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충직한 검이 되려 했는데-178화 (178/254)

178 화

"공녀님! 이 재킷 착용 부탁드립 니다!"

"잠시만요! 검집 한 번만 닦겠습 니다!"

나는 반쯤 영혼을 놓은 채 두 팔을 양옆으로 뻗었다.

다람쥐처럼 재빠르게 달려온 시 녀가 내게 고급스러운 제복 재킷 을 입혀 주었다. 그 옆에선 다른

시녀가 물 묻은 수건으로 흙먼지 가 잔뜩 묻은 내 검집을 닦기 시 작했다.

이번 검술 대회의 승자는 나였 다. 결승전에서 라이너를 상대로 반론의 여지 없이 확실히 승기를 잡았다. 나는 곧바로 이어질 시상 식의 주인공으로서 강제로 삐까번 쩍해지고 있었다.

'피곤해......•'

나는 의자에 몸을 깊게 기댄 채 고개를 젖혔다.

바로 직전에 소드 익스퍼트인 라이너와 경기를 치렀다. 금방이 라도 쓰러질 만큼은 아니었지만, 한숨 자고 싶은 건 사실이었다.

'정신 바짝 차리자. 곧 사건이 터진다.'

나는 눈을 질끈 감았다 뜨며 정 신을 집중했다. 원작대로라면 대 륙의 판도를 뒤엎을 절체절명의 사건이 바로 이 시상식에서 일어 날 터였다.

나는 반드시 그 사건을 막아야 했다.

그 생각을 하니 피곤해서 축축 늘어지는 몸이 단번에 긴장되었 다. 안 그래도 예민하던 감각이 더욱 예민해져 머리가 아파 오긴 했지만.

나는 곧 일어날 사건에 정신을 온통 집중한 채로 대기실의 빠른 흐름을 유야무야 따라갔다.

언니!"

그리고 그때, 내 피로회복제가 불쑥 모습을 드러냈다.

" 아리아."

원래 대기실에 외부인은 못 들 어오건만, 가족이란 이유로 들어 올 수 있었던 것 같았다. 나는 풀 린 낯으로 웃으며 습관처럼 두 팔 을 벌렸다. 아리아가 당연하다는 듯 내 품에 폭 안겼다.

작은 인영을 꼭 안은 채 몽실몽 실한 분홍 머리를 쓰다듬고 있자 면 모든 피로가 가시는 것 같았

다.

"슈슈. 수고 많았다."

뒤따라 들어온 칼이 내 머리를 쓰다듬었다. 평소 같지 않게 들뜬 기색인 그는 뿌듯해 죽겠다는 눈 으로 나를 바라보았다. 지금 당장 이라도 '!축! 카슈미르 크리시스 검술 대회 우승 !하!' 현수막을 들 고 수도 거리를 뛰어다니고 싶다 는 눈빛이었다.

"오늘 너무 멋졌어. 사실 그런 모습은 나만 보고 싶은데. 그래도

자랑스러웠어."

내 품에 머리를 부비적거린 아 리아가 속삭였다.

진심 어린 찬사에 괜히 부끄러 워진 나는 머리를 긁적였다.

"아버지가 바로 찾아오지 못해 미안하다고 하셨다. 아버지는 자 리를 지켜야 하셔서."

칼이 내 재킷 카라를 매만져 주 며 말했다. 크리시스의 자리를 텅 비워 놓을 수도 없으니 당연한 일

이었다. 나는 아무렇지 않게 고개 를 끄덕였다.

이후 칼과 아리아는 주절주절 이야기를 늘어놓았다. 내 경기 감 상평과 사람들의 반응에 대한 이 야기가 대부분이었다. 신난 아이 처럼 구는 두 사람을 물끄러미 바 라보던 나는 부드럽게 미소 지었 다.

이게 내가 지켜야 하는 일상이 었다.

"정말 죄송하지만...... 이제 공

녀님께서 준비를 마무리하셔야 하 는 시간이라 잠시 자리를 내어 주 셔야 할 것 같아요."

내가 칼, 아리아와 대화를 시작 한 탓에 내게 다가오지 못하고 안 절부절못하던 시녀들 중 하나가 조심스럽게 다가왔다. 반쯤 울먹 이며 말하는 게 어지간히도 무서 운 것 같았다.

"......쳇. 시상식에서 보자고, 슈 人、"

TT-

"언니, 먼저 가서 기다리고 있을 게."

칼과 아리아가 마지못한 표정으 로 자리에서 일어났다. 나는 두 사람을 달래며 문까지 배웅해 주 다, 문득 입을 열었다.

"오늘 시상식에서 말이야. 혹시 황제 폐하 쪽을 집중해서 봐 줄 수 있어?"

"황제? 굳이? 언니를 보기도 바 쁜데."

아리아가 무심하게 답했다. 황제 를 보는 건 정말 쓸데없는 일이라 는 투라 내가 다 헬리오스에게 미

안해 졌다.

"그래도. 부탁해. 시상식 동안만 집중해서 봐 줘."

내 등장으로 세계의 흐름이 많 이 뒤바뀐 만큼, 사실 그 사건이 실제로 일어나리라는 확신은 할 수 없다. 불확실한 내용을 다른 이들에게 알릴 수 없는 데다, 내 부 첩자가 어디 있는 누구인지 몰 랐기에 아무에게나 알릴 수도 없 었다.

칼과 아리아는 내가 가장 믿을

수 있는 사람이었다. 역시 자세히 는 설명하지 못하지만, 사건과 관 련한 부탁을 할 수 있을 정도였 다.

게다가 두 사람은 실력 있는 마 법사였다. 상황이 위험해진다면 빠르게 도와줄 수 있을 터였다.

"그게 네 부탁이라면."

칼은 기꺼이 수락했다. 이유조차 묻지 않은 채로. 그는 늘 내게 맹 목적으로 굴곤 했다.

자기를 힐끗 바라보는 나와 눈 이 마주친 아리아는 한숨을 쉬며 고개를 끄덕였다.

"여전히 불친절한 거 알지? 하 지만, 그래. 언니 부탁이라면."

'둘다 참 착해.'

나는 흐뭇하게 미소 지었다. 콩 깍지라는 걸 알긴 했으나 역시 내 눈에 칼과 아리아는 순하고 착하 게만 보였다.

"조금 뒤에 봐, 아리아. 칼도

요."

나는 떠나가는 두 사람에게 손 을 혼들어 주었다. 복도엔 사람이 꽤 있건만, 두 사람은 아쉬운 듯 자꾸만 뒤를 돌아보며 사람들의 통행을 방해했다. 나는 웃으며 그 들의 뒷모습을 끝까지 지켜봐 주 었다.

휙.

그리고 지나가는 인파 사이로 순간 내 코끝을 자극하는 익숙한 향취.

단숨에 정색한 나는 급하게 뒤 를 돌아보았다.

여기서 나면 안 되는 향이었다. 나지 말아야만 했다.

나는 눈동자를 재빠르게 굴리며 내 뒤로 지나가는 이들을 훑어보 았다.

'••••••없어.'

익숙한 뒤통수는 보이지 않았다. 분명 확인했음에도 마음이 풀리기

는커녕 더 답답해졌다.

미련을 버리지 못 하고 한번 가 봐야 하나 생각하고 있을 때, 누 군가 내 등 뒤에서 내 옷자락을 끌었다.

"저, 공녀님. 죄송한데 빨리 준 비를 마쳐야 해서 •"

"......아. 지금 가지."

나는 불편한 마음을 가득 끌어 안은 채로 시녀의 안내를 따라 방 으로 돌아갔다.

내 예상이 틀리길 바랐다. 진심 으로.

"이곳에서 대기하시다가 이름이 호명되면 나가시면 됩니다."

나를 경기장으로 들어서는 통로 까지 안내한 시종이 말했다. 나는 고개를 끄덕이고 소매 단추를 잠 갔다.

관계자들은 검술 대회 승자는 대대로 푸른 계열의 옷을 입는 관

습이 있다며 내게 푸른 제복을 입 혀 주었다. 심플함만을 추구하는 내겐 거추장스러운 느낌이 없잖아 있었지만, 디자인 자체는 무척 멋 있었다.

'검은 잘 있고.'

허리춤에 찬 검의 존재를 다섯 번째 확인한 나는 심호흡을 했다. 심장이 계속 빠르게 뛰었다. 시종 이 떠나고 텅 빈 통로엔 나 혼자 만 우두커니 서 있었다.

'제발 일어나지 말았으면 좋겠는

데.'

그 사건이 일어날 거란 가정 하 에 모든 계획을 짜긴 했지만, 그 렇다고 사건이 일어나길 바라는 건 아니었다. 사람의 목숨이 위험 한 일을 바랄 수 있을 리 없었다. 나는 원작이 어그러진 이상 차라 리 그 일이 아예 일어나지 않길 바랐다.

'그럼에도 일어난다면, 부디 내 게 그걸 막을 힘이 있기를.'

나는 잠시 누군가에게 기도했다.

기도를 들어주기만 한다면 그게 누구든 좋았다. 태양 신 라이든, 악마이든.

-이번 검술 대회의 우승자, 카 슈미르 크리시스 공녀님을 모시겠 습니다!

내 이름이 크게 호명될 때, 나는 걸음을 옮겼다.

경기장 위로 발을 딛자 빛과 함 께 환호성이 쏟아졌다. 미르로 지 낼 땐 빛도 영광도 없이 그림자로 서 조용히 일을 처리하곤 했건만,

검술 대회를 얼마나 했다고 벌써 환호성이 익숙해져 있었다.

나는 당당하게 발걸음을 옮기면 서도 내심 초조해하며 경기장 내 부를 훑었다.

'원작대로라면 이곳에 암살자가 잠입해 있다. 어디지? 기척은 전 혀 안 느껴져.'

안 그래도 예민한 감각을 더 날 카롭게 세워도 숨은 존재가 있는 것 같지는 않았다. 이로써 안심할 수 있다면 좋겠지만, 그러기엔 북

부의 흑마법이 지나치게 발달되어 있었다.

'저번 사냥 대회 때 소드 마스터 의 감각조차 탐지하지 못하는 거 대한 결계를 만들어 냈어. 이번에 도 감각을 죽이는 흑마법을 사용 했다면 내가 느끼지 못할 수도 있 다.'

나는 여전히 긴장의 끈을 놓지 않은 채로 빈 황좌 앞에 섰다. 긴 장한 티를 내지 않기 위해 입가엔 부드러운 미소를 걸쳤다.

-시상식을 위해 황제 폐하께서 경기장으로 입장하십니다!

사회자의 쩌렁쩌렁한 말과 함께 관중석에선 우레와 같은 함성이 들려왔다. 나는 옷자락을 힘껏 쥐 었다.

'이때가 가장 위험하다.'

시상식을 위해 황제가 친히 경 기장으로 내려오는 이때가 바로 가장 쉽게 위험에 노출될 때였다. 물론 많은 호위를 대동하고 안전 을 위해 수많은 절차를 거쳤겠지

만, 북부는 늘 상상을 초월했다. 무려 사냥 대회에서 거대 마수를 두 마리나 푼 놈들이니 말이다.

저벅저벅.

중앙 통로를 통해 누군가 걸어 나왔다. 나는 침을 꿀꺽 삼켰다.

빛나는 금발에 청명한 푸른 눈. 세월의 풍파에도 늙긴커녕 무르익 기만 한 외모. 장난스러우면서도 날카로운 눈빛. 주변에 만연한 지 배자의 아우라.

디에고의 아버지이자 현 황제, 헬리오스였다.

그가 여상스러운 발걸음으로 준 비된 황좌에 앉았다. 그곳에 앉아 턱까지 괸 자세는 얼핏 거만해 보 였으나, 태어날 때부터 제자리였 던 것처럼 잘 어울림은 부정할 수 없었다. 연륜을 담은 푸른 눈이 나를 뚫어져라 쳐다보았다. 조금 부담스러워졌으나, 나는 그 시선 을 피하지 않았다.

"우승자는 내게로 가까이 오라."

어느새 고요해진 경기장에서 헬 리오스가 또렷하게 말했다. 나는 고개를 한 번 숙이고 그를 향해 다가갔다. 시선은 그에게 고정한 채였으나, 사실 내 신경은 온통 헬리오스의 옆에 쏠려 있었다.

황좌 바로 앞까지 왔을 때, 헬리 오스는 부드럽게 미소 지었다.

"새로운 인재를 만나게 되어 기 쁘네. 이런 실력이 있으면 진작 귀띔 좀 해 주지. 이렇게나 재밌 는데."

"......부끄럽습니다."

내가 힘을 숨긴 것을 묘하게 질 책하는 투에 나는 다시금 고개를 숙였다. 헬리오스는 흥미주의자였 다. 그에게 가장 중요한 것은 제 국이었기에 흥미 때문에 나라를 팔아먹진 않지만, 나라만 팔아먹 지 않는 선에서 꽤 즐기고 있을 게 분명했다. 그런 헬리오스에게 있어서 재밌다는 말은 최고의 찬 사나 다름없었다.

"뭐, 이제라도 알았으니 다행이 라고 할까."

아무렇지 않다는 투로 말을 끝 맺은 헬리오스가 손을 까닥였다.

옆에서 대기하고 있던 시종이 내게 다가왔다. 나는 대기실에서 속성으로 배운 대로, 한쪽 무릎을 꿇고 엄숙히 고개를 숙였다. 정신 은 여전히 헬리오스의 주위에 집 중한 채였다.

"그대의 승리에 영광이 있으리."

헬리오스의 목소리가 단번에 진 지하게 바뀌었다. 할 땐 또 제대 로 해서 미워할 수 없는 사람이었

다. 시종이 내 머리 위에 황금 월 계관을 씌워 주고, 상품 중 하나 인 검을 내 앞에 내려놓았다.

"그대의 검을 뽑아라."

나는 천천히 고개를 들고 내 허 리춤에 달린 검을 유려하게 뽑아 냈다. 그리고 검 끝을 땅에 박으 며 무릎 꿇은 몸을 지탱했다,

"그대의 움직임을 신께서 축복 하시리니, 그대는 대의를 위해 검 을 사용할지라. 그대의 충성은 신 께 바치고, 그대는 사람을 위해

일하라. 이것이 그대의 사명이 라."

검술 대회 우승자는 어마어마한 상금과 명예를 받았지만, 그와 동 시에 거대한 사명 또한 받게 되었 다.

온 제국의 검사를 모두 제칠 정 도로 강력한 무력을 함부로 사용 하지 마라.

그건 명예인 동시에 제약이었다.

그러나 나는 나쁘지 않다고 생

각했다. 힘엔 당연히 책임이 따르 는 법이니.

"이제 태양 아래 살아갈 때 에......

쿵.

심장이 크게 내려앉았다. 나는 눈을 크게 떴다. 헬리오스의 진지 한 말이 안개처럼 희미해지며 사 라지고, 귓가에 들리는 건 내 심 장 소리뿐이었다.

'위험이 온다.'

극도로 날을 세운 직감이 경종 을 울려 왔다.

느낄 수 있었다. 이 공간의 이질 감을. 숨을 죽였던 위험이 움트려 함을.

헬리오스가 위험함을.

나는 굽혔던 무릎을 펴고 일어 섰다. 내 돌발 행동에 사람들이 당황하는 기색을 보였으나, 상관 하지 않았다.

나는 마수들이 들끓는 사지에서 수백 수천 번의 위기를 마주했으 나, 모두 살아남아 이곳까지 왔 다. 그리고 내가 여태껏 살아남을 수 있었던 건 내 직감을 무시하지 않았기 때문이었다.

'불확실한 상황에서 이성과 본능 이 싸울 땐 본능을 따른다.'

그것이 내 규칙이다. 나는 이번 에도 본능의 말을 따르기로 했다.

나는 쥐고 있던 검을 창처럼 힘 껏 던졌다.

쉬이익!

거친 바람 소리와 함께 검이 허 공을 갈랐다. 검 끝은 헬리오스를 가리키고 있었다.

헬리오스의 푸른 눈이 커지고, 사방에서 비명 소리가 터져 나왔 다. 급하게 호위들이 뛰어들려 했 으나 소드 마스터가 던진 검을 막 을 수 있는 사람은 없었다.

헬리오스가 죽음을 예감한 것처 럼 질끈 눈을 감을 때.

"크아아악!"

비명은 다른 곳에서 터져 나왔 다.

강하게 날아간 검에 투명한 베 일이 찢기고, 허공으로 보였던 곳 에서 사람의 형태가 일렁였다. 붉 은 피가 헬리오스에게로 튀었다.

모두가 경악한 가운데, 누군가 천천히 모습을 드러냈다.

온통 새까만 차림에 날카로운

단검을 든 남자가 내 검에 어깨를 맞고 괴로워하고 있었다.

"다들 뭐 하고 있는 건가!"

人、e 르

■ O •

혼란에 휩싸여 모두 옴짝달싹 못하는 사이, 나는 상품으로 받은 검을 빠르게 뽑아 겨누었다. 여분 의 검이 하나 더 있어 다행이었 다.

"암살자다! 폐하를 보호하라!"

오늘 일어나기로 예견된 일은, 바로 황제 헬리오스 암살 사건이 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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