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70 화
말캉한 촉감이 입술에 퍼졌다. 가장 예민한 피부에 닿는 그의 입 술은 소름 끼치도록 부드러워 저 절로 몸이 파드득 떨렸다.
단단한 팔이 허리를 감싸고, 내 뒷머리를 붙잡은 손이 나를 제 쪽 으로 끌어당기며 몸이 밀착되었
O
모든 사고를 정지한 채 굳어 있 던 나는, 내 아랫입술에 닿는 무 언가에 척추를 곤두세운 채로 반 자동적으로 입을 열었다.
그것을 시작으로 입 안에 온통 백합 단내가 진동했다. 나는 숨을 급하게 들이쉬었다.
'으, 읍.'
목 아래에서 신음이 올라왔으나 뱉지 못하고 안에서 울릴 뿐이었 다. 척추를 타고 오르는 낯선 감
각에 나도 모르게 뒷걸음질 치자 내 뒷머리를 잡은 엘의 손이 나를 제 쪽으로 끌어당겼다.
그는 눈을 감지 않았다. 내 얼굴 근육의 움직임 하나하나 눈에 담 겠다는 듯 번뜩이는 눈으로 나를 담아냈다. 그 강렬한 은빛 눈과 마주하고 있을 때면 더욱 숨을 쉴 수가 없어서, 나는 그의 어깨를 꾹 잡은 채 눈을 감았다.
" 아."
그가 송곳니로 내 아랫입술을
살짝 깨물었다. 이후 달래듯 입술 을 건드리는 것에 그의 어깨를 더 꽉 잡았다.
이상했다. 어쩔 줄 모를 만큼 자 극적 이었다.
"흐
"하, 슈슈."
내 입술을 느리게 놓아준 엘은 나와 이마를 맞댄 채 열기가 들끓 는 목소리로 내 애칭을 속삭였다.
내가 질끈 감았던 눈을 간신히
떴을 때 본 것은 붉게 무른 그의 눈가와 욕망을 억누르는 그의 표 정이었다.
"......우리는 이유가 필요 없는 사이라고 했잖아요. 이건 내가 이 유 없이 하고 싶어서. 그래서 한 거예요. 놀라게 해서 미안해요."
갈라진 목소리로 다정을 흉내 낸 그는 시선을 내리깐 채 웃어 보였다. 여느 때와 같은 미소를 지으려 했던 것 같지만, 내겐 균 열이 보였다.
나는 연인만이 이런 스킨십을 하는 게 아니라는 것을 알고 있었 다. 무엇보다도 처음 살던 곳이 사창가였으니까. 그곳에서 감정은 이유가 되지 않는다. 그저 충동이 면 충분했다.
나는 충동적으로 했다는 엘을 이해했으나, 뇌에 열이 올라 사고 가 잘 되지 않는 것도 컸다. 고장 난 나를 지긋이 내려다보던 엘은 묘한 미소를 지었다.
"......나는 좋았는데. 슈슈는 싫 었어요?"
엘의 물음에 얼굴이 화끈 달아 올랐다. 거울을 보지 않아도 얼굴 이 새빨개졌으리라는 걸 알 수 있 었다. 그의 집요한 눈길 아래 안 절부절못하던 나는, 이내 살짝 고 개를 돌리고 손등으로 얼굴을 가 린 채로 중얼거렸다.
"시, 싫지는 않았습니다."
엘은 내가 친애하는 이였고, 그 는 상냥했으며, 부드러웠다. 온몸 이 달아오르고 참을 수 없이 부끄 러웠지만 싫을 이유는 없었다.
멈칫.
하릴없이 내 머리칼을 쓸어내리 던 큰 손이 멈췄다. 한참 굳어 있 던 그는, 이내 손등으로 입가를 가렸다.
엘의 얼굴은 온통 붉게 달아올 라 있었다.
"나한테 왜 그러는 거죠?"
" 네?"
엘이 황급히 몸을 돌렸다. 성큼
성큼 벽 쪽으로 가더니 미처 말릴 틈도 없이 이마가 부을 정도로 벽 에 박아 댄 엘은 나를 돌아보았 다. 그의 귀와 목덜미까지 새빨갛 게 달아올라 있었고, 나와 눈을 마주치지 못한 채였다.
"미안해요. 나 먼저 가야 할 것 같아요."
"어,어, 네, 자, 잘 가세요."
우리 둘 다 상당히 고장 난 상 태였고, 엘은 왜인지 상당히 다급 해 보였다.
눈을 질끈 감았다 뜨기를 반복 하던 엘은 이내 주머니에서 순간 이동 아티팩트를 꺼냈다. 아티팩 트를 으스러져라 쥐고 발동하기 직전, 엘은 홍조를 진정시키지 못 한 채 나를 똑바로 보고 말했다.
"나는 실수로 한 거 아니에요. 후회 안 해요."
"그러니까 당신도 그래 줬으면 좋겠어요."
엘은 목이 살짝 졸린 사람처럼 메마른 목소리로 말했다.
화악.
그리고 내가 대답하기도 전에 그는 환한 빛과 함께 사라졌다.
털썩.
엘이 사라지고 10초를 센 나는, 그 자리에 힘없이 쪼그려 앉았다. 두 손으로 덮은 얼굴은 무척 뜨거 웠다.
'기분이 너무 이상해.
열기는 쉬이 식지 않을 듯했다.
검술 대회 4차 본선은 시시하게 끝났다. 상대에겐 나와의 경기가 하드 모드를 넘어 헬 모드였겠으 나, 내겐 애들 장난이나 다름없었 다. 쌍검을 꽤 그럴듯하게 사용하 는 상대는 안타깝게도 나로 인해 곤죽이 되어 4차 본선에서 좌절 해야 했다.
"크리시스의 공녀가 정녕 그레 고리를 이겼단 말인가? 대체 어
떻게? 공작가의 수작이 있었던 겐가?"
"그렇다기엔...... 경기에서 그레 고리가 너무 일방적으로 밀렸네. 공녀가 확실히 위였지."
요 근래 길을 걷다가 좀 북적거 린다 싶으면 다 4차 본선의 내 경기 얘기를 하고 있었기에, 나는 내 상대가 유명한 이였음을 알게 되었다. 용병 출신 방랑 기사라는 그레고리는 그를 검술 대회의 승 자로 점치고 돈을 걸었던 이들이 꽤 될 정도로 유망주였다.
상대가 유명한 강자였던 만큼 그를 이긴 내게도 저절로 시선이 쏠렸다. 이제 내게 돈을 거는 이 들까지 생겼다. 아직도 내가 크리 시스의 후광으로 여기까지 올라왔 다고 생각하는 이들이 있긴 했으 나, 이쯤 되니 사람들은 슬슬 내 무력에 관심을 가지기 시작했다.
'하지만 지금 중요한 건 그게 아 니지.'
나는 품 안에 한아름 안은 새하 얀 국화를 느리게 쓸어내렸다. 새 하얀 꽃잎을 보면 저절로 떠오르
는 설원에 가슴이 울렁거렸다.
검은 제복까지 차려입은 나는, 순간이동 아티팩트를 쥔 손에 힘 을 주었다.
'미르'의 정체를 세상으로 드러 내기 전 만나야 하는 사람이 있었 다. 이 이름을 지어 준 사람이었 다. 나는 작게 속삭였다.
" 텔레포트."
시야에 담긴 세상이 단번에 뒤 집혔다.
"으
나는 인상을 구긴 채로 짧게 신 음을 뱉었다.
순간이동 특유의 역겨운 느낌은 익숙해지려야 익숙해질 수가 없었 다.
'용병 시절 말 타고 올 땐 이런 문제는 없었는데.'
딱 2회 사용이 가능한 순간이동 아티팩트를 처음으로 사용한 나
는, 아티팩트를 바지 주머니에 아 무렇게나 넣다 문득 손등에 떨어 진 차가운 액체를 보았다. 그리고 자동적으로 하늘을 올려다보았다.
" 아."
하늘에서는 굵은 눈송이가 떨어 지고 있었다.
초여름을 이제 막 지나는 제국 과 달리, 이곳은 겨울이었다. 만 년설을 자랑하는 북부엔 겨울 말 고 다른 계절이 찾아오지 않았다.
'북부도 오랜만이네.'
용병 일을 할 땐 매일같이 오던 곳이었는데, 크리시스 가문에 들 어간 뒤로는 올 일이 아예 없었 다. 나는 벌써부터 머리에 쌓이기 시작한 눈을 털어 내곤 주위를 짧 게 두리번거렸다.
익숙한 'S' 모양의 나무가 시야 에 들어왔다. 이곳이 어딘지 단번 에 파악한 나는, 능숙하게 오른쪽 으로 발걸음을 옮겼다.
IX 표 =『, =〒•
눈이 발목까지 쌓여 있어 발걸 음을 옮길 때마다 푹푹 눌렸다. 긴 부츠를 신고 와서 다행이었다. 눈에 대한 껄끄러움을 꾹 참고 꾸 준히 발걸음을 옮기던 나는, 목적 지에 가까워질수록 점점 속도를 줄였다.
발걸음이 무거워지는 것은 불가 항력이 었다.
탁
끝엔 느리다 못해 거북이 기는
속도로 걷던 나는, 새하얀 설원 한복판에서 유일하게 새까만 바위 앞에서 멈춰 섰다. 미간이 슬픔을 담아 저절로 찌푸려졌다.
이 투박하고 볼품없는 돌이 바 로 내 스승, 카라쇼의 죽음을 기 리는 유일한 비석이었다.
"......스승님. 많이 늦었죠."
나는 작게 속삭이며 바위 앞에 들고 온 국화 꽃다발을 내려놓았 다. 하얀 꽃잎은 얼마 지나지 않 아서 눈꽃과 섞여 날리고 사라지
리라는 걸 알면서도, 나는 늘 꽃 을 가져왔다. 덧없고 약하기에 아 름다운 것이 있는 법이니까.
나는 카라쇼의 기일마다 이곳을 찾았다. 꽃다발을 내려놓고, 그동 안의 일상을 한탄하듯 털어놓은 뒤 돌아가는 것이 연례행사에 가 가웠다. 원래는 술도 가져오곤 했 지만, 오늘은 그녀의 기일도 아니 니 꽃다발만 가져온 참이었다.
"그동안은 말씀드릴 수 있는 제 일상이 한정적이었죠. 어제도, 그 제도, 죽도록 마수 토벌해서 돈
벌었다는 이야기밖에 해 드릴 게 없었잖습니까. 하지만 이젠 다릅 니다. 저, 아리아 말고 다른 소중 한 것과 돌아갈 곳이 생겼거든 요."
이젠 카라쇼에게 생사의 기로에 서 겨우 살아남아 하루를 간신히 살아내고 있다는 말 외에 다른 말 도 할 수 있었다. 나는 잠시 카라 쇼가 살아 있었다면 어땠을까, 생 각했다.
'네 아버지를 찾았다고! 아니, 공작이든 말든! 어때, 좋은 사람
이더냐? 네게 잘 대해 주든? 하 하, 그러면 되었다!'
그녀라면 내가 새로운 가족과 돌아갈 곳을 찾게 된 것에 대해 진심으로 축하해 주었으리라. 자 기 일처럼 기뻐해 주고, 더는 함 께 용병 일을 못 한다는 것을 조 금 아쉬워하면서도 내 앞길을 응 원해 줬을 거다. 그녀는 상냥했으 니까.
나는 입술을 꾹 깨물었다. 물 밀 듯 밀려오는 그리움과 슬픔이 나 를 잠식했다.
소중한 사람들이 많아졌다고 하 여 카라쇼의 상실이 없던 것이 되 는 건 아니었다. 사람의 빈자리는 다른 사람으로 채워질 수 없었다. 빈자리는 영원히 빈자리고, 채워 지는 것은 다른 자리였다.
나는 오래된 양피지를 복원하듯 천천히, 조심스럽게 카라쇼를 곱 씹었다.
보기 좋게 탄 갈색 피부에 온화 한 검은색 눈. 따뜻한 동쪽에서 왔다는 용병은 마음씨도 따뜻했
다.
나는 카라쇼에게서 많은 것을 배웠다. 지금의 나를 지탱하고 있 는 수많은 기둥들 중 반은 그녀로 인해 형성되었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었다. 그녀는 내게 검을, 인 생을, 신념을 가르쳐 주었다. 망 아지 같던 내가 사람 구실을 할 수 있게 된 건 그녀 덕이라고 해 도 과언이 아니었다.
"저, 당신께서 주신 가르침들 하 나도 잊지 않고 모두 기억하고 있 습니다. 특히 마지막에 주신 가르
침은...... 절대 잊을 수 없겠죠. 스승님 말씀이 맞습니다. 스승님 은 돌아가셨어도 스승님의 가르침 은 남아 있습니다."
머릿속에 새겨진 가르침은 모두 내 인생의 나침반과 지침서가 되 었다. 흐트러짐 없이 곧고 뻣뻣한 내 신념은 그녀에게서 온 것이었 다. 나는 그녀를 동경했고, 닮고 싶어 했다. 천성 또한 없다고는 못 하겠으나 현재 내 많은 부분이 그녀의 가르침에 의해 형성된 것 이었다.
나는 그녀의 옷을 물려받아 입 고 있었다.
"하지만 전 이제 당신의 가르침 을 뛰어넘어 제 신념을 찾고 싶어 요."
나는 비석 위에 쌓인 눈을 조심 스럽게 털어 냈다. 내 손길 아래 쌓인 눈이 사라지듯, 내 마음속 설원도 이렇게 천천히 사라지고 있었다. 이젠 악몽을 잊을 때였
나는, 이제 내 옷이 입고 싶었
다.
"스승님의 신념이 틀렸다는 게 아닙니다. 이제 당신으로부터 졸 업해 제 것을 찾을 때가 됐죠. 이 제 다 컸으니까요."
비석 위에 쌓인 눈을 싹 털어 낸 나는 허리를 펴고 똑바로 섰 다. 여전히 슬펐지만, 이제 카라 쇼는 더 이상 내 악몽이 아니었 다. 추억이었고, 소중히 간직할 보물이었다.
"이번 겨울은 조금 바빠 기일에
제때 찾지 못할까 봐 미리 찾아왔 습니다. 기일에 찾아오지 못한대 도 용서해 주세요. 모든 일이 다 끝난 뒤 찾아뵙겠습니다."
나는 비석 위에 짧게 이마를 맞 대었다. 이마에 닿는 딱딱한 돌은 분명 시리도록 차가웠으나, 내겐 따뜻하게 느껴졌다.
"여전히 존경하고 사랑하고 있 습니다. 그곳에서 편히 쉬세요."
나는 진심을 꾹꾹 눌러 담은 목 소리로 속삭였다.
카라쇼는, 죽었어도 여전히 내 스승이었다.
깊게 숨을 내쉰 나는 머리 위로 내려앉은 눈을 가볍게 털어 냈다. 주머니에 있는 로브를 꺼내 입고 후드를 쓰면 조금 더 편하겠지만, 카라쇼를 보기 위해 검은 제복을 똑바로 차려입고 온 만큼 제복을 가릴 로브를 꺼내 입진 않았다. 나는 그 잠시 서 있는 새에 어깨 에 소복이 쌓인 눈을 털어 내며 여상스럽게 입을 열었다.
"너는 언제까지 거기 서 있을 거냐?"
사박.
내 질책에 등 뒤에서 눈 밟는 소리가 들렸다. 나는 어깨에 쌓인 눈을 싹 털어 내고 고개를 돌렸 다.
"지그문트 하이드."
큰 인영이 나무 뒤에서 나와 내 게로 걸어왔다. 깊게 눌러쓴 후드 가 벗겨지고, 지독하게 아름다운
얼굴이 드러났다.
"그 재수 없는 낯짝은 여전하군 그래."
나는 비소를 흘렸다.
이 하늘 아래 나를 제외하고 유 일한 카라쇼의 제자, 지그문트 하 이드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