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83화. 외전 4
시간은 빠르게 흘러갔다. 어느새 카라쇼, 지그문트와 함께 수행한 의뢰의 수를 두 손으로 다 꼽을 수 없게 되었고, 나는 빠르게 성 장했다. 몸도, 마음도.
챙! 챙!
검날이 맞부딪히고, 날카로운 쇳 소리가 울려 퍼졌다. 검을 잡은 손이 떨려 오고, 손목까지 얼얼해
졌다.
"더 빨•리 움직여! 쓸데없는 움직 임은 죽여라!"
평소와 다르게 엄한 표정을 지 은 카라쇼가 크게 소리쳤다.
올곧게 반짝이는 두 눈, 낮고 또 렷한 목소리. 그녀는 처음 만났을 때와 똑같았다. 달라진 점이라곤 듬성듬성한 새치를 제외하곤 짙은 오렌지색을 띠던 짧은 머리칼이 그 사이 온통 하얗게 세어 버렸다 는 것뿐이었다. 제자가 둘로 늘어
나며 기력을 많이 소진하고 있어 서 그런 걸지도 몰랐다.
" 집중해라!"
입꼬리를 굳힌 카라쇼가 내 검 을 강하게 내쳤다. 일순 손에 힘 이 풀리며 쥐고 있던 검이 날아가 땅에 꽂혔다.
'너무 강해......•'
몇 달간 거의 매일 카라쇼에게 서 속성으로 검을 배웠으나, 카라
쇼를 이길 가망은 조금도 보이지 않았다.
'카라쇼 머리가 하얗게 세는 걸 넘어 파랗게 변할 지경이 돼도 못 이길 것 같은데.'
나는 욱신거리는 손목을 주무르 며 작게 투덜거렸다.
"아주 잠깐 다른 생각을 한 것 뿐입니다."
"그 잠깐이 생사를 가른다는 걸 모르느냐?"
"......알아요. 죄송합니다."
검술을 가르쳐 줄 때 카라쇼는 등골이 섬찟할 정도로 엄하고 무 서웠다. 단번에 꼬리를 내린 나는 풀이 죽은 채로 순순히 고개를 숙 였다.
카라쇼는 울적해하는 나를 물끄 러미 바라보다가 그제야 평소같이 온화한 미소를 지어 보였다.
"알면 되었다. 그래, 전투 중에 무슨 생각을 그렇게 했느냐? 평 소엔 그러지 않으면서."
"별건 아니고...... 스승님 머리
카락이 너무 빨리 세어 버렸다는 생각을 했습니다. 요즘 무리하고 계신 거 아닙니까?"
눈을 깜빡인 카라쇼가 제 머리 칼을 쓱 쓸었다. 그녀의 투박한 손가락 새로 짙은 오렌지색 머리 칼과 흰 머리칼이 뒤섞여 흩어졌 다.
무엇이 그리 웃긴지 지긋한 나 이와 어울리지 않는 쾌활한 웃음 을 지은 그녀가 무어라 말하려 입 술을 뗄 때였다.
"스승님의 급격한 노화에 가장 큰 기여를 한 천둥벌거숭이가 그 런 말을 하는군."
등 뒤에서 들려오는 시린 목소 리에 혈압이 급격히 치솟았다. 목 소리만 들어도 머리에 열이 오르 는데, 그 목소리가 담고 있는 내 용은 어김없이 내 고혈압에 일조 했다. 근 시일 내로 고혈압 약을 하나 지어야 할 지경이었다.
"내게 양보하는 건가? 배려심이 풍부하군. 가장 크게 기여한 사람 은 너인 걸로 아는데, 지그문트
하이드."
나는 차가운 미소로 비죽거리며 지그문트를 돌아보았다. 나만큼이 나 빠르게 성장하고 있는 그는, 이제 소년보단 청년에 더 어울렸 다.
'그 미모만 시들면 바로 얼굴에 주먹을 갈겨 주지.'
나는 지그문트의 지독한 아름다 움과 마주하고 또다시 굳게 결심 했다. 시간이 갈수록 무르익어가 는 그의 미모가 시들 가능성은 만
무했음에도 말이다.
"네가 온 뒤로부터 스승님이 무 리하고 계신다. 양심이 있다면 보 약 정도는 지어 와야 하는 거 아 닌가."
갈 곳이 하수구밖에 없는 놈의 아가리 또한 무르익긴 마찬가지였 다.
나는 느리게 숨을 들이쉬며 머 릿속으로 검 종류를 달달 외웠다. 꽉 쥔 주먹을 그의 입에 찔러 넣 지 않기 위한 노력이었다.
카라쇼는 첫 합동 의뢰가 끝났 을 때, 내게 제자가 되지 않겠냐 고 물었다. 나는 단번에 수긍했 다. 이미 카라쇼에게 정이 든 뒤 였고, 그녀를 닮고 싶었으니까. 카라쇼는 반짝반짝 빛나는 웃음을 지어 보이며 그 선택을 후회하지 않게 만들어 주겠다고 했다.
관계의 깊이가 무조건 함께 지 낸 시간의 길이에 비례하진 않았 다. 함께 지낸 건 고작 몇 달이었 지만, 카라쇼와 나의 유대는 깊었 다. 처음엔 어색하기만 했던 '스
승님'이란 호칭도 이젠 익숙했다.
'하지만 이놈이랑은...... 애매하 지.'
나는 유감이 많은 눈으로 지그 문트를 꼬나보았다. 그와 눈을 맞 추기 위해선 고개를 가파르게 젖 혀야 한다는 것까지 마음에 들지 않았다.
지그문트와 나의 관계는 애매했 다• 둘 다 카라쇼의 제자였으나, 방금 전 대화만 보아도 친근함과 는 거리가 멀었다.
'처음엔 생명의 은인이라고 대우 해 줬지만...... 며칠 못 가고 때려 치웠지.'
지그문트의 무질서한 혀 놀림은 도저히 두고 봐줄 수 없는 것이었 다. 그는 나와 눈만 마주쳐도 쓰 레기를 툭 뱉어 냈다.
그 때문에 틈만 나면 싸우고 있 긴 하지만, 사실 나는 지그문트가 싫지 않았다. 오랜만에 만난 또래 친구를 싫어할 수 있을 리 없었 다. 나는 그가 꽤 편했다.
문제는 나에 대한 지그문트의 감정이었다.
지그문트는 나를 껄끄러워했다. 티는 내지 않았지만 악의에 예민 한 내겐 보였다. 그가 툭툭 뱉어 내는 인성 터진 말들엔 작은 가시 들이 있었다.
'아마...... 카라쇼의 제자가 하나 늘었다는 것이 마음에 들지 않는 거겠지.'
그가 내게 태클을 거는 내용은
대부분 이것이었기에 모를 수가 없었다.
내가 없을 땐 지그문트가 카라 쇼의 관심과 애정을 오롯이 받고 있었다. 혼자 독식하던 케이크를 갑자기 나타난 이방인이 한두 조 각씩 앗아 가는 게 마음에 들지 않는 건 당연했다.
'그래도 나가라고 눈치를 주거나 직접적으로 괴롭히진 않으니까.'
나는 푹 한숨을 쉬었다. 지그문 트는 정말 내가 싫다기보단 과도
기를 겪고 있는 것 같았다. 내가 이곳에 적응하는 시간이 필요했 듯, 그 또한 단둘뿐이던 세계의 확장에 적응할 시간이 필요할 터 였다. 가끔 복잡한 눈으로 나를 바라보는 지그문트는 안쓰러울 정 도였다.
"왜 나를 그런 눈으로 보는 거 지? 불쾌하군. 대련 중에 머리를 맞은 건가? 아니, 얼굴을 맞았군. 처참하게 찌그러진 걸 보니."
내 눈빛을 본 지그문트가 미간 을 찌푸렸다. 줄곧 가면을 쓰고
있는데 내 얼굴이 찌그러진 것을 어떻게 아는지 모를 일이었다.
'참아 주려고 해도.'
나는 머릿속에 팽팽하게 당겨져 있던 끈 하나가 툭 끊어지는 것을 느끼며 부드럽게 미소 지었다.
"그런 너는 복부가 왜 그 꼴이 지? 흙먼지 묻은 게 꼭 한 대 걷 어차인 것 같구나."
"무슨 소리를 하는 거지. 멀쩡하 다만."
"오, 정말?"
자기 몸을 내려다본 지그문트가 떫은 표정을 지었다. 나는 가증스 럽게 놀란 표정을 지었다.
"그럼 이젠 어떠냐, 개자식아!"
퍽!
그리고 허공을 박차 올라 있는 힘껏 지그문트의 복부를 걷어찼 다.
"미르! 지그문트! 그만둬라!"
지그문트가 반격하며 또다시 시 작된 난투극에 카라쇼가 이마를 짚었다.
"둘이 계속 그러고 있을 건가?"
나와 지그문트를 번갈아 본 카 라쇼가 한숨을 쉬었다. 동굴 한가 운데 앉은 그녀는 늑대와 재규어 를 합사하려다 처참히 실패한 사 육사의 낯을 하고 있었다.
"무슨 소리신지 모르겠습니다."
얼굴에 커다란 반창고를 붙인 나는 모르는 척하며 고개를 휙 돌 렸다. 동굴 끝에 앉은 내 목소리 가 동굴 안에 웅웅 울렸다.
"전 이게 편합니다."
입가가 찢어진 지그문트가 무심 한 낯으로 답했다. 동굴 밖으로 몸이 반쯤 걸치게 앉아 있는 그는 내가 앉아 있는 곳으로부터 약 15m 떨어져 있었다. 동굴이어서 목소리가 울렸기에 망정이지, 다 른 곳이었다면 목소리도 안 들렸
을 터였다.
지그문트와 나는 서로가 세균이 라도 되는 양 눈 한번 마주치지 않은 채 끝과 끝에 앉아 있었다.
"계속 그러면 둘이 한 시간 동 안 손잡고 있게 할 거다."
카라쇼가 눈을 부릅떴다. 사사건 건 의견이 다른 나와 그였지만, 지금만큼은 따다 베낀 듯 똑같이 서로를 경멸스러워하는 표정을 지 었다.
"차라리 죽여 주세요••••••
나는 짜증스럽게 웅얼거리며 엉 덩이 걸음으로 자리를 옮겼다. 오 랜 가뭄으로 바짝 마른 지렁이 같 은 속도였다. 지그문트는 일어나 서 걸어왔으나, 속도는 나흘 굶은 거북이와 견줄 만했다.
"서로가 그렇게 싫으냐?"
모닥불 앞에 모이고서도 서로를 없는 사람 취급하는 나와 지그문 트를 번갈아 본 카라쇼가 심란한 표정을 지었다.
카라쇼는 조화와 평화를 중요시 여기는 사람이었다. 제자라곤 둘 밖에 없는데 그 둘이 사사건건 불 협화음을 일으키니 착잡할 법도 했다. 무릎을 모으고 앉은 나는 입술을 꾹 물었다.
"저 자식이 저를 싫어하지 않습 니까."
내 작은 목소리에 두 사람이 동 시에 나를 돌아보았다. 나를 담는 지그문트의 보랏빛 두 눈은 악의 가 아니라 묘한 동요를 담고 있었
차라리 그가 진심으로 나를 싫 어했다면 편했을 것이다. 나도 같 이 싫어하면 그만이니까.
하지만 저런 반응을 보이면 내 가 그를 괴롭히는 악역이라도 된 것 같았다.
" 나는••••••
답지 않게 당황스러운 기색을 보인 지그문트가 머뭇거렸다.
그가 무어라 말하려 할 때, 눈을 부릅뜬 카라쇼가 무언가 느낀 것 처럼 자리에서 벌떡 일어섰다.
"둘 다 검 들어라!"
_스-르-르
■ 1 O •
소름 끼치는 쇠붙이 소리와 함 께 카라쇼의 검이 달빛을 받아 빛 났다. 나 또한 급하게 검을 뽑았 다. 아직 소드 익스퍼트인 카라쇼 처럼 직감이 날카롭진 않았으나, 카라쇼의 태도에서 심상치 않은 일이 일어나려 한다는 것을 알 수
있었다.
크르릉.......
얼마 지나지 않아 짐승 특유의 거친 울음소리가 들려왔다. 나는 침을 꿀꺽 삼키며 동굴 밖을 노려 보았다.
병든 하이에나를 닮은 외양• 윤 기 없이 뻣뻣한 검은 털 사이로 뚝뚝 떨어지는 녹색 액체.
사방으로 풍기는 악취에 머리가 어지러울 지경이었다. 길고 날카
로운 송곳니는 꼭 갈고리 같았다. 적의로만 가득한 붉은 눈과 마주 한 나는 급하게 숨을 들이쉬었다.
넘쳐흐르는 압생트, 큐베라였다.
"......큐베라의 독이 일정량 이 상 피부에 묻으면 곤란해진다는 거 기억하겠지. 너희는 직접 상대 할 생각은 하지 말고 놈이 달려들 면 독이 묻는 걸 피하기만 해라."
나와 지그문트를 막고 선 카라 쇼가 단호하게 말했다. 큐베라는 온몸에 독이 흘렀기에, 실제로는
그리 강하지 않지만 상대하기 까 다로운 마수 중 하나였다. 큐베라 를 막아선 넓은 카라쇼의 등은 단 단한 벽처럼 든든해 보였다.
크앙!
독이 섞인 역겨운 침을 뚝뚝 흘 리던 큐베라가 카라쇼에게 달려들 었다.
쉬익
그녀가 검을 크게 휘둘렀다. 새 하얀 오러가 검은 몸체를 베었다.
사방으로 녹색 액체가 튀어 올랐 다. 미처 피하지 못한 독 한 방울 을 맞은 뺨이 마취제라도 맞은 것 처럼 뻐근해졌다.
" 지그문트!"
" 점화!"
카라쇼의 부름에 지그문트가 재 빠르게 화염 마법을 전개했다. 합 을 한두 번 맞춰 본 솜씨가 아니 었다.
미르!"
나를 부르는 목소리에, 나 또한 움직임이 더뎌진 큐베라를 향해 거침없이 검을 던졌다. 예쁜 포물 선을 그리며 창처럼 날아간 검이 큐베라의 몸통을 관통했다. 큐베 라가 기괴한 울음소리를 냈다.
지그문트만큼은 아니었지만, 나 또한 카라쇼와 합을 맞추는 것에 익숙해져 있었다.
쿠에에엑!
큐베라가 거칠게 몸부림치며 나 를 향해 돌진했다. 몸 한쪽이 지
져지고 검에 꿰뚫린 뒤에도 움직 이는 괴물은 끔찍했다. 큐베라의 또 다른 특징은 지독한 생존력이 었다.
"피해라!"
카라쇼의 외침과 함께 난 앞구 르기로 아슬아슬하게 큐베라를 피 했다. 피하는 새에 큐베라의 몸에 꽂힌 검을 거칠게 뽑아내자, 검은 피와 녹색 독이 함께 솟구쳐 내 얼굴을 적셨다.
나는 얼굴이 타는 듯한 통증을
느끼며 이를 악물었다. 그나마 가 면을 쓰고 있어서 다행이었다. 한 동안 얼굴이 부어 눈도 뜨지 못하 겠지만, 이 정도면 목숨이 위험한 수준은 아니었다.
가볍게 기합을 지른 카라쇼가 큐베라를 향해 하얀 오러를 날렸 다. 화염 마법으로 지져진 피부에 다시 한번 공격을 맞은 큐베라의 몸이 기괴하게 뒤틀렸다. 비틀거 리던 괴물은 풀썩 쓰러졌다.
'죽었나......
나는 긴 한숨을 뱉으며 고개를 숙여서 와이셔츠 자락으로 얼굴에 묻은 독을 닦아냈다. 흰 와이셔츠 위로 녹색 물이 들었다. 독이 콧 속으로도 들어간 건지 숨을 쉬는 게 조금 힘들었다.
"미르! 괜찮으냐!"
창백해진 카라쇼가 급히 내게로 달려왔다. 얼굴에 독을 뒤집어쓴 내게로 그녀의 모든 신경이 쏠렸 다. 나는 땡땡 부어오르기 시작했 을 얼굴이 얼마나 못났을지 상상 하면서 어색하게 웃으며 눈을 굴
렸다.
그리고 두 눈에 들어온 광경에 뻣뻣하게 굳었다.
'죽을 줄 알면서도 걸어야 하는 길이 있다.'
언젠가 카라쇼에게서 들은 가르 침이었다. 그녀는 언제고 내 나침 반이었다.
팟.
망설임은 짧았고, 실행은 즉시였
다. 나는 두 발에 어설프게 마나 를 두르고 전속력으로 뛰며 팔을 뻗었다.
콱.
긴 송곳니가 피부를 뚫었고, 붉 은 것이 터졌다. 뻗은 팔에 참을 수 없는 고통이 퍼졌다.
"허 억."
나는 비명조차 지르지 못하고 숨을 몰아쉬었다. 지그문트에게 달려들었던 큐베라는 내 팔을 물
고 모든 힘을 다한 듯 숨을 멈췄
커진 보라색 눈동자 표면에 내 가 담겼다. 예쁜 붉은색 입술이 떨려 왔다. 지그문트의 포커페이 스가 산산이 부서지는 것을 본 건 이번이 처음이었다.
인격도 되먹지 못하고, 말하는 법도 모르는 개자식이다. 나는 역 시 지그문트가 마음에 들지 않았 으나.
그럼에도 그를 싫어할 수 없었
"빚은 갚았다, 개새끼야."
해일처럼 몰려오는 고통을 꾹 누른 나는 입꼬리를 한껏 올려 얄 미운 미소를 지어 보였다. 시야가 핑 돌고, 몸이 기울어졌다. 부어 오른 얼굴로 인해 팽팽해졌던 가 면의 끈이 끊기며, 여태껏 꽁꽁 감추었던 얼굴이 공교롭게도 지금 드러났다.
단단한 팔이 거의 넘어간 내 몸 을 아슬아슬한 타이밍으로 안아들
었다.
"이 미친 새끼가 진짜!"
감정 없는 기계처럼 굴던 지그 문트가 처음으로 원색적인 욕설을 내뱉었다. 속이 시원해진 나는, 위급한 상황이 우습게도 나직한 웃음을 뱉었다.
내가 눈을 감기 전 마지막으로 본 것은 사정없이 일그러진 지그 문트의 얼굴이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