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충직한 검이 되려 했는데-191화 (191/254)

191 화

제복의 맨 윗단추를 잠갔다. 거울 속의 나는 지나치게 뻣뻣해서 원래 나이보다 두어 살쯤 많아 보였지 만, 그걸 노린 것이었기에 퍽 만족 스러웠다.

오늘 나는 어려 보여선 안 됐다.

"언니, 준비 다 됐어?"

방 밖에서 아리아의 목소리가 들 려왔다. 나는 거울을 보며 자연스

러운 미소를 준비한 뒤 방문을 열 었다.

"응. 가자."

대답하며 방을 나서서 아리아와 마주한 나는, 눈을 크게 떴다.

"......제복 입었네?"

깔끔하게 정돈된 분홍색 단발머리 끝자락이 닿은 어깨를 감싼 금색 견장. 아리아의 몸을 감싼 건 새하 얀 제복이었다. 내 검은색 제복과 대치를 이루어 꼭 커플룩 같았다.

'이번 가을엔 같이 제복을 맞출 까? 바디체인 대신 하네스를 차도 좋을 거야.'

'......아니야. 나는 드레스로 할 래.'

아리아는 여태껏 드레스 차림을 고집해 왔다. 내가 제복 입는 걸 이상하게 여기는 제국의 귀족들처 럼 편협한 사상을 가진 것도 아니 면서, 자신은 제복을 입지 않았다. 내가 은근히 권유해도 말이다.

이유를 물어도 그저 웃을 뿐이라 늘 마음 한편에 의문을 품고 있었 는데, 아리아는 오늘 갑작스럽게

제복 차림으로 나타났다.

"왜. 안 어울려?"

아리아가 자신만만하게 입꼬리를 올렸다. 그 모습에서 나는 또 묘한 기분을 느꼈다.

아리아는 분명 조숙한 아이였지 만, 내 앞에선 약하고 어린 모습을 보였다. 어쩔 때는 그녀의 나이답 지 않다 싶을 만큼-그래 봤자 아리 아는 올해로 16살이긴 하지만, 그 어린 나이를 감안하고서도 어려 보 였다는 소리다- 어리광을 부리기도 했다.

나는 뭔가 이상하다고 생각하면서 도 그 어리광을 모두 받아 주었다. 나한테만 그런다는 걸 알기도 했 고, 내게 아리아는 언제까지고 어 린아이였기 때문이다. 내게 아리아 의 어리광은 너무도 당연한 것이었 다.

'그런데 서서히 달라지더니...... 요즘은 아예 어리광을 안 부리지.'

나는 문득 그 사실을 깨달았다. 아리아의 변화는 하룻밤 사이에 도 래한 것이 아니라 서서히 이루어진 것이었다. 창문 밖 한쪽 구석의 작

은 새싹이 어느 날 나무가 된 것을 발견한 것과 같았다.

아리아의 웃음은 더 이상 천진난 만하지 않았다. 순하거나 부드럽지 도 않았다.

대신 또렷했고, 당당했다. 예쁘거 나 사근사근해 보일 필요가 없는 권위자의 웃음 같았다.

그건 분명 성장이었다.

"그럴 리가. 너무 잘 어울려서 그 래."

나는 나직하게 웃으며 아리아의 머리를 쓰다듬었다. 그러면서도 묘 한 기분은 영 가시지 않았다.

아리아의 성장이 기뻤음에도, 한 편으로는 복잡한 감정이 걸리적거 렸다. 나는 이 감정의 이름을 알 수 없었다.

"다행이네. 그럼 가자."

내 손을 붙잡은 아리아가 나를 이 끌고 계단을 내려갔다. 우리 자매 사이에서 이끄는 쪽은 늘 나였기에 아리아의 뒷모습을 정말 오랜만에 본 것이었다.

그녀의 등은 더 이상 좁아 보이지 않았다.

"왔군."

복도에 배치된 의자에서 무료한 표정으로 기다리던 칼이 나와 아리 아를 발견하고 자리에서 일어섰다. 나를 보면 어김없이 올라가던 입꼬 리는 뻣뻣하게 경직되어 있었다.

'......한동안은 널 여느 때와 같이 대하지 못할 것 같다. 시간이 필요 하다.'

전쟁에 출전하겠노라 선언하고 가 족 모두의 동의를 얻은 날, 칼은 내게 솔직하게 말해 왔고 그날 이 후 나를 대하는 태도가 경직되어 있었다.

사지를 제 발로 들어가는 나를 이 해하기까지 시간이 필요하다고 했

다. 그 선택에 분노하지 않고, 수긍 해 줄 때까지 말이다.

나는 그를 이해하고, 그의 태도에 대해 말을 얹지 않았다.

삶은 소설처럼 간단하지 않아서, 모든 갈등을 한 번의 사건으로 완

벽하게 해소할 수는 없었다. 받아 들일 시간과 적당한 간극이 필요했 다.

"시간이 여유로우니 수도 한 바퀴 를 돌고 가도 좋겠구나."

복도에서 걸어 나온 카이사르가 희끄무레하게 미소 지었다. 그 또 한 아직 나를 대하는 태도가 어색 했지만, 여전히 날 지지해 주고 있 었다. 나는 마주 웃으며 고개를 끄 덕였다.

우리 네 사람을 태운 마차가 출발 했다. 마차 안은 지나치게 고요했

으나, 어색하거나 무거운 침묵은 아니었다. 나는 턱을 괴고 창 밖을 바라보았다.

검술 대회 이후 일주일이 지났다. 오늘은 그날 미처 마치지 못했던 시상식이 황궁에서 이루어지는 날 이었다.

대륙 전체가 뒤숭숭했기에 사실 이런 공식적인 의례를 진행하는 건 위험했으나, 고작 위험하다는 이유 로 거북이 등껍질에 숨듯 모든 일 들을 철폐할 순 없었다. 황실은 황 제 암살 사건 이후에도 제국이 건 재함을 제국민들에게 보여 줘야 할

의무가 있었기에 더더욱 아무렇지 않게 원래의 행사들을 진행하려 했 다.

일주일간 황제 헬리오스는 나를 끊임없이 황실로 호출했다. 시상식 전에 나와 따로 대화를 나눠 보고 자 했던 것 같았다.

'카슈미르 크리시스는 현재 감기 로 병석에 누워 사경을 해매고 있 습니다'

'......제발 변명이라도 좀 그럴듯 하게 해 주면 안 되겠나? 소드 마 스터가 감기에 걸린다는 게 얼마나 터무니없는 소리인지 경이 가장 잘

알 텐데.'

'그럴 리가요. 저도 겨울만 되면 감기로 고통을 받곤 합니다.'

'재작년 겨울에 기사단 기강을 잡 겠다며 황궁 기사단 전체를 얼음물 에 목욕시켜서 전원이 감기에 걸리 게 하고 다음 날 혼자만 멀쩡히 출 근한 그대가 할 말인가?'

'뵙지 못해 유감스럽습니다. 이만 끊겠습니다.'

하지만 그 모든 호출은 첫날 터무 니없는 이유를 시작으로 카이사르 의 선에서 매몰차게 잘려 나갔다.

'그래. 사흘 전엔 감기 때문이었

고, 이틀 전엔 악몽으로 잠을 못 자서였고, 어제는 텃밭에서 감자를 캐느라 못 온다고 했지. 오늘은 카 슈미르 영애에게 무슨 일이 일어났 나?'

'명상 수련을 하다 영의 세계로 빠져 코마 상태입니다.'

'......경 정녕 미쳤는가? 당장 공 녀 바꾸게.'

'상태가 나아졌을 때 다시 연락 드리겠습니다.'

'야! 황명이다! 황명이라고! 이 새 끼가•...!'

나는 헬리오스와 카이사르가 통화 하는 것을 모두 엿들으면서, 제국

군이 저택으로 몰아닥쳤을 때 대처 할 시뮬레이션을 머릿속에서 돌리 기도 했다.

'카이사르 칼라 드 케니스 크리시 스 공작.'

' 네.'

'오늘이 검술 대회 시상식임은 알 겠지.'

' 네.'

'공녀가 검술 대회의 우승자라 필 참해야 한다는 것도.'

'......네.'

'만약 오늘도 공녀와 함께 황궁에 출석하지 않는다면......

'내 직접 그대의 저택으로 갈 걸 세. 무려 벌거벗고.'

나는 그 순간 카이사르의 표정이 얼마나 불경했는지 똑똑히 봤다. 다리 120개의 지네가 현란한 탭댄 스를 추는 걸 본 사람의 표정도 그 보단 밝았으리라.

'내가 한다면 하는 사람임은 알 지? 오늘도 출석하지 않는다면 내 알몸을 보고 싶다는 뜻으로 받아들 이겠네.'

그 말을 끝으로 헬리오스는 통신 을 뚝 끊었고, 카이사르는 인상을

박박 긁다 결국 황궁에 갈 준비를 하라고 통보했다.

그래서 우린 지금 황궁에 가는 중 이었다.

'잘할 수 있겠지.'

나는 조금 긴장한 채 손가락을 꼼 지락거렸다. 미르라는 게 밝혀진 상태에서 처음으로 공식 석상에 서 는 것이니 긴장이 되지 않을 턱이 없었다.

사람들의 시선에선 익숙해졌지만, 그들이 뒤에서 떠드는 말들에선 아

직 완전히 자유롭지 못했다. 신경 쓰지 않으려 해도 신경이 쓰일 때 가 있었다.

카이사르는 이런 나를 알기에 일 주일간 모든 공식 석상을 끊어 낸 것이리라.

'또 무슨 말을 들을까.'

나는 내 뒤에서 오갈 말을 떠올리 다, 좋은 상황은 전혀 그려지지 않 아 반쯤 체념한 채로 그만두었다.

끼익.

마차가 황궁 앞에서 멈춰 섰다. 나는 열린 문 너머로 가볍게 뛰어 내렸다. 오랜만에 온 황궁은 여전 히 휘황찬란했다.

"크리시스 공녀님. 따로 길을 안 내해 드리겠습니다."

내가 내리자마자 궁궐 문 앞에 대 기하고 있던 황궁 시중들의 무리가 줄지어 내 앞에 다가왔다.

우승자가 나인 만큼 따로 안내하 는 건 당연했지만, 집단 린치를 할 기세로 몰려오는 걸 보면 헬리오스 가 이를 갈고 내가 도망치지 못하

게 준비한 것 같았다. 나야 도망칠 생각이 없으니 카이사르가 나를 데 리고 도망치는 걸 방지했다는 것이 더 정확하겠지만 말이다.

"먼저 가 보겠습니다."

"••••••그래."

나는 카이사르가 수긍하면서도 혀 를 차는 것을 보았다. 그는 정말로 날 데리고 도망칠 작정이었을지도 몰랐다.

나는 시종들에게 부담스럽게 둘러 싸여 대기실로 이끌려 갔다. 이미 알고 있는 시상식 절차를 한 번 더

전해 들은 나는, 시상식 시간이 다 될 때까지 빈둥거리다 또다시 시종 들에게 이끌려 문 앞에 섰다.

"안쪽에서 호명한 뒤에 들어가시 면 됩니다."

시종이 공손하게 말하곤 물러갔 다. 나는 온 제국의 귀족이 다 있 을 홀의 문을 물끄러미 바라보았 다.

조금 긴장되었지만 두렵진 않았 다.

'용병임을 부끄러워하지 마라. 이

세상에 천한 직업은 없어. 천한 사 람만 있을 뿐이지. 용병으로 살며 정당하지 않은 돈을 받은 적이 있 느냐? 불의를 외면하거나 약자를 탈취한 적은?'

'......없는 것 같아요.'

'그거면 되었다.'

카라쇼의 가르침은 여전히 내 영 혼 깊숙한 곳에 남아 있었다.

"검술 대회의 우승자, 카슈미르 카이사르 드 도레마 크리시스 님께 서 입장하십니다!"

'미르'라는 이름은 내게 부끄러워

할 것이 아니었다.

문이 열리고, 시선이 따발총처럼 쏟아졌다. 나는 정면에 시선을 고 정한 채 발걸음을 옮겼다.

'키프로스 백작 안색이 많이 안 좋아졌네.'

나는 지나가는 동안 키프로스 백 작의 시꺼먼 안색을 확인하고 속으 로 웃었다. 나를 바라보는 그의 눈 은 거의 나를 찢어죽일 듯했다. 수 도의 테러를 막은 것은 미르였고, 미르가 나인 걸 알았으니 당연한 반응이었다.

북부의 황제 암살 시도 사건은 키 프로스와 합의된 부분이 아니었을 것이다. 원작에선 이 사건 때문에 황위 계승 문제가 급박해지며 곧바 로 디에고가 황제로 즉위하니까. 아직 세레논의 입지가 황제가 될 만큼 튼튼하지 않은데도 무턱대고 헬리오스를 암살했으니 예정된 결 과였다.

'이게 북부가 키프로스를 쓰다 버 릴 말로 사용했다는 증거겠지.'

북부가 키프로스와 손을 잡은 건 오직 수도 테러 때 들어갈 길을 마

련하기 위해서였으리라. 키프로스 는 그때 황제와 황태자 모두 죽일 계획으로 북부와 손을 잡았을 테 고. 황제 하나만 노린 이번 사건은 합의되지 않은 불협화음이었을 것 이다.

'이 일로 북부와 키프로스가 틀어 지겠지.'

북부가 지금 일으키려는 전쟁은 혁명에 가깝고, 키프로스는 현재 제국의 기득권층이니 틀어지는 것 이야 당연했다. 그 시기가 당겨졌 을 뿐이다. 나는 백작의 뜨거운 시 선을 즐겁게 만끽하며 왕좌 앞에서

멈춰 섰다.

황제 헬리오스와 교황 엘리오르가 그 중심 양측에 앉아 있었고, 헬리 오스 옆엔 황후 티나 키프로스가 앉아 있었다. 나는 티나에게 시선 을 던졌다.

'속여서 미안해요.'

정처없이 혼들리는 그녀의 눈을 보며 나는 눈빛으로 사과를 건넸 다. 수도 테러 사건 때 미르로서 그녀와 협업하긴 했지만, 카슈미르 크리시스와 미르가 같은 사람이라 는 것은 몰랐을 터. 악의는 없었으

나 두 사람인 척했으니 그녀를 속 인 것과 다름없었다.

"무릎을 꿇어 주십시오."

시종의 안내에 나는 천천히 한쪽 무릎을 꿇었다.

이번 시상식은 못 다한 검술 대회 시상과 함께 황제를 위험에서 구한 내 공을 치하하는 자리였다. 시종 이 장황하고 형식적인 치하문을 나 열하고 나서야 헬리오스가 입술을 열었다.

"공녀는 고개를 들어라.

바닥의 먼지 개수를 세던 나는 그 제야 고개를 들었다.

늘 가볍던 헬리오스의 푸른 눈이 이례적으로 복잡한 빛을 띤 채 나 를 응시하고 있었다. 잠시 물끄러 미 나를 바라보던 그는, 대외적인 행사 때 짓는 형식적인 미소를 입 가에 머금었다.

"위험 앞에서 나를 지킨 그대의 공이 크다. 그러므로 그대에게 묻 노라."

푸른 눈이 깊어졌다.

"그대의 소원이 무엇인가?"

황제나 교황을 구한 이에겐 묻지 도, 따지지도, 기준도 없이 무조건 소원 하나를 이루어 주는 것이 제 국의 전통이었다.

이 상황에선 구한 것으로 족하다 는 대답을 하는 것이 암묵적인 규 칙이었다. 어차피 특별한 소원을 빌지 않아도 그런 국가의 영웅에겐 탄탄대로의 미래가 보장되었으니 까. 그럴 듯한 모양으로 포장하는 것이 양쪽의 체면을 살리기에 좋았 다.

"소원, 있습니다."

하지만 나는 체면을 버리고서도 빌어야 하는 소원이 있었다.

날 바라보는 헬리오스의 두 눈이 가늘어졌다. 언짢음보단 흥미에 가 까운 기색이었다. 조금 웅성거리는 소리가 주위로 퍼지는 가운데, 나 는 입술을 열었다.

"저를 다가올 전쟁의 군사 훈련관 으로 삼아 주십시오."

이것이 내 소원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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