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충직한 검이 되려 했는데-181화 (181/254)

181 화. 외전 2

"언제까지 그렇게 있으려고. 배 고프지 않으냐?"

카라쇼가 걱정스럽게 물었다. 그 녀가 냄비 안의 내용물을 저으니 동굴 전체에 스튜의 고소한 냄새 가 풍겼다. 음식 냄새를 맡으니 잊고 있던 배고픔이 치밀었으나, 나는 티 내지 않은 채 더욱 몸을 웅크렸다.

"대답하세요. 왜 도와준 겁니 까?"

최대한 눈을 매섭게 뜨고 물었 다.

상대는 둘. 게다가 두 사람 모두 나보다 강했다. 저들이 나를 공격 해 오면 나는 손 쓸 방도도 없이 무력하게 당해야 했다.

'얼마 전 수도 외곽에서 불법 노 예 시장이 열렸다고 했는데. 노예 상인인가? 아니면 인신매매범?'

내 머릿속에선 지금 상항에서 펼쳐질 수 있는 최악의 시나리오 가 전개되고 있었다. 나는 잔뜩 경계하며 검 손잡이를 꽉 잡았다.

'마수 토벌 의뢰를 받고 왔는데 마을의 수장이 누가 이 의뢰를 수 행하러 혼자 숲으로 갔다고 하지 않나. 혹시 위험할까 싶어 빠르게 왔다. 조금이라도 늦었으면 큰일 날 뻔했지. 늦지 않아 다행이네.'

카라쇼는 이곳에 오게 된 자초 지종을 설명해 주었지만, 날 도와 준 이유는 말하지 않았다. 그저

빠르게 데베라를 제압하고 나를 이 동굴로 데리고 왔을 뿐이었다.

나는 동굴에 도착하자마자 카라 쇼의 품을 벗어나 구석으로 도망 쳤다. 소년은 나를 한심하다는 듯 바라보다 아예 없는 사람 취급을 했고, 카라쇼는 나를 억지로 잡을 수 있을 텐데도 섣불리 거리를 좁 히지 않은 채 몇 번이고 음식을 권할 뿐이었다.

'......힘들어.'

날 세우는 것도 지친 나는 힘없

이 고개를 떨구었다. 생명의 은인 에게 무례하게 굴고 있다는 걸 알 고 있었다. 그럼에도 경계를 버리 고 다가가 감사 인사를 건넬 엄두 는 나지 않았다.

"이름이 뭔가?"

제풀에 지쳐 시들시들해진 나를 물끄러미 바라보던 카라쇼가 물었 다. 조금 낮은 목소리는 다정했 다. 나는 무정함과 차가움엔 익숙 했으나 이런 다정엔 익숙지 않았 기에 움찔하면서도 홀린 듯 대답 하고 말았다.

"••••••미르."

"그래, 미르. 이리로 오기 싫으 면 내가 그쪽으로 가도 되겠나?"

여자는 내가 벌린 거리를 함부 로 좁히지 않고 정중하게 청했다. 내게 무엇이든 강제할 수 있는 강 자임에도 말이다. 내가 머뭇거리 자, 서늘하게 식은 눈으로 나를 힐끗 본 소년이 비소를 흘렸다.

"그냥 내버려 두지 그러십니까. 거기서 굶어 죽게."

'저 새끼가, 진짜......

머리에 살짝 열이 오른 나는 소 년을 무섭게 노려보았다. 시린 보 랏빛 눈동자가 나를 무심하게 바 라보았다.

카라쇼에게 '지그문트'라고 불린 소년은 비현실적으로 아름다웠다. 인간이라기보단 차라리 정령 같을 정도로.

그리고 그 얼굴값을 하겠다는 듯, 인성 터진 말들을 곧잘 해 댔 다.

'그냥 두고 가죠. 구해 줬으니 됐잖습니까. 데리고 가 봤자 짐밖 에 안 됩니다.'

'그거 안지 마세요. 때 묻어서 더럽습니다.'

어찌 되었건 나를 구해 준 사람 이니 반박하고 싶은 마음을 꾹 참 고 있었지만, 호감은 도저히 생기 지 않았다. 나는 덤벼 봤자 내가 묵사발이 된다는 사실을 다시금 되뇌며 분을 꾹 눌렀다.

"지그문트. 사람에게 그리 말하

면 안 된다고 하지 않았느냐."

카라쇼가 엄하게 꾸짖었다. 지그 문트가 입을 닫았다. 그는 세상을 혼자 사는 냉혈한 같았지만, 지켜 본 바로는 카라쇼의 말만은 곧잘 들었다. 카라쇼는 다시금 나를 바 라보았다.

"그래서, 괜찮나? 내가 가까이 가도."

입술을 짓씹은 나는 조금의 고 민 끝에 작게 고개를 끄덕였다. 내가 저들을 경계하고 있긴 해도

저 정중한 제안을 거절할 정도로 매정하진 못했다. 기쁘다는 듯 환 하게 웃은 카라쇼는. 작은 동물에 게 손을 뻗듯 조심조심 다가와 내 옆에 앉았다.

"춥진 않으냐?"

"......괜찮습니다."

가벼운 질문과 대답이 오갔다. 분명 괜찮다고 했는데도 카라쇼는 제 망토를 벗어 내게 덮어 주었 다. 그녀의 망토에선 따뜻한 햇살 향이 났다.

"너를 왜 구해 줬냐고 물었지."

누가 검은색을 불길한 색으로 정했을까. 내가 본 그녀의 검은 눈은 모든 빛을 흡수하는 검은색 의 성향처럼, 세상 모든 빛을 머 금은 듯 찬란하고 따뜻했다.

그 눈을 홀린 듯 바라보고 있는 데 그녀가 새하얀 이빨을 드러내 며 환하게 웃었다. 그녀의 웃음은 어린아이의 천진난만함과 연장자 의 자애로움을 모두 담고 있었다.

"사람이 살아 있는 데에 이유가

필요하더냐. 살아 있기에 살아가 는 것이고, 살아가며 이유를 찾아 가는 거지- 그러니 사람을 구하는 데도 이유가 필요치 않다."

조심스럽게 다가온 큰 손이 내 머리를 쓰다듬었다. 분명 그녀의 손은 굳은살과 흉터로 거친데 손 길은 부드럽게만 느껴졌다.

"그러니 이유 없는 호의를 경계 하지 않아도 괜찮다. 네가 살아남 은 것만으로도 나는 대가를 받았 어."

13년간 구축된 내 세계를 단번 에 부정하는 말이었다.

나는 이해할 수 없었다. 여태껏 세워 온 가치관이 있는데 그게 어 떻게 한순간에 바뀔 수 있단 말인 가. 나는 지금까지 평생 동안 이 유 없는 호의, 선의 실존을 믿지 않았다. 내게 있어 카라쇼의 말은 뜬구름 잡기 같았다.

나는 입을 꾹 다물었다. 조금이 라도 입을 열면 반항심 어린 반박 이 툭 튀어나갈 것 같아서였다. 이곳에서 나는 명백히 약자였고

그들을 자극해선 안 됐다. 말만 하지 않았을 뿐, 이미 머릿속은 반항심으로 가득 차 있었지만.

"하하하! 내 말을 믿지 못하는구

그게 표정으로 드러난 걸까, 나 를 본 카라쇼가 호탕하게 웃어젖 혔다.

"그래. 그럼 믿지 말게나. 끝까 지 믿지 말고 경계하게. 호의를 의심하고 가늠해 보게. 내 그것 또한 기꺼이 받아 낼 테니."

그녀의 눈꼬리가 휙 접혔다.

"그 대신 이곳에서 무사히 나간 뒤엔 조금은 믿어 주지 않겠나. 내 진심을 말이야."

노예 상인이나 인신매매범이 이 렇게 나올 리는 없었다. 당장이라 도 나를 제압해서 들고 가 버리면 되는 일이었으니.

나는 여전히 이유 없는 호의를 믿지 않았으나, 그럼에도 인정할 수밖에 없었다. 그녀에겐 꿍꿍이

속이 없음을.

"의심도 배가 불러야 하는 법이 지. 이제 한 그릇 들지 않겠나? 만드는 과정을 봤으니 독이 들어 가지 않았다는 것도 알 거 아닌 가."

카라쇼는 스튜 한 그릇을 떠 내 게 건넸다.

나는 침을 삼켰다. 꽤 인내심이 있는 편이라고 자부했건만, 겨우 배고픔에 경계심이 흐물흐물해졌

갈팡질팡하는 나를 보며 쿡쿡 웃은 카라쇼는 내 손에 그릇을 꽉 쥐여 주었다. 뜨거운 그릇을 통해 따뜻한 온기가 전해져 왔다.

"한 번쯤은 속는 셈치고 믿어 보는 것도 좋네."

그녀가 나직하게 속삭였다. 나는 느리게 숨을 뱉었다.

어쩌면, 그녀는 정말 좋은 사람 일지도 몰랐다.

"쥐새끼처럼 뭘 하는 거지."

조용조용 짐을 챙기던 나는 갑 작스럽게 들려온 미성에 놀라 봇 짐을 떨어트릴 뻔했다. 홱 고개를 돌리니, 조금 전까지만 해도 숨소 리도 내지 않고 죽은 듯이 자고 있던 지그문트가 어느새 동굴 벽 에 기댄 채 나를 보고 있었다.

그의 무감각한 시선은 사람이 아니라 무생물을 보는 것 같았다. 코끝을 스치는 시린 겨울 내음은

이른 새벽의 냉기인지 그의 체향 인지 분간할 수 없었다.

"돌아갈 때도 짐이 될 생각은 없어. 먼저 갈 거야."

덤덤하게 대답했다. 카라쇼는 내 마수 토벌 의뢰를 도와주고 수도 까지 데려다주겠다고 했지만, 그 렇게까지 민폐를 끼칠 순 없었다. 여기서 이별을 하는 게 맞았다.

'좋아하겠네.'

지그문트는 처음부터 나를 고깝

게 여겼으니, 지금 이별한다고 하 면 기뻐할 것 같았다.

나는 힐끗 눈을 들어 그를 바라 보았다.

예상과 다르게 지그문트의 얼굴 엔 기쁜 기색이 없었다. 그렇다고 슬픈 기색이 있는 것도 아니었지 만.

빨리 꺼지라고 할 줄 알았건만, 특별히 뭔가 말하지도 않았다. 그 저 속을 읽을 수 없는 깊은 눈으 로 나를 물끄러미 바라볼 뿐이었

다.

'내가 아무런 감흥도 끌어올리지 못할 정도로 아무것도 아닌 존재 라 그런가.'

하기야, 어제 처음 만난 사인데 감흥을 느끼는 것도 이상했다. 괜 히 민망해진 나는 헛기침을 하고 봇짐을 어깨에 멨다.

"어제는 고마웠다. 은혜는 잊지 않을 거다."

담백하게 감사 인사를 건넸다.

대가를 치를 수 있다면 좋겠지만, 지금 내 수중엔 먼지밖에 없었다. 염치없는 인간이 된 것 같아 고개 를 떨구고 있다가 오랫동안 돌아 오지 않는 대답이 빨리 꺼지라는 뜻인가 싶어 발걸음을 옮길 때였 다.

"미련한 놈."

나는 나직한 목소리에 멈칫했다.

'이 자식은 왜 계속 시비지?'

생명의 은인만 아니었다면 질

걸 알면서도 덤벼들었을 것이다. 재앙을 부르는 네 미련한 주둥아 리나 어떻게 해 보라고 쏘아붙이 고 싶은걸 꾹 참고 있었을까, 그 가 말을 이었다.

"나였다면 끝까지 빌붙으며 받 을 수 있는 건 다 받아먹었을 거 다. 되지도 않는 자존심 세우는 건가."

고슴도치처럼 잔뜩 가시 난 말 투가 사람의 화를 돋구었지만, 그 의 목소리엔 순수한 의문이 담겨 있었다. 내가 어째서 그들의 도움

을 더 받지 않는 건지.

한숨처럼 웃은 나는 지그문트와 눈을 맞추었다.

"나는 은인들에게 짐이 되고 싶 지 않아."

참 미련하다. 이리 쉬이 정을 줘 버리니.

지그문트가 느리게 눈을 깜빡였 고, 나는 당당하게 어깨를 쭉 폈

"두고 봐라. 언젠간 너보다 더 강해져서 이 은혜를 갚을 거니 까."

나는 그를 향해 씨익 웃었다.

"다음엔 내가 널 구해 주마."

다음을 기약할 수 없는 한여름 밤의 인연임을 알면서도 그리 말 했다. 나도 누군가를 구할 수 있 는 사람이 되고 싶어져서. 다음이 있다면 그땐 지금보다 더 강해져 있고 싶었다.

지그문트의 눈이 조금 커졌다. 가면을 쓴 것 같은 그가 감정의 동요를 보인 것은 만난 이후로 처 음이었다.

나는 동굴 밖으로 발걸음을 옮 겼다. 설원에 쌓인 눈이 이른 새 벽의 햇빛을 받아 다이아몬드처럼 반짝였다.

처음으로 다음을 기약하고 싶은 사람들을 만났다 싶었다.

지그문트는 한 사람의 발자국만 찍힌 설원을 물끄러미 바라보았 다.

제 발의 반쯤 될까 싶은 작은 크기의 발자국. 아이가 아장아장 걸어간 듯 좁은 보폭.

확실히 혼자 마수 토벌을 할 수 있는 나이는 아닐 터였다.

"이제 자는 척은 그만하시죠."

지그문트는 자신의 스승을 돌아 보았다. 어투는 여전히 건방지고

시니컬했으나, 카라쇼를 대할 때 만큼은 미묘한 온기가 담겨 있었 다. 옅게 웃음을 흘린 카라쇼는 천천히 눈을 뜨며 몸을 일으켰다.

"좋겠구나, 지그문트. 귀여운 애 한테 저런 소리도 듣고."

"좋긴 뭐가 좋습니까. 어린애의 치기 어린 말인데."

짓궂은 카라쇼의 말에 지그문트 가 차갑게 일갈했다. 그럼에도 카 라쇼는 껄껄 웃었다.

저렇게 대답하지만, 그녀의 제자

는 정말 마음에 들지 않았다면 대 답도 하지 않았을 터였다. 저건 꽤 긍정적인 반응이었다.

"하울인가? 그 사람 말로는 마 수 토벌 의뢰만 도맡아 하는 용병 이랬지."

카라쇼는 제 턱을 쓸어내리며 눈을 빛냈다.

"우리도 이젠 수도에 터를 잡았 고, 어차피 마수 토벌을 주로 할 테니......

제국 외곽에서 지내던 카라쇼와 지그문트는 바로 어제 수도로 거 처를 옮겼다. 이젠 수도의 용병으 로 활동할 터였다. 제 스승이 저 렇게 눈을 빛낼 땐 작든 크든 일 이 일어난다는 걸 아는 지그문트 가 한숨을 푹 쉬었다.

"아무거나 주우면 안 됩니다."

"아무거나라니! 내 안목을 무시 하는 게냐! 내가 제자 삼은 것이 바로 너 아니냐! 안목 증명은 확 실한 게지!"

카라쇼가 씨익 웃었다. 자부심과

애정이 가득한 목소리였다. 지그 문트는 잠시 입술을 꾹 깨물었다 놓았다.

"......그것 때문에 스승님 안목 을 믿지 못하는 겁니다."

지그문트는 빛나는 카라쇼의 인 생에서 가장 큰 오점 중 하나가 자기 자신이라고 생각했다.

카라쇼는 그날 설원에서 지그문 트를 주워선 안 됐다. 그녀는 반 드시 후회하게 될 터였다.

" 지그문트."

그런 지그문트의 마음을 읽은 카라쇼가 다정하지만 단호한 목소 리로 그의 이름을 불렀다. 살짝 올라간 눈매가 곱게 휘고, 옅은 주름이 진 입매가 호선을 그렸다.

"늘 말하지 않느냐. 너는 내게 선물이라고."

"나는 너를 거둔 걸 절대 후회 하지 않아."

지그문트는 제 머리에 닿는 손

길에 스르르 눈을 감았다. 언젠가 이 따뜻한 손이 배신감에 겨워 제 뺨을 치는 순간을 생각했다.

덤덤해져야 하는데, 그 순간을 상상만 해도 속이 뒤틀렸다.

카라쇼는 자신의 제자가 여전히 스스로에 대한 확신이 없다는 걸 알고 있었다. 그녀의 마음을 불신 한다는 것도.

조금도 섭섭하지 않다는 건 거 짓말이겠지만 그래도 괜찮았다. 몇 번이고 다시 말해 줄 수 있었

으니까.

"가자꾸나. 얼른 이곳에서의 일 을 끝내고 새 친구를 만나 보자 고."

카라쇼는 자리에서 일어나 허리 에 손을 얹고 햇살이 비친 설원을 바라보았다.

기분 좋은 아침이었다.

나는 잠시 과거를 되짚었다.

그러니까, 마수 토벌 의뢰를 받 고 무리하게 수행하다 거대 마수 와 맞닥뜨려 죽을 뻔하고 처음 만 난 사람들에게 구해졌다. 더는 짐 이 되고 싶지 않아 빠르게 보수만 받고 수도로 돌아온 뒤 이틀 만에 용병 길드를 찾은 참이었다.

용병 일을 시작한지 얼마 되진 않았으나, 마수 토벌 의뢰를 받는 용병은 무척이나 한정적이었기에 벌써 얼굴을 다 외웠다.

"하하! 여기서 또 보는군! 이런

공교로운 우연이 다 있나!"

"......하."

그리고 내가 외운 얼굴 중에 저 둘은 없었다.

"다시 만나서 기쁘네, 미르!"

나는 내 눈앞에 다시 나타난 카 라쇼와 지그문트를 보며 입을 떡 벌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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