었지. 멍청했던 거다. 더 치밀했어야 했는데."
브로커의 삶은 험난하다. 특히나 야샤같이, 높으신 분들의 물건을 주로 운반하는 최상위 브로커들은 매일매일 살해 위협을 받는다고 보아도 과언이 아니었다. 한 번의 실수가 삶과 죽음을 갈랐다.
눈앞의 장수는 이미 정점에 다 다랐음에도 끊임없이 자신을 채찍 질했다. 짓씹듯 자신의 실수를 말 한 야샤는 투박한 손으로 힘껏 안
대를 끌어 내렸다. 안대를 지탱하 던 매듭이 억지로 풀리고, 그녀의 왼쪽 눈이 드러났다. 나는 잠시 숨을 멈추었다.
감고 있는 눈꺼풀의 피부 조직 은 새까맣게 죽어 있었다. 화상 흉터 같기도, 마법에 당한 흉터 같기도 했다. 고요하게 감긴 눈은 영원히 다시 뜨이지 못할 터였다.
야샤는 느릿한 손길로 죽은 피 부 위를 매만지며 말을 이었다.
"나는 그때 죽음을 각오했다. 살
아남긴 힘든 상황이었으니까. 다 만 우스운 건 그때 내가 두려워했 던 게 죽음이 아니라 첫 임무 실 패였다는 거야. 너도 알겠지만 이 할미는 단 한 번도 의뢰 수행에 실패한 적이 없거든."
야샤는 자랑스럽게 말하며 낄낄 웃었다. 분위기를 풀기 위한 그녀 의 노력이 보였기에, 나는 작게 마주 웃어 주었다.
"나는 더 도망칠 힘도 없어 나 무에 기대 죽음을 기다리고 있었 다. 그때 누군가 말하더군."
야샤의 눈이 추억을 되새기듯 반짝였다. 그녀의 입꼬리가 부드 럽게 말려 올라갔다.
"'좀 비켜 주실래요? 제가 찾는 약초가 당신 발아래에 있어서.'하 고."
"......제 어머니가 그랬단 말입 니까?"
나는 좀 놀란 채로 물었다. 죽어 가는 사람 앞에서 그런 소리를 하 다니, 그 말만 들어도 내 어머니 성격이 장난 아니었음을 알 수 있
었다. 아리아의 맹수 같은 성격의 출처를 우연찮게 알아낸 나는 조 금 미묘한 기분이 되었다.
"그랬다니까! 고운 갈색 머리에 은회색 눈을 한 맹랑한 아이였지! 살짝 비켜 주니 눈 깜짝 안 하고 내 발아래에서 풀을 뜯어가더라니 까! 그때 보통이 아니라는 걸 알 아차렸다."
야샤는 안테이아에 대해 말할 때 무척 즐거워 보였다. 나는 묵 묵히 고개를 끄덕이며 다음으로 이어질 말을 종용했다.
"그 아이는 풀을 다 뜯고 나서 야 내게 눈길을 주더군. 무표정한 얼굴로, 죽기 직전인 내 몰골을 위아래로 훑어보더니 하는 말이 뭐였는지 아나? '살고 싶어요?'였 다니까! 아주 깜찍했지."
'그건 깜찍한 게 아니라 심히 무 심한 거 아닌가.'
나는 질려 버린 채로 떨떠름한 표정을 지었다.
눈앞의 사람이 죽든 말든 상관
은 별로 없는데 살려 주겠단 투였 다. 내 어머니도 보통 귀족 영애 는 아니었던 것이 분명했다.
"나는 처음으로 임무를 실패할 거란 생각에 조금 짜증이 난 상태 였다. 암살자 수십 명이 날 쫓고 있으니 살고 싶어도 살 수 없다고 했지. 댁이 기적이라도 일으킬 수 있냐고 했다. 생각해 보면 나도 혈기가 좀 있던 시기군. 부끄럽구 먼."
'둘 다 장난 아니군.'
나는 두 사람이 신경전을 벌이 던 그 장면이 얼마나 살벌했을지 가늠하며 웃음기 섞인 눈으로 야 샤를 바라보았다. 야샤는 머쓱한 듯 머리를 긁적이다, 눈매를 부드 럽게 휘었다.
"아직도 안테이아의 자신만만한 웃음이 또렷이 기억난다. 그 아이 는 말했지."
야샤의 푸른 눈엔 그날 밤의 별 이 촘촘히 박혀 있었다.
"'원한다면 오늘 밤 당신의 기적
이 되어 주도록 하죠.'라고"
나는 아픈 심포니를 두었던 안 테이아를 떠올렸다. 내가 아리아 를 보며 죽음을 실감했듯이, 안테 이아도 늘 죽음을 실감하고 있었 으리라.
죽음을 실감하고 있는 이들은 타인의 죽음에 무뎌지기 어렵다. 상실의 파급력을 인지하고 있는 이들은 타인의 상실을 방관할 수 없었다.
나는 안테이아가 야샤를 도와준
건 이 때문일 거라고 감히 예측했 다.
"그 아이, 마법 실력이 천재적이 었다. 나와 내 동료들을 모두 데 리고 단번에 안전한 곳으로 텔레 포트를 하더군. 그 정도의 텔레포 트 실력자는 많지 않아. 그러고도 멀쩡해 보였으니 말 다했지."
'아리아의 마법 실력은 어머니에 게서 온 건가.'
나나 아리아나 안테이아와 닮은 점은 하나도 없다고 생각했건만,
천천히 그녀를 알아가다 보니 나 와 아리아의 많은 부분이 그녀에 게서 유전되었음을 알 수 있었다.
내가 상념에 빠져 있을 때에도 야샤는 말을 이었다.
"이후 들어 보니 제국 아카데미 마법부를 수석으로 졸업했다더군. 그 실력이라면 당연한 일이겠지."
"제국 아카데미를 수석으로요?"
잠시 다른 생각을 하던 나는 그 말에 깜짝 놀라 눈을 크게 뜨고 고개를 확 쳐들었다.
제국 아카데미는 온 대륙을 통 틀어 가장 유망 있는 학생들만 입 학할 수 있는 최고의 아카데미였 다. 거기서 수석으로 졸업을 마쳤 다는 건 대단하다 못해 어디서든 와 달라고 비는 인사가 될 수 있 다는 뜻이었다.
'그렇게 유망했던 학생의 최후가 그래야만 했나.'
어머니에 대해서 알면 알수록 가슴이 아파 왔다. 이젠 그녀에 대한 원망은 거의 사라지고, 야속
한 세상에 대한 원망이 불쑥불쑥 고개를 들었다.
"그래. 졸업 후에 마탑에서 연락 이 왔을 정도라더군. 그런 아이 가...... 그렇게 되어서는 안 됐는 데."
야샤가 소파 위로 두른 손으로 소파 테두리를 으스러져라 잡았 다. 그녀와 나 사이에 잠시 무거 운 침묵이 감돌았다.
우리 둘 다 무어라 말하진 않았 지만 알고 있었다. 이 침묵은 그
리 죽어야 했던 안테이아를 향한 묵념이 었다.
"......그 일 이후 나는 그 아이 를 내 은인으로 삼았고, 내 도움 이 필요하면 언제든 나를 찾으라 고 했지. 네가 가지고 온 이 명함 을 안테이아에게도 줬었다."
야샤가 검은 베스트 가슴팍 주 머니에서 명함을 꺼냈다. 그녀의 사인이 남은 그 명함이었다.
"필요 없다고 하는 걸 억지로 쥐여 준 거라 다시 만날 가능성은
낮다고 생각했네. 누군가에게 도 움받는 것에 자존심 상해하는 것 같았으니까. 그런데 어느 날, 그 아이가 이걸 가지고 날 찾아왔더 군. 만신창이 상태에, 죽은 눈을 하고서."
짙푸른 눈에 어둠이 드리웠다. 무슨 말이 나올지 예상한 나는 질 끈 눈을 감았다.
"자기와 자기 아이를 살려 달라 더구나."
아, 지독한 이야기다. 인생은 멀
리서 보면 희극이고 가까이에서 보면 비극이라는데, 안테이아의 이야기는 멀리서 보아도 비극이었 다.
"사람을 숨기기 가장 좋은 곳은 예나 지금이나 사창가지. 나는 가 장 은밀하고 안전한 곳에 안테이 아의 거처를 만들어 주었다."
"......거기까지면 됐습니다."
한 손에 얼굴을 묻은 나는, 다른 손을 들어 야샤를 저지했다.
이후 이야기는 알고 있었다. 나
를 낳고, 아리아를 낳고, 소설의 엑스트라로서 모든 일을 다 했다 는 듯 죽어 버린 어머니. 이 비극 을 더 듣고 싶지 않았다.
무겁게 고개를 끄덕인 야샤는 잠시 뜸을 들이다 입술을 열었다.
"우리를 돕는 건 우리다. 우리를 도울 건 우리밖에 없다. 잊지 마 려무나."
가슴이 찡해지는 말이었다.
나는 입술을 꾹 물었다 놓고는
고개를 끄덕였다. 야샤는 나를 지 긋이 바라보았다. 한 알의 푸른 눈은 여전히도 따스했다.
"어렸던 네가 떠오르는군. 넌 작 고 사랑스러운 아이였지. 나를 꽤 잘 따르기도 했다. 너는 내 마음 의 일부를 차지한 가장 작은 존재 였어. 너를 오랫동안 본 건 아니 었지만, 잠시일지라도 너를 애정 했다. 사랑의 규모는 시간의 길이 와 비례하지 않음을 알아 주었으 면 한다."
"너는 나를 기억하지 못한다 해
도 나는 늘 너를 기억하고 있었 다, 카슈미르."
나는 울컥 치미는 감정을 삼켜 냈다. 나도 기억하지 못하는 내 어린 날을 기억하는 사람이 있다 는 게 왜 이리 가슴 저미는지 모 를 일이었다.
"다시는 만나지 못할 줄 알았는 데 이렇게 만나 기쁘구나."
야샤의 주름진 손이 내 뺨을 붙 잡았다. 그녀의 손은 거칠고 투박 했지만, 그녀의 손길은 조심스럽
고 부드러웠다. 내 뺨을 엄지로 살짝 쓸어 본 야샤가 인자하게 웃 음 지었다.
"지금까지 살아 있어 줘서 고맙 다. 보고 싶었다."
나는 야샤의 상냥한 바다를 바 라보며 생각했다.
새로운 도피처이자 인생의 스승 을 만난 것 같다고.
검푸른 까마귀 길드에서 나온 나는, 손 안에 있는 물건을 조용 히 굴려 보았다. 한 쌍의 날개 형 태를 띤 청금석 브로치였다.
'내 도움이 필요할 땐 언제든 이 걸 들고 검푸른 까마귀를 찾아라. 명함보다 더 직방일 거다. 꼭 도 움이 필요할 때 말고, 보고 싶을 때마다 와도 좋다! 이 할미 적적 한데 자주 좀 찾아와라. 연락도 좀 하고!'
야샤는 브로치와 함께 자신의 통신구 번호를 주며 기꺼이 내 조
력자를 자처했다. 은인의 자식 또 한 은인이라고 하는 그녀에게선 곧은 신념이 엿보였다.
'진짜...... 멋졌지.'
야샤를 떠올린 나는 나도 모르 게 배시시 웃음을 지었다. 어려서 도 이런 적이 없었건만, 다 커서 야 존경할 위인을 만난 것 같았
늘 시원스러운 태도와 다정한 온기, 올곧은 신념. 젊음이 떠나 간 자리를 지혜와 숙련으로 채운
사람.
나는 야샤를 닮고 싶었다.
해가 거의 지고 가로등이 켜지 기 직전의 거리를 천천히 걸었다. 로브 자락을 흐트러트리는 시원한 바람이 기분 좋았다. 잠시 눈을 감고 밤의 정취를 맡기 위해 숨을 크게 들이쉬었을 때.
'어.'
나는 공기 사이로 익숙한 향취 를 맡았다.
익숙한 인기척의 목적지는 나였 다. 나는 빠르게 가까워지는 인기 척에 작게 웃음을 뱉었다.
휙.
내가 서 있던 곳의 오른쪽 골목 에서 불쑥 나온 큰 손이 내 손목 을 부드럽게 끌어당겼다. 나는 저 항하지 않고 그에게 끌려갔다.
"오랜만이에요, 그죠."
내 허리에 단단한 팔이 제자리
를 찾은 듯 익숙하게 감기고, 낮 은 목소리가 속살거렸다. 나는 동 의하는 뜻으로 옅게 미소 지었다.
"당신도 내가 그리웠나요?"
축 처진 눈꼬리가 초승달처럼 휘며 은빛 눈동자가 가늘어졌다.
내 오랜 친구, 엘리오르 라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