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73 화
순간이동 아티팩트로 단숨에 이 동했으나, 이쪽으로 오지 않은 지 꽤 되어 장소를 혼동한 건지 나와 지그문트는 온천에서 조금 떨어진 설원 한복판에 도착했다.
가는 길은 똑바로 기억하고 있 었기에, 나는 하라바나의 독으로 반쯤 정신을 잃은 지그문트를 끌 다시피 하며 온천으로 가고 있었
"새끼, 살쪘냐? 이전보다 훨씬 무겁네."
나는 투덜거리며 지그문트를 부 축한 채 질질 이끌었다. 사실 지 그문트는 하나도 무겁지 않았으 나, 원수로 생각하던 놈을 살려 주고 있다는 생각에 저절로 퉁명 스러운 말투가 튀어나왔다. 내가 선택한 것이긴 하지만 어쩐지 억 울했다.
"17살 때와, 무게가 같으면, 그 게 더 이상한 거 아닌가. 그리고
그냥 날 두고 가면 되는 일...... 큭"
퍽
독 때문에 열이 올라 달뜬 숨소 리를 내며 띄엄띄엄 말하던 지그 문트가 신음을 흘렸다.
"내 말에 반박하지 마. 한 번만 더 반박하면 공주님 안기로 모셔 주지."
지그문트의 옆구리를 걷어찬 나 는 날카롭게 쏘아붙이곤 다시 발
걸음을 옮겼다. 내게 안기고 싶진 않았는지 그는 단번에 입을 다물 었다.
지그문트와 나 사이에 대화가 사라진 지 얼마 지나지 않았을 때, 눈앞에 김이 폴폴 올라오는 물웅덩이가 보였다. 지그문트의 몸이 점점 더 굳어가는 것을 느끼 던 나는 안도의 한숨을 쉬며 발걸 음을 재촉했다.
"드디어 도착했네."
나는 온천 앞에 서서 뿌듯하게
웃었다. 시린 한기에 얼어 있던 몸이 온천 열기에 간접적으로 노 출된 것만으로도 녹아내리기 시작 했다.
차가운 눈이 퍼부어지듯 내리는 설원 가운데, 유일하게 온기를 품 은 이 온천은 다른 세계를 향해 난 균열 같았다.
잠시 온기를 즐기고 있었을까, 색색거리며 가쁜 숨을 쉬던 지그 문트가 가까스로 말을 꺼냈다.
"멍청한, 놈. 버리고, 가라니까,
미련하게......
"어휴, 진짜 말 많네. 그래, 그 래. 버린다. 이제부터 여기가 네 집이다, 지푸라기야."
휙.
지그문트의 버리고 가라는 말에 질려 버린 나는 짜증스럽게 그를 온천으로 내동댕이쳤다. 독에 중 독되어 약해진 지그문트는 버티지 못하고 종이쪼가리처럼 속절없이 날아갔다.
풍덩!
거대한 소리와 함께 지그문트의 인영이 물속으로 사라졌다.
촤아악, 그 여파로 물이 사방으 로 튀어 오르며 옆에 서 있던 나 까지 적셨다. 나는 뺨에 묻은 물 방울을 손등으로 닦아 내고, 입고 있던 제복 재킷을 벗었다. 검은 피를 뒤집어쓴 몸은 온통 끈적거 렸다.
"야, 너 혼자 씻을 수 있지? 혹 시 씻겨 줘야 하냐?"
"......드디어 미친 건가? 나는
독에 노출된 거지 사지가 부러진 게 아니다."
온천에서 얼굴을 든 지그문트가 물에 젖은 제 앞머리를 쓸어 넘기 며 질린 목소리로 대답했다. 그의 검은 머리칼을 따라 동그란 물방 울이 떨어지고, 설원만큼이나 새 하얀 피부가 물기를 머금었다. 물 에 젖은 검은 와이셔츠가 그의 잘 짜인 몸에 딱 달라붙었다.
'왜 저 와중에도 잘생긴 거지.'
나는 조금 띠꺼운 눈빛으로 지
그문트를 바라보았다. 인정하기 싫지만 인물 하나는 참 출중한 놈 이었다.
독이 씻겨 나가며 마비되었던 근육이 완화됐는지 제 몸을 살짝 움직여 보던 지그문트는 와이셔츠 단추 위로 손을 올렸다.
새하얗고 긴 손가락이 단추를 풀어 내리고, 짙은 보랏빛 눈동자 가 나를 바라보았다.
"계속 보고만 있을 건가?"
"아니."
나는 비죽 웃으며 부츠 하나를 벗었다.
"나도 같이 씻을 거다."
내 대답에 지그문트의 표정이 묘해졌다. 하라바나가 야옹 하고 우는 걸 본 사람 같았다.
"......같이 씻겠다고?"
"그래. 뭐가 문제냐. 설마 이 큰 온천을 너 혼자서 차지하려는 건 가? 이 자식이 은혜도 모르고
"굳이 씻겠다면 말리지 않겠다 만, 너와 내가 같이 씻을 만한 사 이는 아닐 텐데."
"그럼 예전엔 씻을 만한 사이라 서 씻었나?"
나는 온천에 더러운 두 손을 대 충 닦으며 말했다. 나와 지그문 트, 카라쇼가 같이 다닐 땐 좋은 숙소를 바랄 처지가 아니었기에 숙식과 몸 씻기까지 함께했던 게 하루 이틀이 아니었다.
쏟아지는 눈을 맞아 몸은 차갑 고, 옷에 말라붙은 피는 찝찝했
다. 특히 마수 피는 피부에 흡수 가 빨라 몸에 묻은 피는 빨리 닦 아내야 했다. 내가 검은 피로 범 벅되어 버적거리는 망토를 벗어던 질 때, 지그문트가 심란한 표정으 로 물었다.
"......옷을...... 다 벗고 들어올 생각인 건가?"
"뭐?"
나는 양말을 벗으며 그에게 경 멸 어린 눈빛을 보냈다.
"하라바나 송곳니에 정수리를
찔려 뇌에 손상이 가는 불상사라 도 있었던 거냐? 당연히 옷은 입 고 들어간다. 대체 무슨 생각을 한 거냐."
"그래. 그 정도 인식은 박혀 있 어서 다행이군."
내 거친 확언에 지그문트가 그 제야 편안한 표정을 지었다. 나는 쯧 혀를 차곤 허리에 두른 벨트를 풀어냈다. 그리고 온천으로 가볍 게 뛰어들었다.
풍덩.
청량한 소리와 함께 따뜻한 물 이 내 몸을 덮었다. 긴장되어 있 던 근육들이 천천히 이완되기 시 작했다. 곤두서 있던 신경들이 풀 려 나가는 기분 좋은 느낌에, 나 는 한숨을 쉬며 느리게 웃었다. 나이 든 사람 같은 감탄사가 절로 나왔다.
"으어. 시원하다."
"네가 올해로 환갑을 맞이했던 가?"
"너는 계속 그렇게 아가리 놀리 다간 꽃다운 나이에 여기 거꾸로 처박혀 신기한 관광 명소가 될 거
지그문트와 나 사이에 익숙한 말싸움이 오갔다. 역시 먼저 입을 다문 건 지그문트였다.
나는 머리끝까지 물 안에 집어 넣었다가 뺐다. 추위로 붉었던 얼 굴이 이제 열기로 붉어지기 시작 했다. 몸에 물든 검은 피를 충분 히 닦아 낸 나는, 물미역 같은 앞 머리를 쓸어 넘기며 그제야 지그 문트의 상태를 확인했다.
"야, 너 괜찮냐?"
내 부름에 보랏빛 눈동자가 천 천히 내게로 굴러왔다. 물에 젖은 검은 머리칼 위로 눈송이가 떨어 지고 있었다.
잠시 나를 응시하던 그가 무심 하게 눈을 돌렸다.
"네 알 바가 아니다. 더는 상관 하지 마라."
'저게 지금 구해 준 사람한테 할 말인가?'
지그문트의 지독한 말본새를 두 귀로 듣게 된 나는 내 청각의 기 능을 의심했다. 원래 저런 놈이라 는 걸 알긴 했지만, 저렇게 환상 적으로 입을 터는 순간을 마주할 때면 적응이고 뭐고 저 자식 대가 리엔 뭐가 들었나 확인해 보고 싶 었다.
"이야...... 너 길드장 때려치우 고 지옥에 이력서나 내 보지 그러 냐? 악마도 그 싸가지에 한 수 가르쳐 달라고 하겠다."
"난 거기서라도 일할 수 있지만 미련하고 냉정하지도 못한 네 녀
석은 받아 줄 곳이 있을까 싶군. 천국도 널 받아 주진 않을 거다. 천사를 하기엔 입이 너무 더러우 니까."
내 비꼼을 신랄하게 받아친 지 그문트가 한쪽 입꼬리를 비죽 끌 어올렸다. 그 모습을 본 나는 이 성을 지탱하는 머릿속 얇은 선이 뚝 끊겨 나가는 걸 느꼈다.
촤악!
내 주위로 마나가 요동치고, 온 천물이 파도처럼 일어나 내 등 뒤
에서 위험하게 넘실거렸다. 마나 를 운용해 내 키의 다섯 배쯤 될 법한 물의 벽을 만든 나는 지그문 트를 향해 인자하게 웃었다.
"덤벼, 인성파탄자."
저 박살 난 인성을 내버려 둔다 면 지그문트는 그에게 인성을 가 르쳤던 스승, 카라쇼의 얼굴에 먹 칠을 하고 다닐 게 분명했다. 그 녀의 제자로서 그런 꼴을 볼 순 없었다.
내 흉포한 물의 벽을 물끄러미
바라보던 지그문트는 코웃음을 쳤 다. 가소롭다는 기색이었다. 그의 주위로 마나가 끓어올랐다.
촤아악!
마나를 오러 만들 때만 주로 쓰 기에 다른 방식으로 운용하는 건 그리 능숙치 않은 나와 달리, 지 그문트는 마나의 세밀한 조작으로 기적을 만들어 내는 마법사였다. 그의 능숙한 마나 운용 아래, 그 의 등 뒤로 치솟은 물이 뱀과 용 사이쯤 되는 괴물의 모습을 띄었
"도전하겠다면 상대해 주지."
맞물리는 시선. 지그문트와 나 사이에 치열한 신경전이 오갔다.
'하!' 하고 헛웃음을 뱉은 나는, 두 발에 마나를 두른 채 지그문트 를 향해 번개 같은 속도로 뛰어갔 다.
"그 인성으로 어디 가서 스승님 제자였다고 하지 마라, 개자식 아!"
콰앙!
내 물의 벽과 지그문트의 물 괴 물이 부딪쳤다. 물과 물의 접촉이 었음에도 흡사 운석이 떨어질 때 와 같은 굉음이 터져 나왔다.
바야흐로, 세계관 최강자 후보들 의 물싸움 시간이었다.
"한 번만 더 인성 파탄 난 말씨 를 구사하면 그땐 술통에 구겨 넣 어서 바다에 던져 주지."
나는 이마에 송골송골 맺힌, 땀 인지 물인지 모를 액체를 손등으 로 닦아 내며 의기양양하게 말했 다. 지그문트는 내 발 밑에 나가 떨어져 있었다.
물싸움의 승자는 나였다. 마법사 인 지그문트가 세밀한 물 운용에 선 앞섰지만, 독에 중독된 상태인 그는 멀쩡한 나를 이길 수 없었 다.
"지독한 놈......
지그문트가 물에 처박혔던 얼굴 을 들며 중얼거렸다. 그가 물에 젖은 제 앞머리를 넘기며 한숨을 쉬었다. 투명한 물방울이 그의 흰 피부를 타고 흘러내렸다.
'네가 더 지독해......
지그문트를 바라보던 나는 뱉지 못할 말을 속으로 중얼거리며 질 린 표정을 지었다. 미인은 물에 젖으면 두 배로 아름답다는 말이 사실인 모양이었다.
조금 풀린 기색에 딱 달라붙는
검은 와이셔츠, 아찔하게 드러나 는 굴곡. 홀딱 젖은 지그문트는 우스워 보이기는커녕 아슬아슬하 고 치명적이었다.
'조금만 덜 아름다웠어도 저 재 수 없는 낯짝에 주먹을 수백 번은 더 갈겼을 텐데.'
나는 인정하기 싫어도 인정할 수밖에 없는 지그문트의 미모에 쯧 혀를 찼다. 신은 지그문트에게 인성과 싹퉁바가지를 주지 않은 대신 어디서 맞아 죽지는 말라고 경이로운 미모를 준 것 같았다.
"독 완벽하게 풀고 나와. 약 줄 테니까."
나는 그에게서 애써 눈을 돌리 고 온천에서 나왔다.
혹시 모를 일을 대비해 용병 일 을 할 때 입는 아공간 주머니 망 토를 입고 온 게 다행이었다. 이 주머니엔 긴급 상황을 대비하여 웬만한 건 다 준비되어 있었고, 개중엔 독을 완화시키고 면역력을 올리는 약초도 있었다.
'무너진 하늘의 조각이 쏟아지는 것 같네.'
나는 온천 바로 옆 동굴에서 익 숙하게 불을 피우며 눈이 내리는 하늘을 바라보았다.
눈에 파묻혀 삭막한 땅을 보면 북부인들이 대체로 생명력이 강하 고 끈질기다는 말도 이해할 수 있 을 것 같았다. 이런 곳에서 사람 이 살아남으려면 저절로 강해질 수밖에 없을 테니.
저벅저벅.
"어, 왔냐."
불을 피운 뒤 짓이긴 약초에 물 을 타 약으로 만들던 나는 다가오 는 발걸음 소리에 고개를 들었다. 겨울의 향취가 훅 가까워졌다.
마법으로 벌써 다 말린 건지, 지 그문트는 뽀송뽀송한 상태였다. 그는 동굴 안으로 들어와 내 맞은 편에 앉았다. 제자리를 찾듯 익숙 한 모양새였다.
'이상하지. 부재보다 존재가 더
익숙하니.'
생각해 보면 함께 지낸 시간은 겨우 1년쯤이고 떨어져 지낸 시 간이 무려 6년인데 지그문트와 나는 아직까지도 서로가 존재하는 것이 더 익숙했다. 아무래도 그와 나, 모두에게 그 1년의 시간은 무 척 깊고 소중했던 모양이었다.
" 마셔라."
나는 야매로 급하게 만든 약을 지그문트에게로 던졌다. 그는 가 볍게 허공에서 병을 낚아챘다. 작
은 유리병을 이리저리 돌려 보던 그가 중얼거렸다.
"독을 넣진 않았겠지."
"번거롭게 굳이? 널 없애고 싶 었다면 독을 줄 게 아니라 하라바 나의 저녁밥으로 던져 줬겠지. 녀 석, 만찬이었겠군."
그의 의심에도 나는 태연스럽게 반응했다. 피식 웃은 지그문트가 단숨에 약을 들이켜 병을 비웠다.
휙.
텅 빈 유리병이 내게로 날아왔 다. 나는 병을 가뿐히 받아냈다.
"의심은 습관이라서 해 본 거다. 안 넣었다는 거 안다."
하기야, 무려 'Hide & Ceek'의 길드장으로 살아남으려면 먹고 마 시는 모든 것에 의심과 주의를 기 울여야 할 터. 의심이 습관이라는 말도 이해가 되었다.
약을 먹고 조금 피곤해 보이던 지그문트는 이내 축축하게 젖어 있는 나를 바라보았다. 잠시 가늘
어지는 눈. 두 눈이 일렁이는 듯 싶다, 금방 평소의 무미건조함을 되찾았다.
"말려 주지."
뼈대가 보기 좋게 튀어나오고 마디마다 붉은 기가 도는 지그문 트의 손이 허공에서 움직였다.
화악.
내 눈앞에 빛나는 마법진과 함 께 온몸을 타고 퍼져 나가는 따뜻 한 바람. 봄바람에 한바탕 휩싸인
느낌이었다.
'이래서 마법사랑 같이 다니는 게 좋다니까.'
나는 단번에 마른 옷과 머리를 만족스럽게 내려다보았다.
지그문트와 함께 다닐 때는 그 가 마법으로 웬만한 귀찮은 것들 은 모두 해결해 주었기에, 그와 절연한 지 얼마 안 된 몇 달 동안 은 혼자서 하는 야영과 토벌에 적 응하지 못했다.
그의 혼적은 여전히 내게 남아 있었다.
6년이나 지났으니 이젠 토벌 지 역에서 기념품을 살 때 2인분을 사거나 마수 토벌 중 무심코 마법 의 보조를 기다리는 실수는 하지 않았지만, 추억 속에, 습관 속에 그를 찾아낼 때가 있었다.
나는 모닥불이 타닥거리는 소리 만 들리는 가운데 지그문트를 응 시했다. 누군가와의 침묵이 어색 하지 않다는 건 그 누군가가 제 존재의 일부라는 뜻이었다. 그와
나 사이에 짙은 고요가 편안하게 만 느껴진다는 걸 자각한 나는 조 금 착잡해졌다.
" 카슈미르."
"......왜."
투명한 보랏빛 눈동자가 나를 향해 굴러왔다. 나를 직시한 그 는, 나만큼이나 복잡하고 미묘한 표정을 짓고 있었다.
"우리, 친구인가."
벌써 세 번째 하는 질문이었다.
지그문트는 자꾸 우리 관계의 정 의를 내게 떠넘겼다. 나를 친구로 생각하는지 아닌지, 자신의 의견 은 단 한 번도 말하지 않으면서 말이다.
나는 잠시 허공을 보며 과거를 곱씹었다.
그가 첫 번째로 물었을 땐 아니 라고 확답했다. 그땐 친구는 무 슨, 철천지원수였으니까. 그가 두 번째로 물었을 땐 나도 모르겠다 고 했다. 때늦은 버적한 애증을 우정이라 부를 수도, 아니라도 할
수도 없었다.
나는 입술을 달싹였다. 지금은 첫 번째 대답도, 두 번째 대답도 어울리지 않았다. 그와의 관계는 계속 변했고, 나도 그도 성장을 계속하고 있었으니까.
나는 오랫동안 고민한 끝에 고 개를 들었다. 보랏빛 눈동자는 여 전히 나를 응시하고 있었다.
"아마도."
부정할 수 없었다. 친구가 아니
라고 하기엔 지나치게 소중했다. 그렇다고 친구라고 확답하기엔 아 직도 그를 완전히 받아들인 것이 아니었다.
부정과 긍정, 그 사이에서 긍정 에 조금 더 추가 기울어져 있는 답변.
나는 그때서야 완전히 인정했다.
나는 지그문트를 완전히 배척할 수 없음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