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90 화
혼돈과 공포의 검술 대회가 끝난 지 나흘이 지났다.
헬리오스 암살 시도가 있었고, 수 많은 제국민들이 모인 경기장에서 내가 미르임이 밝혀졌다. 제국은 이 사건으로 완전히 뒤집어졌다.
많은 이들이 전쟁을 예견했고, 전 쟁을 피해 대륙을 떠나는 사람들의 수가 증가하고 있었다. 황제의 목 숨이 위협당한 사건은 이번으로 무
려 두 번째였기에, 많은 이들이 제 국의 보안을 의심하고 있었다.
그리고 이런 폭풍 전야 같은 어두 운 상황에서도 크리시스의 공녀가 소드 마스터 미르였다는 사실은 사 람들 입에서 쉴 틈 없이 오르내리 고 있었다.
그 나흘간 매일 챙겨 보는 신문 첫 페이지에서 하루도 빠짐없이 내 얼굴을 봤다. 하필 지그문트 때문 에 감정과 멘탈이 개박살 나 야차 같은 표정을 짓고 있을 때의 사진 을-그 긴박했던 상황에서 대체 어 떻게 인화 마법을 사용한 건지는
미스터리였다. 기자라는 종족들은 내 생각보다 훨씬 대단했다- 기사 에 사용해서 신문을 볼 때마다 얼 굴이 화끈거렸다.
카슈미르 크리시스가 미르라는 사 실은 제국을 넘어 온 대륙으로 퍼 져 나가고 있었다.
그 대사건이 터진 후 내 삶이 이 전과 180도 달라졌느냐 하면 그건 아니었다.
나에게 인터뷰를 요청하는 기자들 의 편지로 방 하나가 가득 찰 수준 이었지만, 그것들은 모두 유능한
총괄 집사 테일러의 선에서 처리되 었다.
나흘간 황궁과 신전의 호출이 끈 질기게 이어졌으나, 카이사르는 그 모두를 내 몸이 좋지 않다는 이유 로 단칼에 쳐 냈다. 원래도 사교계 엔 나가지 않았으니 웅성거리는 귀 족들 사이에서 구경거리가 될 일도 없었다.
나는 그 사건 뒤 놀라울 만큼 별 일 없이 저택에서 놀고먹으며, 180 도가 아니라 360도 달라진 삶을 살 고 있었다.
"이제 풀어 주시면 안 되겠습니 까? 무릎을 꿇겠습니다."
그리고 나흘째 되는 날, 나는 카 이사르의 집무실에서 허공에 거꾸 로 매달려 피할 수 없는 업보의 폭 탄을 얻어맞고 있었다.
천장과 내 발목을 이은 포승줄이 좌우로 움직이는 것에 따라 매달린 내 몸도 시계추처럼 혼들렸다.
인간을 초월한 지 오래인 몸이었 기에 발목이 시큰거리거나 머리에 피가 쏠리는 일은 없었지만, 금방 이라도 질식할 것 같은 방 안의 공
기가 너무 괴로웠다.
'제발 살려 줘.'
나는 거꾸로 뒤집힌 시야를 잠시 눈에 담다 죄책감에 눈을 질끈 감 아 버렸다.
"이리 와라."
깍지 낀 손 위에 턱을 얹은 채 시 선을 내리고 오랫동안 생각하던 카 이사르가 천천히 입술을 열었다. 나는 그 말에 반색하며 단번에 밧 줄을 끊고 공중제비를 돌며 바닥에 착지했다.
이까짓 밧줄은 나를 붙잡을 수 없 었다. 나를 붙잡는 건 나를 묶은 사람 그 자체였다.
'그냥 매달려 있을 걸 그랬나.'
나는 거꾸로 돌아가 있던 시야가 원상태로 돌아오자마자 내려온 것 을 후회했다. 집무실 중앙 책상 앞 에 앉은 카이사르와 그 양옆에 선 칼과 아리아는 지옥의 3대 천황 비 슷한 것 같았다.
나는 그 앞으로 걸어가며 내 몸이 점점 더 쪼그라드는 기분을 느꼈
다.
"네가 계획을 말하지 않고 움직이 는 것, 괜찮다."
내가 책상 앞에 서자, 카이사르가 낮은 목소리로 말했다. 얼마나 마 음고생을 한 건지 감기를 걸렸을 리도 없는데 목소리가 천파만파로 갈라져 있었다. 나는 날카롭게 갈 라진 그 목소리에 양심이 푹푹 찔 렸다.
"어떻게 앞일을 다 예측하고 행동 하는 건지도 설명할 필요 없다."
궁금하지 않을 리가 없는데도 카 이사르는 단호하게 말했다. 그 모 습에 나는 마음이 더 무거워졌다.
"그러니 제발 그 말만은 물러 주 면 안 되겠나."
카이사르의 목소리는 얼핏 듣기엔 담담했으나, 그를 잘 아는 내가 담 담함 속에 꽁꽁 숨긴 참혹함을 찾 지 못할 리 없었다.
나흘 전. 지그문트가 사라지고, 아수라장이었던 경기장은 조금 안
정을 찾았다. 그 가운데 깨진 결계 를 빛과 같은 속도로 넘어서 날 향 해 달려온 카이사르는 새하얗게 질 려 있었다. 내 손을 으스러져라 붙 잡는 큰 손은 미친 듯이 떨리고 있
었다.
"이만 가 보겠습니다."
"잠깐, 공작......
"제가!"
나를 이끌고 성큼성큼 발걸음을 옮기는 그를 헬리오스가 다급하게 제지할 때, 나는 이성을 잃은 카이 사르를 보았다.
"정신을 놓고 이 경기장을 무너뜨 리기 전에 보내 주십시오."
동공이 풀린 새빨간 눈동자는 섬 뜩함을 넘어서 생존 본능에 빨간불 이 들어오게 했다.
흠칫한 헬리오스가 푹 한숨을 쉬 었다. 생명에 위협을 받으며 흙바 닥을 뒹굴며 피해 다녀야 했던 그 는 많이 지쳐 보였다.
"......가 보게. 카슈미르 공녀도 지쳤을 테니."
카이사르는 그의 허락이 떨어지는
동시에 나를 이끌고 발걸음을 옮겼 다. 인사조차 없이 떠나는 건 대단 한 무례였으나, 황제가 허락한 마 당에 그걸 지적할 수 있는 사람은 없었다. 나는 반항 없이 그를 따라 저택으로 돌아왔다.
"......아버지."
"나중에."
저택에 들어선 카이사르는 무언가 를 억누르듯 한참 동안 숨을 고르 기만 했다. 그는 처음으로 명확하 게 나와의 소통을 거부했다. 나는 혀를 깨물고 싶은 심정으로 입술을 열었다.
"아뇨. 지금 말해야 합니다."
나 또한 처음으로 그의 의사를 존 중하지 못하고 밀어붙였다. 지금이 아니면 말하지 못할 것 같았다. 매 도 한 번에 맞는 게 나았다.
카이사르가 나를 돌아보았다. 비 정상적으로 확장된 동공에 공허함 이 가득한 눈빛이 그의 상태를 말 해 주었다. 나는 입 안에서 독극물 처럼 맴도는 말을 기어코 내뱉었 다.
"저, 곧 벌어질 전쟁에 출전할 겁
니다."
카이사르가 숨을 멈추었다. 숨뿐 만 아니라 모든 움직임과 생명의 파동이 멈추었다. 고통스러웠으나, 나는 그의 눈을 피하지 않았다. 나 는 모든 종류의 죽음을 외면해선 안 됐다.
카이사르는 대답을 하지 않고 내 게서 뒤돌아 그의 방으로 떠났다. 나는 붙잡지 않았다. 지금 말하지 않으면 또 상황이 닥쳐서야 알게 할 것 같아 다급하게 말하긴 했지 만, 그에게 시간이 필요하다는 건 알고 있었다.
그 뒤로 나흘간 카이사르는 내게 얼굴을 보이지 않았다. 식사 시간 에 얼굴을 비치지 않는 것은 물론 이고, 용기를 내어 찾아가 봐도 지 금은 만날 수 없다는 말만 시종을 통해 들었다.
평화로우면서도 평화롭지 않은 시 간이 지나가고, 오늘이 되어서야 카이사르가 나를 불렀다. 그리고 지금 이 상황이었다.
"후작 이상인 귀족 가문은 병역이
필수가 아니다. 규율이 달라져 한 명은 나가야 한다고 해도 내가 나 갈 것이니 너희 셋은 신경 쓸 필요 없다."
위태위태한 분위기 가운데 카이사 르가 묵묵하게 말했다. 깍지를 낀 그의 두 손은 얼마나 힘을 준 건지 새파랗게 질려 있었다.
무엇보다, 그는 나와 눈을 마주치 지 않았다.
"어른들이 일으킨 전쟁에 아이들 이 피해를 받아선 안 된다. 이 전 쟁은 내 시대가 지고 가야 할 죄업
이야. 네겐 의무가 없다."
그의 말 한 마디, 한 마디엔 무거 운 책임감이 서려 있었다.
그 말대로였다. 내가 이번 전쟁의 승패를 책임질 필요는 없었다. 내 윗세대가 만든 갈등이니까.
'하지만 그렇게 생각하면 애초에 이 전쟁을 책임져야 할 만큼 잘못 한 사람이 없을 텐데.'
명령을 받고 북부를 억압한 이전 세대의 제국군을 탓해야 할까.
하지만 그들은 명령에 불복종하면 즉시 사살을 당하는 입장이었다.
폭정을 행한 선황을 탓할 수 있겠 으나, 그는 이미 죽었다. 한 줌 먼 지에 불과한 유골에 복수할 수는 없는 노릇이었다.
그럼 북부의 해묵은 원한은 어디 로 향해야 하는가. 그들이 벌이는 정당한 복수극을 방해하는 것이 옳 긴 한가.
하지만 죄를 지은 건 지금의 제국 이 아닌데.
답 없는 질문은 뫼비우스의 띠를 타고 끝없이 이어졌다.
안타깝게도 이곳엔 정답이 없었 다. 각자의 자리에서 최선을 다하 는 수밖에 없었다.
"의무가 아니라고 외면한다면 이 세상은 너무 삭막해질 겁니다."
나는 죄스러움을 감추지 못하면서 도 확실히 말했다. 참극을 외면하 지 않고 마주하는 것. 이것이 내 최선이었다.
"제가 얼마나 강한지는 알고 계시
잖습니까. 전장에서 죽을 생각은 전혀 없습니다. 살아서 돌아올 겁 니다."
사람을 죽이고 살아 돌아와서, 생 으로 죗값을 치를 것이다. 죽는 것 보다 사는 것이 더 어려웠으니.
내 단호한 말에 팔짱을 낀 채 책 꽂이에 등을 기대고 한참 동안 허 공을 바라보고 있던 칼이 기댔던 몸을 일으켰다.
"너는 세상에게 상냥한 영웅이겠 지."
카이사르와 똑같은 색채지만 느낌 은 사뭇 다른 붉은 눈동자가 나를 응시했다.
"그만큼 내게는 잔인한 사람이 야."
그의 두 눈은 상처 입은 짐승처럼 애처롭고 사나웠다. 붉은 홍채가 물기로 일렁이고 있었다.
나는 뻣뻣하게 굳은 입꼬리를 비 틀며 애써 미소 지었다.
"그래도 저를 사랑하시지 않습니 까."
이전이었다면 상상도 못할 뻔뻔 함. 이곳에 와서 사랑을 받으며 배 운 것이었다. 칼이 울컥한 듯 얼굴 을 일그러뜨렸다.
"......그게 내 빌어먹을 인생의 가 장 큰 비극이지."
칼은 거짓말을 아주 잘했지만, 이 상하게도 내게는 그의 거짓이 훤히 보였다. 지금도 그랬다.
그는 더 말하지 않고 그저 고개를 숙였다. 나를 막지 않겠다는 뜻이 라는 걸 알 수 있었다.
"막으면 가지 않을 건가."
메아리처럼 공허한 카이사르의 물 음에 난 그저 웃었다. 묻는 투가 아니라는 점에서 그는 이미 정답을 알고 있었다. 카이사르가 흐}, 헛웃 음을 뱉었다.
"내가 널 꺾을 수 없다는 것쯤은 이미 잘 알고 있지 않나."
한 손에 얼굴을 묻은 그가 잠긴 목소리로 중얼거렸다. 나는 눈을 감고 셋을 셌다. 옅어지는 의지를 다잡는 방법이었다.
"아리아는 네가 직접 설득해라."
허락을 내포한 카이사르의 말을 끝으로 나는 천천히 책상 위에 걸 터앉은 인영을 바라보았다.
내가 이곳에 들어선 순간 나를 거 꾸로 매달아 놓은 장본인이자, 지 금까지 단 한 번도 내게서 시선을 떼지 않는 아이를.
책상 위에서 뛰어내린 아리아가 거침없는 발걸음으로 내게 다가왔 다. 나는 나도 모르게 눈을 피했다. 작은 손이 내 멱살을 꽉 잡았다.
"나를 봐, 카슈미르 크리시스."
내가 저항할 수 없는 목소리였다. 나는 침을 크게 삼키고 천천히 고 개를 들었다.
"똑바로 봐. 피하지 마."
이글이글 타오르는 청염은 슬픔 도, 분노도 아닌 결연한 의지를 담 고 있었다.
"언니만 나를 지킬 수 있는 게 아 니야. 나도 언니를 지킬 수 있어."
언젠가 들은 적이 있는 말이었다. 아리아의 이 말은 언제나 내게 기 껍게, 또 무겁게 들려왔다.
"이 선택에 따라올 일을 감당할 수 있어?"
지나치게 의미심장한 말에 설명을 바라며 아리아를 바라보았지만, 아 리아는 설명해 줄 생각이 없어 보 였다. 눈빛으로 내게 대답을 요구 했다.
나는 잠시 침묵했으나 얼마 지나 지 않아 입술을 열었다. 내가 내놓 을 답은 정해져 있었다.
"......응. 무엇이든."
그 정도 다짐 없이 이곳까지 올 리 없었다. 이 가족을 지키기 위해 서라면 나는 뭐든 할 수 있었다.
"그럼 가. 막지 않을 테니까."
아리아가 내 멱살을 잡은 손을 놓 았다. 짧은 분홍색 머리카락이 목 을 따라 흘러내리고, 요정 같은 얼 굴이 흔들림 없는 단단함을 보였 다. 아리아는 이제 더는 아이라고 부를 수 없을 만큼 자라 있었다.
아리아가 붙잡을 거라고 생각했던 나는 조금 얼떨떨한 채로 고개를 끄덕였다.
그때 그녀의 말을 쉽게 넘겨선 안 됐는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