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충직한 검이 되려 했는데-184화 (184/254)

184화. 외전 5

"으음......•"

나는 갈라진 목소리로 앓는 소리 를 내며 천천히 눈을 떴다. 낯선 천장이라 멍하니 눈을 끔뻑이다, 마지막 상황을 떠올리고 탄식을 뱉 었다.

'큐베라한테 물리고 바로 기절했 지••...•'

얼굴은 아직 욱신거렸지만 몸 상

태는 놀라울 정도로 좋았다.

'아리아가 놀랐을 것 같은데. 빨 리 돌아가야겠네.'

마음이 조급해져서 침대를 짚으며 힘껏 몸을 일으켰다. 그리고 마주 친 두 눈에 흠칫했다.

"......지그문트 하이드?"

어두운 방 창문 틈새로 새어 들어 오는 달빛 한 줄기만이 어두운 방 을 비추고 있었다. 달빛을 등진 지 그문트의 얼굴엔 짙은 그림자가 드 리워져 있었는데, 신비로운 보랏빛

눈동자는 어둠 속에서도 요요하게 빛나고 있었다.

"스승님은 어디 가고 혼자 있 냐?"

나는 머리를 긁적거리며 여상스럽 게 물었다. 날이 어두운 걸 보아 큐베라에 물렸던 그날에서 적어도 하루는 지났을 터. 설마 하루 종일 내 곁을 지킨 건가 하는 의문이 스 치고 지나갔으나, 이내 실소를 뱉 으며 스스로 부정했다.

지그문트가 내 병간호를 한다니, 상상도 되지 않았다.

"......면역력 향상에 좋은 약초를 캐러 가셨다."

"엑. 나 때문에? 나 멀쩡......

" 너는!"

그는 언성을 높이며 내 말허리를 뚝 잘라먹었다. 나는 눈을 등잔만 하게 뜬 채로 지그문트를 바라보았 다.

겨울이 의인화된다면 그 이름은 지그문트일 거라고 생각했다. 그는 체향부터 분위기까지 온통 겨울을 닮았다. 사뿐히 떨어지는 눈송이처 럼 고요했고, 뼈를 꿰뚫고 스며드

는 한파처럼 차가웠다.

결코 격한 감정을 내보이지 않는 얼어붙은 포커페이스가 재수 없다 고 느낀 건 한두 번이 아니었다.

지그문트가 내 앞에서 언성을 높 인 건 이번이 처음이었다.

"생각이라는 게 있는 건가? 그 상황에서 대체 왜 나선 거지? 네가 나보다 독 저항력이 높을 것 같았 나? 나약한 네가? 네놈 도움 같은 건 필요 없었다! 하, 은혜를 갚아? 그러면 내가 좋아할 줄 알았나!"

"오•..."

지그문트가 와르르 토해 내는 말 을 가만 듣고 있던 나는 침대 옆에 있던 의자를 집어 들었다. 부드러 운 미소가 입가에 피어났다.

"이제 막 병석에서 일어난 사람을 고혈압으로 다시 눕히고 싶어 하는 네 인성 잘 봤다. 그래. 내가 아팠 다 일어나니까 더 쉽게 이길 수 있 을 것 같냐? 아니다, 이 악마야."

큐베라에게 대신 물려 줬으니 고 마워 빌빌거릴 거라고 생각하진 않 았지만, 이건 너무하지 않나.

우선 체어샷부터 날리고 볼 생각 으로 의자를 머리 위로 드는데, 지 그문트가 한 손에 제 얼굴을 묻었 다. 푹 숙인 뒷머리가 어쩐지 애처 로워 보였다.

"너는...... 나를 구하면 안 됐다."

오랜 가뭄에 갈라진 땅처럼 버적 거리는 건조한 목소리. 하지만 왜 일까, 나는 그 목소리에 물기가 어 린 것 같다고 느꼈다.

그를 물끄러미 바라보던 나는 살 며시 의자를 내려놓았다. 그는 이 미 충분히 아파 보였다.

"나는 살아남아선 안 됐던 사람이 다. 거기서 죽어야 했다. 너는 분명 나를 살린 걸 후회...... 크윽!"

빠악!

시원한 소리와 함께 지그문트가 신음을 뱉었다. 그의 고개가 90도 로 꺾였다. 때린 당사자인 나도 순 간 그의 목이 부러진 건가 싶어 흠 칫했다.

'풀 파워는 너무 심했나.'

나는 그의 얼굴을 갈긴 손을 두어

번 털어 냈다. 옅은 죄책감이 들었 지만, 후회는 하지 않았다. 아무리 치고박으며 싸워도 그의 얼굴만큼 은 때리지 않던 내가 처음으로 그 의 얼굴을 때린 순간이었다.

" 야."

낮게 깐 목소리로 불러도 지그문 트는 고개를 들지 않았다. 코를 가 린 손 틈새로 붉은 것이 힐끗 보이 는 걸 보아 코피가 터진 것 같았 다. 많이 아프겠지만 미안하다는 말을 할 생각은 없었다.

"너 스승님 앞에서도 그런 소리

하면 그땐 얼굴에 박히는 게 주먹 이 아니라 검일 거다."

나는 지그문트와 카라쇼 사이에 무슨 일이 있었는지 자세히 알지 못했으나, 대강 짐작은 하고 있었 다. 설원에서 죽을 뻔한 지그문트 를 살린 게 카라쇼라는 거.

나는 카라쇼를 존경했고 그녀의 선택을 신봉했다. 내가 생각해도 맹목적인 믿음이라고 할 수 있을 정도였다.

지그문트는 마음에 안 드는 자식 이지만, 그녀가 살렸다면 이유가

있을 터. 카라쇼의 선택이 잘못됐 다고 하는 건 참을 수 없었다.

"......너는 아무것도 모른다."

"그래. 네가 아무것도 말해 주지 않으니까."

침대에 깊이 몸을 기댄 채 깍지 낀 두 손으로 뒷머리를 받치며 여 상히 말했다.

지그문트가 입을 꾹 다물었다. 그 가 입을 닫는 모습이야 익숙했다. 그는 내게 자신에 대해 얘기하는 법이 없었으니까.

"하지만 하나는 알아. 넌 아직 살 고 싶잖아."

지그문트가 휙 얼굴을 들었다. 그 의 얼굴은 코피가 번져 엉망진창이 었다. 저런 꼴을 보면 속 시원할 거라고 생각했건만, 이상하게도 마 음이 불편했다.

"•..."무슨."

"죽을 날만 기다리는 놈은 그렇게 살지 않아. 너는 지쳐 보이지만, 죽 고 싶진 않은 것 같진 않아."

보랏빛 원 중심에 박힌 검은 원이 요동쳤다. 나는 나직하게 웃었다.

"인정하긴 싫지만 나도 네가 살길 바랐어."

내가 막아서지 않았다면 큐베라는 지그문트의 목덜미를 물어뜯었을 것이다. 나는 그 순간 그가 죽는 걸 보느니 내 팔을 버리는 게 낫다 고 생각했다.

그건 카라쇼에게 배운 신념이기도 했지만, 동시에 내 의지이기도 했 다.

"그러니까 감사 인사나 해, 지푸 라기야."

솔직히 털어놓고 나니 괜히 민망 해져서 아무렇지 않은 척 넉살을 늘어놓았다. 그때까지도 말이 없던 지그문트는, 내가 자리에서 일어나 려 할 때에야 입술을 열었다.

"싫어한 적 없다."

"••••••뭐?"

나는 멈칫하며 그를 휙 돌아보았 다.

"네 존재가 어색했다. 스승님이 신경 쓸 거리가 하나 더 늘었다는 게 껄끄럽기도 했다. 하지만 널 싫

어한 적은 단 한 번도 없다."

그에게 들을 거라곤 상상치도 못 한 말이었다. 내가 기묘한 감정에 휩싸여 굳어 있을 때, 지그문트가 자리에서 일어섰다.

"잊지 않는다."

스쳐 지나가듯 희미한 목소리였으 나 나는 분명히 들었다. 지그문트 는 내가 무어라 답하기도 전에 빠 른 걸음으로 문을 향해 갔다.

"야, 야! 잠깐만!"

내 다급한 걸음에 지그문트의 걸 음이 우뚝 멈췄다. 부른다고 멈춘 것만 해도 굉장한 발전이었다.

그가 무심한 표정으로 나를 돌아 보았다.

나는 엉성하게 고쳐져 있는 가면 을 벗었다. 이번엔 내 손으로였다. 의원에게 나를 보이며 내 정체를 지켜 주기 위해 기절한 내게 다시 가면을 씌워 준 것 같았는데. 카라 쇼는 손재주가 상당히 좋았으니 이 엉성한 복원은 분명 지그문트의 솜 씨였다.

"내 이름, 카슈미르야. 슈슈라고 도 불려."

나는 처음으로 내 진짜 이름을 입 에 담았다. 지그문트의 눈이 커졌 다. 한참 나를 응시하던 그는, 느리 게 입술을 열었다.

"......지그문트. 지그문트 하이드 다."

만난 지 몇 개월 만에 제대로 된 통성명이었다. 지그문트는 그 말만 남기고 빠르게 병실을 나섰다.

나는 반듯한 뒤통수가 사라진 곳

을 물끄러미 바라보다 시원하게 웃 었다.

"끝까지 고맙다는 말은 안 하네."

늘 그랬다. 지그문트는 감사 인사 를 하지 않았다.

카라쇼, 지그문트와 함께 다니게 된 지도 벌써 1년이 지났다. 나는 망토 주머니에 왼손을 꽂고 여느 때와 같이 용병 길드로 발걸음을 옮기다, 인파 사이에서 익숙한 얼 굴을 발견했다.

'헤엥.'

짓궂은 마음이 든 나는 기척을 완 전히 죽인 채 살금살금 발걸음을 옮겼다. 바로 등 뒤에서 불쑥 기척 을 드러내며 어깨를 짚으려 할 때, 낮은 목소리가 들려왔다.

"가능할 거라고 생각하고 시도하 는 건가."

그는 돌아보지도 않고 나임을 알 아차렸다. 나는 짜증스럽게 앓는 소리를 내며 두 손을 내렸다.

"김새는군. 나인 건 어떻게 알았 지?"

내가 그의 옆으로 향하고, 그가 보폭이 좁은 내게 맞춰 속도를 줄 이는 것까지 무척 자연스럽게 이어 졌다. 그만큼 그와 내가 서로에게 익숙해졌단 뜻이었다.

"너는 그냥 느낄 수 있다."

짙은 보랏빛 눈동자가 내게로 시 선을 맞추었다. 하얀 반가면을 쓰 고 있어도 느낄 수 있는 지독한 아 름다움. 더 깊고 짙어진 그의 두 눈이 시간의 흐름을 말해 주었다.

'그러고 보면 이 자식 말투도 많 이 다듬어졌지.'

지그문트의 말투는 여전히 재수 없었으나, 이전의 상종 못 할 지옥 의 아가리에 비하면 확실히 발전했 다. 나는 새삼스레 작년을 떠올리 며 치를 떨었다. 아직도 자주 싸우 긴 했지만, 이 또한 작년에 비하면 명확히 횟수가 줄었다.

"자식. 많이 컸다."

"갑자기 무슨 소리지?"

"그냥 만난 지 얼마 안 됐을 때가 생각나서."

난 미심쩍게 묻는 지그문트를 보 며 여유롭게 깍지 낀 두 손으로 머 리를 받쳤다.

"보기만 하면 늘 싸웠잖냐. 그땐 네가 세상에서 제일 나쁜 사람인 줄 알았는데."

지그문트가 짧게 헛웃음을 뱉었 다. 나 또한 치기 어렸던 생각임을 알았기에 피식 웃었다.

"그럼 지금은 어떻게 생각하지?"

" 음?"

나는 눈을 깜빡였다. 지그문트는 예전에 비해서 표현이 늘긴 했지 만, 이런 걸 물어본 적은 현저히 적었다. 나는 조금 신기하다 생각 하며 천천히 입술을 열었다.

"그야 지금은......

"악! 사, 살려 주세요!"

거리를 가로지르는 비명에 그와 나는 단번에 얼굴을 굳혔다. 우리 는 소리가 난 쪽으로 황급히 고개 를 돌렸다.

"하...... 이놈이 마차를 막았다 고?"

"네. 갑자기 마차 앞으로 뛰어들 어서...... 급정지할 수밖에 없었습 니다."

마부로 보이는 자가 10살 남짓 되어 보이는 애를 대롱대롱 들고 있었고, 얼핏 보아도 귀족인 남자 가 검은 커피가 묻은 제 옷을 짜증 스럽게 털어 내고 있었다. 상황을 보아 마차에서 커피를 마시다 급정 지로 인해 쏟으며 아이에게 화살이 돌아간 것 같았다.

"정말 죄송해요! 급한 일이 있어 서......

"네 이놈! 이 옷이 어떤 옷인 줄

아느냐! 네가 살면서 구경 한번 못 해 볼 암브로시오의 비단으로 만든 진귀한 것이란 말이다!"

남자가 호통을 쳤다. 큰 소리를 들은 아이가 파드득 몸을 떨며 눈 을 질끈 감았다. 감긴 두 눈 새로 투명한 물방울이 비쳤다.

"어떻게 할까요, 남작님."

발버둥 치는 아이의 옷자락을 단 단히 붙잡은 마부가 물었다. 거친 숨을 내쉰 남자가 마부의 손에 들 려 있던 말채찍을 뺏어 들었다.

"내가 직접 손봐 주지."

아이의 얼굴이 새파랗게 질렸다. 아이의 조막만 한 얼굴이 눈물로 가득 젖었다.

"살려 주세요! 제발요! 어, 어떻게 든 갚을게요! 도와주세요!"

아이가 소리쳤으나 소란으로 모여 든 인파 사이에서 누구도 나서지 않았다. 모두 웅성거리면서도 방관 할 뿐이었다.

이 시간에 거리를 지나가는 이들 은 보통 평민들이었고, 신분 차이

가 명확한 제국에서 평민이 귀족에 게 반기를 드는 건 미친 짓이었다.

쉬이익!

미친 짓은 미친 사람이 해야 맞았 다.

지지직.

"으악!"

내 허리춤에서 뽑힌 단도가 인파 를 빠르게 가로질러 마부가 붙잡고 있던 아이의 옷자락을 찢고 벽에 박혔다. 기겁한 마부가 빠르게 손

을 물렸다. 마부의 손에서 풀려난 아이는 눈을 휘둥그레 뜨고 주위를 휙휙 둘러보다, 나와 눈이 마주쳤 다.

'도, 망, 가.'

나는 또렷하게 입 모양을 만들어 보였다. 또다시 눈물이 그렁그렁해 진 아이는 고개를 꾸벅 숙이더니 혼란스러워진 틈을 타 빠르게 도망 쳤다.

"누구냐!"

귀족이 주위를 두리번거리며 무섭

게 소리쳤다. 이젠 도망간 아이가 아니라 단도를 던진 사람에게 모든 화가 쏠린 것 같았다.

'사람이 워낙 많아서 내가 범인이 라는 걸 알아차리진 못하겠지 만...... 혹시라도 나 때문에 애먼 사람이 피해를 보면 안 돼.'

나는 짧게 심호흡을 했다. 저런 부류의 귀족들이야 잘 알았다. 우 월한 지위로 사람들을 짓누르기 좋 아하고, 화풀이로 사람을 괴롭히는 저열한 인간들 말이다. 나가서 몇 대만 얻어맞아 주면 끝날 일이었 다.

내가 손을 들고 나서려고 할 때, 나보다 더 빨리 손을 든 사람이 있 었다.

"접니다."

나는 눈을 부릅뜨고 옆을 돌아보 았다. 돌아가는 상황이 이해가 되 지 않았다.

나를 대신해서 나선 사람은, 다름 아닌 태연한 표정의 지그문트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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