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충직한 검이 되려 했는데-188화 (188/254)

188화. 외전 9

검 끝이 그녀의 심장을 정확히 꿰뚫었다. 카라쇼가 쿨럭 피를 토 해 냈다.

촤악.

검을 뽑자, 붉은 것이 새하얀 설 원을 적셨다. 나는 검 끝을 땅에 박아 넣고 이를 지팡이 삼아 몸을

지탱했다.

이렇게 하지 않으면 당장이라도 쓰러질 것 같았다.

순식간에 생기를 잃은 검은 눈 이 나를 빤히 바라보았다. 온몸에 벌레가 기어오르는 끔찍한 감각이 몸을 잠식했으나, 나는 그 눈을 피하지 않았다. 마지막 가르침을 따라야 했으니.

그녀는 그 끝에서 아무 말도 하 지 않았다.

그 온화한 눈빛으로 사랑한다고 소리치고 천천히 눈을 감았다.

새하얀 설원. 붉은 피의 강. 주 인 잃은 검 한 자루. 살아도 산 게 아닌 괴물 네 마리와 사체가 된 여섯 마리. 추락한 일등성 하 나.

모두가 죽었다.

오직 나만 살아 있었다.

"아아아악!"

나는 하늘을 향해 울부짖었으나, 대답은 돌아오지 않았다. 온몸의 피가 솟구치고, 모든 기운이 폭발 하듯 터져 나갔다.

그리고 정전.

내 몸을 감싸고 미친 듯이 회전 하던 마나가 검은 돌풍을 만들어 냈다.

칠흑보다 더 어두운 마나가 일 대를 뒤흔들었다. 나는 엉망이 된

얼굴을 젖히고 초점이 잡히지 않 는 눈으로 하늘을 올려다보았다.

내가 내 스승을 죽인 날, 나는 처음으로 오러를 꺼냈다. 고통에 겨워, 다시는 무엇도 잃지 않을 만큼 강해지고 싶은 마음에 억지 로 꺼낸 것이었다. 사람은 시련으 로 성장한다는 것을 부정하고 싶 었으나, 결국 그 증거가 되었다.

내 정답은 '절망'이었다.

그 뒤로 데베라 네 마리를 어떻 게 죽였고, 어떻게 수도로 기어 올라온 건지는 필름이 증간에 끊 기기라도 한 것처럼 기억이 나지 않았다. 그저 내 몰골을 본 용병 길드 접수원 하울이 경악을 금치 못했으며, 곧바로 나를 병원에 처 넣었다는 것만 어렴풋이 떠올릴 수 있었다.

몇 시간이 지났는지 짐작이 가 지 않았다. 지금이 현실인지도 분 간할 수 없었다. 나는 병실 침대 에 누워 정신 나간 사람처럼 멍하 니 허공을 바라보기만 했다.

잠은 오지 않았다. 올 리가 없었 다. 어떤 생각도 하지 않고, 고요 히 숨을 죽였다. 죽음을 기다리는 사람처럼.

"젠장, 미르!"

얼마나 시간이 지났을까. 익숙한 목소리와 함께 병실 문이 벌컥 열 렸다.

마구 흐트러진 검은 머리카락에 빠르게 움직이는 흉곽, 정처 없이 흔들리는 보랏빛 눈동자. 그는 누

가 봐도 급하게 온 것 같았다.

"너 괜찮은 건가? 길드에 갔더 니 하울이 네가 반죽음 상태로 왔 다고 해서 얼마나 놀랐는지 아나! 빌어먹을, 무슨 일이 있었던 거 냐! 스승님은 어디 계시지?"

지그문트가 말을 와르르 쏟아냈 다. 이를 한 귀로 듣고 흘려보낸 나는 그를 물끄러미 바라보며 물 었다.

"왜 안 왔어?"

"••••••뭐?"

그가 이해하지 못하겠다는 듯 미간을 좁혔다. 내 호흡이 점점 더 불규칙해졌다.

"왜, 토벌하러 안 왔어? 같이 가기로 했잖아."

"무슨...... 지금 내가 안 가서 이 꼴이 됐다는 건가? 그건...... 하...... 그럴 수도 있겠군. 그 부 분은••...

"왜 안 왔냐고, 개자식아!"

나는 이불을 내팽개치고 일어나 눈을 번뜩였다. 손목에 꽂혀 있던

주삿바늘이 뽑히고 붕대에 감겨 있던 복부의 상처가 다시 터졌지 만, 감각이 잘못된 걸까, 고통은 느껴지지 않았다.

나와 눈을 마주친 지그문트가 흠칫했다. 내가 지지리도 제정신 아닌 꼴을 하고 있는 모양이었다. 아예 굳어서 멈춰 있던 뇌가 비정 상적으로 과열되는 것을 느끼며 그의 멱살을 붙잡고 벽에 내팽개 쳤다.

"으 "

"네가 왔다면 뭔가 달라졌을까? 대답해 봐. 아니, 들을 것도 없지. 뭔가 달라지긴 했을 거야. 뭐라 도! 공격 동선이 꼬이며 스승님이 아니라 내가 대신 죽는 행운이 일 어날 여지는 있었을 테니까!"

"••••••뭐?"

벽에 등이 부딪치고 앓는 소리 를 내던 지그문트가 눈을 찢어져 라 크게 뜨며 설명을 바라는 눈빛 으로 나를 직시했다. '설마.' 하고 중얼거리며 창백해지는 얼굴이 안 쓰러울 법도 했으나, 안타깝게도

나는 그의 감정에 신경 써 줄 수 있는 상태가 아니었다.

투둑.

고장 난 수도꼭지처럼 눈물이 줄줄 샜다. 나는 그의 멱살을 거 칠게 흔들었다.

"그 무언가가 스승님보다 중요 했어? 세 명이서 처리할 일이었 는데 왜 둘만 남게 했냐고! 너 때 문이야, 네 탓인데 왜 내가 고통 받아야 해? 왜, 왜 나를......!"

지그문트는 아무런 저항도 없이 혼들리며 그저 나를 바라보았다. 신비롭던 보랏빛 눈동자가 생기를 잃고 멍하고 탁하게 변했다.

나는 이를 악물었다. 억지로 꿀 꺽 삼킨 날카로운 것을 소화할 줄 몰라 보이는 이에게 마구잡이로 휘둘렀다. 그것도 나만큼이나 상 처받게 될 이에게.

카라쇼가 그렇게나 교육해 주었 지만, 역시 나는 천성이 안 되는 놈이었다. 이런 상황이 벌어지니

남 탓을 하는 것부터가 그렇지 않 은가.

카라쇼는 나 같은 것을 제자로 들여선안 됐다.

"왜 나를, 그 지옥에 혼자 뒀 어......

불행이나 불러오는 나약한 것을 말이다.

쿵.

지그문트의 멱살을 힘없이 놓고

그의 옆 벽에 머리를 박았다. 온 몸에 힘이 빠졌다.

쉴 새 없이 눈물이 흘렀다. 이 눈물로 핏빛 죄악이 씻겨 나가면 좋을 텐데, 핏자국은 물로 씻기지 않았다. 시야에 붉은빛이 일렁이 는 듯한 착각이 들었다.

"아, 윽••...

나는 울음과 함께 신음을 토해 냈다. 지그문트는 그때까지 손가 락 하나 움직이지 않았다. 눈치 하나는 더럽게 빠른 놈이었으니

내 상태에서 곧바로 상황을 읽은 것 같았다.

새까맣게 죽은 보랏빛 눈동자는, 그 또한 사랑하는 사람을 잃었음 을 말해 주었다.

"......미안. 미안해. 네게 이러려 는 게 아니었는데......

숨을 죽이고 울던 나는 목소리 보단 쇳소리에 가까운 소리로 그 에게 사과했다. 카라쇼를 죽인 뒤 이성을 완전히 잃어버려 되는 대 로 지껄인 것이지, 진심이 아니었

그 참극에 어떻게 잘못한 이가 있겠는가. 모두가 피해자인데.

내 심장엔 가시가 꽂혀 숨도 제 대로 쉬어지지 않았으나, 이 가시 로 찔려야 할 만큼 잘못한 이는 없었다.

이 가시는 어떻게 처분할 수도 없이 내가 평생 안고 가야 하는 것이었다.

"너무 아파서, 그냥 있으면 숨

막혀 죽을 것 같아서, 그래서 아 무 말이나 지껄인 거야. 진심 아 니야."

입을 여는 것조차 힘겨워 숨이 가빠와도 제대로 사과했다. 우리 에게 남은 건 서로밖에 없었다. 이대로 지그문트까지 잃고 싶지 않았다. 그까지 가시에 찔려 괴로 워하길 바라지는 않았다.

"내가 죽였어."

"데베라의 독에 중독되셨는데, 내게 죽여 달라고 하셔서, 내 검

으로 심장을 꿰뚫었어."

"••••••미르."

"사실 다 내 잘못이야. 나만 아 니었으면 스승님은 사셨을 거야. 그런데 조잡하고 비열하게 네 탓 을 "

"슈슈."

와락.

큰 품이 나를 강하게 안아 왔다. 그는 조금의 틈도 용납하지 않겠 다는 듯 꽉 끌어당겨 몸을 겹쳤

그 포옹이 버튼이라도 된 것처 럼, 나는 말도 더 잇지 못하고 아 이처럼 울음을 터트렸다.

"......미안하다."

천파만파로 갈라진 낮은 목소리 가 내 귓가에 속삭였다.

그는 처음으로 내게 사과했다. 네 탓이 아니라고 해 주고 싶었는 데, 멈추지 않는 눈물 때문에 말 을 할 수가 없었다. 나는 지그문 트의 품에 얼굴을 묻고 눈물에 익 사해서 죽을 듯 울었다.

"네 잘못이 아니다."

카라쇼처럼 따스하지 않지만, 바 위처럼 묵직한 그 속삭임이 나를 위로했다. 오직 그만이 할 수 있 는 말이었다. 같은 카라쇼의 제자 였으며, 나만큼, 어쩌면 나보다 더 그녀를 사랑했던 지그문트의 위로만이 내게 기만이 아니었다.

"같이 있어 주지 못해 미안하다. 네 말이 맞아. 다 내 탓이다."

"윽, 아, 니••••••

"쉬이."

반박하려는 나를 저지한 지그문 트가 내 등을 토닥이며 나를 가볍 게 안아 들었다. 말투부터 손길까 지 지나치게 부드러워서 꼭 평소 의 그가 아닌 것 같았다. 얼굴을 묻은 그의 품에서 은은히 풍겨 오 는 겨울의 향취만이 여전했다.

"괜찮아."

'괜, 찮다, 슈슈.'

지그문트의 목소리에 죽어 가던 카라쇼의 목소리가 겹쳐 들렸다.

나는 발작하듯 몸부림치며 숨을 죽여 울었다. 침대에 앉아 나를 자신의 무릎에 앉힌 지그문트가 나를 더 강하게 안아 왔다. 내 손 톱이 그의 살갗을 찢어도 움찔하 지 않고 아이를 어르듯 내 등을 토닥였다.

그의 품에서 조금 진정이 된 나 는 부르터서 제대로 떠지지도 않 는 눈으로 그를 올려다보았다.

지그문트도 카라쇼의 죽음에 괜 찮을 리 없었다. 그는 나보다 더 오래 제자로 있었으니, 나보다 더

괴로울지도 몰랐다.

"너, 는......

"어째서 울지 않냐고."

지그문트는 단번에 내 의도를 알아차렸다. 내가 고개를 끄덕이 자, 그가 짧게 한숨을 쉬었다.

그의 눈은 눈물을 흘릴 기색을 보이지 않았다. 얼굴이 심각하게 굳고 두 눈이 죽어 버리긴 했지 만, 아무리 봐도 오랜 스승을 잃 은 제자의 얼굴 같진 않았다.

"눈물은 오래전에 말랐다. 잃는 것도 익숙하다."

지그문트의 대답은 지나치게 태 연했다. 대체 어떤 삶을 살아왔나 의문이 들 정도로. 저렇게 이별에 익숙하려면 몇 번의 이별을 겪어 야 했을까.

만약 내가 조금만 더 둔했다면 스승님의 죽음이 슬프지도 않냐며 역정을 냈을지도 모르나, 나는 발 견했다.

지그문트의 두 눈 너머로 얼핏

보이는 그의 속은 아예 썩어 문드 러져 있었다. 슬픔을 표출하지 못 할 만큼.

"......이리 와."

나는 두 팔을 벌렸다. 그에게도 안길 품이 필요한 것은 분명했다.

지그문트는 열린 내 품을 한참 동안 내려다보았다. 저는 나를 거 침없이 안았으면서, 내게 안기는 건 주저하고 있었다.

" 멍청이."

맹맹한 목소리로 중얼거린 나는 거침없이 지그문트를 끌어안았다. 그의 무릎 위에 앉아 있어서 이러 나저러나 그에게 안긴 것 같았지 만.

그의 어깨가 살짝 튀었으나, 얼 마 지나지 않아 천천히 내 어깨에 제 머리를 기댔다.

"......스승님이 네게 전해 달래."

한참이 지난 뒤에 나는 입술을 열었다. 잠잠한 보랏빛 눈동자가

나를 바라보았다.

"네게도 반드시 봄이 올 거라 고."

내 중얼거림에 지그문트가 힘없 이 헛웃음을 뱉었다. 하기야 지금 상황에 어울리는 말은 아니었다.

"내일 스승님의 비석을 쌓을 거 야. 의뢰지로 와. 거기 설원 한복 판에 세울 거야."

담담히 그녀의 죽음을 기리고자 했다. 괜찮은 건 하나도 없었지

만, 나는 지그문트가 올 것이라는 전제하에 말했다. 당연히 올 거라 고 생각했으니까.

나중에 다시 생각해 보면, 그는 그때 아무런 대답도 하지 않았는 데.

지그문트가 없었다면 카라쇼의 유언이고 뭐고 참지 못하고 자결 해 버렸을지도 모른다는 생각이 들었다. 내가 가장 위태로울 때 붙잡아 준 것이 그였다. 나는 옅 은 파동을 일으키는 보랏빛 눈동 자를 바라보며 힘없이 웃었다.

"네가 있어서 다행이다."

아직도 고통스럽고, 영원히 씻을 수 없는 흔적이겠지만, 그와 함께 라면 이겨 낼 수 있을지도 모르겠 다고 생각했다.

그 다음 날, 지그문트는 오지 않 았다.

그리고 6년 동안 단 한 번도 내 앞에 모습을 보이지 않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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