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69 화
"엘, 오랜만입니다."
나는 편하게 웃음을 지었다. 나 를 담아내는 온화한 은빛 눈동자 를 보자면 마음 한구석의 착잡함 이 단번에 풀려나갔다.
엘은 흰 가면에 흰 로브를 착용 하고 있었다. 정체를 숨기고자 한 것 같지만 머리부터 발끝까지 새 하얀 데다 숨겨지지 않는 신성한
분위기 탓에 눈에 띄지 않는 건 무리일 것 같았다.
'무슨...... 빛이 강림한 것 같은 데.'
나는 새삼스럽게 엘의 외모에 감탄했다. 인상을 희미하게 하는 마법은 꽤 단단하게 걸려 있었지 만, 내겐 통하지 않았다. 내 눈엔 그의 새하얀 피부도, 물빛 머리칼 도, 은색 눈동자도 또렷이 보였
내가 한참 말없이 엘을 바라보
고 있었을까, 그가 제 머리칼을 귀 뒤로 넘기며 풋사과보다 더 풋 풋한 수줍음을 머금은 미소를 지 었다. 입술을 느리게 혀로 훑고 눈을 내리까는 일련의 행동까지 그를 청초한 한 떨기 백합처럼 보 이게 만들었다.
"그렇게 보면 떨려요, 슈슈. 계 속 달아오르잖아요."
내 손을 겹쳐 쥔 엘이 내 손을 제 뺨 위로 올렸다. 투명하다 싶 을 만큼 새하얀 피부엔 열기가 올 라 뜨끈했다.
복숭앗빛으로 물든 그의 뺨을 본 나는 조금 흠칫했다. 어쩐지 나까지 달아오르는 느낌이었다.
"크흠! 엘, 잘 지내셨습니까?"
나는 헛기침을 뱉고 말을 돌렸 다. 이런 종류의 분위기에 면역력 이 없는 내가 뱉어낸 건 어색한 안부 인사였다. 나는 잠시 내 끔 찍한 임기응변 실력에 절망했으 나, 엘은 부드럽게 웃으며 장단을 맞춰 주었다.
"그럼요. 당신과의 만남이 예정 되어 있었으니까요. 다시 만날 생 각을 하며 버티고 있었어요."
엘의 등 뒤로 있지도 않은 꼬리 가 살랑거렸다. 엘을 오랫동안 지 켜본 끝에 어렵고 의뭉스러운 그 의 속내를 어느 정도 읽을 수 있 게 된 나는 이게 칭찬해 달라는 뜻이라는 걸 알았다.
'강아지 같아.'
그의 후드 안으로 손을 넣어 조 심스럽게 긴 머리칼을 쓸어내리
자, 엘의 얼굴이 단번에 화사해졌 다.
"오늘은 줄 게 있어서 온 거지 만, 줄 것만 주고 헤어지긴 너무 아쉽잖아요."
내 허리에 둘렀던 팔을 푼 엘은 내 앞으로 손을 내밀었다. 난 이 젠 엘에게 안기는 게 너무 익숙해 안겨 있다는 것조차 자각하지 못 하고 있었기에, 조금 멈칫하다 하 얀 손을 바라보았다.
깜빡거리는 가로등 하나만이 해
가 완전히 진 거리를 비추고 있었 다. 더러운 뒷골목과 어울리지 않 게 우아한 몸놀림으로 손을 내민 엘은 마치 무도회에서 춤을 청하 는 것 같았다.
"부디 오늘 밤은 나와 함께해 주겠어요? 정처 없이 거리를 걸 어도 당신과 함께라면 즐거울 것 같은데."
나는 엘과 함께 춤을 췄던 데뷔 탕트를 떠올리고, 흘러나오는 웃 음을 막지 않았다. 답은 정해져 있었다.
"기꺼이요."
그때 그랬듯, 지금도, 이후에도 나는 엘의 손을 잡을 터였다.
검술 대회로 인해 활기를 얻은 수도의 거리는 언제 테러가 일어 났었냐는 듯 북적거렸다. 작년 이 맘때의 수도가 사람 지옥이었다는 걸 떠올리면 확실히 인원이 줄긴 했지만, 그래도 적은 수는 아니었
"이렇게 거리를 걷는 건 오랜만 이네요. 교황이 된 후론 늘 마차 를 타야 했거든요."
느긋하게 주위를 돌아본 엘이 작게 속삭였다. 거리를 걷는 그는 평소 교황 정복을 입고 왕좌에 앉 아 있을 때보다 훨씬 자유로워 보 였기에, 나는 마음이 조금 불편해 졌다.
"교황으로 사는 게 답답하진 않 으십니까?"
엘은 한때 귀족도 아닌 평민이 었다. 예법도 규칙도 없이 자유로 웠던 그에게 교황이란 직위는 그 렇게까지 즐겁지만은 않을 수 있 겠다는 것에 이제야 생각이 닿았 다.
"조금은 그럴지도 모르죠. 보고 싶을 때 무작정 당신을 찾아갈 수 없고, 사람들 앞에서 당신 발등에 입 맞출 수 없다는 점이요. 나는 그럴 수 있지만 교황과 엮이면 당 신이 곤란해질 테니까."
잠시 생각하던 엘이 진지한 표
정으로 고개를 끄덕였다. 나는 그 가 언급한 자유의 기준이 모두 나 와 관련되어 있는 점을 지적할까 하다 그만두었다.
엘이 고개를 돌려 나를 바라보 았다.
"그래도 괜찮아요. 당신이 이렇 게 숨구멍이 되어 주니까. 막강한 힘을 쥔 대가이니 불평할 생각은 없어요."
습관처럼 휘어진 엘의 눈에선 성숙함이 엿보였다. 어려서부터
나이답지 않게 어른스러웠던 소년 은 여전히 스스로의 책임을 알았 다.
"......가끔 답답해지는 밤엔 언 제든 절 부르시죠. 은밀히 찾아가 함께해 드리겠습니다."
"흐음."
엘이 눈을 빛냈다. 고개를 기울 인 그가 장난스럽게 웃음 지었다. 하지만 가벼운 웃음과는 별개로 은빛 눈동자엔 묘한 빛이 깃들어 있었다.
"밤에...... 찾아와서 어떻게 해 줄 건가요? 내 침대에서 함께해 줄 건가요?"
'엘은 파자마 파티를 하고 싶은 건가?'
나를 내려다보는 그의 눈을 바 라보았다. 같이 자 줄 거냐는 뉘 앙스를 보니 그는 꼭 안고 잘 바 디 필로우가 필요한 걸지도 몰랐 다.
커다란 곰돌이 인형을 안고 자 는 엘을 상상해 버린 나는, 바람
빠지는 웃음소리를 내었다.
"필요하다면 안고 잘 바디 필로 우가 되어 드릴 수 있지만 말입니 다. 그것보단 엘을 데리고 신전을 빠져 나와 잠시 밤 산책을 나가는 것 정도를 생각하고 있었습니다. 제가 몰래 탈출하는 건 또 잘해서 요."
"......바디 필로우? 그게 아니라, 후...... 그래요. 좋네요."
내 말에 미간을 좁힌 엘은 무언 가 반박하려는 것처럼 말문을 떼 다 한숨을 쉬곤 해탈한 듯 긍정했
다. 할 말이 많지만 하지 않겠다 는 표정이었다.
"그럼 달이 밝아서 외롭다고, 별 이 예뻐서 보고 싶다고 해도 받아 주시는 거예요."
엘은 천천히 발걸음을 옮기며 속삭였다. 발걸음을 옮길 때도 그 의 시선은 앞이 아니라 내게 고정 되어 있었다. 나는 아름답고 신빙 성 없는 이유들에 즐거워져 고개 를 끄덕였다.
"달이 밝지 않거나 별이 예쁘지
않아도 찾아가겠습니다. 엘과 제 가 이유를 필요로 하는 사이는 아 니니까요."
굳이 천체를 핑계로 두지 않아 도 되는 사이라고 생각했다. 엘이 라면 그냥 보고 싶다는 말로도 충 분했다.
거리를 걷던 엘이 멈칫했다. 내 손을 맞잡은 그의 손에 힘이 들어 갔다. 나는 고개를 돌려 그를 올 려다보았다.
" 아닙니까?"
눈을 느리게 깜빡인 엘이 한숨 처럼 웃었다. 두 눈이 크게 요동 쳤고, 눈가가 붉게 달아올랐으며, 휘어 올라간 그의 입꼬리가 희미 하게 떨리고 있었다.
"......그럴 리가요. 물론이죠."
환한 달빛을 등 뒤에 두고 있어 서였을까, 엘은 금방이라도 아스 라이 사라질 것 같았다.
엘의 말대로 그와 나는 정처 없 이 거리를 돌기만 했으나 충분히 즐거웠다. 도란도란 대화를 나누 며 거리를 몇 바퀴고 돌았을까, 텅 빈 골목에서 지나치게 어두워 진 하늘을 확인한 나는 문득 아쉬 워졌다.
"이제 그만 헤어져야겠군요."
" 벌써요?"
엘의 눈매가 축 처졌다. 은빛 눈 동자가 애처로운 물기로 반짝이는 것이, 금방이라도 그의 처진 눈매 를 타고 녹인 은이 흘러내릴 것
같았다.
"......금방 또 만나게 될 겁니다. 검술 대회에서도 절 보실 수 있지 않습니까."
그런 엘의 표정에 나는 조금 약 해졌으나, 이내 마음을 굳게 먹었 다. 지금 엘에게 끌려갔다간 밤새 도록 이 거리를 빙빙 돌아야 할지 도 몰랐다.
"그래도 당신과의 작별은 언제 고 아쉬워요."
백합 위로 떨어진 아침 이슬처 럼 청초한 목소리로 속삭인 엘이 제 주머니에서 작은 케이스를 꺼 냈다. 열린 케이스에서 나온 것은 반지였다. 그가 눈꼬리를 낭창하 게 휘었다.
"오늘은 이거 주려고 온 거예요. 받아 주기로 한 거 기억하죠?"
"네, 기억합니다만, 이건......
나는 잠시 할 말을 잃고 반지를 내려다보았다.
반지에선 강력한 신성력이 느껴
졌다.
푸른빛이 도는 투명한 테에 겉 에 황금색으로 새겨진 정밀한 문 양. 한눈에 봐도 예사 물건이 아 닌 반지의 정체를 나는 알고 있었 다.
"이거...... 신성모독 아닙니
까••••••?"
엘이 내게 건넨 것은 교황에게 만 허락된 반지였다.
"내가 주겠다는데 누가 반발을
할까요. 신의 목소리를 듣는 건 나뿐이라서 내가 행하는 건 모두 신의 뜻이거든요."
엘은 느긋하게 내 오른손을 잡 아 쥐었다. 그는 교황으로서 참 무서운 말을 하고도 아무렇지 않 아 보였다.
"됐다. 예쁘죠."
반지를 내 새끼손가락에 조심스 럽게 끼운 엘은 만족스러운 표정 으로 물러났다. 내 왼손 약지 집 착광처럼 보이던 칼과 아리아와는
다르게 엘은 새끼손가락에 끼우는 것으로 충분한 듯했다.
반지를 끼고 있는 내 새끼손가 락을 만지작거리던 엘은 싱긋 웃 었다.
"새끼손가락 걸고 약속했던 것 들 잊지 말라는 뜻이에요. 약속 안 지키면 바늘 백 개 삼켜야 한 다는 거 기억하죠? 당신이 말해 준 건데."
그 말에 나는 그와 나, 모두 어 렸던 시절을 떠올렸다.
'앤이 자꾸 당신을 찾아요.'
'스읍...... 다음 주엔 정말 보러 갈게. 오늘은 조금 힘들어.'
'당신, 저번 주에도 그 말 한 거 알죠.'
'......그땐 일이 좀 크게 있었어. 진짜라니까! 다음 주에도 이러면 그땐 내가 바늘 백 개를 삼킬게!'
'좀 끔찍한데. 그게 약속을 지키 지 않은 죗값이에요?'
'그럼. 공연히 거짓말을 한다는 건 입으로 가시를 뱉는 거나 마찬 가지니까. 뱉은 가시 대신 바늘을 삼키는 걸로 되돌려 받는 거지.'
여러 사정으로 약속을 지키지 못했던 나는, 어렸던 엘에게 꽤 살벌한 죗값을 알려주었다. 그래 도 이런 죗값을 걸고 말할 땐 내 가 한 말을 반드시 지켰다.
"나는 당신이 아픈 게 싫으니까 약속 꼭 지켜요."
엘은 나긋하게 말하며 내 머리 를 쓸어내렸다. 벌칙을 물러 줄 생각은 없으니 반드시 지키라는 소리였다. 조금 살벌했지만, 애초 에 나는 지킬 자신이 있는 약속만
했기에 기꺼이 고개를 끄덕였다.
"엘에게 돌아서지 않겠다고 한 약속 기억합니다. 꼭 지킬 겁니 다."
나는 새롭게 자리를 차지한 반 지를 매만지며 단언했다. 그의 어 두운 면까지도 내가 감당해야 할 숙제였다. 그의 악과 부족함까지 도.
"......그래요?"
나를 지그시 내려다보던 엘이
작게 중얼거렸다.
그의 목소리가 평소보다 낮았다. 천공에서 살고 있을 것만 같은 신 비롭고 성스러운 외향과는 달리 바닥을 기는 목소리. 허리를 숙인 그가 제 얼굴을 내게로 가까이 했
"그럼 지금도 돌아서면 안 돼요. 할 수 있죠?"
엘은 웃지 않았다. 평소 습관처 럼 눈을 휘는 것도 없이, 그의 본 연 그대로 무표정을 보여주고 있
었다.
가라앉은 은빛 눈동자는 가슴을 내려앉게 하는 능력이 있다. 나는 늘 무중력 상태를 유지하던 심장 이 갑작스럽게 중력의 영향을 받 기 시작한 것을 느끼며 얼떨결에 고개를 끄덕였다.
"방금 슈슈가 말했죠. 우리는 이 유가 필요하지 않은 사이라고."
붉은 와인을 한 모금 머금은 듯 몽롱한 목소리로 속삭인 그가 내 턱을 잡고 꾹 눌렀고, 저절로 입
술이 벌어졌다.
분위기는 미약이라도 뿌려놓은 것처럼 자극적이었다. 이런 상황 자체가 낯설고 어색해서인가, 어 딘가가 간질간질해졌다. 나는 나 도 모르게 몸을 움츠렸다.
엘은 지긋한 시선으로 내 입술 을 바라보았다. 노골적이라 착각 할 수도 없었다. 그 시선에 얼굴 이 화끈해진 나는 시선을 굴리다 무심코 그의 입술에 시선을 멈춰 세웠다.
백합 향이 어지러울 만큼 진해 지고 그가 코앞까지 가까워졌다.
내 향을 가져가겠다는 듯 크게 숨을 들이쉰 엘이 곱게 눈을 휘었 다. 눈 틈새로 봇물 터지듯 넘쳐 흐르는 욕망은 숨기지 않은 채로. 동시에 그는, 왠지 모르지만 조금 은 슬퍼 보였다.
"그러니, 이것도 이유 없이 했다 고 해요."
그르렁거리는 목소리를 끝으로
엘의 고개가 살짝 틀어졌다.
그리고 그와 나의 입술이 맞물 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