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89 화
잠시 과거를 회상하던 나는 느 릿하게 정신을 차렸다. 떠올려 봐 야 좋을 거 하나 없는 기억에서 얼른 벗어나야 했다.
검술 대회장 안은 조금 전 소란 이 무색할 정도로 고요했다.
미르임을 밝힐 예정이라는 건 가족들에게도 말하지 않았기에, 카이사르와 칼, 아리아까지도 모
든 움직임을 멈추고 굳어 있었다. 내가 이미 미르임을 아는 디에고, 라이너, 엘, 르웰린조차도 예외 없이 경악에 빠져 있었다. 나는 그때 처음으로 황제 헬리오스의 넋 나간 표정을 보았다.
내가 이런 반응과 시선을 즐기 는 사람이었다면 그나마 기분이 좀 나았을까. 안타깝게도 나는 뭉 그러진 진흙처럼 끔찍한 기분에서 헤어날 수가 없었다.
"진심으로 나온다는 말, 물리지 않는 게 좋을 거다."
쾅
나는 짓씹듯 내뱉으며 폭주하듯 오러를 방출했다. 마수의 검은 피 가 고인 웅덩이에 거대한 바위가 떨어지듯, 불길한 검은색 마나가 사방으로 튀어 올랐다.
"나는 정말 널 죽여야 하니까."
내게 있어 죽음이란 단어는 내 신념과 스승의 목숨만큼 무거운 것이었다. 피의 무게를 감당할 수 없어 여태껏 살인을 두려워했고,
북부의 테러리스트인 글렌을 죽인 뒤에도 매일 악몽을 꾸었다.
하지만 이제 더는 물러설 수 없 었다. 관객석에서 나를 바라보고 있는 이들을 지키기 위해선 눈앞 의 옛 친우를 죽여야 했다.
지그문트 하이드는 내 적이었다.
"......다행이구나. 6년 전 그 애 송이에서 발전이 없으면 실망스러 웠을 텐데."
죽어 있는 보랏빛 눈으로 나를
응시하던 지그문트가 비죽 입꼬리 를 올렸다. 기분이 엉망인 것은 별개로 머릿속은 이상할 만큼 고 요했다.
내 본능은 내가 인지하기도 전 에 그를 적으로 인식하고 있었다.
"하나만 묻자. 전쟁을 일으키는 목적이 뭐지?"
목소리는 나조차도 놀랄 만큼 차분했다. 지그문트를 바라보는 시선도 더는 떨리지 않았다. 그에 게 온전히 초점을 맞췄다.
나와 한참 눈을 맞추던 지그문 트는, 이내 눈꼬리를 휘었다.
"해묵은 핏자국과 덧없는 사명 을 위해서."
쾅!
지그문트가 마나를 폭발시키듯 방출하며 살기를 내뿜었다. 검은 색과 연한 붉은색 연기가 그를 감 싸며 뒤섞이는 모습은 전시 상황 이라는 것을 잊을 만큼 신비롭고 아름다웠다. 나는 차분했던 머릿
속을 비집고 밀려오는 혼란에 입 술을 짓씹었다.
그의 오러 색은 꼭 내 머리카락 과 눈에서 색깔을 빼낸 것처럼 나 와 닮아 있어서, 나는 의문을 품 지 않을 수가 없었다.
"전쟁에 정의라도 있을 줄 알았 나. 선한 전쟁 같은 건 없다."
단호하게 말한 지그문트가 나를 향해 검을 휘둘렀다.
쉬이익!
보글보글 끓는 것처럼 기이하게 꿈틀거리는 그의 오러는 꼭 살아 날뛰는 것 같았다. 나는 다급하게 뛰어올라 공격을 피했다.
쾅
두 가지 색이 섞인 불길한 오러 는 그대로 벽에 내리꽂혔고, 그 여파로 경기장이 크게 뒤흔들렸 다. 살벌한 위력이었다. 나는 이 를 까득 갈고 검을 세웠다.
쾅! 쾅!
그와 나의 검이 빠르게 맞부딪 쳤다. 오러를 꺼내지 않았던 이전 의 전투는 모두 반쪽짜리였음을 증명하듯, 지그문트의 검은 이전 과 비교도 되지 않을 정도로 강했 다. 검이 부딪칠 때마다 울리는 소리는 쇠붙이 소리보단 천둥소리 에 가까웠다.
오러의 격돌로 하늘이 갈라질 듯 거대한 난류가 일어났다. 머리 카락이 미친 듯이 휘날렸다.
시야를 가린다는 디메리트를 고
수하고도 기른 이 머리는 내 자신 감과도 같았다. 나는 눈가를 간지 럽히는 검은 실낱들 사이로도 어 렵지 않게 그의 검을 감싼 오러를 응시했다.
"......네가 찾은 정답은 대체 뭐 지?"
색이 두 개인 오러는 생전 처음 봤다. 어두운 것도, 밝은 것도 아 닌 이 오러를 무어라 정의해야 할 지 의문이었다. 잠시 침묵하던 지 그문트는 기계적으로 입꼬리를 올 렸다.
"나조차도 이해할 수 없는 것."
"뭔••••••
"네가 자세히 알 필요는 없다. 알려 줄 생각도 없고."
쾅
내 검을 거칠게 쳐 낸 지그문트 가 주먹을 한 번 쥐었다 펴는 것 으로 마법진을 만들어 냈다.
콰뢍!
그리고 머리 위로 쏟아지는 검
은 낙뢰.
나는 빠르게 뒷걸음질 쳐 공격 을 피했다. 저걸 맞았다고 죽진 않았겠지만, 그 위력에서는 나를 통구이로 만들겠다는 각오가 보였 다. 나는 뻣뻣하게 굳은 입꼬리를 비틀었다.
"재수 없는 새끼."
지그문트가 아무것도 알려주지 않는 것은 익숙했다. 나는 쓴 침 을 삼키며 다시금 그와 격돌했다.
그와 검을 마주할 때면 온몸에 전류가 흐르는 것 같았다. 뜨겁 고, 짜릿하고, 고통스러웠다. 검사 로서의 내 본능은 나와 대적할 만 한 존재에 본능적으로 열광했으 나, 이성과 감정은 괴로워했다.
나는 숨을 거칠게 몰아쉬며 속 도를 더더욱 올렸다. 지그문트는 올라가는 속도를 곧잘 따라왔으니 언뜻 생각하기엔 괜한 체력 낭비 인 것 같았지만, 그를 정신없게 만드는 건 분명 효과가 있었다.
정신이 없으면 마법을 발동하지
못하니까.
쾅!
그리고 마법을 발동하지 못하는 지그문트는, 명백히 나보다 약했 다. 소드 익스퍼트인 그가 나와 대등하게 싸울 수 있는 건 적시 적소에 적절하게 발동하는 마법 덕분이었으니까.
오러를 더욱 끌어 모은 검으로 공격을 받아치자 지그문트의 검이 엇나갔다.
그 순간, 무너진 자세가 바로 빈 틈이 었다.
서걱.
나는 망설임 없이 검을 놀려 검 끝으로 지그문트의 옆구리를 베어 냈다. 인간의 피부가 내 검 아래 서 베여 나가는 감각은 끔찍했다. 나는 입술을 짓씹어 탄식을 참았
분명 꽤 깊게 베었는데, 지그문 트는 신음 소리 한번 내지 않았 다. 그저 피가 흐르는 환부를 대
충 손으로 틀어막을 뿐이었다. 그 를 베었다는 사실이 끔찍했으나, 나는 애써 티 내지 않으며 다시 검을 세웠다.
"검으론 날 못 이긴다는 걸 알 텐데."
경고에 가까운 내 지적에 지그 문트가 피식 웃었다.
"걱정하는 건가?"
"......너는 그냥 죽어라."
이 순간까지도 시덥잖은 태도였
다. 이 상황에 참혹함을 느끼는 건 나뿐인 것 같아 열이 받은 상 태로 오러를 뿜어낼 때, 상처가 아프긴 했는지 길게 숨을 뱉은 지 그문트가 갑작스럽게 마법진을 발 동했다. 나는 빠르게 방어 태세를 취했다.
"애초에 내가 이곳에 온 이유를 잊은 건가."
하지만 그가 공격한 건 내가 아 니었다.
지그문트의 얼굴을 본 탓에 나
도 모르게 방심했던 모양이다. 뒤 늦게 상황을 깨달은 나는 다급히 뒤로 몸을 돌렸다.
내 뒤쪽으로 대피해 있던 헬리 오스가 무방비하게 마법진에 노출 되어 있었다.
'개자식이 진짜......!'
지그문트는 전투에선 수단과 방 법을 가리지 말라며 내게 온갖 술 수를 가르쳐 준 인물답게 뒤통수 치는 것도 서슴지 않았다.
자신의 머리 위로 쏟아지는 낙 뢰를 발견한 헬리오스의 푸른 눈 이 커졌다. 내가 그를 지키기 위 해 전속력으로 달려갈 때.
"어, 됐네."
헬리오스의 앞에 익숙한 인영이 갑작스럽게 나타났다.
'네가 여기서 왜 나와?'
나는 달려가던 걸음도 멈추고 입을 떡 벌렸다. 이곳에 등장하리 라곤 상상치도 못한 인물이었다.
갈색 머리 변장을 푼 듯 티 한 점 없이 새하얀 백발, 서늘하게 올라간 눈매에 조용히 번뜩이는 연둣빛 눈.
아타라 왕국의 국왕, 엘렉산드로 아타라이자 내 친구 레오였다.
순간이동처럼 나타나 헬리오스 의 앞을 지키고 선 그가 쥐고 있 던 검을 사납게 휘둘렀다. 독극물 같이 유해해 보이는 초록빛 오러 가 하늘의 검은 낙뢰를 향해 날아 갔다.
콰콰쾅!
검은 낙뢰와 초록빛 오러가 허 공에서 맞부딪치며 폭발했다.
"깔끔하군. 이걸로 솔라티네 제 국은 아타라 왕국에 빚 하나 진 겁니다."
"이게 무슨......•"
손날을 세워 눈 위를 가리며 폭 발 장면을 지켜본 레오가 씨익 웃 는 레오를 보며 헬리오스가 얼빠 진 표정을 지었다. 그 장면을 잠
시 바라보던 나는 상황을 이해하 지 못한 채로 얼굴을 일그러뜨렸 다.
"......대체 어떻게 이곳에 들어 온 거지?"
지그문트도 나와 같은 의문을 품고 있었는지 그에게 물었다.
지금 이곳은 북부가 만든 결계 때문에 외부를 볼 수 있고 소리로 소통할 수도 있지만 나가거나 들 어올 수는 없는 분리 상태였다. 소드 마스터 둘도 들어오지 못해
바깥에서 마법사들이 결계를 해체 할 때까지 기다리고 있었다.
그런데 레오는 순간이동을 한 것처럼 갑작스럽게 나타난 것이 다.
"순간이동 안 통하는 건 진작에 확인했는데!"
아리아의 날카로운 목소리가 귀 에 꽂혔다. 나는 설명을 바라는 눈으로 레오를 바라보았다. 레오 는 집 앞에 산책 나온 사람처럼 지나치게 태평했다.
"순간이동 아니야. 사냥 대회 끝 나고 한동안 내가 안 보였지? 아 타라 좀 다녀왔어. 그동안 아타라 가 가만히 있었던 건 아니야. 북 부에 대항할 기술을 연구했다고. 지금도 그 기술인 흑마법 결계 소 규모 커터를 통해 들어온 거야. 아직 연구 과정이라 진짜 될지는 몰랐지만."
그가 웬 이상한 기계장치를 들 고 흔들었다. 과연, 순수한 검술 위주의 군사 조직만 발달된 솔라 티네와 다르게 부유함으로써 마도
공학을 발달시킨 아타라다웠다.
"갑자기 이 일이 터지고, 네가 갇힌 걸 보고 순간이동으로 아타 라에 갔다가 이거 들고 방금 다시 왔어. 너 때문에 온 거긴 한 데......
말끝을 흐린 레오가 매서운 눈 으로 지그문트를 노려보았다.
"저 자식. 그때 레이샤 유품 가 져간 놈이지."
아무래도 그는 이전에 만났던
유품 도둑놈을 향한 앙심이 깊은 것 같았다. 가면에 후드까지 눌러 썼는데 알아본 것을 보면 말이다.
"레오. 전원 안전히 탈출하는 게 우선이야."
나는 혹시 레오가 저번처럼 이 성을 잃고 폭주할까 봐 미리 저지 했다. 레오는 지그문트를 보며 이 를 갈았으나, 전처럼 무턱대고 나 서진 않았다.
'레오까지 있는 상태에서 지그문 트가 함부로 덤비진 못할 거야.
바깥에서 경계를 풀 때까지만 이 곳에 버티고 있으면 돼.'
나는 긴장한 눈으로 멀리 떨어 진 곳에 지그문트를 살폈다. 그는 이미 나와 레오의 합동 공격에 도 망친 전적이 있었다. 지그문트는 갑작스러운 레오의 등장에 골치가 아픈 듯 이내 서늘하게 미소를 지 었다.
"낙뢰."
그가 중얼거리는 것과 거의 동 시에 마법진이 만들어졌다. 언제
보아도 놀라운 마법진 전개 속도 였다.
그리고 우리가 모여 있는 곳 위 로 재앙과도 같은 검은 낙뢰가 비 처럼 쏟아졌다.
지그문트의 검은 낙뢰는 예나 지금이나 가공할 위력을 자랑했 다. 그가 가장 잘하는 공격 마법 이 바로 낙뢰 소환이었다.
"젠장, 피하세요!"
나는 순식간에 생겨난 번개를
맞을 뻔한 헬리오스를 밀쳐 냈다.
그 바람에 어깨에 낙뢰를 비끼 다 맞은 나는 찌르르한 통증에 숨 을 참았다. 내가 숨을 헐떡이자, 내게 밀려 바닥을 구른 헬리오스 가 얼굴을 일그러뜨렸다.
레오의 표정이 험악해졌다.
콰뢍!
통증에 집중할 새도 없이 또다
시 낙뢰가 떨어졌다. 레오와 내가 힘을 합친 상황에서 접근전 2:1로 는 승산이 없으니 헬리오스라도 죽이고 가고자 원거리에서 마법을 폭격하는 것 같았다.
지그문트가 미친놈처럼 헬리오 스에게 공격을 퍼붓는 가운데, 나 는 헬리오스를 지키려 애썼다. 마 음 같아선 지그문트와 승부를 보 고 싶었지만 헬리오스를 또 혼자 내버려 둘 수는 없었다.
레오는 내가 헬리오스를 보호하 는 동안 내게 날아오는 낙뢰를 막
아 내고 있었다.
"방어막 거의 다 해체됐습니다!"
등 뒤로 칼의 날카로운
가 들려왔다. 조금만 더
될 것 같았다.
욕을 짓씹은 지그문트가
마법진을 거두었다. 나와
집중 마크를 시작한 이상
스 암살은 불가능하단 걸
린 모양이었다.
목소리
버티면
결국엔
레오가
헬리오
알아차
빠르게 손을 놀린 그가 새로운
마법진을 전개했다. 이번엔 순간 이동 마법진이었다.
"기억해라."
그의 보랏빛 눈동자가 나를 또 렷이 바라보았다. 나는 그 눈을 기억했다.
"이제 눈보라가 몰아닥칠 것이
'이제 눈보라가 몰아닥칠 거야.
글렌의 마지막 말과 지그문트의
말이 겹쳐 들렸다.
"경계 파훼 성공했습니다!"
"네가 세상을 포기하지 않는 이 상••...•"
불길한 기운이 가득한 결계가 점점 더 옅어져 갔다. 나는 순간 이동의 빛에 휩싸여 사라지는 지 그문트를 지긋이 바라보았다.
"우리는 또다시 전장에서 만나 게 될 거다,"
그 말을 끝으로, 그는 완전히 사
라졌다.
"슈슈!"
"슈슈 언니!"
결계가 풀리며 내가 아는 모든 이들이 나를 향해 달려오고 있었 다. 나는 이를 악물었다.
그의 말이 맞았다.
우리는 서로의 빌어먹을 안티테 제가 될 운명이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