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충직한 검이 되려 했는데-179화 (179/254)

179 화

경기장이 아수라장이 되는건 순식간이었다. 사방에서 비명이 터져 나왔고, 관중들은 이러지도 저러지도 못한 채 우왕좌왕했다.

"커 헉!"

내 외침을 신호로 삼기라도 한 건지 허공에서 검은 옷을 입은 이 들이 속속히 경기장에 등장하기 시작했다.

숫자는 열 명. 모두 상당한 수준 의 강자였다. 그들은 가장 먼저 호위들을 제압했다. 황제를 향해 달려가려던 기사들이 하나둘 쓰러 졌다.

"폐하!"

"젠장!"

가장 먼저 반응한 건 역시 노아 와 카이사르였다. 순식간에 무장 한 그들은 관객석을 박차고 경기 장으로 뛰어들었다.

쾅!

" 무슨••••••!"

갑작스럽게 치솟아 오른 보랏빛 결계에 튕겨 나간 두 사람이 당혹 스러운 표정을 지었다. 지독하게 풍겨 오는 불길한 기운이 익숙했 다. 나는 얼굴을 일그러뜨렸다.

소드 익스퍼트도 부수지 못한 최고위급 결계. 사냥 대회에서 본 그것이었다.

"......부순다."

카이사르가 검을 세웠다. 붉은 두 눈이 섬뜩하게 번뜩이고, 짙은 붉은색 오러가 그의 검날 위에서 날뛰었다. 흉흉한 살기가 멀리 있 는 여기에서도 느껴졌다.

"안 됩니다! 이 결계, 공격 반사 형입니다. 여기에 당신 오러를 날 리면 관객들은 다 죽는 겁니다!"

결계에 손을 얹고 재빠르게 결 계의 성분을 읽어 낸 노•아가 카이 사르를 만류했다. 그는 긴급 상황 에 얼굴을 심각하게 굳히고 있었

으나, 여전히 침착했다.

"......빌어먹을!"

검을 내린 카이사르가 초조하게 경기장을 내려다보다 나와 눈이 마주쳤다. 그의 두 눈이 일렁였 다. 그답지 않게 성급한 것이, 아 무래도 나를 걱정하고 있는 것 같 았다.

" 나와요!"

아리아가 날카롭게 소리치며 인 파를 헤집고 결계 앞에 섰다. 아

리아는 함께 온 칼과 함께 결계를 읽어 내기 시작했다. 안전을 위해 곳곳에 배치되어 있던 마법사들도 함께했다.

"이 결계는 저희가 해체합니다. 사람들이 이쪽으로 오지 못하게 통솔해 주십시오."

칼이 두 손을 빠르게 움직여 수 많은 마법진을 전개했다. 핏빛으 로 빛나는 마법진들은 마법을 잘 모르는 내가 봐도 섬뜩했다. 붉은 눈이 사납게 이글거리는 게 상당 히 분노한 것 같았다.

확실히, 결계를 안전하게 해체할 수 있는 건 소드 마스터가 아니라 마법사다. 노아와 카이사르는 관 객들을 통솔하고, 칼과 아리아는 결계를 해체하기 시작했다.

이 모든 것은 순식간에 이루어 졌다. 그 찰나를 눈에 담아 관객 석의 상황을 확인한 나는, 당장 급박한 경기장의 상황을 살폈다.

'외부의 지원을 기대하긴 힘들

상황이 저 꼴이다. 경기장으로 들어올 수 있는 입구란 입구는 모 두 결계로 막혔다. 경기장에 있는 이들은 나와 황제 헬리오스, 호위 와 시종 몇 명, 그리고 암살자들 뿐.

몇몇 호위들은 이미 제압당했고, 암살자들은 헬리오스를 노리고 있 었다.

나는 느리게 숨을 뱉곤 검 손잡 이를 꽉 쥐었다. 처음 잡은 검은 길을 들이는 데에 꽤 시간이 필요 한 법이건만, 명검은 확실히 명검

인지 오랫동안 잡아온 것처럼 익 숙하고 편했다.

이미 각오했던 상황이다. 움직여 야 했다.

검으로 땅을 찍자 일대가 강하 게 혼들렸다. 여기저기서 비명이 터져 나오고, 공격 태세를 갖추던 암살자들이 중심을 잃고 비틀거렸

나는 자리를 박차고 헬리오스를

향해 바람처럼 달려갔다. 헬리오 스가 순식간에 눈앞에 나타난 나 를 크게 뜬 눈으로 바라보았다.

"••••••공녀?"

"조금 전에 폐하를 향해 검을 던진 대역죄는 부디 용서해 주시 기 바랍니다. 보시다시피 쥐새끼 가 있어서."

"커 헉!"

나는 내 검에 어깨가 찔려 쓰러 져 있는 암살자의 복부를 꽉 밟고 그의 어깨에 박힌 내 검을 뽑아냈 다. 암살자가 고통스러운 비명을

토해 냈고, 붉은 피가 솟구쳤다.

'이제 정말 익숙해졌구나.'

피와 살인에 익숙해지기 위해 긴 시간 수련한 결과, 이젠 코앞 에서 사람이 죽고 피가 터져 나와 도 담담하게 굴 수 있었다. 속은 여전히 뒤집어졌지만.

나는 양손에 검을 든 채 헬리오 스를 돌아보았다.

화악.

"웬만한 검으론 못 뚫을 겁니다. 누가 달려들면 바로 소리쳐 주세 요."

헬리오스의 몸을 마나로 둘렀다. 혹시 내가 미처 보지 못한 새에 암살자의 검이 그에게 날아올까 싶어서였다. 헬리오스가 무어라 말하기도 전, 나는 등을 돌려 은 밀히 다가오던 암살자를 향해 피 가 묻어 있는 검을 던졌다.

"크아악!"

다리에 검이 박힌 암살자가 속

절없이 무너졌다. 나는 긴장한 기 색으로 다가오는 암살자들을 서늘 한 눈빛으로 훑어보곤 다른 검을 고쳐 잡았다.

"여기서 움직이시면 안 됩니다•"

그 말을 끝으로, 나는 암살자들 을 향해 도약했다.

"크윽!"

나와 검을 맞댄 암살자가 팔을

부들부들 떨며 밀려났다. 나는 무 표정으로 머리 위에 마나의 방을 만들었다.

그리고 내 뒤를 노리는 암살자 에게로 쏟아부었다.

"크악!"

등에 진득한 액체가 묻는 게 느 껴졌다. 나는 또다시 마나의 방을 생성하며 눈에 보이는 암살자들에 게 날카로운 마나의 파편들을 쏟 아부었다.

쉬이익! 쉬익!

비처럼 쏟아지는 잿빛 칼날들을 보며, 나는 아주 잠시 내게 '재앙' 이란 이명이 꽤 어울린다고 생각 했다.

칼날이 닿은 곳마다 붉은 것이 터져 나온다. 내 칙칙한 마나는 조금도 아름답거나 고귀해 보이지 않았다.

그저 기괴한 재앙 같았다.

그 아래에 살수 대부분이 쓰러

졌다. 나는 내 공격으로 인해 만 신창이가 된 그들의 꼴을 하나하 나 눈에 담았다.

내가 앗은 생명에서 도망쳐선 안 됐다. 고통스러울지언정 마주 하고 기억해야 했다. 그것이 괴물 이 되지 않는 방법이었다.

쏟아지는 공격 아래에서도 용케 서서 버틴 살수들은 직접 검을 휘 둘러 처리했다. 살수들은 꽤 실력 자들이었지만 그들을 처리하는 건 어렵지 않은 일이었다. 살수 하나 의 다리를 베어 전투 불능으로 만

들었을 때, 다른 살수 하나가 자 리를 박차고 날 향해 달려왔다.

'심상치 않은 놈이다.'

직감이 강하게 울리기도 했고, 달려오는 속도부터가 범상치 않았 다. 내가 경계하며 검을 세울 때.

"여전히 난폭하군."

귓가에 익숙한 목소리가 스치고, 나는 얼음 마법에 걸린 것처럼 동 작을 완전히 멈췄다.

검은 천으로 온몸을 칭칭 가려 눈조차 잘 보이지 않았으나 알 수 있었다.

불쾌하고 어두운 기운에, 모든 계절을 거슬러 겨울로 만드는 지 독히 시린 향취. 가라앉은 저음.

모두 내게 익숙한 것이었기에.

어쩌면 다시 만났던 그 순간 이 미 알았을지도 모른다. 그 죽어 버린 두 눈을 보며, 우리는 다른 길을 걷게 될 것 같다고 생각했으 니까 말이다.

나는 여태껏 직감을 무시하지 않은 덕에 살아남았지만, 가끔 어 떠한 직감들은 무시해 버리고 싶 을 때가 있었다. 소드 마스터의 예리함은 축복인 동시에 저주였 다.

점점 더 가까워지는 진상에도 끝까지 속으로 부정했음은 어째서 인가.

그래. 내가.......

"날 살린 걸 후회하게 될 거라

고 하지 않았나."

아직 그를 친구로 여기고 있어 서.

나는 헛숨을 들이쉬며 눈앞으로 다가온 인영을 바라보았다.

"미련한 놈."

지그문트. 지그문트 하이드였다.

서걱.

"......아."

순간 넋을 놓은 나는, 등 뒤에서 내 어깨를 노리고 날아온 단검에 조금 느리게 반응했다. 어깨에 단 검이 박히는 불상사는 면했으나 날카로운 날붙이가 어깻죽지를 긁 고 지나갔다.

"슈슈!"

누군지 모를 사람이 나를 부르 는 게 얼핏 들렸으나, 나는 돌아 보지 않았다. 내 눈앞의 인영에게 서 시선을 돌릴 수가 없었다.

"......지그문트 하이드."

쇠를 긁듯 거칠고 잠긴 목소리 가 입술 새로 튀어나왔다. 깊게 쓴 후드 아래로 희미하게 보이는 붉은 입술이 호선을 그렸다. 그 웃음이 기쁨을 담았는지, 아니면 다른 감정을 담았는지는 읽히지 않았다.

"전에 내게 진심으로 나오라고 했지. 오러를 꺼내라고."

지그문트가 날 향해 검을 겨누 었다. 그 자세까지도 내 눈엔 너

무 익은 것이었다.

"이번엔 네 말대로 해 주마."

화아악!

그의 검날 위로 강대한 마나가 밀집되었다. 순수한 오러와 다르 게 불길하고도 기이한 느낌이었 다.

'흑마법이었구나.'

이제야 퍼즐 조각이 맞추어졌다.

늘 지그문트에게서 느끼곤 했던 불쾌한 기운. 기시감을 느끼면서 도 정의 내리지 못했던 그것은, 다름 아닌 흑마법의 기운이었다. 그에게선 늘 흑마법의 기운이 풍 겼다.

나는 초점이 잘 잡히지 않는 눈 으로 그의 검을 내려다보았다. 그 가 찾은 정답을.

'정상적으로 검술을 연마하고 자 연의 흐름을 따라 검을 휘두르는 검사들의 오러는 단 하나의 형태 다. 정답은 하나인 것이 자연의

이치이기 때문이다. 다만 세상에 서 가장 정결한 오러의 흐름에 다 른 기운이 섞일 때, 자연의 이치 가 뒤틀리며 수많은 오류를 정답 으로 인식한다. 나는 오러의 색이 두 개인 검사를 본 적이 있다. 그 는 내가 생전에 봐 온 모든 검사 중 가장 불결한 기운을 품고 있었 다.'

언젠가 라이너에게 오러가 두 개인 경우를 물었을 때 들었던 정 보였다.

아마 지그문트는 흑마법과 검술

을 병행했으리라. 흑마법과 오러 는 상극이었기에, 그의 오러에 문 제가 생긴 것도 놀라운 일은 아니 었다.

그의 검날 위로 검은색과 형광 빛 진분홍색이 뒤섞여 일렁인다.

이것이 지그문트의 오러였다.

"이, 개 같은 새끼......

나는 물기 어린 목소리로 짓씹 듯 내뱉었다. 속이 뒤틀리고, 감 정이 크게 파도쳤다.

나는 물기가 뒤섞인 헛웃음을 뱉다, 검 손잡이를 으스러져라 잡 았다.

이때를 생각하긴 했다. 내 정체 를 드러내게 된다면 가장 극적이 고 영웅의 모습으로 새겨질 수 있 을 이때에 드러내려고 했다. 황제 암살 사건이 일어나지 않기를 바 라면서도 계획은 그렇게 짰다.

하지만 이런 걸 바란 건 아니었 다. 내가 없애야 할 상대로 지그 문트가 서 있는 것은 바라지 않았

다.

고통스러워 이를 악물면서도, 나 는 가까스로 입꼬리를 올렸다. 그 에게 약한 모습을 보이고 싶지 않 았다.

"네게 마음을 주는 게 아니었는 데."

혼잣말처럼 속삭인 나는, 방대한 마나를 끌어 검에 퍼부었다.

쉬이익!

주위의 모든 마나가 게걸스럽게 집어삼켜졌다. 검날을 감싸고 마 나의 소용돌이가 일어났다.

모든 빛을 빨아들이고, 정전.

치지직.

빛 한 점 없는 칠흑 같은 오러 가 들끓듯 이글거렸다.

" 저건••••••!"

"세상에, 저게 무슨!"

반투명한 결계 너머로 내 오러

를 본 이들이 동시다발적으로 웅 성거리기 시작했다.

검은 오러.

미르의 상징이었다.

"크흑!"

등 뒤로 신음 소리가 들렸다. 지 그문트를 제외하면 마지막 살수였 다. 내 뒤를 치려고 다가오던 그 는, 검은 오러에 묶여 땅에 머리 를 박았다. 검은 오러가 흉흉한 기세로 그의 살을 파고들었다.

"윽! 당신, 당신이 미르입니까?"

살수가 경악이 깃든 목소리로 믿기지 않는다는 듯 물었다. 죽을 지도 모르는 상황인데 그걸 묻는 걸 보면 어지간히도 놀란 모양이 었다.

잠시 멈칫한 나는 주위를 둘러 보았다. 모두 하나같이 패닉에 빠 진 표정을 하고 있었다.

제국에 셋뿐인 소드 마스터 중 한 명이자, 마수 관련 의뢰를 독

식하다시피 한 마수들의 재앙, 미 르.

그 누구도 미르의 정체를 밝혀 내지 못했다. 그러던 와중 크리시 스가의 공녀가 용병왕 미르일 거 라고 예상한 이가 어디 있겠는가.

나는 느리게 헛웃음을 뱉었다.

"••••••그래."

움직임으로 후드가 살짝 걷히며 희미하게 드러난 지그문트의 보랏 빛 눈동자에, 형형한 붉은빛이 돌

기 시작한 내 두 눈동자가 비쳤 다.

나는 느릿하게 고개를 젖혔다.

"내가 미르다."

미르. 내가 평생을 이어 온 투쟁 의 이름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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