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76 화
"카슈미르 공녀는...... 정체가 뭔가?"
턱을 괸 채 물끄러미 경기장을 내려다보던 헬리오스는 혼잣말처 럼 중얼거렸다. 그의 시선을 온전 히 독차지한 카슈미르는 허공을 박차 올라 라이너에게 검을 내리 꽂고 있었다.
'세레논의 검술 스승으로서 무리
없이 가르치고 있다기에 검을 어 느 정도 다룰 것이라고 예상은 했 지만......
헬리오스의 푸른 눈이 가늘어졌 다. 그는 검의 경지는 이루지 못 했으나 여태껏 수많은 기사들을 만나며 실력을 보는 방법은 자연 스레 익혔다.
제2 기사단장 라이너 아인하르 트와 대등하다 못해 우위를 선점 하고 있는 실력이라니. 저건 범상 치 않음을 넘어 경악스러웠다.
기민한 청각으로 헬리오스의 중 얼거림을 주워들은 카이사르는 시 선을 여전히 경기장에 고정한 채 로 슬쩍 입꼬리를 말아 올렸다. 만족스러움을 한껏 머금은, 부드 러운 미소였다.
카이사르 크리시스의 그런 표정 을 처음 본 헬리오스가 썩은 표정 을 짓든 말든, 카이사르는 고개를 살짝 젖히며 여유롭게 말했다.
"제 딸입니다."
"그걸 여기서 모르는 사람이 있 나? 사랑도 그 정도면 병일세. 무
슨 호구가 되어서는......
자신의 딸이라는 그 한마디는 수많은 의미를 내포하고 있었다. 내 피를 이어서 그렇다는 자신감, 저게 내 혈육이라는 자랑, 뿌듯함 까지. 그걸 모두 읽어 낸 헬리오 스는 경멸 어린 목소리로 그를 꾸 짖었으나, 카이사르는 전혀 신경 쓰지 않았다.
"어떻게...... 저런 인재를 데리 고 있으면서 제게 일언반구도 없 을 수 있습니까?"
한편 경기장을 맹목적으로 바라 보던 노아 아인하르트가 가라앉은 목소리로 카이사르를 질책했다. 늘 인자하던 황금빛 눈은 먹이를 앞에 둔 맹수처럼 빛나고 있었다.
노아는 요새 들어 인재 육성에 심혈을 기울이고 있었다. 이제 은 퇴할 나이건만 제1 기사단장 자 리를 물려줄 사람을 찾지 못 했기 때문이었다.
'그나마 실력 있는 라이너는 제 2 기사단장 자리가 좋다며 승진 을 거부하니......•'
아직은 쌩쌩하니 앞으로 10여 년은 무리 없겠지만, 후계는 빨리 찾아서 빨리 교육할수록 좋았다. 그걸 잘 아는 노아는 지금 눈에 불을 켜고 자신의 후계자를 찾고 있었다.
그런데 그 후계자감이 바로 옆 에 있었을 줄이야.
"저런 인물이 있다면 오랜 친우 로서 제게 소개시켜 줘야 하는 거 아닙니까."
"내 딸을 며느리 삼을 생각이나
하고 있는 그대에게? 내가 미치 지 않고서야."
카이사르의 시니컬한 비아냥거 림에 노아는 입을 꾹 닫았다. 맞 는 말이라 할 말이 없었다.
노아는 카슈미르를 바라보는 라 이너의 눈빛을 알았다. 그의 아들 이 진심으로 웃는 순간은 카슈미 르 앞일 때뿐임을 알았기에, 늙은 이의 주책임을 알면서도 계속 마 음이 쓰였다.
어려서부터 병을 앓던 아이는
눈에 띄게 생기가 없었다. 텅 빈 눈을 하고선 의미도, 바람도 없이 하루하루를 보냈다.
몸이야 어떻게 할 수 없지만 마 음까지 병들고 있는 것이 너무 가 슴 아파 지방으로 휴양까지 보냈 었는데.
'아버지. 저 검을 배우고 싶어 요. 더 강해져서, 누군가를 지킬 수 있는 사람이 되고 싶어요.'
신의 안배인지, 라이너는 그곳에 서 병을 깔끔히 고치고 돌아왔다.
몸의 병도, 마음의 병도.
조숙하던 라이너가 노아에게 무 언가를 청한 건 그때가 처음이었 다. 죽어 있던 금빛 두 눈이 반짝 일 때, 노아는 울면서 신께 감사 인사를 올렸다.
휴양지에서 무슨 일이 있었기에 라이너가 그렇게 변했는지는 모른 다. 라이너는 그때에 대해 물어보 면 조개처럼 입을 꾹 닫았으니. 노아는 간신히 나아진 아이를 괴 롭히고 싶지 않았기에 더 묻지 않 았다.
그 이후 라이너는 필사적으로 검을 배웠다. 탐욕스럽다 싶을 만 큼 다급하게 검술을 습득하는 모 습에 무언가 있음은 확신했지만, 여전히 이유는 알 수 없었다.
시간이 지나며 라이너는 또다시 생기를 잃어갔다. 이전처럼 심각 한 수준은 아니었지만 의무와 정 의만을 좇는 그의 모습은 감정 없 는 기계 같았다.
그는 노아가 검 말고 다른 곳에 취미를 붙여 보라고 이리저리 찔
러봐도 끄떡없었다. 권력을 사용 해 몇 달 동안 강제 휴가라도 보 내야 하나 고민하고 있을 때.
'너 크리시스가의 공녀에게 춤을 청했다가 거절당했다던데. 사실이 냐?'
4 o]三'
분명 헛소문이라고 생각하고 별 의미 없이 던진 질문에 얼굴이 새 빨갛게 달아오르던 라이너를 보 며, 노아는 돌덩이 같은 제 아들 이 드디어 사랑을 배웠음을 알아 챘다.
이후 카슈미르 크리시스에게 관 심을 가졌음은 당연한 수순이었 다.
늙은이의 주책이 도를 넘어선 안 되기에 신경 써서 지켜보는 정 도에 그쳤으나, 사실 마음 같아선 중매쟁이라도 되어 도와주고 싶었 다.
"며느리라...... 재밌군."
지금 자신에게 한마디 던진 디 에고처럼, 아들에겐 적이 아주 많
았으니 말이다.
노아는 눈을 질끈 감았다 떴다. 분명 부드러운 투였음에도 묘하게 소름이 돋는 목소리였다. 디에고 가 눈을 휘어 싱긋 웃는 채로 턱 을 괴었다.
"중요한 건 공녀의 의사가 아니 겠나. 제삼자가 끼면 안 되지."
황태자 디에고 솔라티네는 늘 그랬다. 다정한 목소리로 한없이 타당한 소리를 하며 할 말을 잃게 했다. 눈치채지도 못하는 새에 서
서히 사람을 죄여 자신의 뜻대로 움직이게 하는 것이다.
"누구만 혈육이 있는 것도 아닌 데......
디에고의 중얼거림에 노아는 슬 쩍 눈을 피했다.
디에고의 혈육이라 함은 다름 아닌 황제였다. 이 제국의 황제. 황제가 나서서 중매라도 한다면 대적할 자가 있긴 한가. 저건 경 고였다.
"그러게. 혈육을 이용해야만 무 언가 할 수 있다면 그건 무능하단 소리 아닌지."
새로운 목소리가 서늘하게 중얼 거렸다. 디에고의 웃음이 딱딱해 졌다.
'대적할 자가...... 있군.'
노아는 착잡함을 숨길 수 없었 다.
황제조차 건드릴 수 없는 절대 권력. 신과 가장 가까운 자가 있
었다.
"자기의 일은 스스로 해야겠 죠?"
순한 눈꼬리가 아름답게 휘어들 었다.
교황, 엘리오르 라였다.
전혀 순하지 않은 은빛 눈동자 를 힐끗 본 노아는 속으로 한숨을 쉬었다.
노아는 엘리오르와 처음 만났던
순간을 기억했다. 그가 교황으로 즉위하던 때였다.
'새 교황이 오르자마자 신전에 피바람이 불었다기에 위험한 인간 일 줄은 알았지만, 그렇게까지 미 쳐 있었을 줄은.'
길게 늘어뜨린 물빛 머리칼과 우아하게 차려입은 교황 정복, 아 름다움을 형성화한 것 같은 하얀 얼굴에선 빛이 나는 것 같았다. 태양신이 인간으로 강림한다면 딱 그처럼 생겼으리라.
허나 노아가 그를 처음 본 그날, 신성력에 물들어 은색이 번져 가 는 중이던 검은 두 눈은 조금도 자비롭거나 신성하지 않았다.
그의 눈빛에 깃든 것은 광기였 다.
18살 소년의 것이라곤 믿을 수 없을 만큼 깊고 짙은 어둠에, 노 아는 제국이 폭군을 마주하게 될 거라고 생각했다. 한번 선택된 교 황을 바꿀 수 없다는 것을 알면서 도 교황의 탄핵을 황제에게 고해 야 하나 고민하기까지 했으나.
엘리오르는 노아의 예상과 다르 게 교황직을 문제없이 소화해 냈 다. 아니, 소화해 내는 정도가 아 니라 태어나기를 지배자로 태어난 사람처럼 완벽히 수행해 냈다. 즉 위한 지 얼마 지나지도 않아 신전 의 부정부패를 싹 갈아엎고 신전 의 수뇌부를 휘어잡은 엘리오르는 분명 유능한 군주였다.
하지만 노아는 여전히 불꽃 같 은 눈으로 엘리오르를 지켜보고 있었다. 엘의 방식은 지나치게 잔 인했고, 그의 엄격은 공포 정치에
가까웠다. 그는 완벽한 성과를 냈 으나, 그 성과를 내는 잔악한 방 식을 들여다보면 저게 인간이 맞 나 싶었다.
'언제 폭군으로 돌변할지 몰라 늘 주의를 기울이고 있었건만.'
엘리오르는 노아의 예상대로 돌 변하긴 했다. 폭군이 아니라 미친 사랑꾼으로 말이다.
노아는 3년 간 엘리오르를 지켜 보며 그가 진심으로 웃는 모습을 본 적이 단 한 번도 없었다. 그의
웃음이라곤 외부적 이미지 관리를 위한 기계적인 미소나 비아냥거리 는 비웃음뿐이었다.
북부 문제로 일어난 대귀족 회 의 날, 엘리오르가 카슈미르를 바 라볼 때. 노아가 엘리오르의 진심 어린 웃음을 본 건 그때가 최초였 다.
그러고 보면 인간보단 완벽하게 깎은 조각상에 가까워 보이던 엘 리오르가 근래 들어선 인간다워 보였다. 그가 변하기 시작한 시기 는 카슈미르가 나타난 시기와 맞
물렸기에, 노아는 모르고 싶어도 알 수밖에 없었다.
태양의 사자께선 아주 지독한 열병에 빠져 있었다.
"맞습니다. 자기의 일은 스스로 해야죠. 자기의 힘만으로 해야겠 죠."
노아가 엘리오르의 과거를 되짚 으며 회한에 빠져 있을 때, 디에 고가 불쑥 개입했다.
엘리오르가 디에고를 돌아보고,
사뭇 다른 색채의 두 눈이 마주했 다. 시선이 오가는 사이로 정전기 라도 오른 듯 따끔한 기운이 튀어 올랐다.
디에고가 순수하고 말간 웃음을 머금었다. 그가 타인의 속을 터트 리려고 작정했을 때 자주 짓는 웃 음이었다.
"이전에도 말했듯, 사람을 쟁취 함에 있어 권력을 개입시키는 건 몰상식한 짓이라고 생각합니다."
엘리오르의 두 눈이 가늘어졌다.
노아는 체념한 채로 또다시 과거 를 되짚었다.
'아, 그대가 아인하르트 후작인 가. 반갑군.'
그는 디에고와 처음 만난 순간 을 떠올렸다. 그의 키 절반도 안 되던 소년은 완벽한 지배자의 낯 을 하고 있었다. 어린 나이가 떠 오르지 않는 대단한 위엄에, 노아 는 다음 시대의 주인이 디에고임 을 확신했다.
황위 다툼으로 인해 매일 살해
위협을 겪는다던 소년은 조숙했 다. 사교술로 사교계를 휘어잡고, 수완으로 정치를 이어 나갔다.
많은 이들이 디에고 솔라티네를 완벽한 황태자라고 칭송했으나, 노아는 그의 중심이 텅 비어 있음 을 볼 수 있었다. 그는 생기가 없 었고, 무엇도 믿지 못했다. 황태 자는 되었으나 인간은 되지 못한 젊은 청년을 보며 가끔은 안타까 워했는데.
지금의 디에고는 달랐다. 여전히 지나치게 냉철한 면모가 남아 있
었으나, 생기가 있었다. 믿고 기 댈 곳을 찾은 것 같았다.
디에고가 바뀌기 시작한 순간 또한 카슈미르의 등장과 맞물려 있음을 노아는 모르지 않았다.
"......동감이에요. 그게 무엇이든 정정당당하게 해야겠죠."
엘리오르가 유려한 투로 말했다. 오가는 시선이 살벌했다. 어느새 다른 고위 귀족들의 시선도 이쪽 으로 몰릴 때였다.
-아! 말씀드리는 순간 공녀님께 서 허공을 밟고 도약하십니다! 마 나로 발판을 만드신 것 같군요. 아주 빠르고 능숙한 마나 운용을 보여 주고 계십니다! 대단한 실력 인데요
마나로 발판을 만들어 공중을 종횡하는 카슈미르로 인해 시선이 경기장으로 몰렸다. 치열한 기싸 움을 이어가던 엘리오르와 디에고 도 주저 없이 경기장을 바라보았
허공을 자유롭게 뛰노는 작은
인영. 화려하게 휘날리는 긴 머 리. 예술에 가까운 검 놀림. 미친 듯이 반짝이는 진분홍색 눈동자.
노아는 단번에 인정할 수밖에 없었다. 카슈미르 크리시스는 사 랑할 만한 사람이었다. 강하고도 사랑스러운 사람.
그는 나이 지긋한 노인인 만큼 카슈미르를 인재로서만 탐했으나, 그녀와 같은 세대인 젊은이들은 그녀를 사랑하는 여인으로 탐하는 것도 당연한 일 같았다.
' 힘내라.'
노아는 카슈미르를 상대하며 전 에 보여준 적 없는 환한 미소를 짓는 그의 아들을 물끄러미 내려 다보다 심심한 응원을 건넸다. 그 가 도와주기 시작했다간 황족에 신전까지 나설 테니, 그냥 가만히 있는 것이 제일 큰 도움일 터였 다.
아주 지독한 사랑의 수라장이었
'왜 내 딸을 가지고 다 지랄들인
거지?'
모든 상황을 지켜보던 카이사르 는 어이가 없어 헛웃음을 지을 뿐 이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