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충직한 검이 되려 했는데-180화 (180/254)

180화. 외전 1

"정말 이 의뢰를 혼자 처리하겠 다고?"

의뢰지를 몇 번이고 다시 읽은 용병 길드의 의뢰 접수자 하울은 조심스럽게 되물었다. 몇 번째 계 속된 되물음이었기에, 나는 약간 의 짜증을 담아 고개를 끄덕였다.

"말했잖아. 내가 갈 거야. 접수 해."

"하지만 혼자는 너무 위험하네!"

하울이 조금 언성을 높였다. 그 간 정이 든 건지 아니면 길드를 자주 이용하는 방랑 용병 하나가 사라지는 게 기껍지 않은 건지는 알 수 없었으나, 그래도 걱정해 주는 것이 나쁘진 않았다. 나는 코웃음을 쳤다.

"뭐, 어차피 나 말곤 지원할 사 람이 없잖아."

마수 토벌은 다양한 의뢰들 중 에서도 가장 위험한 종류였다. 이

번에 마수 토벌을 의뢰한 마을은 마수가 자주 출몰하진 않았으나, 거대 마수의 출몰 위험이 있어 많 은 이들이 꺼려했다. 지원하는 사 람이 아예 없다고 봐도 과언이 아 니었다.

'한 명이서 처리할 수 있는 난이 도는 아니지.'

하울의 만류는 타당했다. 나는 짧게 한숨을 쉬었다.

"어쩔 수 없어. 이번 달은 돈이 급해."

"그래도 그렇지••••••!"

"제발, 하울."

나는 간절한 눈으로 그를 올려 다보았다. 위험해도 할 수밖에 없 었다. 이번 달 요정 숲의 약수를 아직 구하지 못했으니까. 이 정도 일은 해야 부족한 돈을 메꿀 수 있었다.

"젠장, 애한테 못 할 짓을 하는 기분이야. 이 일을 때려치우든지 해야지......

복잡한 낯으로 나를 바라보던

하울은 결국 의뢰를 접수해 주었 다. 나는 그제야 마음 놓고 웃었 다.

"지금까지 살아남은 건 초심자 의 운에 가깝네. 계속 이렇게 무 모하게 굴다간 정말 죽어."

하울이 진지하게 조언했다. 구구 절절 옳은 말이었다. 나는 씁쓸한 입 안의 침을 삼키며 느리게 입꼬 리를 올렸다.

"그럼 그게 내 운명이겠지."

초연하게 답했으나, 사실 나도 두려웠다. 세상 어느 누가 죽음을 기껍게 받아들일 수 있겠는가.

마수의 흉포한 이빨과 날카로운 발톱을 마주할 때면 온몸이 덜덜 떨렸다. 도망가고 싶었다. 그럼에 도 이 일을 그만두지 않는 건 내 죽음보다 더 두려운 것이 있기 때 문이었다.

나는 내가 죽는 것보다 아리아 가 죽는 게 더 두려웠다.

"지금 바로 출발한다고 의뢰인

한테 연락해 줘."

"야, 야! 미르!"

더 남아 있으면 위험한 의뢰에 무모하게 도전한 걸 철회하고 싶 어질 것 같아, 나는 빠르게 길드 밖으로 발걸음을 옮겼다.

사박사박.

겨울을 맞은 대지엔 새하얀 결 정들이 수놓여 있었다. 나는 밟을 때마다 울려 퍼지는 경쾌한 소리 를 즐기려 노력하며 장정들의 반 도 안 될 어깨를 쭉 폈다.

누구도 내가 겁먹었음을 알 수 없게.

'오늘도 살아 보자.'

내일 아침 해를 보는 것이 매일 의 내 단출한 소원이었다.

"당신이 정말 이번 의뢰를 수행 하기 위해 온 용병이란 말입니 까?"

마을의 수장, 론이 세 번째 되물 었다. 나는 조금 위축된 채 느적 느적 고개를 끄덕였다. 시선은 땅 에 고정한 채였다. 그의 실망한 눈빛을 보고 싶지 않았다.

"마수 토벌은 당신 생각보다 쉽 지 않을 겁니다."

론이 마뜩잖은 투로 말했다. 내 가 일을 제대로 할 수 없으리라 짐작한 것 같았다.

찬바람이 쌩쌩 부는 목소리 때 문에 아직도 단단해지지 못한 마

음에 생채기가 났으나, 나는 담담 한 낯을 가장했다. 익숙한 반응이 었기에 그럴 수 있었다.

평균적으로 큰 덩치에 우락부락 한 인상을 자랑하는 용병들과 달 리, 나는 키도 작고 비쩍 말라 믿 음직스럽지 않다는 걸 나 스스로 도 알았다. 온몸은 검은 망토로 칭칭 감은 데다 얼굴은 가면에 가 려져 수상해 보이기까지 했다.

여태껏 만나 온 모든 의뢰인들 은 내 외양을 보고 고깝지 않은 기색을 보였다. 어떤 의뢰인은 어

디 꼬마가 어른에게 장난을 치냐 며 역정을 내기까지 했다.

그들을 욕할 생각은 없었다. 그 들도 그들 나름대로 간절한 마음 으로 용병 길드에 의뢰를 한 것일 텐데, 얼핏 봐도 믿음직스럽지 않 은 사람이 나오면 실망스러운 게 당연하니까.

"어차피 저 말곤 하겠다고 하는 사람 없잖습니까."

'이럴 땐 강하게 나가야 해. 아 니면 계속 무시할 테니까.'

티 나지 않게 심호흡한 나는 눈 을 사납게 뜨고 론을 올려다보았 다. 키가 워낙에 작아 평균 장정 의 키를 가진 그를 볼 때도 가파 르게 고개를 쳐들어야 했다. 이럴 땐 강하게 나가야 했다. 한번 얕 잡히면 계속 무시당하니까.

내가 이렇게 뻔뻔하게 나올 줄 몰랐던 건지, 론은 조금 흠칫했 다. 나는 조금이라도 덩치가 커 보이기 위해 어깨를 쭉 펴 보았

"강함은 덩치에서 나오지 않습 니다. 제국에 둘뿐인 소드 마스 터, 노아와 카이사르도 덩치가 큰 편은 아닙니다. 저는 아직 무명이 지만 그래도 마수 토벌 경험이 몇 번 있습니다. 이 근방의 마수를 모두 처리하는 건 무리여도 농작 물에 피해를 주는 작은 마수들 정 도는 충분히 처리할 수 있습니 다."

최대한 여유 넘치게 말했다. 저 렴한 가격에 싸구려 목소리 변조 반지를 사 둬서 다행이었다. 어린 애 목소리로 이런 말을 했다면 치

기로밖에 들리지 않았을 테니까.

"으 "

O

론이 짧게 신음을 뱉었다. 금방 이라도 나를 내쫓을 듯 서늘하던 그의 기세가 조금 누그러졌다. 그 사실을 알아챈 나는 가면 밑으로 당당하게 웃어 보였다.

"잘할 수 있습니다. 속는 셈치고 맡겨 주세요."

조금 머뭇거리던 론은, 결국 고 개를 끄덕였다.

나는 용병계에서 내 입지를 천 천히 넓혀 가고 있었다.

난 앓는 소리를 내뱉으며 땅에 몸을 뉘었다. 서툰 솜씨로 겨우 지은 허접한 1인용 천막의 천장 이 북부의 매서운 칼바람을 맞아 위태롭게 흔들렸다.

난 쌀쌀한 날씨에 코를 훌쩍거

리며 모포 속으로 꼬물꼬물 들어 갔다.

'피곤해......

하루 종일 말을 타고 달려 이곳 까지 와서는 쉬지도 못하고 곧바 로 토벌을 시작했다. 마나 운용 도, 검 놀림도 아직까지 많이 미 숙했기에 멋지게 사냥을 했다기보 단 마수와 우당탕탕 술래잡기를 한 것에 더 가까웠다. 그 과정에 서 구르고 부딪치고 얻어맞고 쏘 이고 찔려 온몸이 욱신거렸다.

'멍청이. 하필 터를 잡아도 키피 라의 서식지에 잡아서.'

온몸에 붉은 가루를 뒤집어쓴 나는 스스로가 조금 처량해져서 입술을 삐죽거렸다. 실전에선 무 지도 죄악이다. 이곳이 키피라-무 리를 지어 사는 나비 형태의 야행 성 마수. 날개를 펄럭일 때마다 환각을 일으키는 붉은 가루가 날 린다-의 서식지인지 모르고 천막 을 짓던 나는, 밤 사냥을 끝내고 돌아온 키피라 무리와 호된 싸움 을 치러야 했다.

'......물로 닦았는데도 안 사라지 네.'

나는 붉은 가루를 정통으로 맞 았던 두 눈을 손등으로 벅벅 닦아 냈다. 따가운 두 눈에 환각이 자 꾸만 아른거렸다.

붉은 가루의 환각은 내가 싫어 하는 것과 원하는 것을 함께 보여 주는 모양이었다. 아리아의 시체 와 건강한 아리아를 함께 보여 줬 으니 말이다.

나는 옅게 한숨을 쉬고 눈을 질

끈 감았다. 더 이상 환각은 보이 지 않았으나, 아무것도 보이지 않 으니 문득 오싹해졌다.

"달의 아이는 아름답고, 불의 아 이는 은총이 가득하다네. 물의 아 이는 슬픔이 많고, 나무의 아이는 먼 길을 떠나지......

나는 이 적막을 환기시키기 위 해 속삭이듯 노래를 부르기 시작 했다. 나밖에 없는 천막 안이 스 산했다. 천막을 흔드는 거친 바람 소리가 꼭 유령이 날아다니는 소 리 같았다.

"황금의 아이는 사랑하고 베풀 줄 알며, 땅의 아이는 열심히 살 아가."

반쯤 떨며 주문을 외우듯 노랫 말을 중얼거렸다. 나는 노래를 완 창하는 것에만 온통 집중하고 있 었다.

"태양의 아이는 예쁘고, 즐겁고, 착하고......

쾅-!

재앙은 예고 없이 찾아왔다.

엉성하던 천막이 모래성처럼 무 너지고, 땅이 크게 울렸다. 나는 반쯤 본능적으로 옆으로 굴러 일 어난 뒤 새하얗게 질린 채로 내가 누워 있던 곳을 짓밟고 선 거대한 발을 바라보았다.

크르릉.......

개를 닮은 외양에 장정의 열 배 쯤 될 법한 거대한 덩치. 섬뜩하 게 불타오르는 붉은 눈동자와 거 대한 송곳니를 타고 흐르는 역겨

운 타액. 살 썩는 역겨운 악취.

두 눈으로 본 것을 믿을 수 없 었던, 아니, 믿고 싶지 않았던 나 는 파르르 떨리는 입술을 벌렸다.

지옥에서 기어오는 사냥개, 데베 라였다.

'어째서, 어째서 데베라가 여기 에......

거대 마수가 출몰할 가능성이 있음은 알았다. 하지만 그 가능성 은 무척이나 희박해 단순한 마수

들만 처리하는 의뢰라고 생각해도 무관하다고 들었기에 무모하게 혼 자 온 것이었다. 본능적인 두려움 에 온몸이 덜덜 떨리기 시작했다.

느낄 수 있었다. 이 괴물은 내가 감당할 수 없었다.

어깨너머로, 도서관에서 빌린 책 으로, 또 혼자 마구잡이로 휘둘러 보며 검을 배우기 시작한 지 1년 도 채 되지 않았다. 평균적으로 보았을 때 빠르게 습득하고 있다 는 평을 듣긴 했으나, 저런 괴물 을 홀로 상대할 수 있는 수준은

결단코 아니었다.

"아••••••

흉포한 붉은 눈동자와 눈이 마 주치고 온몸이 굳었다. 감당할 수 없는 천재지변을 마주한 인간처럼 아득해지고 나의 무능을 절감했 다. 나는 눈물을 흘리고 싶은 걸 꾹 참았다.

'여기서 이렇게 죽는구나.'

'하울의 말을 들을걸' 하는 뒤늦 은 후회가 올라왔으나, 이는 오래

하지 않았다. 수많은 생각을 돌고 돌아 결국 떠오르는 것은 내가 사 랑한 아이의 얼굴이었다.

'내가 죽으면 아리아는 누가 보 살펴 주지?'

그것이 가장 문제였다. 아픈 아 리아를 돌봐줄 사람이 없다는 거- 살고 싶다는 지극히 인간적인 본 능보다 그 생각이 먼저였다.

나는 이를 악물며 두려움을 참 고 땅에 떨어진 검을 빠르게 주워 들어 발도했다.

J스 르丄르-

■■..." o •

날이 무디고 은빛보단 칙칙한 잿빛에 가까운 볼품없는 검이 덜 덜 떨려 왔다. 데베라는 나를 위 험으로 느끼지도 않는 건지 벌레 가 꿈틀거리는 꼴을 보듯 내가 하 는 양을 물끄러미 바라볼 뿐이었 다. 나는 그 사실에 자존심도 상 하지 않았다. 저 거대한 데베라에 게 작은 나는 밟으면 죽어 버릴 벌레가 맞았으니까.

'••••••싫어.'

붉은 눈이 무서웠던 나는 결국 쥐어짜 낸 용기를 지탱하지 못하 고 눈을 꾹 감아 버렸다. 이렇게 끝을 맞이하는 건 싫었다. 나도 조금은 행복해져 보고 싶었다. 평 범하게 일상을 영위하고 사소한 행복에 웃고 싶었다.

나는 아직 죽고 싶지 않았다.

쉬이익!

나를 지켜보는 것도 흥미가 떨 어진 건지, 데베라는 무심하게 앞

발을 휘둘렀다. 내 덩치보다 더 큰 발이 내 위에 큰 그림자를 드 티웠다.

'못 막아.'

나는 겨우 머리 위로 검날을 세 웠지만, 사실 알고 있었다. 내 힘 으론 절대 저 공격을 막지 못한다 는 걸.

생리적으로 핑 돈 눈물이 감은 눈을 비집고 툭 흘렀다. 나약한 스스로에 대한 경멸이 치솟았다.

재앙 앞에서 무력하게 당하는 인간이 되고 싶지 않았다. 저항하 고 싶었다. 같은 재앙이 되어서라 도 이 위기를 물리치고 싶었다.

'강해지고 싶어.'

그림자가 짙어지는 가운데, 유언 처럼 그런 생각을 했을 때.

" 가드."

소년과 청년, 그 사이 경계에 있 는 아름다운 미성이 무심하게 울 려 퍼졌다. 무심코 눈을 번쩍 뜬

나는, 빠르게 전개되는 마법진 아 래로 보랏빛 장막이 나타나 나를 지키는 것을 볼 수 있었다.

"아이코. 조심해야지, 아이야."

온화한 목소리와 함께 단단한 팔에 내 몸이 덜렁 들렸다. 은은 하게 풍겨 오는 따뜻한 햇살 내음 에 악취로 마비되다시피 했던 후 각이 천천히 완화되었다. 나는 눈 을 크게 뜬 채 나를 안아 든 사람 을 올려다보았다.

건강한 구릿빛 피부에 짧게 깎

은 진주황색 머리, 세상을 품을 듯 드넓고 온화한 검은색 눈.

"많이 무서웠지? 미안하다! 이 쪽 근방은 처음이라 길을 좀 헤맸 지 뭔가! 최대한 빨리 오려고 노 력은 했네. 부디 용서하게."

여자는 시원하게 함박웃음을 지 으며 내가 이 상황에 처한 것이 자신의 잘못이라도 되는 양 살갑 게 사과를 건넸다. 내가 상황을 이해하지 못하고 멍하니 눈을 끔 뻑였을까, 옆에서 냉랭한 목소리 가 들려왔다.

"스승님께서 사과를 구해야 할 상황은 아닙니다. 세상 모든 사람 을 스승님께서 구하실 필요는 없 잖습니까."

시리게 얼어붙은 보랏빛 눈동자 가 나를 물끄러미 바라보았다. 나 는 잠시 숨을 멈추었다.

눈송이 섞인 바람결에 실크처럼 살랑거리는 검은 머리, 세상 모든 어둠을 모아 혼신을 다해 깎은 듯 음울하고도 아름다운 얼굴. 소년 과 청년의 경계에 서 있는 남자는

무심하게 방어막을 전개하고 있었 다.

"하하! 지그문트! 구할 수 있음 에도 구하지 못한 것은 죄악이래 도. 놀랐을 애 앞에서 그리 쌩하 게 굴지 말거라!"

남자의 등짝을 팍 치며 호탕하 게 말한 여자는 이내 나를 바라보 았다. 검은 동공이 나를 사랑스러 운 무언가를 보듯 응시했다. 그 시선이 익숙지 않아 흠칫 몸을 떨 었다.

"반갑구나, 아이야. 나는 용병 카라쇼다. 널 도와주러 왔다."

처음이었다. 누가 나를 도와주겠 다고 나선 것은. 부드러운 미소를 지어 주고, 따뜻하게 안아 준 것 은. 나를 지키겠다고 마법진을 펼 쳐 준 것은.

온 생애를 통틀어 가장 존경하 고 애정할 나의 스승과 가장 지독 한 나의 악우는 그렇게 갑작스럽 게 내 세상에 들이닥쳤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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