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82화. 외전 3
"......원래 이 길드 소속 용병들 인가? 이곳에선 처음 봤는데."
지나치게 밝은 카라쇼를 한 번, 지나치게 차가운 지그문트를 한 번 본 나는 그들을 피해 하울에게 로 눈을 돌렸다. 두 사람은 여름 과 겨울, 불과 얼음처럼 극과 극 이었다.
"아니. 얼마 전에 처음으로 방문
하신 분들이네. 길드 소속은 아니 고 자네처럼 의뢰만 받아가는 방 랑 용병. 초면은 아닐 텐데? 저번 에 마수 토벌 의뢰를 찾으신다기 에 자네가 맡은 의뢰를 소개시켜 드렸지. 앞으로도 마수 토벌 의뢰 를 자주 받을 거라고 하시니 아마 자주 만나겠군."
둘 사이에 껴서 어쩔 줄 몰라 하는 나를 즐겁다는 표정으로 바 라보던 하울이 명쾌하게 대답했 다. 아연해진 나는 멍하니 둘을 바라보았다.
인연은 그날 밤으로 끝일 줄 알 았다. 더 강해져서 만났으면 좋겠 다는 감성적인 생각까지 하며 소 설 속 주인공처럼 깔끔하게 이별 을 고했는데.
고작 사흘 만의 재회였다.
'쪽팔려......
데베라 앞에서 맹하니 있다 덜 렁 들어 올려져 구해진 것, 카라 쇼의 품에 안겨 운 것 등등 그날 밤의 흑역사가 새록새록 떠올랐 다. 나는 수치심에 두 손으로 얼
굴을 가렸다.
하루 보고 말 사람들이라면 괜 찮지만, 앞으로 꾸준히 만나게 될 사람들이라면 이야기가 달라졌다.
"응? 왜 그러는 겐가. 어디 아 픈가? 설마 그날의 피로가 아직 풀리지 않았나?"
내가 아무 말도 없이 얼굴을 가 리고 서 있으니 카라쇼가 고개를 갸우뚱 기울였다. 나는 더욱더 부 끄러워졌다.
"내버려 두세요. 수치스러워하고 있는 거 아닙니까."
무심한 듯 툭 내뱉은 지그문트 가 내 주위를 기웃거리는 카라쇼 를 제 쪽으로 끌어당겼다. 카라쇼 에게의 눈치가 모두 그에게 간 모 양이었다.
예상치 못한 배려에 조금 놀란 눈으로 지그문트를 바라보았다. 잠시 나와 눈을 마주친 그는 얼마 지나지 않아 고개를 휙 돌려 버렸
"아, 그랬던 건가! 미안하네. 내 아직도 이런 미숙한 실수를 한다 니까. 진정됐을 때 말하게. 얼마 든지 기다려 줄 수 있네!"
지그문트의 말에 머리 위에 느 낌표를 띄운 카라쇼가 명랑하게 말했다. 카라쇼는 눈치는 없지만 좋은 사람의 표본인 것 같았다.
나는 한숨을 푹 쉬곤 마른세수 를 했다. 가면이 살짝 덜그럭거렸
"됐습니다. 이제 괜찮습니다. 그
런데...... 저와 함께 가시겠다고
요?"
경계 서린 내 물음에 카라쇼는 고개를 끄덕였다.
"그래. 어차피 같은 곳에 가는 데, 같이 가서 같이하는 게 좋지 않은가. 팀을 맺자고. 함께 토벌 한 뒤의 소득은 똑같이 배분하겠 네!"
카라쇼가 호탕하게 말했다. 그녀 는 여전히 꿍꿍이속 하나 없이 맑 은 낯이라, 나는 어쩐지 착잡해졌
"저번에 보시지 않았습니까. 저 는 아직 많이 약합니다. 함께 가 봤자 도움이 안 될 겁니다. 그쪽 이 손해입니다."
마수 토벌의 보수는 처리한 마 수의 양에 따라 달라진다. 이 두 사람은 분명 나보다 많은 마수를 잡을 수 있을 터. 나는 별 도움도 안 될 것이다. 그 상황에서 똑같 이 배분을 받는 건 명백히 카라쇼 와 지그문트의 손해였다.
"나야 손해일 수 있지. 하지만 그대에겐 이득일 텐데. 우리도 정 식 용병이라는 것을 하울에게 확 인받지 않았나? 그럼 더는 의심 스럽지도 않을 텐데 무어가 문제 인가."
카라쇼는 손해를 보아도 상관이 없는 것처럼 말했다. 날 향해 반 짝거리는 검은 눈은 꼭 물질보다 내가 중요하다고 말하는 것 같아 서, 나는 기분이 이상해졌다.
"......정말 그러셔도 되겠습니
까?"
한참을 갈팡질팡 고민하던 나는 홀린 듯 되물었다.
여태까지 일확천금에 눈이 팔리 는 인간들을 멍청하다고 생각했건 만, 당사자가 되어 보니 알겠다. 자신이 손해를 보면서 내게 수익 을 더 주겠다는 말은 너무 달콤했 다. 당장 내일과 모레에 쓸 돈이 급했기에 더욱 그랬다.
"그럼. 나는 너와 함께하고 싶으 니까."
카라쇼가 망설임 없이 답했다. 잠시 손가락을 꾸물거리던 나는, 결국 굳은 표정으로 고개를 끄덕 였다.
이런 미끼 같은 조건에 넘어가 도 호구, 이런 좋은 조건을 놓쳐 도 호구다. 확률이 절반인 행운이 라면, 나는 받아들이지 않고 후회 하느니 받아들인 것을 후회하고 싶었다.
"좋아요. 그럼...... 같이 가요."
끝에 노예시장이 있을지라도, 나
는 도박에 기회를 걸어 보기로 했
나와 카라쇼, 지그문트는 용병 길드를 나섰다. 다른 사람과 함께 나오는 건 오랜만이라 어색했지만 묘한 소속감이 느껴져 나쁘진 않 았다. 내가 타고 갈 말을 빌리기 위해 마구간으로 발걸음을 옮길 때였다.
"어디 가는 게냐?"
"네? 말 빌리러 가죠."
카라쇼의 물음에 나는 당연스레 대답하며 고개를 기울였다. 작게 웃은 그녀는 그럴 필요 없다는 듯 고개를 젓고 내게 손짓했다.
"그럴 필요 없네. 우리에겐 훨씬 좋은 운송 수단이 있으니까."
카라쇼의 시선이 옆을 향했다. 그녀의 눈빛엔 자랑스러움이 묻어 나 있었다.
"지그문트가 순간이동을 할 줄 알거든."
난 그 말에 빠르게 고개를 돌려 지그문트를 돌아보았다. 놀라움에 두 눈이 커졌다.
순간이동은 정식 마법사들도 쉽 게 사용하지 못하는 고위 마법이 었고, 미려한 얼굴을 가진 지그문 트는 십 대 중후반쯤 되나 싶었 다. 그 나이에 순간이동 마법을 전개할 수 있다는 건 대단한 걸 넘어 경악스러운 일이었다.
"별것도 아닌 걸 필살기 자랑하 듯 말하지 마시죠."
단호하게 일갈한 지그문트가 허 리춤에서 제 검을 뽑더니 흙바닥 위에 마법진을 그리기 시작했다. 제자인 것치고는 무례한 말투를 구사하는데도 카라쇼는 껄껄 웃을 뿐이었다.
"부끄러움이 많아 저러는 거지 나쁜 아이는 아니다. 까칠하게 굴 어도 부디 너그럽게 넘어가 주자 꾸나."
"쓸데없는 소리를."
'단순히 부끄러움이 없는 것으로
넘어가기엔...... 너무 싹퉁머리가 없는 거 아닌가.'
따사로운 불과 꽝꽝 얼은 얼음 의 대치를 지켜보던 나는 떨떠름 해졌다. 지그문트의 말투는 스승 을 대하는 말투라기엔 신랄해 보 였으나, 얼마 전 나를 대하던 것 이 그의 기본 말투라고 생각하면 지금은 깍듯한 수준이긴 했다.
"안쪽으로 들어오시죠."
마법진을 완성한 지그문트가 손 을 까닥였다. 카라쇼는 익숙하게
마법진 위에 섰고, 나까지 이끌어 주었다. 얼떨결에 순간이동을 경 험하게 된 나는 지레 겁을 먹고 황급히 카라쇼의 팔을 붙잡았다.
"저, 저 순간이동은 처음입니 다......! 많이 어지럽다고 하던 데 !"
"응? 괜찮다! 많이 어지럽지 않 아. 내 팔을 꽉 잡아라."
카라쇼가 자기 팔을 내주었다. 그 단단한 팔을 꽉 붙잡으니 조금 은 안심이 되었다. 내가 입술을 꽉 깨문 채 옅은 두려움에 눈을
부릅뜰 때, 작은 미성이 들려왔
"눈 감아."
" 뭐?"
투명한 보랏빛 눈동자에 내가 담겼다. 무심하게 나를 돌아본 지 그문트는 마법진이 그려진 땅 위 에 손을 얹었다.
"그편이 덜 어지러워."
나직한 목소리가 울리고, 발 아 래로 환한 빛이 터져 나왔다. 나
는 무심결에 눈을 꽉 감았다.
화아악.
처음 경험한 순간이동은, 뭐랄 까. 거인이 내 머리와 발을 잡고 행주의 물기를 짜듯 쥐어짜는 것 같았다. 나는 밀려오는 토기를 간 신히 참았다.
"아이고, 괜찮으냐? 나도 처음 엔 그랬지. 등이라도 두드려 주 랴?"
어느새 공간이 뒤틀리고 보이는
광경이 달라졌다. 내가 비틀거리 니 카라쇼가 빠르게 내 몸을 잡아 주었다. 나는 간신히 고개를 저었
"이런 약골을 데리고 뭘 할 수 나 있을까 싶습니다만."
내 상태를 힐끗 본 지그문트가 카라쇼에게 말했다. 내가 분노로 이 어지러움을 극복하게 만들고 싶었다면 아주 성공적이었다고 말 해 주고 싶었다.
나는 이를 악물며 카라쇼의 팔
을 놓고 내 두 발로 곧게 섰다.
"이제 괜찮습니다. 가시죠."
나는 세모눈으로 지그문트를 노 려보았다.
그렇게까지 개자식은 아닌가 싶 을 때마다 그는 어김없이 입을 털 어 굳이 제 이미지를 제 손으로 망쳤다. 이제 두 번째 만남이지만 저 주둥아리를 바늘로 정성스럽게 꿰매 버리고 싶었다.
눈싸움으로 신경전을 벌이는 나
와 지그문트를 번갈아 본 카라쇼 는 크게 웃음을 터트렸다.
"하하! 둘이 벌써 친해진 게냐! 역시 애들은 빨리 친해진다니까!"
'친해진다는 게 서로 치는 사이 가 된다는 뜻인가.'
나는 무어라 반박하고 싶었으나, 말간 카라쇼의 얼굴을 보니 그게 무슨 의미가 있나 싶어졌다. 나는 카라쇼의 말을 듣자마자 곱씹을 가치도 없다는 듯 성큼 발걸음을 옮기는 지그문트를 따라 마을로
향했다.
마을에 도착해서 마을의 대표와 이야기를 마쳤다. 오늘은 마을에 서 묵고 내일 토벌하러 가기로 합 의를 봤기에, 오늘 밤은 그럴 듯 한 숙소에서 묵을 수 있었다.
'호수와 밀접한 지역이니 수중 마수들이 많겠죠. 그중 가장 까다 로운 것이 쿠퍼일 텐데, 쿠퍼와 마주했을 땐 무조건 뭍으로 나와 석류즙을 몸에 바르세요. 쿠퍼는
뭍에서 힘이 약해질뿐더러 석류 향을 아주 싫어해서 웬만하면 물 러갈 겁니다.'
카라쇼는 자야 하는 밤이 되기 전까지 마을 사람들을 모아 두고 마수에게서 살아남는 방법을 가르 쳤다.
그녀가 가르치는 것은 무력이 없는 평범한 사람들도 따라할 수 있는 것들이었다. 아직 마수 토벌 경력이 많지 않은 내게도 유용한 정보였기에 집중해서 들었다.
슬슬 어둠이 깔리고 마을 사람 들이 다 집으로 돌아갔을 때, 나 는 조용히 사람이 없는 공터로 발 걸음을 옮겼다. 오직 달빛만이 비 추는 허허벌판에 선 나는 검을 뽑 아 들었다.
'짐이 되고 싶지 않아.'
그 생각 하나가 내 마음을 무겁 게 짓누르고 있었다.
하룻밤 연습한다고 실력이 느는 게 아님을 알면서도 난 집착적으 로 검을 휘둘렀다. 나는 약한 내
자신이 싫었다.
나는 대중도 없이 마구잡이로 검을 휘두르며 점점 가빠지는 숨 을 골랐다.
"검은 그리 쓰는 것이 아니다."
"헉."
그리고 어느 순간 등 뒤에서 자 애로운 목소리가 들려왔다.
난 화들짝 놀라 검을 놓칠 뻔하 고 빠르게 뒤를 돌아보았다. 이제 는 익숙해진 인영이 그곳에 서 있
었다.
"......카라쇼?"
"아직까지 들어오지 않았다기에 찾으러 나왔건만, 이리 무리를 하 고 있었구나."
진주황색 머리칼이 달빛을 받아 반짝였다. 카라쇼는 성큼 내게 다 가왔다.
"내가 좀 도와줘도 되겠나?"
나는 눈을 동그랗게 떴다. 안 그 래도 요새 들어 검술 실력이 마음
처럼 늘지 않아 스승의 필요성을 느끼고 있었는데, 이렇게 도와준 다고 하니 고마울 따름이었다.
내가 고개를 붕붕 끄덕이자 살 짝 웃은 카라쇼가 등 뒤에서 나를 감싸며 내 검을 함께 잡았다.
"조금 더 부드럽게 움직여야 한 다. 검을 휘두른다고 생각하는 게 아니라, 검과 춤을 춘다고 생각하 는 거야. 검은 한낱 날붙이가 아 니다. 네 파트너야. 세상 모든 사 람이 널 배신해도 네 검만큼은 너 를 배신하지 않는다."
내 귓가에 낮게 속삭인 카라쇼 는 유려하고 부드럽게 움직이기 시작했다. 그녀의 품에 안기다시 피 한 나는 자연스럽게 그 움직임 을 좇았다.
"네가 들고 있는 건 가장 단순 하고도 강력한 무기다. 목표를 명 확히 하지 않은 검은 무고한 피를 부른다. 검 끝이 향하는 곳이 어 디인지 확실히 응시해라."
움직임이 빨라졌다. 물 흐르듯 매끄럽게 이어지는 동작은 행위
예술처럼 아름다웠다. 나는 그녀 의 말을 빠짐없이 새겨들었다. 카 라쇼의 몸에서 따뜻한 마나가 몽 글몽글 새어 나오기 시작했다.
"네가 어째서 검을 잡고 있는지 생각해라. 무엇이 너를 강하게 만 드는지, 한계를 돌파할 힘을 주는 지 고뇌하기를 멈추지 말아라. 멈 추면 고이고, 고인 물은 썩는다. 끊임없이 파헤치면!"
촤아악!
무딘 검날 위로 새하얀 오러가
개화하듯 피어났다. 처음 보는 아 름다운 광경에, 나는 할 말을 잃 고 신비롭게 일렁이는 오러를 멍 하니 바라보았다.
카라쇼의 오러는 어둠 한 점 없 는 하얀색이었다.
"그 끝에서 찾은 정답이 네 오 러를 만들어 줄 거다."
카라쇼가 천천히 검을 내렸다. 경이로운 장면을 본 뒤 한참 멍하 니 굳어 있던 나는, 그녀를 돌아 보았다.
"왜 이렇게까지 절 도와주시는 겁니까?"
카라쇼는 내 스승이라도 되는 것처럼 날 전력으로 도와주고 있 었다. 나는 그것을 행운이라고 생 각하는 동시에 의문을 느꼈다.
나를 물끄러미 내려다보던 그녀 는 피식 웃으며 내 머리를 꾹 눌 렀다.
"이게 내 정답이었다. 타인을 돕 고 선을 추구하는 것이. 이것이
나를 강하게 만들었고, 내 행복이
올곧고 단단한 목소리가 선포하 듯 말했다. 검은 두 눈은 혹시 거 짓일지도 모른다고 의심하는 것조 차 불경하게 느껴질 만큼 진실로 만 가득했다.
입술을 뻐끔거리던 나는, 소심하 게 중얼거렸다.
"......제가 이 은혜를 다 갚을 수 있을지 모르겠습니다."
카라쇼는 내 생명을 구해 주고, 자신이 손해 보면서 의뢰 수행을 함께해 주며, 검술 훈련을 도와주 기까지 했다. 받은 도움이 너무 많아 다 갚을 엄두도 나지 않았 다.
카라쇼가 껄껄 웃었다.
"만약 네가 나중에 너 같은 아 이를 만나게 된다면, 내가 했던 것처럼 해 주어라. 이유 없는 호 의 또한 존재함을, 사람은 재앙과 맞서 싸워서 이길 수 있음을, 외 로울 땐 함께 있어 줄 사람이 있
음을, 아플 때 스튜 한 그릇 내밀 어 줄 사람이 있음을 알려 주거 라. 그거면 충분하다."
나는 카라쇼의 말을 기억했다. 그리고 그리 살겠노라 결심했다.
달빛 아래 반짝반짝 빛나는 카 라쇼는 존경할 이상향으로 삼기 충분한 존재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