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75 화
"오래 기다리셨습니다! 오늘은 검술 대회의 마지막 날, 대망의 결승전입니다!"
와아아아!
사회자의 경쾌한 목소리와 함께 거대한 함성이 터져 나왔다. 검에 달린 장식을 한 번, 약지손가락의 반지를 한 번, 목에 걸린 반지를 한 번 매만진 나는 천천히 숨을
들이쉬며 천장을 올려다보았다.
시간은 흐르고 흘러, 오늘은 검 술 대회 결승전이었다.
'사람 엄청 많네.'
나는 대기실 의자에 널브러지듯 앉아 경기장의 모습을 담고 있는 커다란 수정구를 바라보았다. 결 승전이기 때문인지 현재 경기장엔 지금까지의 모든 경기를 통틀어 가장 사람이 많았다.
'내가 아는 사람은 다 왔겠지.'
나는 내 좁디좁은 인간관계를 되짚었다. 내 가족과 친구들은 하 나같이 고위 귀족이니 상석에서 경기를 관람할 것이고, 야샤까지 올 거라 했으니 내가 아는 사람은 다 이 경기를 보게 될 거라고 해 도 과언이 아니었다.
'허. 네가 크리시스의 공녀라고. 신기하구먼. 네가 잘 살고 있다면 다행이다.'
야샤 같은 사람이라면 믿을 수 있다는 생각에 내가 사실 크리시
스의 공녀임을 실토했을 때, 야샤 의 반응은 담백했다. 지나치게 태 연한 반응에 되레 내가 당황했을 까, 야샤는 그렇잖아도 크리시스 의 공녀가 검술 대회에 출전 중이 라는 소문을 들었다며 보러 오겠 다고 호들갑을 떨었다.
'자랑스러운 녀석! 이 늙은이도 응원하러 가마! 사람 불러다 응원 단 세워주랴?'
'제가 경기 중에 선 채로 기절하 는 모습 보고 싶지 않으시면 제발 그러지 마세요......
이미 나를 손주로 생각하고 있 는 야샤에게 잔뜩 귀여움을 받기 도 했다.
나는 오늘 일을 많은 사람이 볼 거란 생각에 마음이 착잡해졌다. 검을 쥔 손이 긴장으로 굳었다.
오늘 검술 대회에선 사건이 터 졌다. 대륙 전체의 분위기를 단번 에 뒤집어엎을 거대한 사건이.
그건.......
"공녀님. 슬슬 나갈 준비를 하셔
야 합니다."
나를 조심스럽게 부르는 소리에 퍼뜩 상념에서 깨어났다. 사건은 결승전이 끝나고 벌어질 것이다. 우선은 경기에 집중해야 했다.
나는 자리를 털고 일어나 문 가 까이에 섰다. 나를 조심스럽게 따 라온 남자가 내 눈치를 살피더니 말했다.
"저, 공녀님. 아시다시피 오늘은 결승전이라 흥미진진한 경기를 기 대하는 사람이 많습니다. 일부러
라도 화려한 경기를 보여 주시면 사람들이 좋아하지 않을까 싶습니
검술 대회는 하나의 축제에 가 까운 만큼, 관계자들은 보는 이들 의 즐거움을 고려해야만 했다. 남 자의 두 눈에서 걱정과 간절함을 본 나는 머쓱해하며 머리를 긁적 였다.
'준결승전 때문인가.'
나는 디에고가 알려준 정보 때 문에 생각이 많아져 요 근래 무척
멍했다. 실수를 일삼으며 아슬아 슬하게 지내기를 며칠, 결국 준결 승전에서 실수를 하고 말았다.
준결승전 상대를 1분 만에 해치 운 것이다.
'공녀님이 검을 어느 정도 사용 하신다는 건 압니다. 하지만 여기 까지입니다. 저, 폭풍의 검제 헤 스터가 상대, 으아아악!'
살인적인 속도로 휘몰아치기 시 작한 검에 '폭풍의 검제' 헤스터 는 1분이 채 지나지 않아 정신을
잃었다. 그로써 나는 '폭풍의 검 제'의 검술을 영원히 볼 수 없게 되었다.
이후 헤스터에겐 '1분 천하', '폭소의 검제' 등의 별명이 생겼 다. 그날 경기를 본 이들은 승부 가 너무 빨라서 재미없다고들 하 면서도 내 실력에 대해 다시금 술 렁이기 시작했다.
'전처럼 재미없게 끝낼까 봐 이 러는 거겠지.'
울상을 지은 남자를 보고 있자
니 묘한 죄책감이 느껴졌다. 구경 거리가 되는 건 달갑지 않았지만, 검술 대회는 그걸 각오하고 나와 야 하는 곳이었다.
나는 시원스럽게 고개를 끄덕였 다.
"걱정하지 말게. 화려한 경기를 보여줄 테니."
상대가 그 사람인 이상 대충 겨 룰 생각은 조금도 없었다.
"......그리하여! 결승전 진출자는
카슈미르 도레마 드 카이사르 크 리시스 공녀님입니다!"
주저리가 끝난 건지, 사회자가 내 이름을 불렀다. 나가야 할 때 였다.
와아아아!
나는 터져 나오는 환호성을 들 으며 어두운 통로를 지났다. 거대 한 경기장에는 화창한 태양의 광 채가 쏟아지고 있었다.
"공녀님이 이곳까지 올라오실
거라고 누가 예상했을까요! 검술 대회 이전엔 그 대단한 실력이 조 금도 세간에 알려지지 않았다는 게 안타까울 따름입니다! 과연 크 리시스답다는 말이 저절로 나오는 실력을 보여주시며 제국 전체를 술렁이게 하셨죠! 작은 덩치를 가 지셨음에도 불구하고 장정들과의 싸움에서 단숨에 승기를 잡으셨습 니다!"
'그놈의 작은 덩치 타령 언제 나 오나 했다.'
나는 허공 언저리를 바라보며
속으로 투덜거렸다. 용병으로 살 며 내 작은 덩치에 대해 사람들이 업신여기는 것에는 익숙해졌다. 소드 마스터가 된 이후론 감히 내 덩치에 대해 논하는 사람은 없었 지만.
사회자의 영양가 없는 설명을 한 귀로 듣고 한 귀로 흘리던 나 는, 고개를 들어 최상석을 확인했
'좀 아슬아슬한데.'
자리에 앉아 사회자를 지그시
바라보는 카이사르의 표정이 미묘 하게 굳어 있었다. 다른 사람이 보기엔 평소 같은 무표정이었겠지 만, 내 눈엔 그의 심기가 불편하 다는 게 보였다,
크리시스의 이름은 그 누구도 함부로 입에 담지 못했다. 게다가 카이사르는 나에 관한 사항이라면 특히 더 민감하게 반응했다.
자리가 자리인 만큼 어느 정도 떠드는 건 눈감아 주고 넘어가야 하건만, 카이사르의 표정을 보아 사회자는 이후 인생길이 좀 험난
할지도 모르겠다.
"그런 공녀님의 상대는......!"
'드디어.'
심장이 크게 뛰고, 기분 좋은 소 름이 등골을 훑고 지나갔다. 내가 인정하는 이와 진심으로 검을 맞 댈 수 있다. 기다리고 기다리던 순간이었다. 나는 흘러나오는 웃 음을 막지 않았다.
발걸음 소리가 가까워졌다. 그림 자를 넘어서 다가오는 사람은 익
숙한 인영이었다. 나는 코끝을 스 치는 친근한 향취에 기분 좋게 숨 을 들이쉬며 활짝 웃었다.
"황궁 제2기사단장 라이너 카르 텔 르 노아 아인하르트 경입니 다!"
기분 좋은 바람에 은회색 머리 칼이 가볍게 나부꼈다. 금빛 눈동 자가 태양빛을 받아 번뜩였다.
내 상대는 당연히 라이너였다.
라이너가 곧고 당당한 걸음으로
내 앞에 다가왔다. 나와 눈이 마 주치자 무미건조하게 굳어 있던 그의 얼굴이 부드럽게 풀렸다.
라이너가 옅게 미소 지으며 고 개를 숙였다. 나도 마주 고개를 숙였다.
"이곳에서 만나게 되어 영광입 니다, 크리시스 공녀님."
"저야말로 영광입니다, 라이너 경."
가벼운 어투로 예를 갖춘 인사 를 주고받은 뒤, 고개를 든 라이
너의 두 눈이 반짝이고 있었다.
"역시 오셨군요. 여기서 마주하 고 싶었습니다."
"저도 그렇습니다. 라이너라면 당연히 이곳에 올 것이라고 생각 했으니까요."
나는 검 손잡이를 잡으며 씨익 웃었다.
"진심으로 싸우겠다고 한 거 잊 지 않으셨죠?"
낮게 웃은 라이너가 마찬가지로
검 손잡이를 쥐었다.
"물론입니다. 여전히 당신을 만 족시키기엔 부족하지만...... 당신 과 마주할 각오는 됐습니다."
그렇게 말하는 라이너의 목소리 는 결연했다.
"오러, 여태껏 한 번도 꺼내지 않으셨더군요."
그가 갑자기 목소리를 줄였다. 주위는 소란스러웠고, 혼잣말처럼 작은 소리였지만, 나는 라이너의
목소리를 확연히 들을 수 있었다.
스르릉.
라이너의 크고 거친 손이 검을 뽑았다. 그의 검은 한 손 검이라 기엔 크고 대검이라기엔 작은, 딱 중간쯤의 크기였다.
중간을 선택한다면 날렵함과 파 워, 둘 다 놓칠 가능성도 높지만, 라이너는 둘 모두 잡은 사람이었 다. 그의 공격은 빠르면서도 하나 하나가 묵직했다.
"오러를 꺼내지 않으면 상대도 되지 않는다는 걸 알지만, 저는 역시 당신과 똑같은 위치에서 검 을 맞대고 싶습니다. 저도 오러를 사용하지 않을 겁니다."
라이너의 단호한 말에 나는 조 금 눈을 크게 떴다. 검사가 오러 를 포기한다는 건 요리사가 불을 포기한다는 것과 같았다. 가장 중 요한 도구를 놓는다는 거다.
'승패에 연연하지 않는구나.'
나는 라이너의 발언에서 그가
승패가 아닌 나와의 결투 자체에 초점을 맞추고 있음을 알 수 있었 다. 기사단장이라는 높은 직위에 있기에 사람들 앞에서 한낱 영애 인 내게 패배하는 것이 신경 쓰일 수 있을 텐데도 말이다. 과연 라 이너다운 태도였다.
"......좋습니다."
스르릉.
나는 유려하게 발도했다. 날카로 운 검의 표면이 주위를 투명하게 비추었다.
모든 감각을 그에게 집중하자, 시간이 멈추고 세상이 아스라졌 다. 그 가운데 나와 라이너만이 온전했다. 느낄 수 있었다. 정상 의 범위를 벗어난 라이너의 맥박. 온통 내게로 쏠린 라이너의 신경.
나는 느리게 침을 삼켰다. 그리 고 웃었다.
기분 좋은 긴장감이었다.
"그럼 순수하게 검술만으로 승 부를 보도록 하죠."
쉬이익!
거대한 경기장의 마나가 블랙홀 에 속절없이 빨려 들어가는 별처 럼 나와 라이너에게로 끌려왔다. 마나의 이동을 느낀 이들에게서 웅성거림이 터져 나왔다.
노아의 눈이 가늘어지고, 카이사 르의 입가에 만족스러운 미소가 피어났다. 나는 관중 사이에서 껄 껄 웃음을 터트리는 야샤를 보았
혼히 검사들의 싸움이라고 하면 오러를 기대하는 이들이 많았다.
확실히 오러는 화려하고 폭발적 이다. 볼거리 하나는 톡톡했다.
하지만 오러가 있어야만 싸움이 재미있는 거라고 생각하면 그건 완전히 오류였다.
검은 가장 단순하면서도 강력한 무기였다. 검사가 어떻게 움직이 느냐에 따라 무궁무진한 움직임을 보여줄 수 있었다.
검의 움직임은 검사의 삶을 담 는다. 검을 맞대는 것은 완벽한 타인인 두 사람의 삶이 충돌하는 것이었다.
쾅!
서로를 알아가는 행위는 그것만 으로도 아름다웠다.
순수한 마나만을 덧씌운 두 개 의 검이 거세게 부딪쳤다. 화산 폭발 같은 거대한 폭음이 터져 나 왔다.
공기 중의 마나가 미친 듯이 진 동하며 살이 떨렸다. 마나 친화력 이 없는 이들조차 섬찟해질 정도 의 진동이었다. 관객들이 더욱 크 게 술렁이는 가운데, 나는 전율했 다
내 손을 잠시 욱신거리게 할 정 도로 강한 이와 검을 맞대는 건 지그문트 이후로 오랜만이었다.
심장이 터질 듯이 뛰며 붉은 피 를 빠르게 온몸으로 퍼트렸다.
등골을 타고 오르는 오싹한 긴
장감. 두뇌를 달구는 흥분. 더 움 직여 달라 비명을 지르는 몸속 피.
긴 역사 속 백 명도 되지 않는 소드 마스터들은 대부분이 싸움광 이거나 인성 파탄자였다. 이전엔 이해할 수 없었지만, 소드 마스터 가 된 이후엔 어째서 그들이 그랬 는지 이해할 수 있었다.
소드 마스터의 피는 피를 불렀 다. 맹수가 먹이를 갈구하듯 투쟁 을 부르짖었다.
나야 싸움보다 더 중요한 신념 이 있었기에 싸움을 향한 탐욕이 상대적으로 약한 편이었다. 그럼 에도 불구하고 가끔 뱃사람을 홀 리는 사이렌처럼 나를 전장으로 부르는 몸의 소리에 이성을 잃지 않으려 노력해야 했다.
내게 검은 본능이었다. 도구의 수준을 넘어 세 번째 팔과 같았
나는, 전투가 즐거웠다.
라이너의 올곧은 마나와 내 흉
포한 마나가 힘겨루기를 하는 가 운데, 나는 입이 찢어져라 웃으며 라이너를 직시했다.
"카슈미르는 싸울 때 그런 표정 을 짓는군요."
그가 낮게 속삭였다. 문득 라이 너의 표정을 본 나는 놀라 눈을 크게 뜰 수밖에 없었다.
라이너에게서 단 한 번도 본 적 없었고, 볼 거라고 예상하지도 못 했던 표정. 정말 그답지 않은데 지나치게 어울렸다. 날카로운 눈
꼬리는 낭창하게 휘고, 직선을 그 리던 입매가 함박웃음을 짓는 얼 굴.
라이너는 아이처럼 해맑게 읏고 있었다.
"새로운 카슈미르를 알아 기쁩 니다."
다시금, 검이 부딪쳤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