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71화
거친 눈발을 사이에 둔 채 미묘 한 대치가 계속되었다.
나는 그를 아니꼬운
눈으로 바
라보면서도 검에 손을
대진
않았
다. 스승의 묘 앞에서
다른
제자
와 싸우는 불효막심한
짓을
저지
르고 싶지 않았으니까.
지그문트도 나와 같은 마음인지 검 손잡이에 손을 얹진 않았다.
싸우고 싶지 않았던 나는 조용히 안도의 숨을 내쉬었다.
"여긴 왜 기어왔지? 너 나 따라 다니냐?"
나는 짜증스럽게 얼굴을 구긴 채로 물었다.
내가 홀로 세운 이 비석의 위치 를 지그문트가 알고 있는 건 이상 한 일이 아니었다. 예전에 위치를 알려 주었으니까. 다만 조금 놀란 것은, 그가 아직도 이 위치를 기 억하고 있다는 것이었다.
'잊어버렸을 거라 생각했는데.'
스승님 기일에 하루 종일 이곳 에 죽치고 있어도 코빼기도 보이 지 않던 놈이었으니 이곳에 대해 선 까맣게 잊고 사는 줄 알았다. 싫은 것도, 좋은 것도 아닌 싱숭 생숭한 기분에 그를 흘겨보고 있 자니, 눈송이가 내려앉은 검은 앞 머리를 쓸어 넘긴 지그문트가 한 쪽 입꼬리를 비죽 올렸다.
"유감스럽지만 먼저 온 건 나였 다. 날 따라다니는 건 너 아닌
가?"
"애초에 넌 이곳에 왔던 적도 없으면서 무슨 헛소리냐. 진짜 날 따라온 게 아니라고?"
"우연이다. 그리고......
너무 공교로운 타이밍에 내가 의심을 지우지 못하자, 지그문트 가 우연이라고 딱 잘라 단언했다. 눈밭을 가로질러 성큼성큼 내 쪽 으로 다가온 지그문트는 나를 지 나쳐 비석 앞에 섰다. 이제 보니 그의 손엔 꽃 한 송이가 들려 있 었다.
"이곳에 온 거, 처음 아니다."
툭.
꽃이 비석 앞에 떨어졌다.
새하얀 바탕에 샛노란 꽃술, 꽃 술 테두리를 두르고 있는 다섯 개 의 핏빛 점.
지그문트가 가져온 꽃은 시스투 스였다.
나는 한숨을 쉬었다.
새하얗게 피어오른 입김은 순식 간에 사라져 버려서, 나는 숨결을 타고 퍼진 것이 분노인지, 슬픔인 지, 원망인지, 안도인지 알 수 없 었다.
"......기일에 코빼기도 안 보이 던 새끼가......
"꼭 기일에 찾아야 한다는 법은 없지 않나."
"꼭 기일이 아닌 날에 찾아야 한다는 법도 없지. 지금 네가 얼 마나 뻔뻔하게 굴고 있는지 자각 은 있나?"
나는 차갑게 말했다. 그의 짙은 보랏빛 두 눈은 여느 때와 같이 새까맣게 죽어 아무 감정도 내비 치지 않는다는 사실이 나를 더욱 짜증나게 했다.
나는 분명 그에게 카라쇼의 기 일에 찾아오라고 말했고, 매년 기 일마다 그가 오기를 기다렸다. 물 론 저놈이 내 기다림에 부응한 적 은 단 한 번도 없었다.
"......모든 이들이 너처럼 당당 하게 살 순 없는 법이다. 누군가 는 악역을 맡아야지."
비석에 손을 올려놓고 눈을 감 았던 지그문트는 얼마 지나지 않 아 눈을 떴다. 그는 내가 이해할 수 없는 말을 중얼거렸다.
'저 반반한 얼굴을 쳐, 말아
나는 주먹을 꽉 쥔 채 심각하게 고민했다. 지그문트의 태도를 걸 고 넘어지려면 한도 끝도 없었다. 내가 세운 비석에 멋대로 찾아오 지 말라며 유치한 심술을 부릴 수 도 있었다. 분명 이전이라면 그렇
게 굴었을지도 모르겠다. 나는 지 그문트에 한해 유치해지곤 했으 니.
"......야. 밥은 먹고 다니냐?"
카라쇼의 묘 앞에서였기 때문일 까? 아니면 내가 야샤를 만난 뒤 새로운 결심을 했기 때문일지도 몰랐다.
이유가 무엇이든, 나는 어쩐지 지그문트에게 날을 세우고 싶지 않아져서 힘을 풀고 한숨을 쉬듯 나직하게 물어보았다.
내 유한 반응에 지그문트가 놀 란 듯 눈을 크게 떴다. 첫 재회 땐 죽일 듯 싸우고, 두 번째엔 레 이샤의 유품을 두고 죽음의 술래 잡기를 했으며, 그 이후 만남엔 싸우진 않았으나 살벌한 분위기를 이어 갔다. 내가 그에게 유하게 나온 것이 처음이니 그럴 법도 했 다.
"......화 안 내나?"
"그러니까 내가 너한테 성질만 내는 나쁜 자식 같잖아. 이제 그 쪽으로 정신력 소모하는 것도 지
쳐서. 스승님을 욕한 건 나중에 저승 가서 스승님이랑 대화로 원 만하게 해결해라."
아직도 지그문트가 카라쇼를 '뭣 도 없는 용병'이라고 칭한 걸 생 각하면 카라쇼 비석에 지그문트 대가리를 처박아 버리고 싶긴 했 다. 하지만 침착하게 생각해 보 면, 분명 카라쇼는 자신 때문에 지그문트와 내가 싸우는 것을 바 라지 않을 터였다.
"이리 와 봐."
나는 카라쇼의 비석 앞에 살짝 굳은 채로 서 있는 지그문트에게 손가락을 까닥였다. 그는 미간을 확 좁혔다.
"무슨 생각인 거지?"
"쫄았냐? 안 칠 테니까 이리 와 봐."
나는 피식 웃었다. 지그문트는 내 행동을 이해하지 못한 듯 얼굴 을 일그러트리면서도 순순히 내게 로 다가왔다. 그와 나 사이 거리 가 딱 한 걸음 정도 남았을 때, 나는 그에게 따라오라는 뜻으로
손짓하곤 설원을 천천히 가로지르 기 시작했다.
나와 지그문트는 정원을 산책하 듯 눈밭을 걸었다. 이렇게나 평화 로운 분위기는 정말 오랜만이었 다.
"너. 예전에 용병 일을 할 때, 번 돈을 다 고향으로 보냈었지."
멈칫.
지그문트의 발걸음이 잠시 멈췄 다. 아무 일도 없었다는 듯 금방
다시 움직이긴 했지만, 내가 그 움직임을 포착하지 못할 리가 없 었다. 나는 설원으로 시선을 돌리 며 과거를 떠올렸다.
'야, 너는 특산품 안 사냐?'
마수 토벌을 위해 대륙 각지를 돌아다니다 보면 각 지역의 특산 물을 살 일이 많았다. 비싼 건 아 니더라도 아리아가 좋아할 만한 물건을 발견하면 틈틈이 구매하던 나와는 달리, 지그문트는 뭔가를 사는 일이 없었다.
'그런 곳에 쓸 돈은 없다.'
'돈도 잘 버는 놈이 무슨......
지그문트는 구두쇠 같다 싶을 정도로 지출이 적었다. 나는 아리 아의 약을 사느라 많이 벌어도 늘 빈털터리였다지만 지그문트는 돈 쓸 일도 없는 주제에 빈곤하게 살 았기에, 나는 한때 그가 도박에 돈을 탕진하는 줄 알았다.
'지그문트는 늘 돈을 보내는 곳 이 있다.'
그런 내 오해를 깨트려 준 건
카라쇼였다. 지그문트는 늘 내게 설명 한번 제대로 해 주지 않고 불친절했으나 카라쇼와는 많은 것 을 나누었기 때문에, 나는 카라쇼 에게서 지그문트의 속사정을 전해 듣곤 했다.
'무슨...... 설마 그 자식 부모가 그 자식한테 돈 벌어오라고 용병 일을 시킨 겁니까?'
'그건 아니다. 지그문트의 부모 님은 둘 다 돌아가셨으니까. 맨 처음엔 그러지 않았는데, 나와 함 께 다니기 시작한 지 조금 되었을 때쯤 어딘가로 서신을 주고받기
시작하더니 언제부턴가 번 돈을 모두 그곳으로 보내더군. 그 아이 말로는 고향과 연락이 되었다더구
나는 지그문트가 그 고향이라는 곳에 착취당하고 있는 게 아닌가 염려했다. 아주 고약한 놈이긴 했 지만, 미운 정이 들었기에 그 자 식이 다른 사람한테 당한다고 하 면 좀 짜증이 날 것 같았다.
'걱정하지 마라. 강제로 돈을 보 내는 건 아니니까". 자기가 보내고 싶어서 보낸다더구나. 고향이 많
이 어려워서 도와줘야 한다고. 다 만...... 애 얼굴이 의무감으로 찌 들어 있어서 조금 염려스럽기도 해.'
내 걱정을 알아본 건지 카라쇼 가 말을 덧붙였으나, 끝엔 카라쇼 도 지그문트를 걱정하고 있었다. 나는 그 말을 들은 뒤 지그문트를 소년 가장으로 인식해 버렸다.
'야, 너 오늘도 아무것도 안 샀 지?'
'그래. 나는 됐• ... 이게 뭐지?'
'너무 많이 사서. 너랑 닮은 말
라 비틀어진 과일이다. 네가 좀 처리해라.'
'......지금 시비 거는 건가?'
'이 자식이 줘도 지랄이야.'
이후 왠지 안쓰러운 마음에 내 것을 살 때 지그문트의 것도 같이 사곤 했다. 지그문트는 처음엔 미 심쩍어 하더니 이후엔 곧잘 받았 다. 그 자존심 굳건한 성정에 내 게 고맙다는 말은 절대 하지 않았 지만, 가끔 마수 토벌 때 내 일을 도와주는 걸로 고마움을 표했다.
"그 고향엔 가 봤냐?"
나는 지그문트를 슬쩍 돌아보며 물었다. 서로 연락하지 않았던 공 백 사이에서 그가 자신의 헌신에 보답을 받았을지 궁금했다.
"......그래. 가 봤다."
무거운 표정으로 입술을 꾹 물 던 지그문트는 느리게 대답했다. 그의 짧은 머리칼이 시린 바람에 휘날리고, 새까만 암흑 새로 하얀 눈송이가 스며들었다. 지그문트의 얼굴은 세상 모든 비극을 깎아 조 각으로 만든 듯 애달파 보였다.
"네가 보내 준 돈으로 잘 살고 있든?"
"아니. 그 정도로는 근본적인 문 제를 해결할 수 없더군."
지그문트의 짙은 보랏빛 눈동자 에 섬광이 스쳐 지나갔다.
저벅저벅.
그와 나의 발걸음은 계속 설원 을 가로질렀다.
"근본을 뒤바꾸려 한다. 문제가
된 땅부터 갈아엎어야 비로소 제 대로 자랄 수 있겠지. 나는 그걸 위해서 일하는 증이다."
"......지금 하고 있는 길드장 일 도 고향을 위한 거냐?"
"그래."
나는 지그문트를 지그시 바라보 았다. 그는 정면에서 시선을 떼지 않은 채 묵묵히 걸었다. 나는 헛 웃음을 뱉었다.
"예전에 나보고 이타주의에 찌 든 멍청이라고 한 주제에 알고 보 니 네가 더하군."
"네 이타는 무분별하다. 너는 모 두를 살려야 한다는 강박에 빠져 있잖나. 다만 내 기준은 명확하 지. 고향을 지키는 게 내 의무고, 나는 내 고향을 살리는 것만을 목 표로 한다."
지그문트가 단호하게 잘라 냈다. 그는 국가 이기주의와 비슷한 관 념을 가지고 있는 모양이었다. 나 는 반박할 수 없어 그저 눈송이가 묻은 머리를 긁적거리다 입을 열 었다.
"그런데 그렇게 살면 넌 언제
네 삶을 살아?"
지그문트가 나를 돌아보았다. 그 의 보랏빛 눈동자엔 옅은 파동이 일었다. 나는 그와 똑바로 눈을 맞추었다.
너무 오랫동안 자신이 아닌 다 른 것을 위해 살다 보면 자신의 이름을 잊어버린다. 나라는 존재 는 사라지고 직책과 위치만 남는 것이다. 평생을 아리아를 위해 살 아온 나였기에 그것을 잘 알았다.
'이제 언니의 삶을 살아. '카슈
미르 크리시스'의 삶을.'
그랬기에 언젠가 아리아가 했던 그 말이 그렇게나 어색하게 느껴 졌던 것이리라. 그렇게 사는 것에 익숙해져서 종종 내 이름을 잊어 버리곤 했으니까.
아리아의 언니로 사는 삶이 괴 롭고 후회되는 것은 아니었지만, 온전히 행복할 수도 없었다.
"너는 지금 행복해?"
나는 지그문트에게 물었다.
그는 조금도 행복해 보이지 않 았으니까.
" 나는••••••
지그문트가 말끝을 길게 끌었다. 그는 할 말을 잃은 듯한 표정이었 다• 입술을 몇 번 달싹이던 그는, 내 눈을 피했다.
"내겐 이루어야 할 사명과 끝마 쳐야 할 의무가 있다. 그런 걸 생 각할 여유는 없어."
그러고 보면 지그문트는 늘 어 깨에 짐을 지고 있는 사람 같았 다. 지나치게 정적이었고, 무거웠 다. 나는 그가 내 눈을 피하는 찰 나, 보랏빛 눈동자에 스며든 찌든 때 같은 사명감을 발견할 수 있었 다.
지그문트는 거대한 무게에 눌려 있었다.
"그래서 여태껏 널 찾지 않았던 거다. 넌 내가 사명을 이루는 데 방해가 되는 존재니까."
지그문트가 낮게 뇌까렸다.
상처가 될 법한 말이었으나 그 의 목소리는 무딘 칼날처럼 매섭 지 못하고 누그러져 있었기에 아 프지 않았다. 그저 그 무딘 칼날 을 내찌를 수밖에 없게 만드는 그 의 사명이라는 것이 궁금해질 뿐 이었다.
"너는 내 사명이 무엇인지 모르 니 나를 네 곁에 두고 있는 거겠 지."
탁
검은 구두가 설원 한복판에서 멈춰 섰다. 나도 그를 따라 멈추 었다. 아예 내게로 몸을 돌린 지 그문트가 가라앉은 눈으로 날 바 라보았다.
"나는 말이다, 이곳의......
순간 허공을 찢고 다가오는 존 재감.
나와 지그문트가 동시에 숨을 멈추었다. 우리는 시선을 빠르게 교환했다. 아주 희미하디 희미하
지만, 그와 나는 마나에 아주 예 민한 존재였기에 느낄 수 있었다.
강대하고 흉포한 존재감이 우리 를 향해 빠르게 다가오고 있었다.
'운도 더럽게 없군.'
정말 길 가다 돌부리에 걸리는 것도 모자라 넘어지는 곳에 철천 지 원수가 있어서 우연찮게 입술 박치기를 해 버릴 만한 운수였다. 나는 실소를 터트리며 검 손잡이 에 손을 올렸다.
"대화는 나중에. 우선 이것부터 처리하자고."
지그문트가 짧게 고개를 끄덕이 며 마찬가지로 검 손잡이를 쥐었 다. 이제 보니 카라쇼가 그의 생 일날 선물로 준 그 검이었다. 나 는 그 검이 더러워질 거라는 사실 에 조금 탄식하며, 문제의 그 존 재감이 바로 앞까지 다가왔을 때 거칠게 발도했다.
촤악
크아아아악!
아무것도 없던 곳에 거대한 괴 물의 아가리가 나타났다. 나는 형 태가 드러난 찰나, 그 아가리를 향해 검은 오러를 날렸다. 괴물이 빠르게 입을 닫은 탓에 안타깝게 도 입천장을 공격하진 못했지만 입가에 큰 상처를 입힐 수 있었 다. 검은 피가 터져 나오고 괴물 이 비명을 질렀다.
내가 빠른 발걸음으로 하라바나 에게서 거리를 벌리자 따라붙은 지그문트가 제자리인 것처럼 익숙 하게 내 오른쪽에 섰다. 검을 세
운 그의 모습은 오랫동안 봐 왔던 그 자세와 습관을 유지하고 있었 다. 나는 피식 웃으며 검날 위로 오러를 덧씨웠다.
"오랜만에 너랑 협공하는군."
그 己 ■르
-_ 1 o •
6년 만에 그와 협공하는 상대는 깊은 숲속의 폭군, 하라바나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