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충직한 검이 되려 했는데-187화 (187/254)

187화. 외전 8

캬아아악!

카라쇼의 오러를 정통으로 맞은 알파 데베라가 대지가 진동할 정 도로 울부짖었다. 검은 피가 흰 설원 위에 흩뿌려졌다. 단번에 죽 진 않았으나, 치명상인 것 같았 다.

"슈슈! 물러서라!"

알파 데베라가 공격받자 흥분한 다른 데베라 하나가 껑충 뛰어올 라 내 쪽으로 달려왔다. 내가 침 착하게 피하자, 카라쇼가 검을 크 게 휘둘렀다. 새하얀 오러가 초승 달 모양으로 쏘아져 나가 정확히 데베라의 배를 그었다.

'다행히 한꺼번에 몰려들진 않 네.'

다시 카라쇼의 뒤로 돌아온 나 는 잔뜩 긴장한 채 상황을 살폈 다. 열 마리가 한꺼번에 달려들면 승산이 없을 텐데, 알파 데베라가

치명상을 입은 여파가 큰 건지 모 두 주춤하며 덤벼들지 않고 있었

"신중하게 하나씩 칠 거다. 나를 잘 따라와야 한다!"

"네!"

카라쇼는 지시와 함께 다시 알 파 데베라에게 오러를 날렸다. 나 는 허벅지에서 단도를 뽑아 알파 데베라의 눈을 겨냥해 던졌다.

알파 데베라가 재빨리 몸을 움 직였다. 놈은 카라쇼의 오러는 피

했으나 내 단도까지 피하진 못했

=『.

붉은 눈동자에서 검은 피가 터 져 나왔다.

"온다!"

한쪽 눈을 잃고 격노한 알파 데 베라가 바람 같은 속도로 달려왔 다. 카라쇼의 호령에 나는 또다시 검을 들었다.

새하얀 세상에 순백의 신념이 폭주했다.

"허억•••••• 윽••••••

나는 숨이 넘어갈 듯 거칠게 헐 떡거렸다. 얼마나 오랫동안 대치 한 건지 짐작도 되지 않았다.

뼈까지 시린 날씨인데 식은땀이 폭포처럼 쏟아져 체온을 가늠할 수 없었다. 이미 한계를 뛰어넘어 과부하에 다다른 온몸은 터질 듯

욱신거렸다. 나는 비틀거리며 겨 우 검을 잡은 손에 힘을 주었다.

"후......

내 앞에 선 카라쇼가 길게 숨을 뱉었다. 나와 마찬가지로 만신창 이가 된 그녀 또한 과부하 상태인 것 같았다. 카라쇼가 모든 공격을 전담하다시피 했으니, 아마 나보 다 더 심각한 상태일 터였다. 그 럼에도 꼿꼿이 허리를 펴고 검을 치켜든 그녀는 내가 이상향으로 삼은 사람다웠다.

'그래도, 꽤......

나는 초점이 잘 맞지 않는 눈을 깜빡이며 설원에 널브러진 데베라 들의 사체를 보았다. 총 여섯 마 리• 무려 반 이상을 죽였다.

어쩌면 살아서 나갈 가능성이 있는 걸지도 몰랐다.

나는 그 생각에 방심했다.

"슈슈! 뒤!"

날카로운 고함이 귀를 찔렀다.

나는 한 박자 늦게 뒤를 돌아보았

죽은 줄 알고 안심하고 있었는 데, 죽은 척을 하고 있었던 모양 이다. 내 뒤에 널브러져 있던 데 베라가 벌떡 일어나 아가리를 쩍 벌렸다. 내 팔뚝만 한 송곳니에서 역겨운 타액이 흐르고, 벌려진 입 이 나를 삼킬 듯 몰아닥쳤다.

나는 그 순간 우습게도 아무것 도 하지 못했다. 너무 지쳤다고 변명할 수도 있겠으나, 사실 겁에 질려 움직이지 못한 것이다. 꼴사

납게.

나약함의 대가는 지나치게 컸다.

카라쇼가 몸을 날려 내 몸을 밀 쳤다. 나는 힘없는 종잇조각처럼 허공으로 붕 떠 멀리 떨어졌다. 땅에 부딪친 엉덩이뼈가 부러진 듯 아려 왔으나, 통증을 곱씹을 정신은 없었다.

콰직.

카라쇼의 구릿빛 발목이 데베라 의 이빨에 으스러졌다.

" 아."

나는 멍청하게 단말마를 내뱉었 다. 눈앞에 펼쳐지는 모든 광경이 현실감 없었다. 머리는 무언가를 하라고 소리치는데, 설원의 한기 와 마음속에서 솟구치는 냉기로 얼어붙은 몸은 핀에 박제된 나비 처럼 뻣뻣하게 멈춘 채였다.

"크윽!"

고통스러워하며 신음을 뱉은 카 라쇼가 몸부림쳐서 데베라의 입에 서 벗어났으나, 그녀의 발목은 이

미 데베라의 맹독에 퍼렇게 부풀 어 오른 뒤였다. 하필 다른 데베 라보다 더 강한 독을 가진 알파 데베라였다. 창백하게 질린 나는

얼어붙은 몸을 꺾듯이 움직여 그

녀에게로 달려갔다.

" 카라쇼!"

"오지 마라!"

간신히 검을 든 카라쇼가 힘겹 게 데베라의 앞발을 막아내며 소

리쳤다. 그러나 나는 듣지 않았

꽤 멀어진 거리를 전속력으로 좁히고 있을 때.

데베라의 흉포한 이빨이 카라쇼 의 어깨를 꿰뚫었다.

크게만 보였던 그녀의 어깨가 그렇게 작아 보일 수 없었다. 하 늘 위 높이 떠 있던 별이 인간으 로 보인 순간이었다.

툭 •

내 별이 둥그런 궤적을 그리며 추락했다. 사람들은 유성우가 아 름답다고들 하는데, 내 눈엔 조금 도 아름다워 보이지 않았다.

유성우는 별의 장례식이었다. 내 가 사랑하던 별의 죽음이 아름다 워 보일 리 없었다.

"카라쇼. 카라쇼!"

반쯤 정신을 놓은 나는 데베라

의 입에서 떨어지는 그녀를 잡기 위해 폭주하듯 마나를 터트렸다. 머리가 어질어질한 속도로 달려, 떨어지기 직전의 카라쇼를 간신히 품에 안았다. 그녀는 허무하리만 큼 가벼웠다.

푹!

끼에에엑!

나는 본능적으로 마나로 감싼 검을 던졌다. 검이 포물선을 그리 며 날아가 카라쇼를 공격한 데베 라의 주둥이를 꿰뚫었다. 비명을

지르던 괴물이 이내 거대한 진동 을 내며 쓰러졌다.

"끄흑, 커헉......

"카라쇼, 숨 쉬어요. 제발요

나는 숨 쉬기도 벅차 하는 카라 쇼를 꽉 안고 애원했다. 나는 그 녀의 어두운 피부가 창백해질수록 내가 이 세상에서 조금씩 추방당 하는 듯한 기분을 느꼈다.

"죄송해요. 저, 저 때문이에요. 제가 약해서, 피하질 못해서, 그

래서 스승님이......

나는 미친 사람처럼 두서없이 중얼거렸다. 눈앞이 깜깜했다. 설 원을 적시는 붉은 피만이 두 눈에 서 잔상처럼 일렁였다.

나는 차라리 저 피가 내 피이길 바랐다.

빌어먹을 새끼. 나약하기 짝이 없는 놈. 은혜를 못 갚은 걸 넘어 은인을 죽게 만든 배은망덕한 쓰 레기. 은인을 만난 그날 죽어야 했던 개자식.

자학적이고 거친 문장들이 잘린 동맥에서 피가 솟구치듯 머릿속에 서 터져 나왔다.

수많은 '만약'이 머릿속을 스치 고 지나갔다.

만약 내가 이 의뢰에 오지 말자 고 막았더라면. 적어도 이쪽 길로 는 오지 말자고 막았더라면. 지그 문트 그 자식이 함께 와서 손을 보탰다면.

내가, 조금만 더 강했더라면.

나는 형편없이 떨리는 손으로 카라쇼의 어깨를 막았다. 터진 둑 을 자갈로 막는 것과 다름없는 짓 이었다. 붉은 피에 언뜻 비친 내 눈은 새까맣게 죽어 있었다.

"슈슈."

"죄송해요. 제가, 제가 정말 로••...

" 카슈미르!"

카라쇼가 엄한 목소리로 나를 불렀다. 나는 뜨거운 피로 젖어 가는 설원을 멍하니 바라보던 눈

을 들어 카라쇼를 바라보았다.

그녀는 명백히 죽어 가고 있었 다. 옅어지는 숨소리와 차가워지 는 몸이 이를 대변했다.

하지만 그 두 눈만큼은 여전히 맹렬하게 살아 불타고 있어서, 나 는 시선을 뗄 수 없었다.

"가, 드."

카라쇼가 뚝뚝 끊기는 목소리로 속삭이자, 힘겨워 보이는 반투명 한 막이 생겨나 그녀와 나를 감쌌

다. 슬금슬금 다가오던 데베라들 이 보호막에 막혀 멈칫했다.

마나 고갈에 가까워진 카라쇼가 이 상황에서 마나를 많이 잡아먹 는 보호막을 전개했다는 건, 살기 를 포기했다는 뜻과 같았다.

"해체하세요! 제발 스스로를 신 경 써요! 사, 살 수 있어요. 제가 어떻게든 할게요. 그러니까......!"

"슈슈. 내 사랑하는 제자."

비명을 지르는 나를 사랑스럽다 는 듯 올려다본 카라쇼는 피가 묻

은 손으로 내 뺨을 매만졌다. 쉬 어 버린 속삭임에 나는 발광하던 것을 멈췄다.

"우리 마지막 수업을 해 볼까."

카라쇼가 떨리는 손으로 검을 쥔 내 손을 부드럽게 덮었다.

그리고 내 손을 움직여 검 끝을 그녀의 심장에 가져다 댔다.

"지키기 위해선 죽이는 법도 알 아야 하는 법이다."

" 카라쇼."

"여태껏 네게 선과 신념을 가르 쳤지. 이번엔 그에 따른 책임을 가르쳐 줄 차례인 것 같구나."

" 카라쇼!"

내 울부짖음에도 카라쇼는 나직 하게 웃었다. 그 웃음은 지독한 슬픔을 머금고 있었다.

"나를, 죽여라, 슈슈."

그녀는 기어코 내게 형벌을 선 고했다.

안다. 직감적으로 느꼈다. 그녀

는 여기서 살아갈 수 없음을.

늘 불행만 몰고 다니는 나는, 결 국 내 은인이자 첫 스승이었으며, 가장 존경하던 이상향까지 죽음으 로 내몰았음을. 알았다. 내 결말 이야 늘 이렇다는 것을 알고 있었

하지만 내가 그녀의 숨통을 직 접 끊는 것은 다른 문제였다.

"저, 저는 못 해요."

"슈슈."

"아시잖아요! 제가 당신을 얼마

나 사랑하는지! 제게 당신이 어떤 의미였는지 아시잖아요! 그런데 어떻게 그런 말을 해요! 차라리 제발, 제발 저를 욕하세요. 어디 쓰레기장에서 구르던 개새끼가 염 치없이 옆으로 기어 들어오더니 기어코 내 목덜미까지 물어뜯는다 고 하고 찢어 죽여 버리세요!"

"슈슈!"

나는 검은 두 눈이 상처로 물드 는 걸 봤을 때에야 입술을 콱 깨 물었다. 봇물 터지듯 솟구친 진심 은 나와 카라쇼 모두에게 상처를 주었다.

나도 모르는 새 줄줄 흘러나온 눈물을 벅벅 닦고 고개를 떨굴 때, 카라쇼가 내 뺨을 느리게 쓸 었다.

"수업이라는 말로 포장했지만, 사실 이건 내 마지막 이기심일지 도 모른다."

나는 퍼뜩 고개를 들었다.

카라쇼가 과연 '이기심'이라는 단어와 어울리는 사람이었던가.

내가 멍하니 그녀를 바라볼 때, 그녀는 찬연히 웃었다.

"나는 죽는다면 더러운 마수들 이 아닌 네 손에 죽고 싶구나."

단 한 번도, 정말 단 한 번도 제 욕망을 앞세우지 않던 사람이 다. 어떤 상황에서도 나를 더 중 히 여겼다. 자신의 이기심을 세워 내게 무언가를 요구한 적이 단 한 번도 없는 카라쇼였다.

그랬던 그녀가, 마지막으로 내게 요청하고 있었다.

영혼이 산 채로 비틀어지는 기 분을 느꼈다.

내가 이 요청을 거절할 수 있나. 아니, 거절할 자격이 있는가. 그 녀로 인해 다시 산 사람인데.

나는 그때 직감했다.

나는 결국 카라쇼를 죽이게 될 거라고.

울 자격도 없는데 눈물이 뺨을 타고 피처럼 질질 늘어졌다. 검을

고쳐 잡을 때, 나는 차라리 오늘 이 내 장례식이길 바랐다. 고개를 푹 숙인 채 검을 빼지도, 꽂아 넣 지도 못하고 있을 때, 카라쇼가 속삭였다.

"사람의, 숨통을, 끊을 땐...... 절대 그의 눈을 피해선 안 된다. 네가 앗아 가는 생명의 무게를 반 드시 짊어져야 해......

핏물 섞인 속삭임을 듣는 것만 으로도 고통스러웠다. 나는 발작 하듯 떨며 간신히 카라쇼와 눈을 마주쳤다.

"아, 윽......

그녀가 여전히 나를 사랑스럽다 는 눈빛으로 보고 있다는 것이 나 를 망가뜨렸다.

"기억해라. 그게 상처받을지언정 괴물이 되지 않는 방법이다."

카라쇼는 꽤 잔인한 사람이었다. 내가 그녀를 사랑한 만큼, 잔인함 은 증폭되었다. 가슴에 비수가 꽂 히는 듯한 환상통에 나도 모르게 헛구역질했다.

"괜, 찮다, 슈슈."

마법 주문처럼, 그 한마디에 정 말 다 괜찮아지는 것 같았다. 괜 찮은 건 아무것도 없다는 것을 알 면서도.

손에 떨림이 멈추었다.

"아, 지그문트에게 전해, 주겠 니."

그녀의 주름진 눈꼬리가 휘었다.

"네게도 반드시 봄이 올 거라 고."

그 자식은 모르겠으나, 나는 이 시간 이후 계속 겨울을 살 것 같 았다. 나는 잇새로 억눌린 울부짖 음을 흘리며 칼에 몸을 지탱했다. 데베라가 보호막을 치며 나는 소 리가 꼭 내 세계가 파괴되는 소리 같았다.

"그리고, 카슈미르에게도 꼭 전 해 주렴."

검 끝이 피부를 뚫었다. 사람 피

부를 파고드는 소름 끼치는 감각 은 절대 잊을 수 없을 것 같았다.

카라쇼는 온 세상을 다 밝힐 듯 환히 웃었다.

"네 생명은 내가 살린 것이니 살아라. 형벌이라 생각될지라도 끈질기게 살아남아라. 절대 스스 로 목숨을 끊지 마라. 버티고, 버 티면......

카라쇼는 내가 자신을 따라 죽 으려 들 걸 알았던 모양이다. 자 신의 유언을 무시하지 못하리라는

걸 알기에, 그것으로 내게 생이란 족쇄를 걸었다.

나는 이를 악물고 검을 높이 쳐 들었다.

"반드시 행복해질 거다."

당신의 피로 물든 삶이 과연 행 복해질 수 있을까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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