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충직한 검이 되려 했는데-170화 (170/254)

170 화

말캉한 촉감이 입술에 퍼졌다. 가장 예민한 피부에 닿는 그의 입 술은 소름 끼치도록 부드러워 저 절로 몸이 파드득 떨렸다.

단단한 팔이 허리를 감싸고, 내 뒷머리를 붙잡은 손이 나를 제 쪽 으로 끌어당기며 몸이 밀착되었

O

모든 사고를 정지한 채 굳어 있 던 나는, 내 아랫입술에 닿는 무 언가에 척추를 곤두세운 채로 반 자동적으로 입을 열었다.

그것을 시작으로 입 안에 온통 백합 단내가 진동했다. 나는 숨을 급하게 들이쉬었다.

'으, 읍.'

목 아래에서 신음이 올라왔으나 뱉지 못하고 안에서 울릴 뿐이었 다. 척추를 타고 오르는 낯선 감

각에 나도 모르게 뒷걸음질 치자 내 뒷머리를 잡은 엘의 손이 나를 제 쪽으로 끌어당겼다.

그는 눈을 감지 않았다. 내 얼굴 근육의 움직임 하나하나 눈에 담 겠다는 듯 번뜩이는 눈으로 나를 담아냈다. 그 강렬한 은빛 눈과 마주하고 있을 때면 더욱 숨을 쉴 수가 없어서, 나는 그의 어깨를 꾹 잡은 채 눈을 감았다.

" 아."

그가 송곳니로 내 아랫입술을

살짝 깨물었다. 이후 달래듯 입술 을 건드리는 것에 그의 어깨를 더 꽉 잡았다.

이상했다. 어쩔 줄 모를 만큼 자 극적 이었다.

"흐

"하, 슈슈."

내 입술을 느리게 놓아준 엘은 나와 이마를 맞댄 채 열기가 들끓 는 목소리로 내 애칭을 속삭였다.

내가 질끈 감았던 눈을 간신히

떴을 때 본 것은 붉게 무른 그의 눈가와 욕망을 억누르는 그의 표 정이었다.

"......우리는 이유가 필요 없는 사이라고 했잖아요. 이건 내가 이 유 없이 하고 싶어서. 그래서 한 거예요. 놀라게 해서 미안해요."

갈라진 목소리로 다정을 흉내 낸 그는 시선을 내리깐 채 웃어 보였다. 여느 때와 같은 미소를 지으려 했던 것 같지만, 내겐 균 열이 보였다.

나는 연인만이 이런 스킨십을 하는 게 아니라는 것을 알고 있었 다. 무엇보다도 처음 살던 곳이 사창가였으니까. 그곳에서 감정은 이유가 되지 않는다. 그저 충동이 면 충분했다.

나는 충동적으로 했다는 엘을 이해했으나, 뇌에 열이 올라 사고 가 잘 되지 않는 것도 컸다. 고장 난 나를 지긋이 내려다보던 엘은 묘한 미소를 지었다.

"......나는 좋았는데. 슈슈는 싫 었어요?"

엘의 물음에 얼굴이 화끈 달아 올랐다. 거울을 보지 않아도 얼굴 이 새빨개졌으리라는 걸 알 수 있 었다. 그의 집요한 눈길 아래 안 절부절못하던 나는, 이내 살짝 고 개를 돌리고 손등으로 얼굴을 가 린 채로 중얼거렸다.

"시, 싫지는 않았습니다."

엘은 내가 친애하는 이였고, 그 는 상냥했으며, 부드러웠다. 온몸 이 달아오르고 참을 수 없이 부끄 러웠지만 싫을 이유는 없었다.

멈칫.

하릴없이 내 머리칼을 쓸어내리 던 큰 손이 멈췄다. 한참 굳어 있 던 그는, 이내 손등으로 입가를 가렸다.

엘의 얼굴은 온통 붉게 달아올 라 있었다.

"나한테 왜 그러는 거죠?"

" 네?"

엘이 황급히 몸을 돌렸다. 성큼

성큼 벽 쪽으로 가더니 미처 말릴 틈도 없이 이마가 부을 정도로 벽 에 박아 댄 엘은 나를 돌아보았 다. 그의 귀와 목덜미까지 새빨갛 게 달아올라 있었고, 나와 눈을 마주치지 못한 채였다.

"미안해요. 나 먼저 가야 할 것 같아요."

"어,어, 네, 자, 잘 가세요."

우리 둘 다 상당히 고장 난 상 태였고, 엘은 왜인지 상당히 다급 해 보였다.

눈을 질끈 감았다 뜨기를 반복 하던 엘은 이내 주머니에서 순간 이동 아티팩트를 꺼냈다. 아티팩 트를 으스러져라 쥐고 발동하기 직전, 엘은 홍조를 진정시키지 못 한 채 나를 똑바로 보고 말했다.

"나는 실수로 한 거 아니에요. 후회 안 해요."

"그러니까 당신도 그래 줬으면 좋겠어요."

엘은 목이 살짝 졸린 사람처럼 메마른 목소리로 말했다.

화악.

그리고 내가 대답하기도 전에 그는 환한 빛과 함께 사라졌다.

털썩.

엘이 사라지고 10초를 센 나는, 그 자리에 힘없이 쪼그려 앉았다. 두 손으로 덮은 얼굴은 무척 뜨거 웠다.

'기분이 너무 이상해.

열기는 쉬이 식지 않을 듯했다.

검술 대회 4차 본선은 시시하게 끝났다. 상대에겐 나와의 경기가 하드 모드를 넘어 헬 모드였겠으 나, 내겐 애들 장난이나 다름없었 다. 쌍검을 꽤 그럴듯하게 사용하 는 상대는 안타깝게도 나로 인해 곤죽이 되어 4차 본선에서 좌절 해야 했다.

"크리시스의 공녀가 정녕 그레 고리를 이겼단 말인가? 대체 어

떻게? 공작가의 수작이 있었던 겐가?"

"그렇다기엔...... 경기에서 그레 고리가 너무 일방적으로 밀렸네. 공녀가 확실히 위였지."

요 근래 길을 걷다가 좀 북적거 린다 싶으면 다 4차 본선의 내 경기 얘기를 하고 있었기에, 나는 내 상대가 유명한 이였음을 알게 되었다. 용병 출신 방랑 기사라는 그레고리는 그를 검술 대회의 승 자로 점치고 돈을 걸었던 이들이 꽤 될 정도로 유망주였다.

상대가 유명한 강자였던 만큼 그를 이긴 내게도 저절로 시선이 쏠렸다. 이제 내게 돈을 거는 이 들까지 생겼다. 아직도 내가 크리 시스의 후광으로 여기까지 올라왔 다고 생각하는 이들이 있긴 했으 나, 이쯤 되니 사람들은 슬슬 내 무력에 관심을 가지기 시작했다.

'하지만 지금 중요한 건 그게 아 니지.'

나는 품 안에 한아름 안은 새하 얀 국화를 느리게 쓸어내렸다. 새 하얀 꽃잎을 보면 저절로 떠오르

는 설원에 가슴이 울렁거렸다.

검은 제복까지 차려입은 나는, 순간이동 아티팩트를 쥔 손에 힘 을 주었다.

'미르'의 정체를 세상으로 드러 내기 전 만나야 하는 사람이 있었 다. 이 이름을 지어 준 사람이었 다. 나는 작게 속삭였다.

" 텔레포트."

시야에 담긴 세상이 단번에 뒤 집혔다.

"으

나는 인상을 구긴 채로 짧게 신 음을 뱉었다.

순간이동 특유의 역겨운 느낌은 익숙해지려야 익숙해질 수가 없었 다.

'용병 시절 말 타고 올 땐 이런 문제는 없었는데.'

딱 2회 사용이 가능한 순간이동 아티팩트를 처음으로 사용한 나

는, 아티팩트를 바지 주머니에 아 무렇게나 넣다 문득 손등에 떨어 진 차가운 액체를 보았다. 그리고 자동적으로 하늘을 올려다보았다.

" 아."

하늘에서는 굵은 눈송이가 떨어 지고 있었다.

초여름을 이제 막 지나는 제국 과 달리, 이곳은 겨울이었다. 만 년설을 자랑하는 북부엔 겨울 말 고 다른 계절이 찾아오지 않았다.

'북부도 오랜만이네.'

용병 일을 할 땐 매일같이 오던 곳이었는데, 크리시스 가문에 들 어간 뒤로는 올 일이 아예 없었 다. 나는 벌써부터 머리에 쌓이기 시작한 눈을 털어 내곤 주위를 짧 게 두리번거렸다.

익숙한 'S' 모양의 나무가 시야 에 들어왔다. 이곳이 어딘지 단번 에 파악한 나는, 능숙하게 오른쪽 으로 발걸음을 옮겼다.

IX 표 =『, =〒•

눈이 발목까지 쌓여 있어 발걸 음을 옮길 때마다 푹푹 눌렸다. 긴 부츠를 신고 와서 다행이었다. 눈에 대한 껄끄러움을 꾹 참고 꾸 준히 발걸음을 옮기던 나는, 목적 지에 가까워질수록 점점 속도를 줄였다.

발걸음이 무거워지는 것은 불가 항력이 었다.

끝엔 느리다 못해 거북이 기는

속도로 걷던 나는, 새하얀 설원 한복판에서 유일하게 새까만 바위 앞에서 멈춰 섰다. 미간이 슬픔을 담아 저절로 찌푸려졌다.

이 투박하고 볼품없는 돌이 바 로 내 스승, 카라쇼의 죽음을 기 리는 유일한 비석이었다.

"......스승님. 많이 늦었죠."

나는 작게 속삭이며 바위 앞에 들고 온 국화 꽃다발을 내려놓았 다. 하얀 꽃잎은 얼마 지나지 않 아서 눈꽃과 섞여 날리고 사라지

리라는 걸 알면서도, 나는 늘 꽃 을 가져왔다. 덧없고 약하기에 아 름다운 것이 있는 법이니까.

나는 카라쇼의 기일마다 이곳을 찾았다. 꽃다발을 내려놓고, 그동 안의 일상을 한탄하듯 털어놓은 뒤 돌아가는 것이 연례행사에 가 가웠다. 원래는 술도 가져오곤 했 지만, 오늘은 그녀의 기일도 아니 니 꽃다발만 가져온 참이었다.

"그동안은 말씀드릴 수 있는 제 일상이 한정적이었죠. 어제도, 그 제도, 죽도록 마수 토벌해서 돈

벌었다는 이야기밖에 해 드릴 게 없었잖습니까. 하지만 이젠 다릅 니다. 저, 아리아 말고 다른 소중 한 것과 돌아갈 곳이 생겼거든 요."

이젠 카라쇼에게 생사의 기로에 서 겨우 살아남아 하루를 간신히 살아내고 있다는 말 외에 다른 말 도 할 수 있었다. 나는 잠시 카라 쇼가 살아 있었다면 어땠을까, 생 각했다.

'네 아버지를 찾았다고! 아니, 공작이든 말든! 어때, 좋은 사람

이더냐? 네게 잘 대해 주든? 하 하, 그러면 되었다!'

그녀라면 내가 새로운 가족과 돌아갈 곳을 찾게 된 것에 대해 진심으로 축하해 주었으리라. 자 기 일처럼 기뻐해 주고, 더는 함 께 용병 일을 못 한다는 것을 조 금 아쉬워하면서도 내 앞길을 응 원해 줬을 거다. 그녀는 상냥했으 니까.

나는 입술을 꾹 깨물었다. 물 밀 듯 밀려오는 그리움과 슬픔이 나 를 잠식했다.

소중한 사람들이 많아졌다고 하 여 카라쇼의 상실이 없던 것이 되 는 건 아니었다. 사람의 빈자리는 다른 사람으로 채워질 수 없었다. 빈자리는 영원히 빈자리고, 채워 지는 것은 다른 자리였다.

나는 오래된 양피지를 복원하듯 천천히, 조심스럽게 카라쇼를 곱 씹었다.

보기 좋게 탄 갈색 피부에 온화 한 검은색 눈. 따뜻한 동쪽에서 왔다는 용병은 마음씨도 따뜻했

다.

나는 카라쇼에게서 많은 것을 배웠다. 지금의 나를 지탱하고 있 는 수많은 기둥들 중 반은 그녀로 인해 형성되었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었다. 그녀는 내게 검을, 인 생을, 신념을 가르쳐 주었다. 망 아지 같던 내가 사람 구실을 할 수 있게 된 건 그녀 덕이라고 해 도 과언이 아니었다.

"저, 당신께서 주신 가르침들 하 나도 잊지 않고 모두 기억하고 있 습니다. 특히 마지막에 주신 가르

침은...... 절대 잊을 수 없겠죠. 스승님 말씀이 맞습니다. 스승님 은 돌아가셨어도 스승님의 가르침 은 남아 있습니다."

머릿속에 새겨진 가르침은 모두 내 인생의 나침반과 지침서가 되 었다. 흐트러짐 없이 곧고 뻣뻣한 내 신념은 그녀에게서 온 것이었 다. 나는 그녀를 동경했고, 닮고 싶어 했다. 천성 또한 없다고는 못 하겠으나 현재 내 많은 부분이 그녀의 가르침에 의해 형성된 것 이었다.

나는 그녀의 옷을 물려받아 입 고 있었다.

"하지만 전 이제 당신의 가르침 을 뛰어넘어 제 신념을 찾고 싶어 요."

나는 비석 위에 쌓인 눈을 조심 스럽게 털어 냈다. 내 손길 아래 쌓인 눈이 사라지듯, 내 마음속 설원도 이렇게 천천히 사라지고 있었다. 이젠 악몽을 잊을 때였

나는, 이제 내 옷이 입고 싶었

다.

"스승님의 신념이 틀렸다는 게 아닙니다. 이제 당신으로부터 졸 업해 제 것을 찾을 때가 됐죠. 이 제 다 컸으니까요."

비석 위에 쌓인 눈을 싹 털어 낸 나는 허리를 펴고 똑바로 섰 다. 여전히 슬펐지만, 이제 카라 쇼는 더 이상 내 악몽이 아니었 다. 추억이었고, 소중히 간직할 보물이었다.

"이번 겨울은 조금 바빠 기일에

제때 찾지 못할까 봐 미리 찾아왔 습니다. 기일에 찾아오지 못한대 도 용서해 주세요. 모든 일이 다 끝난 뒤 찾아뵙겠습니다."

나는 비석 위에 짧게 이마를 맞 대었다. 이마에 닿는 딱딱한 돌은 분명 시리도록 차가웠으나, 내겐 따뜻하게 느껴졌다.

"여전히 존경하고 사랑하고 있 습니다. 그곳에서 편히 쉬세요."

나는 진심을 꾹꾹 눌러 담은 목 소리로 속삭였다.

카라쇼는, 죽었어도 여전히 내 스승이었다.

깊게 숨을 내쉰 나는 머리 위로 내려앉은 눈을 가볍게 털어 냈다. 주머니에 있는 로브를 꺼내 입고 후드를 쓰면 조금 더 편하겠지만, 카라쇼를 보기 위해 검은 제복을 똑바로 차려입고 온 만큼 제복을 가릴 로브를 꺼내 입진 않았다. 나는 그 잠시 서 있는 새에 어깨 에 소복이 쌓인 눈을 털어 내며 여상스럽게 입을 열었다.

"너는 언제까지 거기 서 있을 거냐?"

사박.

내 질책에 등 뒤에서 눈 밟는 소리가 들렸다. 나는 어깨에 쌓인 눈을 싹 털어 내고 고개를 돌렸 다.

"지그문트 하이드."

큰 인영이 나무 뒤에서 나와 내 게로 걸어왔다. 깊게 눌러쓴 후드 가 벗겨지고, 지독하게 아름다운

얼굴이 드러났다.

"그 재수 없는 낯짝은 여전하군 그래."

나는 비소를 흘렸다.

이 하늘 아래 나를 제외하고 유 일한 카라쇼의 제자, 지그문트 하 이드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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