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86화. 외전 7
"아, 슈슈! 왔느냐!"
늘 모이는 장소인 용병 길드 뒤 쪽으로 발걸음을 옮겼다. 벽에 등 을 기대고 서 있던 카라쇼가 나를 발견하고 화색을 띠었다. 주름진 입가에 퍼지는 웃음은 영원히 빛 이 바래지 않을 듯 찬란하게 반짝 였다.
"늦어서 정말 죄송합니다."
"하하! 괜찮다. 사정이 있었겠 지. 다만 지그문트가 아직 오지 않아서 걱정이구나."
거리에서 남작과 있었던 일 때 문에 약속 시간으로부터 꽤 늦은 시점이었다. 죄스러운 마음에 허 리를 숙이자 카라쇼가 호탕하게 웃으며 손을 휘저었다. 그녀는 지 그문트를 언급하며 염려스러운 낯 을 보였다.
"지그문트라면 걱정하지 마세요. 조금 전까지 같이 있었습니다. 급 한 일이 있어서 좀 늦게 합류한다
고 하더군요."
"그러면 이번엔 말을 타고 가야 겠구나. 순간이동이 편한데, 아쉽 군. 그렇지?"
내 대답에 고개를 끄덕인 카라 쇼가 장난스럽게 말했다. 그녀는 이유와 정황을 묻지 않았다. 반문 하지도 않았다. 아주 당연하다는 듯 수긍할 뿐이었다.
'지그문트는 뭘 하러 간 걸까.'
문득 의문이 떠올랐다. 그는 1 년 가까이 알고 지냈음에도 여전
히 의뭉스러운 사람이었다. 나는 녀석이 어디서 왔는지, 부모님은 누군지, 벌어들인 돈은 어디로 보 내는 건지, 누구와 그렇게 연락을 하는지 하나도 몰랐다. 골똘히 생 각하던 나는 카라쇼에게 충동적으 로 물었다.
"스승님은 지그문트를 의심해 본 적 없으십니까?"
카라쇼도 지그문트를 완전히 알 지는 못했다. 지그문트가 말하지 않으니까. 그녀는 어떻게 수수께 끼로 둘러싸인 인물에게 온전한
신뢰를 보낼 수 있는 건지, 나는 그게 궁금했다.
'아, 이간질처럼 들렸으려나.'
나를 보는 카라쇼의 표정이 미 묘해졌음을 느끼고 아차 했다. 악 의는 없었으나 충분히 악질적으로 들릴 수 있는 말이었다. 내가 급 히 해명하려 할 때, 카라쇼가 입 을 열었다.
"나도 부족한 사람이다. 그럴 듯 하게 말하지만 마음은 뒤숭숭할 때가 있지. 의심하기도, 고뇌하기
도 한다."
진중한 얼굴로 그런 말을 하는 카라쇼는 내게 잔잔한 충격을 주 었다.
어린 내게 카라쇼의 지혜로운 언행은 아득해 보였고, 그 단단한 등은 태산처럼 커 보였다.
그래서 그녀도 사실은 나와 같 은 인간임을 잠시 잊고 있었다.
그러고 보면 카라쇼도 굉장히 험하게 살아온 사람이었다. 그녀
는 따뜻한 남부에서 태어나, 혈혈 단신으로 자신의 길을 개척했다. 험하게 살아온 이들은 모두 거칠 다는 내 고정관념을 깨뜨린 것도 그녀였고.
"늘 지그문트를 믿는다고 말하 고 있고 실제로도 믿으려고 하지 만, 깊은 곳에서 치미는 생각까지 통제할 순 없더구나. 솔직히 말하 면, 그래. 가끔은 불가항력적으로 의심하기도 하지. 이 아이는 대체 누구일까, 나는 아직도 믿음직스 럽지 못한 스승인 걸까. 그런 생 각들에 괴로워하기도 한다."
이어지는 건 카라쇼의 인간적인 고백이었다.
그래. 그녀도 인간이니 당연히 그럴 터였다. 나는 충격의 여파를 지우려 노력하며 무겁게 고개를 끄덕였다. 세월이 깃들어 주름진 눈가가 힘없이 내려갔다.
"아무리 세월이 지나도 완전해 질 수는 없더구나. 나도 아직 성 장해 가고 있는, 부족한 사람에 불과하지. 다만 나는 긴 세월에서 배웠다. 짧은 시간 동안 후회 없
이 사랑하는 법과 내 선택에 책임 을 지는 법을 말이다."
잠시 상념에 잠겨 있던 카라쇼 의 검은 눈동자가 다시 빛나기 시 작했다. 그녀가 나를 똑바로 바라 보았다.
"지그문트는 언제 떠날지 모르 는 아이다. 그러니 함께 있을 때 더 사랑해 줘야겠지. 너도 그렇 다. 우리는 앞날을 모르니까, 나 는 너희들과 함께 있는 이 순간 최선을 다해 사랑하고 싶구나."
사랑받고 있다는 자각은 언제고 벅찼다. 코끝이 찡해진 나는 느리 게 숨을 뱉었다.
어쩌면 나는 사랑하는 것이 두 렵고 책임지기가 꺼려져서 지그문 트를 온전히 받아들이는 것을 주 저하는 걸지도 몰랐다.
"......만약 지그문트가 정말 나 쁜 자식이면요?"
"지그문트는 그런 아이가 아니 야."
" 만약에요."
"그렇다면 내 판단이 틀린 거겠
지."
카라쇼는 깔끔했다. 그 시원스러 운 태도를 닮고 싶었다. 나는 입 술을 꾹 물고 그녀를 바라보았다.
"사랑하면 분명히 상처받는다는 걸 알면서도 어떻게 그러세요?"
몇 년을 더 살고 무엇을 더 경 험해야 저런 마음가짐을 가질 수 있는 걸까. 아직 카라쇼 같은 사 람이 되려면 먼 것 같았다.
내 물기 섞인 물음에 카라쇼가
환하게 웃었다.
"우리는 죽을 줄 알면서도 살아 가잖아. 사랑한다는 건 눈물 흘릴 각오를 한다는 거다. 그것까지도 내 책임인 게지."
내겐 아직 어려운 말이었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마음 깊이 박 혔다. 복잡한 눈으로 카라쇼를 올 려다보자 그녀가 껄껄 웃으며 내 머리를 마구 헤집듯 쓰다듬었다.
"아직 이해하지 못해도 괜찮다. 분명 이해할 날이 올 테니."
나는 그녀의 거칠지만 따뜻한 손길을 얌전히 받아들였다. 사랑 이 실체화된다면 꼭 이 온도일 것 같았다. 나는 옅게 웃으며 눈을 감았다.
그 '이해할 날'이 코앞에 와 있 는 줄도 모르고.
"크 "
O •
"아이고, 추우냐? 이거 덮거라."
추운 날씨에 무심코 코를 훌쩍 이자, 걱정스러운 표정을 지은 카 라쇼가 자기가 덮고 있던 두꺼운 망토를 내게 둘러 주었다. 나는 거절하려 했으나 그녀가 보통 엄 한 표정이 아니었기에 입술을 삐 죽이며 얌전히 덮었다. 햇살 향이 내 코를 간지럽혔다.
북부는 12월의 끝을 바라보는 시기에 가장 추웠다. 게다가 이번 겨울은 유독 더 추운 것 같았다. 새하얀 눈은 증식하듯 빠르게 쌓 였고 이제는 발목까지 푹푹 잠겼 다. 나와 카라쇼는 쏟아지는 눈을
헤치며 설원을 걸어 나갔다. 마수 토벌에 최악의 환경이었지만, 함 께라서 버틸 만했다.
"지그문트가 많이 늦는구나. 연 락도 없고."
카라쇼가 푹 한숨을 쉬며 잠잠 한 통신구를 매만졌다. 그녀의 얼 굴에 걱정이 덕지덕지 묻어 있었 기에, 나는 지그문트를 다시 본다 면 옆구리를 걷어차 주리라 결심 했다.
"그놈이야 알아서 오지 않겠습
니까. 저희가 머물 동굴을 찾는 게 더 급합니다."
나는 괜히 툴툴거리며 주위를 두리번거렸다. 일은 마쳤건만, 폭 포처럼 쏟아지는 눈송이에 시야가 가려서 마땅히 묵을 곳이 보이지 않았다.
한숨처럼 웃은 카라쇼가 고개를 끄덕였다.
"그래. 지그문트야 혼자서도 잘 할 테니. 저쪽으로 가 보자꾸나."
나는 카라쇼가 가리킨 방향으로 발걸음을 옮겼다. 내뱉는 숨까지 얼어붙어 연기 모양 얼음이 생겨 날 것 같았다. 얼어붙은 몸을 티 내지 않으려 노력하며 설탕 묻힌 추로스처럼 흰 눈가루가 다닥다닥 붙은 발을 움직일 때였다.
쿵.
땅이 크게 울렸다. 나는 움찔하 며 발걸음을 멈췄다. 나무가 혼들 릴 만큼 거대한 진동이었기에, 지 진인 줄 알았다.
'이 지역은 지진이 나는 곳인 가......?'
북부에서 지진을 처음 겪어 본 나는 의아해하며 눈을 깜빡였다. 그때 또다시 땅이 울렸다. 조금 전보다 더 큰 진동이었다. 넘어질 듯 크게 휘청한 나는, 상황의 심 각성을 느끼고 황급히 카라쇼를 돌아보았다.
"스승님, 이거 지진......
말을 뚝 멈췄다. 아마 거울을 봤 다면 내 눈이 크게 혼들리는 걸
볼 수 있었을 것이다.
카라쇼가 섬뜩하게 얼굴을 굳히 고 있었다.
늘 차분하던 그녀가 평정심을 잃은 모습을 보이는 건 처음이었 다. 나는 그것만으로도 상황이 내 생각보다 심각하다는 걸 느낄 수 있었다. 안일하게도 카라쇼의 곁 에만 있으면 안전할 거라고 생각 하던 내게 공포가 엄습했다.
"슈슈, 잘 들어라."
소금 기둥처럼 딱딱하게 굳어 있던 카라쇼가 나를 돌아보며 내 두 어깨를 꽉 잡았다. 평소의 평 정심에서 반 정도를 다시 되찾은 그녀는 결연해 보였다.
꼭, 죽음을 예감한 사람 같았다.
"도망치기엔...... 늦었다. 차라리 내 곁에 있는 게 안전할 것 같구 나. 반드시 내 등 뒤에 있어라. 절대 벗어나선 안 된다."
"무슨...... 무슨 일이 일어나고 있는 건데요!"
내 직감이 머리를 터트릴 듯 위 험 신호를 보내 왔다. 나는 카라 쇼의 이상한 태도에 불안함이 증 폭되어 어쩔 줄 몰라 하며 그녀를 올려다보았다.
카라쇼의 한숨이 덧없는 입김으 로 퍼져 허공에서 사라졌다.
그녀가 웃었다. 진심 어린 웃음 은 아니었다. 나는 그녀의 입꼬리 가 희미하게 떨리고 있는 것을 발 견할 수 있었다.
카라쇼 또한 두려워하고 있었다.
그런데도 그녀는 나를 안심시키기 위해 웃었다.
"재앙이 오고 있구나."
크아아아악-!
그 속삭임을 끝으로 몸을 들썩 이게 하는 진동이 멈추고, 하늘을 찢을 듯 거대한 울음소리가 울려 퍼졌다.
온몸에 소름이 돋았다. 태풍을 예감하고 피신하는 개미처럼, 뱀 들의 왕 바실리스크의 등장에 도
망가는 뱀처럼, 나는 본능적으로 도망쳐야 한다는 걸 느꼈다. 나는 덜덜 떨며 울음소리가 들린 곳으 로 고개를 돌렸다.
외양은 개를 닮았으나, 그 덩치 는 장정의 열 배쯤 될 정도로 거 대했다. 번들거리는 붉은 눈동자 엔 이지가 없었다. 지독한 피비린 내와 살이 썩는 역겨운 악취가 코 끝을 찔렀다.
"스, 스승님, 저건......
"거대 마수 데베라다. 지옥에서 기어 오는 사냥개라고도 불리지."
겁에 질린 내가 카라쇼의 옷자 락을 꽉 잡자 그녀가 침착하게 대 답했다. 카라쇼는 평정심을 유지 하려 하고 있었으나, 목소리에는 긴장한 기색이 역력했다. 살을 에 는 듯 추운 날씨인데도 식은땀이 비 오듯 흘렀다. 나는 파르르 떨 리는 입술을 열었다.
"왜...... 한 마리가 아니죠?"
열 마리. 그 끔찍한 괴물이 한 마리도 아니고 열 마리였다.
"그러게. 데베라는 단체로 서식 하는 마수종이 아닌데...... 저 많 은 놈들이 우리로 배부를 수는 없 을 텐데 말이다."
카라쇼가 의문을 표하면서도 애 써 장난스럽게 말했다. 그녀가 필 사적으로 내 긴장을 풀어 주려고 하고 있음을 모를 수가 없었다.
그르릉.......
우두머리로 보이는 데베라가 우 리를 향해 천천히 다가왔다. 다른 데베라들도 그를 따랐다. 거대한
해일이 나를 덮치기 직전의 모습 을 슬로 모션으로 보고 있는 것 같았다.
'무서워.'
울컥 눈물이 날 것 같았다. 카라 쇼 앞에서 나약한 모습을 보이고 싶지 않았건만, 생리적인 두려움 은 지금 당장 극복할 수 있는 것 이 아니었다. 검을 뽑는 손이 사 시나무처럼 떨렸다.
도망치고 싶었다. 나는 이제 십 대 중반이었다. 키는 150cm 후반
을 겨우 넘겼다. 살아야 하는 이 유가 남아 있었고, 사랑하는 동생 이 날 기다리고 있었다.
분명 죽음 같은 건 하나도 두렵 지 않다고 생각했는데, 대재앙과 마주하니 간사하게도 생각이 달라 졌다.
나는 지금 죽고 싶지 않았다. 더 살아서 이 세상에 내 이름을 남기 고 싶었다. 지금 죽어 봐야 나를 기억해 줄 사람은 아리아밖에 없 었다. 죽어서도 쓸쓸한 건 싫었 다. 아리아를 쓸쓸하게 만드는 것
도 싫었다.
나는, 더 살아서......•
"슈슈."
부드러운 목소리와 함께 추위와 공포로 얼어붙은 내 손을 온기가 감쌌다. 나를 구원했던 그 온기였 다. 나는 물기 가득한 눈을 깜박 이며 그녀를 멍하니 올려다보았 다.
"어린 네가 이런 재앙을 마주하 게 해서 미안하다. 네게 더 좋은
세상을 주지 못한 건 어른인 내 죄다."
카라쇼는 고해성사하듯 낱말들 을 토해 냈다. 자신의 죄도 아닌 것을 고백하는 그녀의 낯은 슬프 고, 쓸쓸했으며, 결연했다. 완벽한 어른의 모습이었다.
아마 이때였을지도 모른다. 내가 좋은 세상을 만들어야 한다는 신 념을 갖게 된 것은.
"정말 미안하다. 시련 같은 걸로 성장하지 않았다면 좋았을 텐
데...... 결국 널 이런 사지로 밀어 넣게 되는구나."
"이, 건, 스승님 잘못이•• ...
"하지만 너는 내가 반드시 지킬 거다."
카라쇼의 검은 눈이 나를 똑바 로 직시했다.
그녀의 두 눈은 고귀한 흑진주 나 신비로운 흑요석과는 거리가 멀었다. 세월의 풍파가 스며들어 투박하고 쓸쓸했다.
그래. 꼭 거친 석탄 같았다.
"부디 나를 믿어 주렴. 네 젊음 이 이곳에서 스러지게 하지 않아. 한 번만 나와 함께해 보자."
카라쇼가 자신의 검을 꺼냈다. 은빛 검날 위로 설원을 뒤덮은 눈 송이보다 더 새하얀 오러가 피어 올랐다.
그녀의 두 눈은 다이아몬드를 품은 석탄, 내가 가장 사랑한 검 은색이 었다.
"같이 가는 거다. 괜찮으냐?"
'같이'. 내 두려움을 누그러뜨린 결정적인 단어였다. 그녀가 나와 함께해 줄 거라는 믿음. 그것은 검을 잡은 내 손의 떨림이 멈추게 하진 못했으나, 다가오는 데베라 를 똑바로 바라볼 수 있게 했다.
"......네."
나는 두려워도 마주하는 법을 배웠다. 카라쇼는 날 향해 환히 웃어 주고 고개를 돌렸다. 세상에 서 가장 반짝이는 검정이 재앙을 고요히 응시했다.
"내가 선봉에 선다. 엄호를 부탁 하마!"
카라쇼가 힘차게 박차고 올랐다.
콰쾅!
새하얀 낙뢰가 몰려오는 재앙 위로 내리꽂혔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