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충직한 검이 되려 했는데-172화 (172/254)

172 화

크아아아앙!

하라바나가 크게 울부짖었다. 거 대한 몸집에 두꺼운 가죽, 흉측한 송곳니는 객관적으로 보았을 때 상당히 위협적이었으나 나는 두렵 지 않았다.

"하라바나의 입천장을 공격하는 건 나다. 엄호해라."

지그문트가 태연하게 검을 세웠 다. 나는 헛웃음을 뱉으며 그를 앞질러 섰다.

"웃기지 마. 엄호는 네가 해."

오래전부터 그와 협공을 할 때 면 늘 부상하는 문제. 누가 공격 수를 하고 누가 보조를 하느냐였 다. 지그문트나 나나 각자의 무력 에 자존심이 대단했던 만큼, 서로 보조가 아닌 공격수를 하려 했다.

"나는 마법을 쓸 수 있기 때문 에 비상 상황에 빠져나오기 용이

하다. 내가 들어가는 편이 나아."

"쓸데없는 소리. 내가 더 강하니 내가 간다."

"하?"

내 자신만만한 단언에 지그문트 가 어이없다는 표정으로 날 돌아 보았다. 하라바나가 코앞에서 으 르렁거리든 말든, 그와 나는 서로 를 물어뜯으며 티격태격했다.

"헛소리를 하는 걸 보아 제정신 이 아니군. 제정신이 아닌 놈을 하라바나 입에 보내 봐야 결과는 뻔하니 내가 간다."

"내가 너보다 강하다는 건 자연 의 섭리고 우주의 이치다. 너는 내 들러리나 해."

지그문트의 보랏빛 눈동자가 짜 게 식었다. 그의 두 눈에서 인간 적인 기색을 보는 것이 무척 오랜 만이라, 나는 유쾌한 상황이 아닌 데도 어쩐지 조금 즐거워졌다.

캬아아악!

자기를 앞에 두고 우리 둘이 싸 우고 있으니 짜증이 난 걸까, 하 라바나가 크게 울부짖었다. 나와

지그문트는 그제야 하라바나에게 시선을 돌렸다.

파앗.

하라바나는 깊은 숲속의 '고요 한' 폭군답게 자신의 존재를 일정 시간 동안 아예 사라지게 할 수 있었다. 거대한 몸집의 괴수가 단 번에 투명해지며, 기척조차 완전 히 없어졌다. 나는 혀를 쯧 찼다.

"네가 꾸물거리니까 사라져 버 렸잖아."

"같이 한 주제에 무슨......

"조용히 하고, 우리 공평하게 승 부를 보자."

나는 주머니에서 주섬주섬 동전 을 꺼내어 씨익 웃었다.

"동전 던지기로 공격수를 정하 자고."

흉포한 하라바나를 앞에 두고 동전 던지기를 한다니. 누군가 본 다면 미쳤다고 하겠으나, 나는 진 지했다. 이건 무력의 문제가 아니 라 자존심 문제였다.

깊은 보랏빛 눈동자로 동전을 지그시 응시하던 지그문트는 한숨 을 쉬었다.

"......내가 뒷면이다."

"좋아. 그럼 내가 앞면."

챙.

나는 하늘로 동전을 튕겨 올렸 다.

빙글빙글 구르며 낙하하는 동전

을 두 손으로 잡았다. 위를 덮은 손바닥을 떼어 냈다.

그리고 드러난 것은 동전의 뒷 면이었다.

" 아악!"

"운명이군."

내가 짜증을 내며 두 손으로 머 리를 부여잡으니, 지그문트가 비 웃음을 흘리며 전투태세를 갖추었

지그문트는 이런 사소한 일에서

제 운을 보여주곤 했다. 어쩐지 자존심이 상해 삼판 이선승으로 하자고 구질구질하게 굴고 싶기도 했으나, 다시 생각해 보면 그쪽이 더 자존심 상했기에 속으로 구시 렁거리면서도 검을 꽉 잡았다.

"빨리 끝내고 나와라."

"너보단 훨씬 빠를 거다."

'이 자식, 하라바나 저녁밥이 장 래희망인가.'

나는 지그문트의 얼굴을 검 손 잡이로 쳐 찌그러트리고 그를 곱

게 접어 하라바나 목구멍에 넣고 싶은 욕망을 가까스로 눌렀다. 불 길한 감각이 경종을 울렸기 때문 이었다. 놈의 존재감이 느껴지지 않을 때에도 예민한 소드 마스터 의 직감은 위험을 감지했다.

지그문트와 나, 둘 다 숨을 죽인 순간. 새하얀 설원은 폭풍전야처 럼 고요했다.

신경을 날카롭게 세운 채 다가 올 공격을 대비하고 있을 때.

내 머리 위에서 거대한 입이 쩌

억, 하고 벌어졌다.

입이 닫히는 찰나에 빠르게 몸 을 굴려 한 입에 먹히는 것을 피 한 나는, 검날에 씨운 검은 오러 를 하라바나의 몸통으로 날려 보 냈다. 초승달 모양 오러가 난폭한 기세로 날아갔다.

촤악!

하라바나의 몸에서 터져 나오는 검은 피는 무척이나 익숙한 것이 었고, 내게 어떤 감흥도 주지 못 했다. 나는 코끝을 훅 찌르는 역

겨운 냄새에 곧바로 숨을 참았다.

'마지막으로 하라바나를 상대했 을 때보다 실력이 늘었어.'

나는 내가 남긴 큰 상처를 보며 뿌듯하게 웃었다. 하라바나의 가 죽은 아주 두꺼워 단번에 뚫는 것 은 불가능에 가깝건만, 내 오러는 그런 가죽을 단번에 뚫을 정도의 위력을 자랑했다.

"하라바나가 두 번째 투명화를 하기 전에 끝낸다! 들어갈 준비 해!"

" 알았다."

푹!

캬아아아악!

하라바나의 발등 위에 오러로 강화시킨 검을 처박자 검은 피가 분수처럼 솟구쳤다. 설원의 새하 얀 눈이 뜨거운 검은 피로 인해 빠르게 녹아내렸다. 귀청을 찢을 듯 큰 하라바나의 울부짖음에 귀 가 먹먹해지는 것을 무시하며 이 마에 묻은 검은 피를 거칠게 닦아 냈다.

고통으로 몸부림치던 하라바나 가 나와 지그문트를 향해 앞발을 휘둘렀다. 소름 끼치는 속도였다. 덩치도 크고 힘도 강하고 속도까 지 빠른 하르바나는 먹이사슬 자 체를 파괴하는 무자비한 포식자였 다.

'이런 걸 마음대로 조종할 수 있 단 말이지.'

북부가 마수 테이밍을 통해 이

런 하라바나를 조종할 수 있다고 생각하면 저절로 착잡해졌다.

"점화."

나와 다른 방향으로 하라바나의 앞발을 피한 지그문트가 조금 떨 어진 곳에서 새하얀 손을 빠르게 움직이며 작게 속삭였다. 그의 손 과 내가 상처 입힌 하라바나의 발 등 위에 붉은색 마법진이 나타났 다.

그의 짙은 보랏빛 눈동자가 번 뜩였다.

콰앙!

반 박자 뒤, 하라바나의 발등 위 에 거대한 불기둥이 치솟았다.

캬아아아아악!

살이 지져지는 냄새가 후각을 지배하고, 하라바나의 비명 소리 가 고막을 때렸다. 나는 잠시 동 안 경이롭다고 표현할 만한 지그 문트의 마법 실력을 멍하니 바라 보았다.

아무리 칼과 아리아가 마법에 천재적이라고 해도 지그문트는 독 보적이었다. 그는 어려서부터 실 전에서 실력을 쌓은 이였으니까. 마법진을 만드는 속도도, 마법진 의 강도도 여태껏 내가 봐 온 수 많은 마법사들 중 독보적이었다. 마법을 저 정도 실력으로 구사하 며 검의 경지도 소드 익스퍼트까 지 다다랐다는 건 징그럽다고 할 만했다.

'내 유일한 라이벌.'

내 동시대 사람 중 나와 무력으

로 맞먹을 수 있는 유일한 인물. 평소 무시하긴 해도, 내가 라이벌 로 인정하는 사람은 지그문트뿐이 었다.

하라바나가 고통에 눈이 먼 틈 을 타, 나와 지그문트는 빠르게 움직이며 하라바나의 몸 이곳저곳 에 상처를 냈다. 말하지 않고 눈 만 마주쳐도 서로의 의도를, 방향 을 파악할 수 있었기에 그와 나는 환상의 팀워크를 보이며 하라바나 의 움직임을 무디게 만들었다.

크아아아앙!

지그문트의 검에 뺨이 베인 하 라바나가 입을 크게 벌리며 비명 을 질렀다. 빈틈이었다. 지그문트 와 나는 빠르게 시선을 교환했다.

쉬이이익!

내 난폭한 검은 오러가 하라바 나의 입을 향해 날아간 것과 지그 문트가 자리를 박찬 것은 거의 동 시였다. 지그문트는 번개를 뒤따 르는 천둥처럼 날뛰는 내 오러를 쫓아갔다. 나는 그 광경을 바라보 다 잠시 헛웃음을 뱉었다.

눈빛만 봐도 심중을 읽을 수 있 는 데다, 오랜 시간 상대방과 겨 루며 전투 스타일이 비슷해졌다. 그는 나를, 나는 그를 잘 알았다.

아무리 지그문트가 싫어도 인정 할 수밖에 없었다. 그와 나는 최 고의 조합이라는 걸.

촤아악!

검은 오러가 하라바나의 입을 찢었다. 광대처럼 입꼬리가 찢어 진 하라바나가 더욱더 입을 벌릴

때, 지그문트는 거침없이 하라바 나의 입속으로 뛰어 들어갔다.

'내가 하라바나의 입에 뛰어드는 걸 본 라이너가 이런 마음이었을 까.'

나는 새삼 내 과거의 업보를 회 개했다.

분명 지그문트가 먹힐 리 없다 는 걸 알면서도 작은 인영이 거대 한 입 안으로 뛰어드는 걸 보고 있자니 심장이 뚝 떨어지는 느낌 이었다. 대재앙을 앞에 둔 인간은

너무도 작아 보였다.

서걱!

하지만 인간은 작을지언정 나약 하진 않았다.

하라바나의 이빨 새로 오러의 빛이 터져 나왔다. 지그문트가 입 천장을 향해 오러를 날린 모양이 었다. 흉측한 송곳니 새로 검은 피가 흘러넘쳤다.

가'으M

하라바나가 마지막 발악처럼 새 된 소리를 질렀다. 그 장면을 모 두 묵묵히 지켜보며, 나는 확신했

역시 내가 이전에 잘못 본 것이 아니었다.

지그문트의 오러는, 분명 색깔이 두 개였다.

쿵!

하라바나가 설원을 뒤흔들며 쓰 러졌다. 순간 대지가 들썩인 게

아닌가 싶을 정도였다. 하라바나 의 검은 피가 흰 설원을 흠뻑 적 셨다.

하라바나를 상대한 게 스승님 비석에서 조금 떨어진 곳이라 다 행이었다. 스승님 비석에 검은 피 가 묻으면 안 되니까.

'만약 내가 지금처럼 강했다면, 당신은 그때 이 설원에서 그리 허 무하게 죽진 않았겠지.'

잠시 상념이 일었다. 이젠 하라 바나쯤은 그와 나, 단둘이서 가볍

게 처리할 수 있었다. 마음이 미 세하게 아려왔으나 그래도 전처럼 고통스럽진 않았다. 이젠 악몽이 아니니까.

나는 쓰러진 하라바나를 향해 성큼성큼 다가가 놈의 주둥이를 발로 툭툭 찼다.

"야. 죽었냐?"

하라바나의 입이 들썩였다.

"죽었길 바라는 투군."

"티 났나."

내 무심한 대답에 헛웃음 소리 가 들려왔다. 철벅, 하는 물 튀는 소리도 얼핏 들린 것 같았다.

이윽고 하라바나의 입이 열리고, 검은 피를 뒤집어쓴 지그문트가 그 안에서 나왔다.

"몰골이 말이 아니군. 마수 피에 서 끝내주는 수영을 했나 본데."

나는 지그문트를 보며 웃음을 참지 못했다.

새까만 마수 피를 뒤집어쓴 그 는 얼굴을 일그러뜨린 채로 제 머 리를 쓸어 넘겼다. 검은 머리카락 에 뒤엉켜 뚝뚝 떨어지는 검은 피 는 아예 그의 머리카락이 녹아내 리는 것 같단 착각이 들 지경이었 다.

점액질에 젖은 모습까지도 묘하 게 야살스럽고 치명적이라는 점이 재수 없긴 했지만, 그래도 객관적 으로 보았을 때 꽤 망가진 모습이 라 나는 조금 즐거워졌다.

늘 고고한 조각처럼 구는 지그

문트가 망가지는 모습을 보기란 쉽지 않았다. 비죽 입꼬리를 올린 내 표정을 보고 짜증스럽게 얼굴 을 구긴 지그문트는 허공에서 손 을 빠르게 움직였다.

" 점화."

화아악!

거대한 불꽃이 일더니 하라바나 의 몸을 살라 먹기 시작했다. 시 린 눈밭 위에서도 활활 타오르는 불길이 지그문트의 마법 실력을 가늠하게 했다. 내 비웃음에 꽤나

빡친 모양인지 하라바나를 더욱 거칠게 불태우는 지그문트를 보며 다시 놀릴 시동을 걸던 나는, 그 의 몸 상태를 확인하고 미간을 좁 혔다.

"너...... 독에 뒤덮인 거군."

입천장을 꿰뚫으며 재수 없게 하라바나의 맹독 주머니를 뚫은 모양이었다. 지그문트를 뒤덮은 검은 피에서는 맹독의 기운이 스 멀스멀 올라오고 있었다. 그는 오 늘 운을 동전 던지기에서 다 쓴 것 같았다.

"됐다. 내가 알아서 처리할 테니 넌 가라."

얼굴에 묻은 피만 대충 닦아 낸 지그문트가 손을 까닥이며 가라는 제스처를 취했다. 독이 피부에 스 며들어 안색이 새파래지는 게 보 이는데도 참 고집스러운 놈이었 다.

'뭐, 이렇게 내버려둬도 죽진 않 겠지만......

지그문트 정도 되는 강자가 독

에 죽을 리 없다. 하지만 보통 사 람이라면 닿기만 해도 위험한 하 라바나의 맹독을 온몸에 뒤집어쓴 상태이니 여기다가 내버려두면 이 자리에서 쓰러져 다섯 시간 정도 는 못 일어날 가능성이 높았다.

"역시 넌 손이 많이 가는 스타 일이야."

"뭐 하는......

나는 온몸에 마나의 막을 두르 고, 혀를 차며 지그문트의 팔을

내 어깨에 걸쳤다. 처음엔 저항하 는가 싶던 그는 몸에 힘이 없는지 비틀거리다 내게 더욱 기댔다. 나 는 묵직한 무게를 묵묵히 지탱하 며 주머니에서 순간이동 아티팩트 를 꺼냈다.

'1시간 거리에 자연 온천이 있 지.'

자연은 참 신기했다. 이 설원 한 복판에서도 뜨거운 물이 솟아나 니. 그곳에 가서 지그문트 몸에 묻은 독을 씻어 내야 할 것 같았

'이제 마지막이긴 한데.'

나는 아티팩트를 내려다보았다. 이런 변수가 있을 거라곤 상상도 못 했기에 딱 2회용 순간이동 아 티팩트를 가져왔다. 지그문트를 위해 사용하면 나는 걸어서 집에 돌아가야 했다.

"너...... 지금 나를 도우면 후회 할 거다."

내게 몸을 지탱한 채 숨을 고르 던 지그문트가 낮게 뇌까렸다. 경

고하듯 묵직한 목소리였다. 그 말 에 잠시 눈송이가 쏟아지는 하늘 을 올려다본 나는, 피식 웃으며 그를 돌아보았다.

희망 한 점 없는 짙은 보랏빛 눈동자. 조각처럼 섬세하게 깎인 새하얀 얼굴. 그 위를 뒤덮은 검 은 피.

나의 유일한 라이벌이자 안티테 제.

"그럴지도. 하지만 돕지 않고 후 회하는 것보다 나아."

나는 단호하게 말했다. 이건 그 가 말하는 것처럼 무분별한 이타 가 아니었다.

" 텔레포트."

지그문트가 아직도 내게 소중했 기에 하는 미련한 짓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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