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충직한 검이 되려 했는데-174화 (174/254)

174확

" 으음......

나는 짧게 신음하며 부스스 눈을 떴다. 모닥불조차 불씨를 죽인 동굴 안은 고요했다. 나는 해가 뜨고 눈이 멈춘 동굴 밖을 바라보다, 휑한 맞은 편으로 눈을 돌렸다.

'결국 갔군.'

자던 중 움직이는 인기척이 느껴졌

기에 대충 예상은 했지만, 텅 빈 자 리를 보교 있자니 상념이 많아지는 것은 불가피했다. 나는 지그문트가 있었을 자리를 빤히 바라보다 혀를 찼다.

여전히 이기적인 놈이었다. 굳이 먼 저 떠나 빈자리를 느끼게 하니.

꾸물꾸물 자리에서 일어나 떠날 채 비를 하던 나는, 문득 맞은편 바위 아래에 시선을 두었다. 새하얀 종이 조각이 바람에 나부꼈다.

쪽지였다.

[빚은 나중에 갚는다. 그래도 너는 나를 살린 걸 후회하게 될 거다.]

"하••...

나는 짧게 실소를 터트렸다. 그리고 흙이 묻어 얼룩덜룩해진 쪽지를 매만 지다 한숨처럼 중얼거렸다.

"하여간 고맙다는 말은 끝까지 안 해."

시린 바람을 타고 풍겨 오는 설원 의 향기는 지그문트의 체향과 닮아

있었다.

"......묘 좀 다녀온다더니, 묘를 만 들고 왔어? 누구를 묻고 온 거야

나를 위아래로 훑어본 아리아가 허 탈하게 중얼거렸다. 나는 흙과 마수 의 핏자국으로 얼룩덜룩한 옷을 입고 온몸에 잔상처를 단 채 머쓱하게 머 리를 긁적였다.

"묘지가 북부에 있었거든. 갔다가

마수를 좀 만나서."

"마수를 만났다고? 괜찮은 건가?"

옆에서 듣고 있던 킬이 얼굴을 일 그러뜨리며 날카롭게 반문했다. 나와 함께 데베라 떼를 처리했을 때가 마 수를 처음으로 마주했다는데, 마수 얘기에 예민해진 걸 보아 그때 티는 안 내도 위기감을 많이 느꼈던 듯했

"저야 당연히 괜찮습니다. 그런 데...... 집엔 무슨 일이 있는 모양인 데요"

나는 어쩐지 부산스러워 보이는 홀 을 둘러보곤 어리둥절해졌다. 크리시 스 공작저는 늘 엄숙한 고요를 유지 했건만, 오늘은 사용인들이 하나같이 심각한 표정으로 빠르게 저택을 오가 고 있었다.

"하* 그러니까 이게

할 말이 많다는 표정을 지은 아리 아가 제 앞머리를 쓸어 넘겼다. 묘하 게 빡친 기색이었다. 아리아가 말을 이으려 할 때.

"아리아 아가씨! 마차가 왔습니다!"

"......벌써 왔다고? 잠깐만 여기 있 어, 언니!"

사용인의 급한 부름에 아리아가 다 급하게 사라졌다. 나는 대답해 줄 대 상이 돌연 사라지는 걸 멍하니 바라 보다가 칼을 돌아보았다.

"오늘 무슨 일 있습니까? 혹시 행 사가 있는데 제가 깜빡한 겁니까?"

"그런 건 아니고, 어제 네가 없을 때 일이 조금 있었다."

손으로 이마를 짚은 칼이 말했다. '그 새끼 진짜.......'하고 중얼거리는

게, 누가 뭔가를 잘못한 것 같기도 했다.

"황궁에서 연락이 왔었다. 황태자 디에고 솔라티네가'••...

벌컥.

저택의 문이 열렸다. 칼이 표정으로 쌍욕을 할 때, 나는 반사적으로 문을 향해 고개를 돌렸다.

"......오늘 공작저를 방문할 거라

고•"

칼의 말이 짓씹듯 마무리되고, 나는 입을 떡 벌렸다.

깔끔하게 빗어 넘긴 금빛 머리칼. 가벼운 듯 완벽하게 차려입은 옷차 림. 날 향해 반짝이는, 보석 같은 푸 른 눈동자. 여러모로 상태가 안 좋은 나와는 상반되게 아주 말끔했다.

머리가 굳은 내가 그저 그를 바라 보고 있을 때, 죽상을 짓는 아리아와 태양을 등진 채 저택으로 들어온 디 에고가 나를 향해 햇살처럼 웃었다.

"오랜만이네, 카슈미르 공녀."

칼의 표정이 썩어 마른 무말랭이처 럼 찌그러졌다.

"그래서...... 어떻게 찾아오셨습니 까?"

나는 제대로 된 목욕도 못 하고 급 하게 옷만 갈아입은 채로 응접실 소 파에 앉아, 맞은편의 남자를 힐끗 바 라보았다. 가볍게 꼰 다리까지도 장 인의 손이 닿은 듯 완벽한 인영이 나 를 바라보았다. 디에고의 날카로운

눈매가 샐쭉 접혔다.

"그대가 보고 싶어져서 말일세."

챙!

홍차가 든 찻잔이 거세게 책상에 내려앉았다. 잔 전체에 금이 가게 하 면서 차가 새지는 않는 게 재주라면 재주였다. 나는 침을 꿀꺽 삼키며 아 리아를 곁눈질했다. 잔을 내려놓은 아리아는 사랑스럽게 웃고 있었다.

"황태자 저하를 저희 저택에서 맞 이하게 되어 얼마나 기쁘고 영광인지

몰라요 조금 더 확실히 모셨다면 좋 았을 텐데, 방문하시기 '반나절' 전에 연락을 주셔서 접대가 부족한 것 같 네요 공작님께서도 황궁에 가신 시 간이고요 아쉬워요."

아리아가 '반나절'에 힘을 꾹꾹 눌 러 담아 발음했다. 완벽한 비꼼이었 다. 아리아의 말에서 디에고가 이곳 에 온 전말을 완벽하게 알게 된 나는 의아한 표정으로 그를 바라보았다.

보통 귀족이 귀족의 집을 방문할 땐 적어도 사흘 전엔 언질을 주는 것 이 예의였다. 그리고 드물게 황족이

귀족의 집을 방문할 때면, 일주일 전 엔 언질을 줘야 했다. 황족을 맞는다 는 건 큰일이었으니까. 반드시 지켜 야 하는 규율은 아니었으나 통상적으 로그랬다.

'그런데...... 반나절 전에 연락을 주 고 성큼 찾아왔다고......

디에고는 융통적인 사람이었지만 웬만해선 형식과 예의를 갖추었다. 제국엔 허례허식을 중요시하는 귀족 들이 많았으니까. 그는 그들 모두를 아울러야 하는 황태자였다. 오늘 일 은 그답지 않았다.

내가 그를 아리송하게 보고 있든 말든, 디에고는 화사한 웃음을 지었

"공작저야 늘 잘 갖추어져 있지 않 나. 접대도 완벽했네."

"그러시다니 다행입니다. 아침 일찍 부터 준비하느라 상당히 소란스러웠 으니 말입니다."

칼이 씨익 웃으며 대답했다. 나는 그의 웃음을 보며 살짝 흠칫했다.

평소에 칼은 웬만해선 웃지 않았다.

그가 웃을 땐 화가 났을 때뿐이었다.

"하하! 다들 이리 진심으로 날 맞아 주니 얼마나 기쁜지 모르네. 그대들 이 이렇게나 나를 좋아하는 줄 몰랐 네."

디에고가 호탕하게 웃으며 우아하 게 찻잔을 들어 올렸다. 모든 비꼼을 모르는 척 넘겨 버리는 스킬이 심상 치 않았다. 심지어 이 상황을 즐기고 있는 것 같기까지 했다.

확실히 아리아나 칼이나, 디에고보 다 어린 데다 사교술에 한해선 뒤떨

어졌으니 휘말릴 수밖에 없었다.

나는 주먹을 꽉 쥔 아리아와 두 눈 에 초점을 잃은 채로 웃고 있는 칼을 빠르게 번갈아 보다, 어색하게 웃으 며 나섰다.

"저하, 제게 볼일이 있으신 것 아닙 니까?"

"아, 카슈미르 공녀. 맞네. 그대를 보러 온 거지."

즐겁다는 듯 칼과 아리아를 지켜보 던 디에고가 나를 돌아보았다. 그의 눈꼬리가 예쁘게 휘었다.

"줄 것도 있고, 할 말도 있어서. 공 녀와 단둘이 얘기하고 싶은데, 잠시 자리 좀 피해 주겠나?"

아리아의 눈썹이 꿈틀거리고 칼의 미소가 짙어졌다. 나는 두 사람의 손 에 순간 마나가 응집되다 말았음을 느꼈다.

"카, 칼, 아리아. 저하와 개인적으 로 할 얘기가 있으니 잠시 자리 좀 피해 줄래?"

난폭한 맹견을 사람과 분리하듯, 칼

과 아리아를 디에고와 분리해야 했 다. 내게로 한꺼번에 휙 쏠린 두 쌍 의 시선이 매서웠으나, 나와 눈이 마 주치고는 금방 사그러들었다.

"......먼저 물러나 보도록 하겠습니 다."

"좋은 시간 보내시길 바라요/

두 사람이 설렁설렁 예를 갖추며 인사하곤 거북이가 기는 속도로 문을 향해 갔다. 얼핏 봐도 나가기 싫다는 태도였다. 나는 두 사람을 안쓰럽게 바라보다 손을 혼들어 주었다.

응접실 문이 닫히고 고요가 방 안 을 가득 채웠다. 남은 건 디에고와 나, 단둘뿐이었다.

나는 숨을 짧게 들이쉬었다 내쉬고 고개를 들어 디에고와 마주했다.

"무슨 일이십니2巾 저하께서 이렇게 오셨을 정도면 꽤 심각한 사항인 것 같은데요"

부드러운 미소를 머금고 있던 디에 고의 표정이 단번에 굳었다. 나를 바

라보는 푸른 눈동자가 진중했다.

"이곳에 도청 장치가 없음은 확실 하지. 엿듣는 사람도 없고•"

"소드 마스터가 둘이나 있는 공작 저에 도청 장치 같은 걸 설치할 수 있겠습니까? 가까이에 인기척은 없습 니다. 확실해요"

내 확언에 디에고가 한숨을 쉬며 소파에 가볍게 몸을 기대었다. 소파 의 붉은 천 위에 그의 금빛 머리칼이 흩뿌려지고, 뻣뻣하다 싶을 만큼 곧 았던 자세가 편하게 풀렸다. 그는 간 혹 내게만 풀린 모습을 보여 주곤 했

는데 지금이 그 순간인 듯했다.

디에고는 극한의 이성을 탑재한 사 람이었다. 그는 이성으로 사고했고, 지혜로 판단을 내렸다.

내가 보그 싶어서 왰다고 하지만, 안건이 그것뿐일 리는 없었다.

"얼마 전에 일어났던 테러의 뒷배 경이 키프로스 백작가와 북부였음은 그대도 알고 있겠지. 그대가 바로 폭 탄을 처치한 당사자였으니."

무거운 그의 목소리를 보아 생각했

던 것보다 심각한 안건이 나오려는 모양이었다. 나는 굳은 표정으로 고 개를 끄덕였다.

"키프로스 백작가의 관여에 대해선 다들 심증으로 예측하고 있으나, 물 증이 없네. 확실한 물증이 있어야 그 들을 끌어내릴 수 있지. 나는 그 물 증을 위해 그들을 깊이 조사 중이었 네. 그러다 북부에 관련해서 무언가 를 알게 되었지. 그대는 가장 믿을 수 있는 사람이니 그대와 정보를 공 유하고자 하네. 그대도 북부와 관련 해 계획이 있는 듯하니."

북부. 내게도 필요한 정보였다. 나 는 디에고의 말에 집중했다. 푸른 눈 이 시린 이성으로 반짝였다.

"키프로스와 결탁한 자는 북부의 지배자일세 족장이라고도 할 수 있 겠지."

"족장 말입니까?"

나는 미간을 찌푸리며 과거의 기억 을 되짚었다.

키프로스와 결탁한 자. 북부이 지배 자. 머릿속 한편에 아주 희미하게 뚫 린 전생이라는 틈을 억지로 열어젖혀

그에 대한 정보를 찾아보려 했으나, 생각나는 것은 없었다. 원작에서 그 에 대한 이야기가 나온 적이 있는지 도 불분명했다.

"그의 자세한 인적사항은 알아내지 못했네. 워낙 베일에 싸인 인물이라. 겨우 알아낸 것은 그가 뒷세계를 잡 고 있는 큰손 중 하나라는 걸세. 커 다란 조직을 운용하고 있는 모양이더 군. 거기서 금전을 확보하고 있는 모 양기야."

"......그렇군요 그 조직이 어디인지 는 아십니까? 금전의 수로인 그곳만 끊어 낸다면 일이 수월하게 풀릴 텐

데요"

"그건 지금 알아보고 있는 중일세. 창설된 지 오래된 곳으론 보이지 않 아. 북부가 본격적으로 기묘한 움직 임을 보이기 시작한 것이 대략 5년 전이니, 그쯤에 함께 지어진 걸로 예 상하고 있지. 하지만 듣기론 그 조직 의 힘이 만만치 않은 모양이더군. 대 륙 전체로 퍼진 조직이야. 알아낸다 고 하여 바로 끊어 낼 수는 없을 걸 세."

나는 입술을 꾹 깨문 채 턱을 매만 졌다. 아무리 북부가 마수 테이밍이 라는 사기적인 한 방을 가지고 있대

도> 자금이 없어 식량을 조달하지 못 하면 오래가지 못하고 망핸다. 하지 만 금전적 수급이 있다면 전쟁은 생 각보다 오래 이어질지도 몰랐다.

'하긴, 그랬기에 원작에서도 승기를 잡아낼 수 있었겠지.'

북부의 제국 침입은 마치 변방의 섬나라가 통일 제국 하나를 덮치는 것과 같았다. 어지간한 준비와 계책 없인 시작조차 못 했을 터.

심란해진 내가 골몰히 생각을 이어 나가고 있었을까, 차를 한 모금 마신

디에고가 부드럽게 미소 지었다. 정 말 웃음이 나와서 웃는 것이라기보 단, 나를 안정시켜 주기 위해 웃는 것같았다.

"심란한 안건이지. 하지만 혼자 너 무 고민하지 말게. 혹여라도 그대 혼 자 이 난관을 헤쳐 나가야 한다고 생 각지 말고. 이건 우리 모두의 문제고, 나도, 다른 사람들도 함께 고민할 걸 세. 그대는 혼자가 아니야."

손을 뻗은 디에고가 내 머리칼을 부드럽게 쓸어내렸다. 나와 정반대의 색채인 두 눈과 마주하면, 어깨를 스

멀스멀 짓누르던 짐이 깔끔히 사라지 는 느낌이었다.

자석의 극과 극이 맞붙듯, 디에고와 나는 늘 잘 맞았다. 특히 그는 내 속 을 읽기라도 하는 듯 나를 잘 알았 다. 내게 필요한 말과 행동이 무엇인 지 단번에 알아차렸다.

"......감사합니다. 저하께서 저를 믿 고 이런 정보를 알려주셨듯, 저도 저 하를 의지하도록 하겠습니다."

싫어할 수 없었己 의지할 수밖에 없는 사람이었다. 나는 쉬이 의지하

지 못하는 성정임에도 디에고에겐 은 연중에 의지를 하게 되었다. 그는 정 말 '어른'이라는 느낌이 나는 사람이 었으니.

"잘 생각했네. 그대라면 언제든지 내게 의지해도 좋아. 나는 항상 이 자리에서 그대를 기다리고 있으니."

디에고는 빛무리가 흩날렸다는 착 각까지 드는 환한 웃음을 지어 보였 다. 그는 한층 풀린 낯으로 장난스럽 게 투덜거렸다.

"그대의 형제자매에게 날 너무 미

워하지 말라고 해 주게. 방금 보니 날 분해할 작정들이던데 정보를 빨 리 전해 줘야 하기도 했고, 황궁엔 듣는 귀가 너무 많아 차라리 공작저 가 안전하겠다 싶었네. 그래서 무리 하면서까지 온 거야."

"칼과 아리아에겐 제가 잘 말해 두 겠습니다."

"그래. 나는 처남과 처제에게 밉보 이고 싶지 않아."

" 네?"

"크리시스가와 원만하게 지내고 싶 다는 뜻일세."

디에고가 말끔하게 말을 마무리했

다. 내가 잠시 어리둥절하고 있을 때, 디에고는 아무렇지 않은 표정으로 제 품에 손을 넣어 무언가를 꺼냈다.

붉은 융단의 작은 케이스 안에 들 어 있는 것은 반지가 걸린 목걸이였 다

"검술 대회의 증표를 주겠다고 하 지 않았나. 디자인을 고민해 봤는데 역시 그대가 보고 날 떠올려 줬으면 해서."

동그란 반지의 주재료는 얼핏 은처 럼 보였으나 자세히 보면 백금이었

다. 그 중심에 부담스럽지도, 작지도 않은 크기로 박힌 사파이어는 딱 디 에고의 눈과 비슷한 색채였다.

"그대가 했던 말 기억하지? 심장이 뛰는 곳에 두고 늘 품에 지니고 있겠 다고"

자리에서 일어난 디에고가 내게 성 큼 다가와 내게로 몸을 숙였다. 그가 부드러운 손길로 내 목에 목걸이를 걸어 주었다.

마주하는 시선. 나는 그를 올려다보 己 그는 나를 빤히 내려다보았다.

그림자 탓인지 평소보다 좀 더 짙어 보이는 얼굴에, 그림자 가운데서도 반짝거리는 푸른 눈동자. 그 두 눈이 잠시 일렁이다, 이내 감겼다.

그가 고개를 숙이고* 이마에 입술이 닿았다. 입술이 피부에 닿는 감촉은 언제고 간질거렸다. 다시금 고개를 든 디에고는, 나를 향해 환하게 웃음 지었다.

"그대에게 내가 있다는 것을 잊지 마. 언제든지 의지해 주어도 좋네."

그 따사로운 다정에 내 어깨에 메 고 있던 짐이 녹아내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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