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충직한 검이 되려 했는데-177화 (177/254)

177 화

쾅! 쾅!

검이 부딪치고, 또 부딪쳤다. 땅 이 크게 울리고 공기가 강하게 진 동했다. 당장에라도 경기장이 폭 풍을 마주한 배처럼 뒤집어져도 놀랍지 않을 것 같았다.

'즐거워.'

나는 눈을 번뜩이며 라이너의

다리를 향해 검을 휘둘렀다. 가볍 게 몸을 뒤로 물려 피한 그는 내 머리를 노리며 달려들었다.

쾅!

다시금 금속의 마찰.

삶과 삶이 부딪쳤다. 나는 라이 너의 검에서 라이너를 읽을 수 있 었다.

라이너의 검은 올곧았다. 강하고 흐트러짐이 없었다. 전투 중 틈틈 이 보이는 라이너의 센스는 그의

전투 경험이 상당함을 말해 주었 다.

콰쾅!

나는 거침없이 검을 내리꽂았다-

-앗, 따, 땅이 혼들립니다! 공녀 님께서 마나로 파동을 일으키신 것 같습니다!

잔잔한 수면에 거대한 바위를 던지듯 땅에 박은 검 끝으로 마나 를 뒤흔들었다. 땅이 지진이 일어 난 것처럼 거세게 혼들리기 시작

했다.

좌중의 웅성거림이 점점 커지는 가운데, 라이너가 살짝 휘청거렸 다.

쉬익!

나는 그 틈을 놓치지 않고 공중 을 밟으며 그에게 돌진했다.

마찬가지로 마나로 발판을 만들 어 허공을 박차 오른 라이너가 아 슬아슬하게 내 검을 피했다. 검을 휘두를 때마다 거대한 돌풍이 일

어나 라이너와 나의 머리카락이 휘날렸다.

"전투 감각이 좋네요, 라이너."

"칭찬 감사합니다."

경기장에 착지한 나는 즐거워하 며 말을 주고받고, 땅에 검을 박 은 채 그걸 지지대 삼아 다리를 크게 돌려 찼다. 라이너는 몸을 숙여 내 발차기를 피했다.

라이너가 금빛 마나가 일렁이는 검을 높게 쳐들었다. 그의 마나는 그의 성격만큼이나 따사로웠다.

"당신과 같은 곳에 서기 위해 얼마나 노력했는지 모릅니다."

작게 속삭인 라이너는 쳐든 검 을 아래로 힘껏 휘둘렀다.

파지 직!

마나가 번개 모양으로 땅을 가 르며 오러처럼 뻗어 나왔다. 섬광 같은 속도에 나는 전속력으로 경 기장 끝까지 뒷걸음질 쳐서 피하 고 벽을 밟아 뛰어올랐다.

"꺅!"

마나가 벽에 부딪치며 관객들이 위치한 벽면 위를 뒤흔들었다. 강 렬한 진동에 관객석에서 비명이 터져 나왔다.

분명 피했음에도 무지막지한 마 나 파동에 뺨이 긁혔다. 손등으로 뺨을 쓱 닦아 내자 붉은 피가 묻 어났다.

탐색전은 이 정도면 충분했다.

이제 본격적으로 전투에 들어가야 할 때였다.

"라이너는...... 저를 즐겁게 해 주는군요."

핏방울이 손등을 타고 흘러 흙 위를 적실 때, 나는 환하게 웃었 다.

핏물이 흐르고 심장이 거세게 뛰는 이 순간, 나는 살아 있음을 가장 생생히 느낄 수 있었다.

"이제 난이도를 올려 보죠."

나는 한 손을 위로 올렸다. 허공 에는 마나의 방이 하나둘 형성되 기 시작했다.

마나의 방을 한꺼번에 여러 개 다루는 일은 무척 어려웠다. 마나 의 방을 몇 개 이상 다룰 수 있느 냐가 강한 마법사의 척도일 정도 였다.

나는 전쟁을 대비하기 시작한 이후부터 수련에 온 심혈을 기울 였다. 체력 단련, 방어 훈련, 마나 운영 훈련과 속도 강화 등 빼놓은

것 없이 열심히 했으나, 그중 가 장 열심히 수련한 것은 단연 광역 공격이었다.

'전쟁에선 여러 사람을 한 번에 상대해야 해.'

나는 마나의 방을 여러 개 만들 기 위해 부단히 노력했다. 내 몸 속의 마나는 영원히 샘솟는 샘처 럼 무한했으나, 이 넘치는 마나를 정밀하게 조작하는 것은 익숙하지 도 않았을뿐더러 원체 까다로웠

하지만 뼈를 깎는 수련으로 안 되는 것은 없었다.

'새로운 마나의 방을 만들면 원 래 만들었던 방이 사라지잖나! 좀 더 집중해라! 마나가 점토라고 생 각해. 네 넘치는 마나를 조금씩 떼어 내어 여러 조각으로 만드는 거다.'

'언니의 마나 운용은 너무 거칠 어. 계속 대포만 만드는 것 같다 고. 더 세밀하게 해 보는 거야. 샤프심을 일정한 크기로 부러뜨리 는 모습을 상상해 봐.'

이 수련엔 칼과 아리아의 도움 이 컸다. 나를 가르치는 일에 승 부욕이 도졌는지 둘이 누가 더 잘 가르치나 싸움이 붙으며 나는 이 리저리 굴러야 했지만, 그 덕분에 정밀한 마나 조작을 급속도로 배 울 수 있었다.

지이잉.

그리고 이것이 내 노력의 결과 였다.

-저, 저게 몇 개죠? 마나의 방 이...... 셀 수 없을 만큼 많습니

다••...!

경악이 깃든 사회자의 목소리가 귓전을 때리는 것과 거의 동시에 관객석에서 거대한 함성이 터져 나왔다.

나는 잠시 하늘을 올려다보았다.

잿빛으로 기이하게 일렁이는 동 그란 구로 가득 찬 하늘은 종말을 목전에 둔 것 같았다. 초월적인 존재의 검은 눈 같기도, 블랙홀 같기도 한 그것은 천천히 회전하 며 불길함과 섬뜩함을 가중시켰

다.

'화려한 볼거리를 보여 주겠다는 약속은 지켰습니다.'

나는 어디선가 보고 있을 이름 모를 관계자를 떠올리며 피식 웃 었다.

"......분명 당신의 발끝엔 닿았 다고 생각했는데."

난생 처음 별을 본 꼬마처럼 순 수한 경탄이 담긴 눈으로 내가 만 든 재앙을 올려다보던 라이너가

내게로 시선을 돌렸다.

"당신이란 별은 여전히 아득합 니다. 전 아직 멀었군요."

어쩐지 서글프게 들리는 목소리. 회한이 담긴 말투.

부정적으로 들리는 말이었으나, 라이너의 표정은 그와 상반되어 있었다.

밝게 웃고 있는 그는 어딘지 벅 차 보였다. 제 이상향이 건재함을 확인한 사람처럼. 내가 애정하는

황금빛 눈동자는 여전히 북두칠성 처럼 반짝이고 있었다.

"라이너는 저를 코앞에 두고도 멀리 있는 것을 보듯 하네요."

그런 라이너를 물끄러미 바라보 던 나는 낮은 목소리로 말했다. 허공을 채운 내 마나의 방들을 하 염없이 바라보던 그가 흠칫했다. 정곡을 찔린 눈빛이었다.

쉬익

수많은 잿빛 덩어리 중 하나가

라이너를 향해 빠른 속도로 날아 갔다.

그가 눈을 깜빡하는 사이, 그것 은 그의 뺨을 단숨에 긁고 사라졌 다. 라이너의 새하얀 뺨을 타고 핏방울이 흘렀다. 내 상처와 똑같 은 위치였다.

피를 느리게 닦아 낸 라이너가 멍하니 나를 바라보았다.

라이너가 나를 동경하다시피 하 는 것은 알고 있었다. 그게 싫진 않았다. 싫을 리가. 오히려 고마

웠다. 나같이 부족한 사람을 우러 러봐 주는 것이 기뻤고, 그 시선 덕분에 더욱 발전하고자 노력할 수 있었다.

하지만 지금처럼 그가 나를 아 득한 존재를 바라보듯 볼 때면 반 항심 비슷한 뜨거운 감정이 치솟 아 올랐다.

나는 그의 앞에 있는데, 그는 내 가 아니라 하늘을 보고 있었다.

"당신 앞에 있는 나를 마주하세 요. 나는 하늘이 아니라 이곳에

있습니다."

라이너를 똑바로 노려보며 단언 했다. 나는 찌르면 아프고 피가 나는 현실에 있었다.

확장된 동공으로 나를 담아내던 라이너가 어느 순간 헛웃음을 뱉 었다.

"......그렇네요. 제가 실수했습니 다."

황금빛 눈동자는 여전히 빛났다.

다만 이젠 별을 보는 아이의 눈 이 아니라 사람을 마주한 어른의 눈이었다.

"당신과 나의 계절이 너무 오랫 동안 엇갈려 있어서 잠시 착각했 습니다."

지이잉.

라이너의 머리 위로 마나들이 빠르게 밀집되었다. 금빛으로 반 짝이는 수많은 마나의 방은 은하 수 같았다.

이젠 자신만의 은하수를 가진 소년, 아니, 청년은, 나를 향해 웃 었다.

"이제 당신이 손 뻗으면 닿는 거리에 있다는 걸."

맹금류를 닮은 두 눈이 욕망으 로 번뜩였다.

라이너는 나를 원하고 있었다.

폭풍 전야의 고요가 우리 둘 사 이를 빼곡히 채웠다. 기묘한 감정 이 온몸을 뱀처럼 휘감았다.

'당신 같은 사람이 되고 싶어

요.'

' 응?'

문득 작은 소년이 떠올랐다. 검 은 머리에 푸른 눈, 약한 몸과 작 은 덩치까지. 지금의 라이너와 같 은 곳이 한 군데도 없는데도 늘 그와 겹쳐 보이던 소년이었다.

'저도 누군가를 지킬 수 있는 사 람이 되고 싶어요. 다시는...... 당 신에게 짐이 되고 싶지 않아요.'

나이에 비해 지나치게 성숙했던 소년은 결연하게 말했다. 세상을 지나치게 빨리 알아 버린 푸른 눈 에서, 나는 아리아를, 그리고 나 자신을 비춰 보았다.

'짐 아니었어. 나는 너랑 있어서 즐거웠는걸. 사람이 사람을 돕는 건 당연한 거야. 힘이 있다면 더 더욱. 그리고......

나는 그때 내 손가락 틈새를 간 지럽히던 소년의 머리칼이 얼마나 부드러웠는지 아직도 기억하고 있 었다. 빛을 잃고 죽어 버린 푸른

눈을 향해 부드럽게 미소 지었던 것 역시도.

'너는 나보다 좋은 사람이 될 수 있을걸. 분명히.'

빈말 같지만 진심이었다. 나는 그 아이의 가능성을 믿었다. 나보 단 훨씬 훌륭한 사람이 될 수 있 을 거라고 진심으로 믿고 응원했

'내 말이 맞았잖아요, 라이너. 당신은 나보다 좋은 사람이 됐 네.'

나는 속으로 중얼거리며 피식

웃었다. 라이너가

것과 동시에, 나

동경하고 있었다.

선함을 선망했다.

나를 동경하는

또한 라이너를

그의 올곧음과

같은 사람으로

서 같이 길을 걷고 싶었다.

이 싸움은 서로의 부재 뒤에 서 로가 부끄럼 없이 살았음을 증명 하는 시간이었다.

나는 내가 그와 헤어진 뒤에도 내 신념에 부끄럽지 않게 끊임없 이 투쟁했음을 말해 줄 생각이었

다. 내 강함은 그 투쟁의 증거였 다.

"저는 이곳에 있습니다."

나는 검을 세웠다. 그나 나나 극 까지 마나를 방출했다. 이번이 승 부를 결정짓는 마지막 합이 되리 라는 것은 분명했다.

긴 쇠붙이 너머 한 쌍의 금안을 응시했다. 승부욕, 혈기, 욕망 같 은 것들로 번들거리는 눈빛은 평 소의 라이너답지 않았으나, 때문 에 인간적이었다.

나는 그 눈빛이 마음에 들었다.

"그러니, 어디 한번 잡아 보시 죠!"

나는 씨익 웃으며 도약해 라이 너에게 전속력으로 돌진했다. 동 그랗던 마나의 방들이 날카로운 단도의 형태로 변모하며 라이너에 게 흉포하게 달려들었다. 라이너 가 나를 향해 달려올 때, 그의 마 나의 방 또한 유성우처럼 내게로 쏟아졌다.

콰콰콰쾅!

검이 맞부딪치고, 수많은 마나의 방들이 충돌했다.

"꺄아악!"

"젠장! 빨리 보호막 강화해!"

싸움의 여파에 일대가 휘말리며 크게 혼들렸다.

흙으로 된 땅이 뒤집어지고, 마 나 충돌의 여파로 경기장 벽에 흠 집이 생겼다. 경기장 전체를 지키 고 있던 마법사들이 나서서 보호

막을 강화했다.

마나의 방이 부딪치고 다시 생 성되기를 반복했다. 라이너는 한 번에 만들 수 있는 마나의 방이 나보다 적었음에도 재빠르게 다시 만들며 끈질기게 버텼다.

쾅! 쾅!

-대단합니다! 검이 보이지 않는 속도로 부딪치고 있습니다!

우리는 일반인의 눈엔 잡히지 않을 속도로 움직였다. 가파르게

치솟는 속도를 라이너는 이를 악 물고 좇아왔다. 나는 근육이 아파 오기 시작했으나 멈추지 않았다.

그리고 라이너가 극에 다다른 속도를 좇지 못하고 한 발자국 늦 게 움직인 순간.

쾅!

그때를 놓치지 않고 있는 힘껏 라이너의 검을 쳐 냈다.

그의 검이 허공을 날아 경기장 벽에 처박혔다. 온 힘을 다해 친

탓인지 긴 검날 전체가 모두 벽을 뚫고 박혀 있었다.

털썩.

라이너가 땅 위에 풀썩 누웠다. 마나 과다 사용으로 탈진이 온 것 같았다. 누운 채로 숨을 고르던 그는, 이내 크게 웃어 젖혔다.

"하, 하하하!"

라이너가 소리를 내어 웃는 건 처음 보는 것 같았다. 그는 참 후 련하게도 웃었다. 아무리 봐도 패

배자처럼 보이진 않았다.

한참 웃은 라이너는 천천히 일 어나 자리에 앉았다. 그의 황금빛 눈동자가 나를 따사롭게 응시했 다.

"이렇게나 간단한 것이었다면 진작에 할걸 그랬습니다. 진작에 당신에게 패배하고 당신과 마주할 것을. 당신만큼 강해지겠다고 쓸 데없는 고집을 부렸습니다."

그의 이마에서 떨어지는 땀방울 이 햇빛을 받아 반짝였다. 한껏

풀린 낯을 한 라이너는 나를 향해 손을 뻗었다.

"제가 졌는데, 그래도 잡으려고 하면 잡혀 주실 겁니까?"

나는 피식 웃고 망설임 없이 그 의 손을 잡았다. 거친 손은 온기 를 담고 있었다.

"제가 잡아 줄 겁니다."

나는 그를 있는 힘껏 잡아당겨 일으켰다.

나로 인해 자리에서 일어나게 된 라이너가 비틀거리다 앞으로 무너졌다.

"조심하셔야죠."

나는 성큼 그에게 다가가 기울 어지는 그의 몸을 내 몸으로 받쳤 다. 넘어질 뻔했던 그가 내 어깨 에 얼굴을 기대게 되었다. 잠시 굳어 있던 라이너는, 이내 옅은 웃음을 흘렸다.

"......당신은 제게 다정하다고 하지만, 나는 당신의 다정을 흉내 내는 것에 지나지 않습니다. 진짜 다정한 건 당신이지 않습니까."

낮은 목소리가 작게 속삭였다. 평소보다 더욱 깊고 짙어진 로즈 우드 향이 코끝을 간지럽혔다.

"잠시만, 기대겠습니다."

라이너가 오른팔을 내 허리에 가볍게 둘렀다. 이번엔 내가 살짝 굳었다.

내게 완전히 기댄 몸을 무리 없 이 지탱하고 있었을까.

라이너가 왼팔을 하늘 위로 들 고 검지와 중지를 세웠다.

"제가 졌습니다."

항복 표시였다.

시끄럽던 관객들이 일순 고요해 졌다.

시간이 멈춘 것 같은 순간. 사회 자가 입을 열었다.

-......라이너 아인하르트 경의 항복 선언...... 이번, 검술 대회의 승자는...... 카슈미르 크리시스 공 녀님이십니다.

잠시 간극.

와아아아!

그리고 고막이 터질 것 같은 함 성이 터져 나왔다.

나는 느리게 입꼬리를 올렸다.

검술 대회의 승자는 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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